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노농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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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 정당
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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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gcolor=#dcdcdc,#222> ||<|8><-2> 공산정당 ||<-7> 조선의 붕당 ||<|10><bgcolor=#dcdcdc,#222> ||
||<-5><bgcolor=#6a1309> 황국협회 ||<-2><bgcolor=#87ceed> 독립협회 ||
||<-7><bgcolor=#ffC87C> 신민회 ||
||<-7><bgcolor=#005ba6> 대한민국 임시정부 ||
||<|7><bgcolor=#fffff0>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3><bgcolor=#f02815> 의열단 ||<|3><bgcolor=#fff8dc> 조선혁명당 ||<|2><bgcolor=#00008b> 한국독립당 ||<-2><bgcolor=#00008b> 한국독립당 ||<-2><bgcolor=#f5deb3> 대한인국민회 ||
||<bgcolor=#f0fff0> 한국혁명당 ||<|2><bgcolor=#00008b> 한국독립당 ||<bgcolor=#90ee90> 대한인동지회 ||<bgcolor=#007dc2> 흥사단 ||
||<-2><bgcolor=#722F37> 신한독립당 ||<-2><bgcolor=#ffb6c1> 신간회 ||
||<-4><bgcolor=#ff8200> 민족혁명당 ||<|2><bgcolor=#80ff00> 한국국민당 ||<|2><bgcolor=#00ffff> 흥업구락부 ||<|2><bgcolor=#fff000> 수양동우회 ||
||<bgcolor=#90253f> 경성 콤그룹 ||<bgcolor=#ffbb00> 조선건국동맹 ||<bgcolor=#dc143c> 조선민족혁명당 ||<bgcolor=#ffdb58> 조선혁명당 ||<-2><bgcolor=#4c516d> 한국독립당 ||
||<bgcolor=#d82018> 전국평의회 ||<bgcolor=#da251d> 건국준비위원회 ||<bgcolor=#c9062a> 조선독립동맹 ||<|2><-4><bgcolor=#4c516d> 한국독립당 ||<|2><bgcolor=#0000ff> 독립촉성중앙협의회 ||<bgcolor=#7cfc00> 조선민족당 ||
||<bgcolor=#cc0000> 조선공산당 ||<bgcolor=#da460d> 조선인민당 ||<bgcolor=#c70125> 남조선신민당 ||<|4><bgcolor=#008000> 한국민주당 ||<colbgcolor=#f00000> 조선민주당 ||
||<|3><bgcolor=#353839> 독립노농당 ||<-3><bgcolor=#cc0000> 남조선로동당 ||<|3><bgcolor=#27176f> 대동청년단 ||<|3><bgcolor=#4f7fd4> 조선민족청년단 ||<|3><bgcolor=#ffffe0> 청년조선총동맹 ||<|3><-2><bgcolor=#1271b5> 대한독립촉성국민회 ||<|3><bgcolor=#FF0000> 서북청년회 ||
||<|2><bgcolor=#cc0000> 남조선로동당 ||<-2><bgcolor=#e31910> 사회노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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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활동


1. 개요[편집]


1946년,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유림을 중심으로 조직된 아나키즘 성향의 정당.


2. 활동[편집]


광복 이후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가들과 시민들은 정치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1946년 7월 7일 서울에서 '독립노농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의 당수는 유림으로 일제강점기 무장독립투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아나키스트였다. 이러한 배경이었기에 독립노농당은 광복 직후 나름대로의 특성을 보여주었다. 독립노농당에서는 창당 3개월 후 발생한 대구 10.1 사건에 대해 누구보다 상세하고도 중립적인 해석[1]을 내놓았고, 미군정이 실시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또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단독선거인 5.10 총선거를 보이콧하기도 했으며, 1947년에는 '노농청년총연맹'이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기도 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독립노농당은 대구광역시부산광역시 등지로 피난을 가 정치활동을 계속했고, 그곳에서 이승만이 저지른 부산정치파동에 대항하였다. 이후 4.19 혁명이 터지고 이승만이 하야하자 옛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을 모아 '혁신동지총연맹'을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해산되면서, 독립노농당 또한 강제로 해산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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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헌영계는 사건을 지나치게 칭찬했고, 우익과 경찰에서는 사건을 지나치게 폄훼하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독립노농당은 이 사건의 원인이 '① 독립이 지연되는 데 대한 민중의 반발심, ② 저질의 경찰관과 악질적 모리배의 횡행에 대한 반발, ③ 양곡수집에 있어서 졸렬한 방법에 대한 반발, ④ 수집된 양곡의 처리에 대한 의혹, ⑤ 공산당 계열의 선동'에 있다고 보았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상세하게 내놓았다. 한편 김규식여운형 등의 좌우합작세력도 독립노농당과 비슷한 견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