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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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eporter_kimyeowool.jpg
이름
김여울
출생일
1984년 4월 25일 (40세)
출생지
광주광역시
직업
기자
소속
광주일보 (2006~)
SNS
파일:트위터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
2. 주요 활동
3. 특징
4. 논란 및 사건사고
4.1. 윤승균 관련 SNS 논란
4.2. 안치홍 임의탈퇴 보도 논란
4.3. 타어강 기사 논란
4.4. 임창용 사건 보도 논란
4.4.1. 담 증세로 말소?
4.4.2. 1군 복귀 후 의문의 선발 전환
4.4.3. 방출 후 팬들과 마찰
4.4.4. 정말 임창용이 태업을 했는가?
4.4.5. 결론
4.4.6. 여담
4.5. 김기태 감독 사퇴 후 기사 워딩 논란
4.6. SNS 연승 워딩 논란
5. 여담



1. 개요[편집]


광주일보 편집국 체육부 차장이자, KIA 타이거즈광주 FC의 전담 취재기자.


2. 주요 활동[편집]




3. 특징[편집]


KIA 타이거즈 전담 기자를 2008년부터 맡게 되면서 거의 모든 선수, 코치들과 친분이 각별하다. 덕분에 블로그나 유튜브 등에 시시콜콜한 비하인드 스토리나 사진 및 영상을 올리며 팬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매년 KIA의 스프링캠프 때는 항상 취재를 가서 많은 영상과 기사를 제공하는 편. 또한, KIA 타이거즈 외에도 고교야구 호남팜도 취재를 자주 해줘서 접하기 힘든 고교야구 소식을 KIA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게다가 광주 FC 담당 기자를 맡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광주 지역 방송국에서는 텔레비전,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야구 담당 패널로 항상 초청이 되어 여러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편이다.

광주에서 프로야구와 프로축구가 동시에 열리는 날이면, 축구도 가끔 기사 작성을 위해 직관을 간다고 한다. 축구장에서도 KIA 중계를 챙겨본다고 하고, 역으로 야구장에서도 광주 경기를 틈틈히 챙겨본다고 한다.

하지만 감성적인 기사가 많으며, 이슈에 대해 기자로서 객관적이고 냉철한 분석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팬들의 불만이 있다. 그 동안 선수, 스텝, 코치진과 형성된 친밀감이 역작용으로 그에 대한 문제점을 비판하는 기사는 거의 없다. 그래서 '타이거즈 담당 블로거'라는 비판을 받는다. 흔히 말하는 싫은 소리를 못하는 타입.


4.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김여울은 평소 신인 선수부터 감독, 코치진까지 뒷이야기를 SNS를 통해 팬이나 독자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좋은 반응을 이끌었다. 하지만 주요 이슈 때마다 3자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하는 기자의 위치보다는 선수나 코치, 프런트의 입장에서 편파적인 보도, 또는 부족한 취재 내용과 객관성이 부족한 분석 등으로 팀의 주요 이슈 때마다 논란의 중심에 선 경우가 많았다.

4.1. 윤승균 관련 SNS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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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KIA 프런트가 외야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2006년에 강간으로 수감되었다가 두산에서 임의탈퇴되었던 성범죄자 윤승균을 영입시도를 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한들 성범죄자가 프로야구에 복귀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사안이 주요 쟁점이 되었는데, 김여울은 당시 트위터에 이러한 글을 남겨 논란이 되었다.

4.2. 안치홍 임의탈퇴 보도 논란[편집]


2014 시즌이 끝나고 선동열 감독의 충격적인 연임이 확정되었고, 이에 KIA팬들은 선동열 퇴진 운동을 개최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인 2014년 10월 23일, 김여울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중략)

2014년 가을, KIA 감독실에서 ‘임의탈퇴’라는 단어가 나왔다.

시즌 막바지 내야수 안치홍의 군입대가 KIA에는 비상한 관심사가 됐다. 김선빈에 이어 내야의 핵 안치홍의 공백이 불가피해지자 구단이 마음을 돌리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준비됐던 계획이기도 했고, 쉼없던 6년의 시간과 대표팀 탈락 논란으로 심신이 지친 안치홍은 군입대를 선택했다. 고민 끝에 군입대를 허락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구단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방법을 썼다. 감독이 아닌 야구 대선배의 입장으로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다독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안치홍을 감독실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감독실에서 나온 얘기는 “군입대를 고집하면 임의탈퇴도 가능하다”였다. 예상치 못했던 ‘임의 탈퇴’라는 단어에 구단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소통’을 화두로 삼았던 KIA였던 만큼 선수단을 비롯한 내부가 술렁거렸다. 이런저런 소란 속에서도 구단과 안치홍은 아름다운 작별 수순을 밟았지만 상처는 남았다.

선동열 감독은 22일 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또 다시 선수들과의 ‘소통’을 약속했다. 그러나 ‘임의탈퇴’의 후유증이 깊게 남아있다. 선 감독이 앞선 3년 동안 언급했던 얘기도 ‘소통’이었기 때문에 이번 재계약에 대한 반응은 냉담할 수밖에 없다.

선수들의 마음을 얻고 팬심을 달래기 위한 선 감독의 진정성, 현재의 통렬한 비난을 정면돌파할 용기기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KIA의 상처와 실패는 반복될 것이다.

기사 중 일부 발췌


이 기사가 나가자마자 대폭발한 KIA팬들은 성적도 안좋은 감독이 감히 코어 선수까지 협박하냐며 퇴진 운동에 더 힘이 실렸고, 얼마 못 가 선동열 감독은 재계약을 포기하며 자진 사임으로 물러나게 된다. 위의 김여울의 기사가 도화선이 된 셈.

하지만 선동열 감독이 사퇴하고 바로 반박문을 내놓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내가 어떻게 안치홍을 협박했겠는가. 설명하자면 안치홍이 군대를 가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자 구단에서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감독실로 불러서 이렇게 말을 했다. ‘너나 나나 프로들이고 어떻게 보면 우리들은 소모품들이다. 최악의 경우 구단 쪽에서 임의탈퇴까지 생각하면 안 되지 않느냐. 생각을 바꿔보자'고 말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기사 중 일부 발췌


이와 같은 발언은 김여울의 기사와 정면으로 대조되는 부분이다.[1] 쉽게 정리를 하자면,

한대화(또는 선동열): 야 회사에서 이거 이렇게 하라고 하는데 너 어떡할거야?

안치홍: 그냥 저는 제가 계획한 대로 진행하고 싶은데 안되나요?

한대화(또는 선동열): 너가 정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데 그러다가 만약 회사에서 너 짜르고 다른 애한테 하라고 하면 어찌하려고 그래?

안치홍: 그러던지 말던지요.


이 정도 선의 대화를 김여울의 기사는

한대화(또는 선동열): 너 내 말대로 안하면 회사에 얘기해서 짤라버린다. 알아서 해.


이렇게 기사를 내버린 것. 추가 증거

“군입대를 고집하면 임의탈퇴도 가능하다” / "최악의 경우 구단 쪽에서 임의탈퇴까지 생각하면 안 되지 않느냐. 생각을 바꿔보자"라는 말은 논조 자체가 다르다. 김여울이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려면, “군입대를 고집하면 임의탈퇴도 가능하다”라는 부분은 부연 설명 정도로 끝났어야 한다. 저건 선동열이 직접 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

이 뜻으로 한 이야기든 저 뜻으로 한 이야기든 기자는 일단 사실을 적시하고 '이런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도로 기사를 써도 충분히 비판하는 시점을 견지하면서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해석의 여지를 남겨둬도 충분했는데, 김여울은 '이랬다'라고 단정지으며 여론을 이끌었다는게 문제다.

결국 결과가 KIA팬들이 원하던 선동열의 사퇴로 이어져 유야무야 사건이 무마되었지만 기자의 움직임과 과장보도는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이 사건으로 김여울이라는 이름 3글자가 KIA팬 이외에 모든 야구팬에게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4.3. 타어강 기사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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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줄여서 일명 타어강은 KIA팬들에게 악몽과 트라우마 같은 단어다. 그런데 2017년 7월 어느날, 김여울은 [타이거즈는 이렇게 강팀이 되었다 – 김여울 기자]라는 서문과 함께 기사를 올렸다. 마침 기사를 올린 날은 롯데에게 스윕패를 당한 다음 날인 경기 없는 월요일, 게다가 사람들이 보기 딱 좋은 오후 4시에 '2017 타이거즈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라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누가 봐도 어그로가 끌릴만 한 제목이었다.

네이버 관계자가 정한 제목이라 하기에는 서두부터 타어강이 떡 하니 등장하면서 기사의 댓글과 여러 게시판의 타팀팬들의 비꼼과 놀림이 한 동안 계속됐고, 누가 봐도 조회수 클릭 유도를 높이려고 그런 제목을 지었다고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자 KIA팬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불러일으키며 우롱한 셈.

당시 연패하는게 그 기사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타어강이 조롱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기사가 나오게 됐다. 정규 시즌 우승이라도 확정 짓고 그런 기사를 썼으면 KIA팬들의 반발이 덜했겠지만, 연패상황에 저런 기사를 올리며 많은 KIA팬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타어강 기사는 유야무야 넘어가긴 했다. 타어강은 그 다음 시즌으로 미룬거다

4.4. 임창용 사건 보도 논란[편집]



4.4.1. 담 증세로 말소?[편집]


2018년 6월 8일, 이대진 코치와 정성훈, 임창용이 갑자기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면서 김기태 감독과 싸운 것이 아니냐는 썰이 여러 커뮤니티에 올라왔는데 많은 KIA팬들은 사실확인을 위해 김여울의 SNS에 찾아가 질문을 하게 된다. 평소에는 피드백을 나름 잘해줬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고, 결국 6월 11일 광주일보 기사에 담 증세로 1군에서 말소됐다는 글을 올리게 된다.

KIA는 이날 경기에 앞서 이대진 투수코치를 2군으로 내리고 신동수 코치를 불러들이며 코치진을 개편했다. 또 등 담증상을 보인 임창용과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정성훈도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 기사 중 일부 발췌


하지만 세이브를 올리고 갑자기 다음 날 말소됐고, 2군에서도 등판하지 않고 경기가 열리기 전에 퇴근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담 증세가 아닌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한 팬들은 김여울의 SNS에 찾아가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김여울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4.4.2. 1군 복귀 후 의문의 선발 전환[편집]


2018년 6월 29일, 임창용은 1군으로 복귀 후 의문의 선발 투수로 뛰게 된다. 노장의 나이에 선발로 뛰는 건 무리가 아니냐는 의견이 대다수였으나, 김기태 감독과 구단의 입장 그리고 김여울의 논조는 '선수 본인이 원했다.'라는 것.

임창용은 결국 별 말 없이 묵묵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뭔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팬들은 김여울의 SNS에 찾아가 진실을 알려달라는 댓글을 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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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댓글 공세에 2018년 7월 경, 김여울은 한 팬에게 이런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낸다. 구단의 기자단 장악은 없으며 임창용도 본인이 선발을 원하며 좋아하고, 코칭스태프도 긍정적이었다는 내용.

그 이후 기사 인용들을 쭉 보면 알겠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Q. 선발 전환을 요구했다는 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A. 2018년 전지훈련 갔을 때 이대진 코치님한테 처음으로 선발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우리 팀에 5선발이 없으니 선발 좀 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팀 입장에서는 걱정이 됐을 것이다. 나이도 많은 데다 5, 6이닝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체력과 구위인지 판단이 안 섰을 것이다. 선발 얘기는 전지훈련지에서 유야무야 됐다. 코칭스태프에서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2]

자연스레 불펜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Q. 임창용 선수가 선발을 원했는데 그게 이뤄지지 않아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A.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스프링캠프 때부터 선발 수업을 받고 착실히 몸을 만들어서 시즌 초부터 선발로 뛰고 싶었지, 시즌 중간에 선발로 들어가길 바랐던 건 아니다.


Q. 그런데 2군에서 한 달 있다가 1군으로 복귀한 다음 곧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다. 2군에 있는 동안 선발 얘기가 오갔던 건가.[3]

A. 전혀 없었다. 선발 계획이 있었다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1군 복귀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1군 올라가서 이대진 코치님으로부터 선발 얘기를 들었다. 7월 10일 NC전 불펜 등판 후 20일 KT전부터 선발 투수로 경기에 나섰다. 선발로 나선 처음 2경기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11년 만의 선발 전환이라 적응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너무 완급 조절에 신경 쓰다 초반에 난타를 많이 당했다. 몇 경기 치르다보니 강약 조절이 되면서 이닝을 거듭할수록 구위가 좋아지는 걸 느꼈다. 불펜과는 달리 선발은 미리 예고되기 때문에 5일 동안 루틴대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더라. 언제 나갈지 고민 안 해도 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재미있었다. 선발로 나가는 경험들이. KIA가 5위 순위를 확정짓는 경기에도 선발로 등판했었다.


그냥 아무리 좋게 봐서 선발투수를 희망했다고 해도 전지훈련 중에 지나간 얘기였지 만약에 진짜 5선발로 임창용을 쓰겠다 싶었으면 그 때부터 준비를 해서 시즌 초까지 몸을 만들고 투입하면 될 일이었다. 절대로 시즌 중에 임창용이 자원해서 선발로 전향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여울은 선수 본인이 원했다며 당당하게 거짓말을 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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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 방출 후 팬들과 마찰[편집]


결국 시즌이 끝난 후 10월 24일 임창용은 팀에서 의문의 방출을 당한다. 방출 당일, 도대체 왜 방출이 됐는지 궁금해하던 팬들은 사실을 알려달라는 글을 요구했지만, 김여울은 이런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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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라는 사명감이 있었다면 임창용의 방출이라는 빅 뉴스에 휴가 불문하고 복귀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해서 팬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하여 해소하는게 많은 KIA팬들이 바라던 모습. 만약 부득이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한 경우는 휴가에 복귀해서 열심히 하면 되는게 많은 팬들이 원하던 모습이었다. 인스타그램에 팬들이 싫은 소리 몇 자 적었다고 바로 대응해서 휴가인데 어쩌니 저쩌니 기분이 나쁘니 마니 하며 글을 올려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것은 구단 기자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만약 비난에 대하여 기분이 나빴다면 정중하게 '제가 지금은 휴가 중이니 복귀하는 대로 사실 관계를 명확히 확인하여 기사를 쓰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마디만 썼어도 비난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언행으로 인해 많은 KIA팬들이 김여울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된다.

4.4.4. 정말 임창용이 태업을 했는가?[편집]


휴가에서 복귀한 10월 26일, 김여울은 임창용이 개인적인 욕심으로 태업과 그로 인한 팀워크 저해로 인해 방출당했다는 기사를 작성한다.

하지만 욕심이 지나쳤다. 지난 6월 세이브 기회에서 출격하지 못했던 임창용은 이날 경기가 승리로 마무리됐지만, 후배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변칙 운영과 마운드 차별에 대한 불만까지 겹치면서 임창용은 이후 마운드에서도 최고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태업 논란’으로 선수단 내부가 술렁거린 것이다. 이날 경기도 승리로 끝났지만 마운드에서도 불만을 노출한 임창용은 ‘팀워크 저해’를 이유로 2군으로 내려갔고, 이에 대한 벌금을 물기도 했다.

오점으로 남은 임창용의 ‘최고참’답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번 재계약 논란에서 김기태 감독과 구단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 기사 중 일부 발췌


이러한 기사를 보도하면서 임창용 방출로 인해 화가 난 KIA팬들은 '6월에는 '담 증세'로 2군 갔다고 하고 팬들이 물어봐도 답도 안해주더니 갑자기 방출되니까 휴가라고 찾지 말라고 해놓고 태업이라고 기사를 쓰니 어이없다는 반응. 이로 인해 융단폭격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김여울의 기사에 따르면 6월 세이브 상황에서 자신을 등판시키지 않았고, 그에 따라 태업을 임창용이 했으며, 태도 논란이 일자 임창용이 벌금을 물기도 했다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4] 벌금 관련해서는 구단 내부 처분이니 알 길이 없으나, '태업'이라는 것이 실제 일어난 것인지 하나하나 뜯어서 살펴보자.

먼저 6월 9일 말소된 선수이므로 6월 1일부터 6월 8일까지의 경기 중에서 세이브 상황을 찾아보면 6월 6일, 6월 7일이 있었고 실제로 6월 6일에는 김윤동이 세이브, 6월 7일에는 임창용이 세이브를 올렸다. 그렇다면 경기 전말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6월 1일~6월 3일까지는 두산 베어스와 3연전을 치뤘다.

  • 6월 1일[5]에는 8회초에 등판한 임창용이 양현종의 승계주자를 막지 못하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경기기록 양현종이 7.2이닝 99구 2실점으로 8회 초 승계주자 2명을 넘겨주고 내려간 경기다. 세이브 상황에 등판했지만 세이브를 못한 경기.
  • 6월 2일에는 10:0 영봉패를 당했다. 세이브 상황은 없었다.
  • 6월 3일에는 11:12로 KIA가 승리하였는데, 그 유명한 황윤호 끝내기와 배치기가 나온, 홈 병살을 두 번이나 친 막장게임이었다. 이날 임창용은 승리투수가 되었다.

6월 5일부터 6월 7일까지는 kt wiz와 3연전을 치뤘다.

  • 6월 5일에는 11:2로 KIA가 대승을 거뒀다. 한승혁이 선발투수로 나온 경기 중 하나로, 경기는 아주 크게 이겼으나 지명타자 말소로 인하여 투수 임기영이 타자 라인업에 이름이 나온 날이다.[6] 전광판을 보고 얼이 빠진 임기영의 사진이 찍힌 날이 바로 이 날이다. 세이브를 올리려면 3이닝 세이브를 하여야 하는 날이므로 세이브 상황은 없었다고 봐도 무관하다.
  • 6월 6일에는 5:2로 KIA가 승리를 거둔 날이며, 이날 또한 지명타자 말소로 타자 헥터를 본 날이었다.[7] 이날은 엄상백을 공략하고 이긴 날이다. 세이브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창용이 등판하지 않은 날이다. 태업 논란이 시작되려면 이날 경기 이후여야 한다. 참고로 이날은 김윤동이 9회에 나와 세이브를 올렸다.[8]
  • 6월 7일에는 2:1로 KIA가 승리를 거둔 날이며, 이날은 양현종 - 김윤동 - 임창용으로 이어지는 마운드였다. 세이브 상황에서 임창용이 등판하였다.
  • 그리고 6월 8일, 임창용은 말소됐다.

김여울의 기사에 따른 주장에 대한 확인을 해보자면, 임창용이 자신을 내보내지 않아 불만을 표시했던 세이브 상황은 6월 중에 6월 6일 경기 단 하나 뿐이다. 그리고 태업을 하려면 6월 6일 이후에 태업을 해야 서순상으로 옳다. 후술하겠지만 6월 6일 경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본인이 인정했다. 그리고 야구선수에게 태업을 했다라고 주장하려면 송광민처럼 성적 상으로 나타나야 정상이다.

6월 7일 경기 내용을 보면 황재균을 내야안타[9], 김민식의 포일성 폭투로 황재균이 2루까지 진루한 다음, 윤석민의 우익수 플라이로 황재균은 태그업으로 3루까지 진루, 박경수가 3루수 땅볼로 아웃당하는 사이 황재균이 득점을 올린다. 2:0에서 2:1이 된 상황. 이후 이해창을 삼진으로 잡으면서 세이브를 올린다. 경기 내용으로 보면 태업의 ㅌ도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그리고 다음 날 말소당한다.

2019년 1월, 임창용이 인터뷰에서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했다.

“6월 6일 KT전이었다. KIA는 전날 두 경기 연속 승리를 이어 갔다. 6일에도 4-1로 앞섰고, 3점차 세이브 상황이었다. 그런데 9회에 감독님이 나 대신 김윤동을 내보내시더라. 거기서 살짝 기분이 좋지 않았다. 팀 마무리가 난데 왜 날 기용하지 않으시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에는 마무리로 올라가 세이브를 챙겼다. 7일 경기 후 감독님과 선수들이 인사를 나누는데 감독님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하이파이브 하는 시늉만 하자, 감독님이 매니저를 통해 ‘창용이한테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보셨던 것 같다. 사실 6일 경기 후 매니저를 통해 감독님 면담을 신청했었다. 그때 매니저가 날 만류하는 바람에 면담이 이뤄지지 않았다. 7일 경기 후 감독님이 그 내용을 알게 되신 것이다. 나중에 감독님이 방으로 부르셨고, 그 자리에서 그동안 불펜 운영과 관련해서 쌓아둔 얘기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2군행 통보를 받았다.”



4.4.5. 결론[편집]


  • 임창용이 6월 6일 세이브 상황에 내보내지 않아 서운해했다. [진실][10]
  • 그것이 단초가 되어 양자 간의 불화가 발생했다. [일부 진실][11]
  • 6월 7일 경기 종료 후 임창용이 감독에게 호출된 그 자리에서 투수진 운영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2군에 갔다. [새로이 드러난 진실]

또한 김여울의 태업 기사가 면피성 발언이라는, 즉 태업이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상황들이 너무나 많다.

  • 정말로 태업 논란이 있었다면 2군이 아니라 3군에서 등판하고 돌아온 7월 10일, 7월 17일 경기 내용이 개판이었어야 했다.[12]
  • 정말로 태업할 의도가 있었다면 선발전환 후 성적이 개판이었어야 한다.[13]
  • 결정적으로, 와일드카드 결정전김기태 감독이 선발투수인 양현종 다음으로 가장 먼저 등판시킨 것이 임창용이다. 아무리 싫었어도 가장 믿을 만한 투수가 임창용이었다는 이야기고[14][15], 태업을 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말이 안되는 이야기.[16]

또한 추가로 2019년 5월 21일 밤 11시 경 임창용의 단독 인터뷰 기사가 나왔는데, 지난 김여울의 과거 기사와 하나부터 열까지 반대라는 사실이 드러나 더더욱 비난을 받고 있다.

정리하자면 태업을 했다고 주장을 할 수는 있으나 태업을 하였다는 증거도, 정황도 없이 태업을 했다고 주장하기에는 태업 논란의 설득력이 매우 떨어지며, 오히려 임창용이 구단이 해준 처우에 비하여 훨씬 헌신적이었다는 증거들이 쏟아진다.

애당초 팬들은 김여울에게 진실된 보도를 원했으나, 김여울은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담 증세 - 피드백 없음 - 선발 전환은 선수 본인이 원한 것 - 방출 - 피드백 없음 - 태업 - 피드백 없음'이라는 나몰라라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게다가 피드백도 거부하며 그나마 남아있던 김여울을 지지하던 팬들 소수마저도 등을 돌리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4.4.6. 여담[편집]


추가적으로 임창용이 방출이 되고 나서 그 동안 참아왔던 KIA팬들의 김여울에 대한 불만과 뒷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2군으로 내려갔을 때 묵묵부답하던 김여울은 한 팬이 인스타그램에 댓글을 달자 장문의 DM을 나눈다. DM은 임창용이 2군에 간 상황에 나눴지만, 글쓴이가 DM을 공개한 시점은 임창용이 방출 된 10월 26일.


요약을 하자면, 한 팬이 '구단 눈치 보지 말고 기사 좀 써달라'고 댓글을 달았더니 갑자기 발끈해서 자기 그런 사람 아니라고 생각을 고쳐달라고 DM이 왔다고 한다. 이에 팬이 어이가 없어서 '아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 하나 못하냐'라고 하니 그제서야 본인이 지레짐작으로 발끈했다는 걸 알았는지 냉정을 유지하길래 김여울 본인이 어용기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상처도 많이 받고 그랬다며 앞으로는 ''구단 눈치도 안보고 소신껏 글을 쓰겠다"라면서 글이 마무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때 6월에 팬에게 보낸 DM과 구단의 나팔수 역할을 한다는 태업 기사를 쓴 10월 당시의 논조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 모순적이다.


또한 2019년 5월, 윗 문단에서도 소개 된 임창용 단독 인터뷰 기사가 나오자 한 팬이 김여울의 페이스북에 정중하게 장문의 피드백을 원하는 글을 남겼으나 묵묵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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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김기태 감독 사퇴 후 기사 워딩 논란[편집]


김기태 감독이 트레이드와 ‘형님 리더십’으로 팀 전력을 극대화했고, 선수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줬다. 그러자 ‘에이스’ 양현종이 마운드를 진두지휘하며 최고의 한 해를 만들었고, 야수진은 폭발적인 화력으로 우승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우승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했던 지난해 KIA는 5위 턱걸이를 하면서 와일드카드 결정전 한 경기를 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김기태 감독의 마운드 변칙 운영 속 투·타의 엇박자에 힘겨웠던 2018시즌, 올 시즌은 더 좋지 못했다.

‘젊은 불펜’의 치열한 내부 경쟁과 성장세가 투수진 줄부상의 아쉬움을 달래줬지만 선발진의 초반 페이스가 좋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승 멤버’로 대우를 받았던 야수 베테랑들의 부진이 치명적이었다.

결국 KIA는 최하위로 전락했고, ‘우승 감독’ 김기태 감독은 지난 16일 KT전을 끝으로 고향팀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자진사퇴로 지도자의 책임을 이야기한 김 전 감독. 원점에서 새로운 팀을 짜는 게 남은 이들에게 주어진 의무다. 각자의 자리에 맞는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

조계현 단장, 정회열 수석 체제로 새로 구성된 지난 시즌, KIA는 아쉬웠던 성적과 함께 안팎에서 나온 잡음으로 이중고를 겪었다. 특히 임창용 논란이 김 전 감독에게 큰 부담이 됐다.

2018시즌 중반 김 전 감독은 이대진 투수 코치와 함께 임창용을 2군으로 내려보냈다. ‘최고참’이었던 임창용이 세이브 상황에 등판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을 후배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표현한 게 발단이 됐다.

김 전 감독이 진노했던 부분은 팀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최고참이 후배의 세이브에 박수를 보낸 게 아니라 개인 욕심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 전 감독은 이대진 코치에게는 ‘소통’, 임창용에게는 ‘팀워크’에 대한 책임을 물어 2군행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김 전 감독은 ‘침묵’을 선택했다. 구단도 베테랑 선수의 예우 차원에서 내부 갈등을 노출하는 대신 자연스러운 봉합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고액 연봉자 신분과 다른 팀에서라도 등판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선수의 요구에 고민하던 구단은 임창용의 재기용을 언급했다. ‘팀워크’를 중시했던 지도자였지만 김 전 감독은 구단의 의사를 존중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 임창용과의 작별 과정 역시 매끄럽지 못했다.

구단 내부 소통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조 단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갑작스레 임창용의 방출이 확정되고, 외부에 먼저 소식이 알려졌다. 임창용의 1000경기 기념 굿즈 예약 판매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다. 내부 정보 차단·소통 부재가 결국 최악의 갈등을 야기했다.

프런트와 현장을 아우르는 역할에 실패한 구단, 선수단 통합 역할을 맡은 수석코치도 책임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 전 수석코치는 위기 상황에서도 팀이 아닌 가족 일에 집중하면서 선수들의 신임을 잃었다.

김 전 감독의 힘이 되어줘야 할 이들이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지워준 모양새가 되면서 어수선하게 2018시즌이 흘러갔다. 지난 시즌의 후유증을 안고 시작한 2019시즌에는 믿었던 선수들이 KIA의 발목을 잡았다.

베테랑들의 급진적인 동반 하락세 속에 ‘야수진 세대교체’가 생각보다 일찍 KIA의 심각한 과제가 되고 말았다.

김 전 감독은 경험과 실력을 존중하며 베테랑을 우대했었다. 베테랑답게 자율적으로 자기 관리를 하면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라는 게 김 감독의 주문이었다.

하지만 올 시즌 베테랑들은 최악의 부진으로 김 전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했다. 신예 선수들이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잠시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지만 패배가 이어지면서 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결국 김 감독은 지난 5일 창원 원정길에서 처음으로 베테랑들에게 호통을 쳤다.

자신감 있는 플레이와 파이팅을 기대했던 일부 신예 선수들까지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는 등 개인주의가 만연하자 김 전 감독이 그라운드 안팎에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베테랑들을 질책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반전의 실마리는 찾지 못했다. 베테랑들의 방망이와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패배는 쌓여만 갔다.

KIA는 박흥식 감독 대행 체제로 치른 지난 주말 3연전에서 모처럼 위닝시리즈(2승1패)를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의 실수’라는 도움도 받았다.

(중략)

기사 원본


기사 전체를 봐도 김기태를 비판하는 부분은 사실 상 빨간 한 줄 정도, '변칙적인 운용'이 끝이다. KIA팬의 열불터지게 만든 수많은 작전이나 혹사 및 기용은 전혀 언급이 없고, 짧은 한 줄로 퉁쳐버렸다. 또한 전반적인 기사 어조가 김기태는 잘했는데 보좌할 코치진과 베테랑급 선수들이 망친 것처럼 묘사해놓아서 책임 소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며 감독을 제외한 모두의 책임을 다 떠안고 억울하게 떠나는 희생양인 것마냥 기사를 써서 비판을 받고 있다.

게다가 박흥식 감독 대행이 김기태와는 다른 기용으로 위닝 시리즈를 이끈 것은 별로 맘에 들지 않았는지 '상대의 실수'로 이긴 것처럼 기사를 썼다. 실제로는 양현종의 7이닝 무실점, 고영창의 무실점, 전상현의 무실점 등 불펜의 도움과 타선의 탄탄한 도움으로 승리했고, 오히려 이창진이 평범한 중견수 뜬공을 놓치며 경기를 내줄 뻔 했던 경기를 승리로 지켜냈지만 상대팀 실수 덕택에 이겼다고 하면서 팀과 가만히 있던 한화 이글스를 비꼬는 듯한 논조로 KIA팬들은 물론 한화팬들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 #

4.6. SNS 연승 워딩 논란[편집]


파일:1559009781341.jpg

2019년 5월 28일 오전, 해외로 출국하면서 연승이 끊어질 때쯤 돌아오겠다며 자기 딴에는 일상글을 올렸는데 팬들에게 연승 끊어지길 바라는 거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페이스북 아카이브

'제가 복귀할 때까지 KIA가 연승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라는 식으로 글을 올렸으면 아무 논란이 없었겠지만, 지난 몇 년간 김기태에 꾸준히 비판적인 논조 없이 우호적인 기사를 쓴 것과 박흥식 감독대행이 데뷔전을 치루게 된 한화전에서 위닝 시리즈를 거뒀음에도 '상대팀의 실수'로 운 좋게 이겼다[17]는 등 한화 흠집내기에 가까운 기사를 쓴 것이 비난의 직간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게다가 임창용 방출 사건 보도로 화가 난 KIA팬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덤. 이 연승 워딩에 대해 엠엘비파크 등에서도 KIA팬들 뿐만 아니라 타팀팬들도 담당 기자의 워딩이 문제가 많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파일:1559014722927.jpg
트위터에선 이런 식으로 팬들을 비꼬는 글까지 남겼다. 트위터 아카이브 우승 드립이 처음 나온 곳은 엠엘비파크 혹은 KIA 타이거즈 갤러리다. 어느 KIA팬이 박흥식 대행 체제 이후 8승 1패인 것을 김기태가 감독으로 있던 경기들을 모조리 시범경기 취급을 하면서 생겨난 드립인데 그걸 보고 비꼰 것으로 추측된다.

5월 28일, 결국 KIA가 한화에 패하면서 8연승 도전은 물거품으로 날아갔고, 당일치기 여행 축하한다며 얼른 귀국하라는 KIA팬들의 비꼬는 글이 많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옹호론으로는 평소에도 'ㅎ'라는 의미없는 웃음 기호를 자주 썼는데, 마침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과하게 욕을 먹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5. 여담[편집]


  • KIA 타이거즈 전담 기자를 맡기 전에는 광주남부경찰서에서 사회부 기자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18]

[1] 김여울 기자의 기사에서 임의탈퇴 발언의 주체는 선동열 감독이다. 반면에 선동열 감독 반박문에서는 임의탈퇴 발언의 주체가 구단이다.[2] 위의 12월 추측당시의 문장대로, 시즌 초에는 임창용은 구원투수로 구상하였다는게 맞다.[3] 첫 선발등판 당시 분명히 임창용이 원해서 선발등판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기사아카이브 애당초 기사 내용도 김기태 감독도 "워낙 본인이 하고 싶어했다. 다른 투수를 생각했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아 대신 창용이를 발탁했다"고 말했다. 라고 적혀있다.[4]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 나중에 자신이 정정보도를 낼 여지라도 있으나, ~했다라는 워딩은 100%로 그러한 사실이 있었고 확인까지 다 했다는 표현이다.[5] 5:3으로 KIA가 졌으며 승리투수 곽빈, 패전투수 양현종, 세이브는 함덕주가 올렸다.[6] 타석에 들어서진 않았다.[7] 이날 헥터는 공 2개를 고르긴 했지만 결국 삼진으로 물러났다. 움짤[8]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김윤동과 임창용 모두 이전 투구는 6월 3일이었다. 둘 다 6월 3일에 2이닝씩 던졌으니 2일 쉬고 등판하는 것인데, 9회 말 상대해야하는 타자가 무려 로하스 - 강백호 - 황재균이었다. 로하스와 강백호가 강력한 좌타자라는 것을 고려해봤을때, 임창용보다는 김윤동이나 임기준이 올라오는 것이 맞는 상황이다. 김기태의 선택은 김윤동이었고 로하스 - 강백호 - 황재균은 볼넷 - 중견수 플라이 - 삼진으로 처리했다. 이후 윤석민에게 볼넷, 박경수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하면서 세이브를 올렸다. 과정적으로 조금 불안했지만 어찌되었던 옳은 선택이었다.[9] 평범한 내야뜬공이었으나 2루수 황윤호와 1루수 김주찬 사이에 떨어졌다. 서로 사인이 안맞아서 놓친 것. 에러는 황윤호의 에러로 기록.[10] 본인이 밝혔다.[11] 임창용이 매니저라고 칭한 사람이 중재를 했다는 게 드러났는데, 임창용이 "왜 나 안올림?"이라고 그냥 물어보는 것 조차 김기태에게 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이 어찌되었던 순탄치 않았던 것인지 임창용도 7일 경기 후에 티를 냈고, 감독이 이를 보고 매니저를 불러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알아보고, 임창용과 직접 대면을 하는 자리를 갖게 되었으므로,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맞다. 단, 직접 원인은 아니다.[12] 애당초 태업으로 팀 케미스트리를 해쳐서 말소한 선수라면 실력도 떨어지고 있었어야 정상이다. 더군다나 3군에서 등판했는데. 통상 태업이라 하면 성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고.[13] 선발로 던질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다는 것이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이전까지의 투구내용을 보면 확연히 드러나며, 9월 이후의 성적이 급변하는 것이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기간동안 선발로 등판할 준비를 했다는 반증이다. 임창용이 선발로 준비해왔다는 주장을 구단이 계속 하는데, 3군 경기를 보고 온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투까지 했었다고 한다. 3군은 기록이 남지 않아 선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으니 선발 준비를 했다라는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14] 2018 시즌 초, 더그아웃 매거진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기태가 항상 위험할 때마다 임창용을 내세웠었다는 게 드러났었다. "김기태 감독님께서 위기 때만 되면 나를 내보내신다. (웃음) 주자가 없는 편안한 상황에서 경기를 맡겨주시면 좋을 텐데 노아웃 1, 2루 원아웃 만루 같은 상황에서만 찾으신다. 그 상황에서 한 방 맞기라도 하면 화살이 모두 나에게 날아오니 가끔 서운할 때도 있다."고 밝혔다. 당시 이 말은 웃으면서 했지만..[15] 불화가 있었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난 상황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창용이 등판하던 상황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의 분수령이었다. 안그래도 부상 회복도 덜된 양현종이 수비진들이 말아먹는 바람에 무너지고 있었던 상황.[16] 태업하는 선수가 가장 믿을 만한 투수면 그 팀의 투수진은 도대체 어떤 수준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17] 실제로는 양현종의 호투와 불펜의 무실점 호투, 최형우 등 타선의 활약으로 위닝 시리즈를 챙겼다.[18] 대부분 언론사의 신입기자는 처음에는 사회부 소속으로 경찰서에서 사건사고를 다루며 경험을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