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커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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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허난성 동남부의 지급시. 정저우에서 동남쪽으로 14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관할 인구 900만명 중 도시 자체에는 약 150만명이 거주하는데, 중심인 촨후이구에 서남쪽으로 연담도시화가 된 상수이현의 인구까지 합친 결과이다. 지명인 저우커우, 즉 주구는 '주가네 운송'을 의미하는 주가구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황허와 화이허 사이의 주요 강인 지아루허 (贾鲁河)와 잉허 (颍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황허가 있는 정저우에서 남하한 지아루허는 시가지 서부에서 잉허와 만나고, 잉허는 다시 화이허로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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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수운 교통이 미비하지만, 주변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결지이며 식품/직물/제지업 등도 발달하였다. 2021년에는 애플 아이폰 공급업체 폭스콘의 공장이 세워졌다. 헝다그룹의 창립자 쉬자인이 이곳 출신이고, '중국 최후의 황제' 위안스카이가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샹청현 출신이다. 뤄허-푸양간 철도가 지난다. 동북쪽 10km 지점의 화이양구는 고대 진현이었고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93년에 세워진 저우커우 관제묘
시가지 동북쪽의 화이양구, 즉 진현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陳)의 수도였다. 진은 남쪽 초나라의 속국이었는데, 그에게 2차례 멸망당했다가 복구될 정도로 허약하였다. 그리고 진민공이 오나라와 연합해 초를 공격하며 배신했다가 기원전 478년 초혜왕의 공격을 받아 죽고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후 기원전 278년 진나라 (秦)의 침공으로 기존 수도 영 (징저우)을 상실한 초양왕이 임시로 천도하여 영이라 불렀다. 다만 기원전 241년 초양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초고열왕이 더 동쪽인 수춘 (화이난시 서우현)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224년 초나라 멸망전 당시 일대는 진나라에게 정복되어 진군 (회양군)에 속하였다. 진 멸망의 단초가 된 진승·오광의 난 시에 진현은 반군이 세운 장초 정권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한나라 때는 시가지 남쪽 외곽 상수이현에 여남군 여양현 (汝陽縣)이 설치되었다. 여남군은 북쪽의 진군과 함께 연주자사부 휘하에 있었다. 원술과 원소의 본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북쪽 기주에 속한 위군 여양현 (黎陽縣)과 구분해야 한다.이곳 역시 원담의 거점이었다 다만 점차 여남군은 서남쪽의 주마뎬으로 옮겨졌다. 서진에 들어 상추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양군에 포함되었다가 다시 진군으로 돌아왔다. 남북조시대 시기에는 남조와 북조의 경계에 해당하였고, 유송의 지배기에 예주 진군에 속하였다. 당나라 시기에는 진주 (陳州)에 편성되었고, 송나라 때에는 경서북로 회녕부가 설치되었다. 회녕부의 치소는 진현이었고, 완구현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명나라 들어 해금 정책으로 대외 무역이 막히고 대신 내륙 수운이 활성화되며 운하화된 지아루허와 잉허, 샤잉허 등이 만나는 합수구인 저우커우가 하항으로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저우커우는 한때 '작은 우한'으로 불리며 번영하였고, 시가지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성벽이 둘러졌다. 하지만 근대 들어 해금이 풀리고 철도가 놓이며 수로 관리비가 큰 내륙 무역은 쇠퇴하였다. 특히 정저우-우한 철도가 서쪽의 뤄허를 지나게 되며 중요성에 있어 그에 밀리게 되었다. 내륙 수운과 함께 쇠퇴했던 도시는 철도가 놓이고, 고속도로가 건설되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활하였다. 70년대의 댐 건설로 전통적인 수운은 중단되었지만, 경공업 등 여러 산업이 발달하며 2000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시가지끼리 비교해도 뤄허보다 더 큰 도시가 되었다.
1. 개요[편집]
중국 허난성 동남부의 지급시. 정저우에서 동남쪽으로 14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관할 인구 900만명 중 도시 자체에는 약 150만명이 거주하는데, 중심인 촨후이구에 서남쪽으로 연담도시화가 된 상수이현의 인구까지 합친 결과이다. 지명인 저우커우, 즉 주구는 '주가네 운송'을 의미하는 주가구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황허와 화이허 사이의 주요 강인 지아루허 (贾鲁河)와 잉허 (颍河)가 합류하는 지점에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황허가 있는 정저우에서 남하한 지아루허는 시가지 서부에서 잉허와 만나고, 잉허는 다시 화이허로 합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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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수운 교통이 미비하지만, 주변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집결지이며 식품/직물/제지업 등도 발달하였다. 2021년에는 애플 아이폰 공급업체 폭스콘의 공장이 세워졌다. 헝다그룹의 창립자 쉬자인이 이곳 출신이고, '중국 최후의 황제' 위안스카이가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샹청현 출신이다. 뤄허-푸양간 철도가 지난다. 동북쪽 10km 지점의 화이양구는 고대 진현이었고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2. 역사[편집]
1693년에 세워진 저우커우 관제묘
시가지 동북쪽의 화이양구, 즉 진현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陳)의 수도였다. 진은 남쪽 초나라의 속국이었는데, 그에게 2차례 멸망당했다가 복구될 정도로 허약하였다. 그리고 진민공이 오나라와 연합해 초를 공격하며 배신했다가 기원전 478년 초혜왕의 공격을 받아 죽고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후 기원전 278년 진나라 (秦)의 침공으로 기존 수도 영 (징저우)을 상실한 초양왕이 임시로 천도하여 영이라 불렀다. 다만 기원전 241년 초양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초고열왕이 더 동쪽인 수춘 (화이난시 서우현)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224년 초나라 멸망전 당시 일대는 진나라에게 정복되어 진군 (회양군)에 속하였다. 진 멸망의 단초가 된 진승·오광의 난 시에 진현은 반군이 세운 장초 정권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한나라 때는 시가지 남쪽 외곽 상수이현에 여남군 여양현 (汝陽縣)이 설치되었다. 여남군은 북쪽의 진군과 함께 연주자사부 휘하에 있었다. 원술과 원소의 본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북쪽 기주에 속한 위군 여양현 (黎陽縣)과 구분해야 한다.
저우커우는 한때 '작은 우한'으로 불리며 번영하였고, 시가지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성벽이 둘러졌다. 하지만 근대 들어 해금이 풀리고 철도가 놓이며 수로 관리비가 큰 내륙 무역은 쇠퇴하였다. 특히 정저우-우한 철도가 서쪽의 뤄허를 지나게 되며 중요성에 있어 그에 밀리게 되었다. 내륙 수운과 함께 쇠퇴했던 도시는 철도가 놓이고, 고속도로가 건설되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활하였다. 70년대의 댐 건설로 전통적인 수운은 중단되었지만, 경공업 등 여러 산업이 발달하며 2000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시가지끼리 비교해도 뤄허보다 더 큰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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