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돌포 그라치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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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육군 원수
로돌포 그라치아니
Rodolfo Graziani


파일:로돌포 그라치아니.png

출생
1882년 8월 11일
이탈리아 왕국 라치오 필레티노
사망
1955년 1월 11일 (향년 72세)
이탈리아 로마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직업
군인
군종
육군
복무
1903년 ~ 1945년
1. 개요
2. 생애
3. 전쟁범죄
4. 미디어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정치가. 아프리카 리비아이탈리아 왕국군 총사령관,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총독, 에티오피아 총독을 지내고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을 지휘했으나 아치볼드 웨이벌의 영국군에 크게 패했다.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에서 국방장관을 맡는다. 배우자는 이네스 치오네티.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82년 8월 11일이탈리아 왕국 라치오 주 프로시노네 현 필레티노에서 의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이후 모데나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대령으로 승진한다.

1920년에는 오마르 무크타르의 지도하에 아프리카 리비아에서 일어난 반이탈리아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리비아로 부임한 그는 운동을 철저히 탄압했고, 가혹한 통치방식으로 리비아에서 "도살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이후 1934년까지 리비아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1935년소말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후 에티오피아 침공 시 정예사단을 이끌고 에밀리오 데 보노 장군의 에리트레아 방면군과 함께 에티오피아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라치아니는 기동력을 앞세워 에티오피아군을 일방적으로 패배시켰지만 보노 장군은 신중책을 취했기에 전쟁이 장기화되자 후임이 된 피에트로 바돌리오 장군이 독가스와 폭격을 행해 에티오피아 수도를 함락해 종결됐다.

1937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로부터 후작의 지위를 받은 그라치아니는 에티오피아 총독이 되었고 저항세력을 리비아에서처럼 철저히 탄압했다. 리비아 총사령관이던 이탈로 발보가 이탈리아군 해군의 오인 사격으로 사고사를 당하자[1] 그 후임으로 리비아에 주둔해있는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이 된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1940년에 이탈리아 왕국영국프랑스에게 선전포고하자 동아프리카 전선의 지원을 목적으로 이집트 침공을 계획했다. 그는 장비와 보급문제 때문에 반대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휘하의 제 23군단에게 진군명령을 내렸다.

영국군이 이탈리아군의 보급을 막아버려서 그라치아니는 진군을 중지하고 무솔리니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했으나 무솔리니의 그리스 원정에 의해 그라치아니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그리고 1940년 12월 9일부터 시작된 A. 웨이벌 휘하 영국군의 반격작전에 의해 제 23군단은 큰 타격을 입고 리비아 국경근처로 후퇴했다. 이후 1941년 2월 5일 제 23군단이 괴멸당하자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군복을 벗어야 했다.


2.3.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과 최후[편집]


퇴역 후 은거생활을 보내던 그라치아니는 무솔리니가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실각하고,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으로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하자 무솔리니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라치아니는 나치 독일군의 지원하에 새로운 정예군을 조직하고, 각지의 파시스트 의용병과 구 정권의 부대를 공화국군으로 전력화시켰다.

그러나 연합국의 공세로 무솔리니가 도망 중 피살되어 정부가 붕괴되자 패전을 맞이했고, 사령관이었던 그라치아니는 전범으로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나치와 협력했던 죄목에 의해 금고 19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연합국의 감형에 의해 그 해에 석방된 그라치아니는 네오 파시즘 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로마에서 칩거하다가 1955년에 병사했다.


3. 전쟁범죄[편집]


리비아에서 잔혹한 학살을 한 전범으로 유명한데, 우물시멘트로 매립해 물을 먹을 수 없게 만들고 거대한 철조망을 곳곳에 설치하며 이동도 막게 했고 리비아 민간인에 대한 학살 및 여성 겁탈, 약탈도 허용했다. 하지만 베니토 무솔리니는 그 일을 허용했고, 이후 리비아 이탈리아군을 지휘한다.

역시 이탈리아의 식민지였던 에티오피아에서도 학살자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각각 리비아의 도살자, 아바시나오의 도살자라고 불린다.

이 때문에 에티오피아가 어떻게든 로돌포를 처벌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2012년 8월 11일에 Affile 지역에 있는 로돌포의 무덤에서 로돌포의 기념 행사를 했으며 기념비를 세웠다. 그런데 이게 논란이 되어 국내외 언론에서 광범위한 비난을 받았고 이후 9월 12일, 기념비가 훼손당했다.

이 기념비는 에티오피아에서도 비난받았다. 역사학자 바루 쥬드(Baru Zewde)는 제18회 에티오피아 국제 학술회의에서 "많은 아프리카인들의 피를 묻힌 로돌포를 위한 기념비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욕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2012년 8월 31일에 이탈리아 대사관 외부에서, 2012년 11월 5일 워싱턴 D.C.에서 시위가 열렸다.


4. 미디어[편집]


리비아 독립운동과 이탈리아의 잔혹한 진압을 다룬 1981년작 영화 사막의 라이온에서는 올리버 리드가 그라치아니 역을 맡았으며, 안소니 퀸이 연기한 리비아 민족지도자 '오마르 묵타르'를 진압하기 위해 잔혹한 전범행위를 한 것이 그대로 묘사된다.

Hearts of Iron IV에서 2레벨 원수로 나온다. 성능은 이탈리아 원수 중에는 최고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면 꽤 한심한 편이다.[2] 낮은 성능을 어떻게든 무마시키기 위해 비슷하게 그나마 성능좋은 조반니 메세와 함께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레벨업을 시키기 위해 기용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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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보의 인기로 자기 자리를 위협하자 무솔리니가 일부러 제거했다는 음모론이 있다.[2] 이 게임 속 장군과 원수들은 공격/방어/작전/보급 4가지 수치가 있는데 로돌포 그라치아니의 수치는 3/2/2/1. 참고로 더글라스 맥아더는 6/3/5/2, 발터 모델은 3/4/3/2,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5/4/5/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