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덕/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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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3. 프로 시절
3.1. OB 베어스 감독 시절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3.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3.4. 이후
4. 역대 감독 성적



1. 개요[편집]


김영덕의 지도자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편집]


1970년 한일은행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지도자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이광환, 김응용, 김인식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김응용과의 악연은 이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당시 강대중 한일은행 감독의 후임으로 김응용이 낙점된 상황이었는데, 중간에 나이 서열상 선배인 김영덕을 먼저 감독에 앉힌 다음, 김영덕의 후임으로 김응용을 앉힌다는 모양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해가 생겨 김응용 입장에서는 자기 감독 자리를 김영덕이 갑툭튀해서 뺏었다고 생각했다고. 오랜 세월이 흘러 그때에 이야기에 대해 박동희가 김응용과 인터뷰했을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김영덕은 한일은행을 맡은 해 그해 곧바로 우승을 차지해 우승감독이 되었다. 어쨌든 위 일화가 진실인지 한일은행은 2년간의 김영덕 감독 체제 후에 1972시즌부터 김응용이 감독이 되었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국가대표팀이 1차 리그에서 탈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반등시켜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공로로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는데 김영덕은 그의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한일은행 감독 일선에서 물러나 은행 창구 업무를 보게 되었는데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고.

1977년 장충고 감독으로 야구계에 돌아왔고, 1977년 9월 말부터 프로야구 개막 직전인 1981시즌까지 천안북일고 감독을 지냈다.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1978년 베네수엘라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1] 1981년 캐나다 대회는 우승을 차지했다.

천안북일고 감독을 지내면서 한화그룹과의 깊은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훗날 프로감독이 되고 나서 김영덕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김종희[2] 회장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다. 보수도 후했다. 세금 제하고 950만원을 받았으니까[3] 프로야구 부러울 게 없는 대우였다. 보수가 문제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중에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자 김영덕은 김종희 회장과의 인연으로 1군 참가 3년차에 불과했던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을 맡아 단기간에 강팀으로 육성시키는데 성공했다. 김영덕이 한화 이글스 창단 30주년 다큐멘터리에서 스스로 밝히길 "한국화약그룹이 1982년 원년부터 충청 연고 프로야구단을 만들었다면 나는 OB가 아닌 한국화약으로 무조건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빙그레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도 김종희, 김승연 회장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다른 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3. 프로 시절[편집]



3.1. OB 베어스 감독 시절[편집]


파일:external/image.munhwa.com/2010070201033633169001_b.jpg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당시 대한야구협회 회장인 최인철의 소개로 두산그룹 회장인 박용곤 회장에게 OB 베어스 감독을 제의받아 창단 감독에 부임하게 된다. 개막시기 야구계에서 지도자로 명성이 높은 3명을 꼽으면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불리던 김동엽 원년 해태감독,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김응용, 그리고 김영덕이 꼽혔다.

당시 창단 멤버 코치로는 타격코치로 이광환, 투수코치로 김성근이라는 조합이었으며, 선수 구성도 원년도 22연승의 에이스 박철순, 실업야구 홈런왕 김우열, 학다리 신경식, 계형철, 김유동, 윤동균, 김경문등을 앞세워 시즌 첫 개막전 MBC 청룡박철순의 완투승으로 승리한 이래 5월 부터 10승 5패로 단독 선두를 유지하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를 우승한 이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원년도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당시 세간에서는 박철순의 선수 생명과 맞바꿔 얻은 우승이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실제로도 박철순은 24승 4패에 224⅔이닝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닝과 함께[4] 팀을 원년 우승으로 이끌고 곧바로 부상으로 쓰러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철순"오히려 내가 등판을 자원하자 김영덕 감독님은 결사 반대했다" 라면서 김영덕의 혹사설을 전면 부정했다."김영덕 감독이 혹사시켜 허리 망가졌다?… 완전 오해"

그러나 찬란했던 원년도 우승 이후, 다음 시즌에는 그야말로 성적이 폭망하게 되는데 박철순, 선우대영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원활하지 못한 신인 수급[5] 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로 마친 뒤 10월 14일 OB 베어스 감독에서 사임한다.


3.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편집]


파일:0cwaV5B.jpg

파일:attachment/김영덕/변태영감.jpg

파일:attachment/김영덕/저녁식샤.jpg

1983년 시즌 이후 OB 베어스에서 사임한 김영덕 감독은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이 꺾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옥같은 기록들이 참 많이도 나왔었다.

삼성 라이온즈에 부임하기까지 에피소드는 후배인 김성근이 삼성행 제의를 받고 상의했을 때 곧바로 자기가 사임하고 그 자리를 먹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는 당시 삼성의 노진호 단장[6]김영덕, 김성근, 김진영 세 명에게 제의를 했었다고 하고 서로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김성근이 삼성행 이야기를 꺼내자 역시 삼성행 제의를 받았던 김영덕이 자기가 먼저 달려가 협상한 것. 삼성은 전격 발탁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이전부터 물밑작업을 해왔다고 하고, 두산그룹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 당시 두산그룹의 박용곤 회장은 김영덕을 감독으로 선임하기 전에 관상까지 일일이 따지면서 영입을 하고는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했었다, 심지어 자진 사임 이후에는 지도자 유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어쨌거나, 삼성 감독에 부임한 김영덕은 3년간의 기간동안 각각 1984년 .550, 1985년 .700 1986년 .654 라는 승률로 1회 통합우승, 2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1984년과 1985년 시즌은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편.

1984년의 경우 포스트시즌에서 롯데와 OB 중 상대적으로 쉽다고 판단한 롯데를 골라[7]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것. 당시에는 롯데한테 2연패를 깔고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2진급을 내보냈었다고 직접 시인했다. 하지만 오히려 2진급 선수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주려 의욕적으로 경기를 펼쳐 리드를 해나가자 1군 선수들로 교체한 이후 노골적인 실책플레이로 갖은 비난을 받았고, 그때의 일은 아직도 미안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말인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8] 다른 것은 다 인정해도 그것은 기자들이 지어낸 말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야유속에 올라간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가을의 전설이 탄생한다.

이후 절치부심한 1985년 시즌에서는 전무후무한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2회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되나...

다음해인 1986년도 무난하게 순항중이었는데 시즌 중 요로결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까지는 갔지만 해태 타이거즈에게 깨진 이후 사임하게 된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해 잘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김은식이 쓴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에서는 "오랜 객지생활로 가정생활이 피폐해"져[9] 김영덕이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고 이후 희망대로 당시 집이었던 천안시와 가까운 곳에 연고를 둔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봤을 때는 감독직에서 잘린 것이 아니라 김영덕이 스스로 감독 자리를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김영덕 후임 감독은 롯데 자이언츠의 초대 감독 출신인 박영길로 팀 타율 3할을 달성한 사람이자 외야수 출신 감독 중 가장 성적이 좋은 감독이다. 그래도 우승은 못했지.


3.3.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편집]


파일:attachment/김영덕/콩그레의전설.jpg
파일이름이 '콩그레의전설(...)' 싱하형?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0000227488_006_20170112100133216.jpg

삼성의 감독에서 물러난 후 1년 간 야인으로 지낸 김영덕은[10] 1988년 빙그레 감독에 취임하였다.

당시 빙그레는 창단한지 3년째인 신생 팀으로 1986~1987년 각각 최하위(7위)-6위에 머물렀지만 전임 배성서 감독의 혹독한 훈련으로 키워낸 이상군, 한희민, 유승안, 장종훈 등등의 투타 자원들이 있었다. 여기에 김영덕 자신의 지도력을 더한 빙그레는 그 해 돌풍을 일으키며 정규 시즌 2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해태 타이거즈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때까진 좋았다...

이후 1989년, 1991~199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11]하는 성과를 보였으나 그때마다 김응용 감독의 해태 타이거즈에 번번이 밀렸고, 심지어 1992년 한국시리즈 에선 시즌 3위로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12]에게 무력하게 우승을 내주기까지 했다.[13] 이때부터 김영덕은 OB 시절 원년 코시 우승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콩라인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 외 1990년 시즌 중반까지 순조롭게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난데없이 터진 "김영덕 종신감독 계약설"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정규시즌 3위로 추락, 간신히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가 4위 삼성 라이온즈에 발렸고, 게다가 김영덕은 종신계약설로 인해 강병철 수석코치와 사이가 벌어지며 강병철이 이듬해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이적하는 연쇄반응이 벌어지기도 했다.[14]

이 과정에서 김영덕은 이상군, 한용덕, 전대영, 김상국 등의 북일파한테 보호막을 쳐 주었고, 강병철은 유승안, 한희민, 장종훈, 송진우 등이 속한 비북일파한테 보호막을 쳐 줬는데 이런 현상은 199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장종훈이 어깨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해지자[15] 1~2차전에서는 북일고 출신의 이종호가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고 장종훈은 1차전에 대타로 나왔을 뿐이었으며 2차전에서는 1차전에서 대주자로 출전한 또다른 북일고 출신 조양근을 김성갑 대신 스타팅 2루수로 출전시킨 바 있었다.

게다가, 2차전에서는 4-2로 앞서던 7회말 선발 한용덕이 솔로홈런을 맞자 빙그레는 투수를 한희민으로 바꿨지만 9회말 연속 솔로홈런을 허용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는데 북일파 한용덕의 승리를 비북일파 한희민이 날려먹은 셈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부터는 북일파 김상국을 주전포수로 등용했고 다음 해에는 또다른 북일파 포수 양용모까지 등용했다. 게다가, 1991년에는 그 해 주전 유격수였던 비북일파 황대연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게임 전 연습 도중 부상을 당해 남은 시즌을 마감하자 한국시리즈까지는 북일파 선수들인 조양근, 이종호, 지화동 등을 써먹은 바 있었고 플레이오프 때는 비북일파 유승안을 기용하지 않았다.[16]

1992년에 정규리그 우승을 하였고, 한국시리즈에서도 해태가 아닌 해볼만한 롯데를 파트너로 만났지만 1차전에서 송진우의 수비때 주자의 진루 방해 시비 등으로 경기를 내주면서 흐름이 넘어가 그해 역시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 후, 1993년 이정훈, 장종훈 등 주축 선수의 부상과 에이스 한희민과의 불화가 불거지면서 빙그레는 김영덕 감독 취임 이후 최악의 성적인 정규시즌 5위에 그쳤고, 결국 김영덕은 그 해를 끝으로 빙그레 유니폼을 벗었는데 당시에는 지화동(2루수), 양용모(중견수 겸 포수), 지화선(우익수)[17] 등 북일파를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시즌 후 한화 이글스로 팀명을 바꾸고 강병철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3.4. 이후[편집]


이후 김영덕은 1996~1998년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을 역임하였고, 1998년 LG 트윈스의 2군 감독직을 끝으로 현장을 떠났다. 201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랫만에 밝히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이글스가 아닌 다른 팀에서 다시는 1군 감독을 다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이행해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고 한다.


4. 역대 감독 성적[편집]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82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82
OB 베어스
73
51
22
0
1위[18]
우승
1983
100
44
55
1
5위[19]
-
통산
173
95
77
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84
삼성 라이온즈
100
55
45
0
2위[20]
준우승
1985
110
77
32
1
1위
[21]
1986
98
65
32
1
1위[22]
준우승
통산
308
197
109
2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1988
빙그레 이글스
108
62
45
1
2위[23]
준우승
1989
120
71
46
3
1위
준우승
1990
120
68
50
2
3위
-
1991
126
72
49
5
2위
준우승
1992
126
81
43
2
1위
준우승
1993
126
61
61
4
5위
-
통산
726
415
294
17

총계(11시즌)
1207
707
480
20

[1] 감독 = 김영덕(북일고 감독) 코치 = 김성근(충암고 감독), 투수 = 장호연(충암), 양일환(대구상), 양상문(부산), 이상군(북일), 이상윤(광주일), 신계석(경기), 포수 = 박철영(배명), 김호근(부산), 한문연(마산상), 내야수 = 정용락(충암), 양승호, 김경표(이상 신일), 김동재(경북), 한대화(대전), 장상철(부산), 외야수 = 김정수(신일), 김상훈(동대문상), 김문영(선린상), 최광묵(인천), 김광림(공주)[2] 한화그룹 창업주로 김승연 회장의 아버지이다. 당시 북일고 재단인 천안북일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3] 참고로 당시 프로야구 창립기획서에서 정한 감독의 연봉이 1200만원이었다. 당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화그룹 부장급 대우라고 했다. 역시 으리의 한화그룹[4] 원년도 OB 베어스가 56승을 했는데 그중 24승이 박철순 혼자 일궈낸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 시즌에 80경기 시절. 매경기 3이닝 가까이 던져야 나올 수 있는 이닝이다.[5] ...이라고 하나, 이 때 들어온 신인들이 그해 신인왕인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 등이었다.[6] 훗날 빙그레 이글스 단장으로도 근무했다.[7] 또한 친정팀이었던 OB를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다고 했다.[8] 다만 당시 어떠한 감독이었어도 최동원을 제외한 투수진이 약한 롯데를 무조건 선택했을것이고, 스무스하게 졌다면 현재까지 비난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전국민이 지켜보는 지상파 중계에서 승부조작급인 노골적 져주기로 비난을 더 받은부분도 컸다.[9] 이 당시 코치였던 박영길과 같은 숙소에서 지냈다고 한다.[10] 본래 1986년 시즌 종료 후 MBC 청룡 측에서 당시 잦은 구설수로 구단 눈 밖에 난 김동엽 감독을 자르고 김영덕을 후임으로 영입하고자 물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김영덕 또한 서울팀 감독직에 대한 열망이 컸는지라 김영덕이 MBC 감독으로 부임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졌었다.. 그러나 당시 김영덕이 모 언론지 기자를 다리삼아 들어오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때문에 MBC 측에서는 "기자한테 기대서 감독으로 오려는 사람은 필요없다."면서 김영덕 감독 영입 의사를 철회하고 대안이 사라진 MBC는 결국 김동엽을 유임시켰다. 그러나 1987년 시즌 중반 팀이 최하위로 처지면서 김동엽이 결국 경질되자 다시 김영덕이 후임으로 거론되었으나 감독대행을 맡은 유백만이 팀을 잘 추스리고 시즌을 마무리하자 MBC는 유백만을 감독으로 선임한다.[11] 1989년, 1992년은 정규시즌 우승.[12]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강병철은 평소 김영덕을 아버지 라 부를 정도로 서로 아끼는 사제지간 이었지만, 밑에 설명한 김영덕 종신계약설 때문에 사이가 서먹해졌다.[13] 그동안 한국시리즈에서 계속 졌던 해태라면 모를까, 시즌 내내 우위를 보였던 롯데(게다가 당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서 7경기나 치르고 올라온 상태였다)에게 진 것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김영덕에게 당시 패배는 1984년 한국시리즈의 재판이나 다름없었다. 둘 다 강병철의 롯데를 상대로 졌고, 롯데에는 안경낀 에이스(1984 최동원, 1992 염종석)가 있었다는 점.[14] 앞서 말했듯이 원래 강병철 감독은 김영덕 감독과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1987년 10월 입단 당시 '차기 감독'을 약속하고 강병철 감독을 데려온 김영덕 감독으로서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감독을 계속할 경우 강코치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재계약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자 구단 간부는 김영덕, 강병철과 함께 회장실을 찾았다. 5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감독 더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이 종신감독으로 둔갑했다.[15] 이후 장종훈은 유격수에서 1루수로 포지션을 전환하게 된다. 1991년부터 은퇴까지 1루수와 지명타자로 뛰었다.[16] 그러나 북일파와 비북일파의 갈등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2010년대에 들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17] 지화동의 동생.[18] 전기 1위, 후기 2위[19] 전기 6위, 후기 5위[20] 전기 1위, 후기 5위.[21]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으로 인한 한국시리즈 무산[22] 전기 1위, 후기 3위. 페넌트레이스 승률은 더 높았으나 당해 한국시리즈 상대팀이 전·후기리그 모두 2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 진출권 2장을 획득했던 터라 삼성은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야 했다.[23] 전기 2위, 후기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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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6:18:41에 나무위키 김영덕/지도자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