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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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덩펑시의 경제를 책임지는 소림사
등봉관성대
登封
영어 Dengfeng
허난성 정저우시의 현급시. 숭산 기슭에 위치하며, 소속 지급시인 동쪽의 정저우보다 서북쪽의 뤄양시가 더 가깝다. 인구는 약 72만명으로, 숭산풍경구를 비롯하여 인근의 소림사와 (중국 4대 서원 중 하나인) 숭양서원 및 등봉관성대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관광지가 많다.
옛 지명은 양성 (陽城)이었고, 측천무후가 칭제 후 숭산에 올라 봉선을 행한 것에서 등봉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정저우보다는 숭산과 함께 본래 뤄양의 교외 지역으로 여겨졌다. 다만 2026년까지 도심과 소림사, 숭산, 중악묘를 이어주는 관광 열차가 건설되는 등 뤄양의 뒤를 잇는 허난성의 관광 도시로 거듭날 예정이다. 세계유산군에 대한 내용은 덩펑의 천지지중 역사 기념물 참고.
봉선 의식의 출발점인 중악묘
11세기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한 곳인 숭양서원
상고시대 고공부, 사악부 부족들이 거주했다. 주공 단이 천문대를 세웠고,한나라 대에는 동남쪽 5km 지점의 현 가오청진에 양성 (陽城縣)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110년 한무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숭고읍 (崇高邑)이 있었고, 수나라 대에 숭양현 (嵩陽縣)이 설치되었다. 이는 696년 측천무후가 봉선을 행한 후 등봉현 (登封縣)으로 개칭되었고, 양성현은 고성현으로 바뀌었다.
금나라 시기 고성현은 등봉현으로 통합되었다. 북양정부 시기 등봉 일대는 군벌들의 각축장이었고, 산적들이 들끓어서 주민들은 자경단을 꾸려 맞섰다. 국공내전기인 1948년 3월, 인민해방군이 덩펑에 접근했고 그해 5월 일대를 점령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뤄양지구에 속했던 덩펑현은 1983년 정저우시로 이관되었고, 1992년 현급시인 덩펑시로 승격되었다.
사실상 덩펑시의 경제를 책임지는 소림사
등봉관성대
1. 개요[편집]
登封
영어 Dengfeng
허난성 정저우시의 현급시. 숭산 기슭에 위치하며, 소속 지급시인 동쪽의 정저우보다 서북쪽의 뤄양시가 더 가깝다. 인구는 약 72만명으로, 숭산풍경구를 비롯하여 인근의 소림사와 (중국 4대 서원 중 하나인) 숭양서원 및 등봉관성대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관광지가 많다.
옛 지명은 양성 (陽城)이었고, 측천무후가 칭제 후 숭산에 올라 봉선을 행한 것에서 등봉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정저우보다는 숭산과 함께 본래 뤄양의 교외 지역으로 여겨졌다. 다만 2026년까지 도심과 소림사, 숭산, 중악묘를 이어주는 관광 열차가 건설되는 등 뤄양의 뒤를 잇는 허난성의 관광 도시로 거듭날 예정이다. 세계유산군에 대한 내용은 덩펑의 천지지중 역사 기념물 참고.
2. 역사[편집]
봉선 의식의 출발점인 중악묘
11세기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한 곳인 숭양서원
상고시대 고공부, 사악부 부족들이 거주했다. 주공 단이 천문대를 세웠고,한나라 대에는 동남쪽 5km 지점의 현 가오청진에 양성 (陽城縣)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110년 한무제가 방문했을 때에는 숭고읍 (崇高邑)이 있었고, 수나라 대에 숭양현 (嵩陽縣)이 설치되었다. 이는 696년 측천무후가 봉선을 행한 후 등봉현 (登封縣)으로 개칭되었고, 양성현은 고성현으로 바뀌었다.
금나라 시기 고성현은 등봉현으로 통합되었다. 북양정부 시기 등봉 일대는 군벌들의 각축장이었고, 산적들이 들끓어서 주민들은 자경단을 꾸려 맞섰다. 국공내전기인 1948년 3월, 인민해방군이 덩펑에 접근했고 그해 5월 일대를 점령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뤄양지구에 속했던 덩펑현은 1983년 정저우시로 이관되었고, 1992년 현급시인 덩펑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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