김상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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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흠
金相欽

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yonhapnews_33782488.jpg

출생
1919년 10월 27일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991년 11월 2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본관
울산 김씨
부모
아버지 김성수 어머니 고광석
형제자매
김상만, 김상기, 김상선
누나 김상옥
남동생 김상오, 김상종, 김남, 김상석, 김상겸
여동생 김상숙, 김상현, 김순민
배우자
고완남
이군엽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31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상세
4. 선거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2. 상세[편집]


1919년 10월 27일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동아일보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재학 중이던 1939년 12월에 고영완, 서영원(徐泳源)[1], 윤주연[2], 백재호(白在鎬)[3] 등과 함께 조선학생동지회를 결성하여 봉기를 기획하였다. 그러나 1941년 7월 동지회의 하부조직인 원산상업학교의 조직이 일경에게 발각됨으로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일본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 후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은 다음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때 그의 아내 고완남[4]도 함께 수감되었다.

8.15 광복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하고 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을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5] 당선 후 민주당에 복당하였다가, 민주당 구파 인물들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후보로 전라북도 고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민주공화당 신용남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진의종에 밀려 공천 탈락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진의종을 제치고 신민당 공천을 받아 전라북도 고창군-부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병옥, 무소속 진의종 후보에 밀려 3등으로 낙선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으며, 1991년 11월 2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오너 일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 고창군 을)

[[무소속|
무소속
]]

7,648표 (24.09%)
당선 (1위)
초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 고창군)

[[민정당|
]]

16,680표 (28.63%)
당선 (1위)
재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 고창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27,804표 (39.44%)
낙선 (2위)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전라북도 고창군-부안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23,664표 (20.3%)
낙선 (4위)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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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재필의 종손자[2] 고산(孤山) 윤선도의 9대손[3] 고영완의 외종사촌, 광복회 사무국장[4] 조선학생동지회에 연락책으로 참여하였다. 고영완의 여동생이기도 하다.[5] 당시 득표율 2위였던 민주공화당 성정기(成正基) 후보에 149표 차로 극적으로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