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토 무솔리니/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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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시스트가 되기 전
2. 참전 상이용사에서 파시스트로
3. 이탈리아의 전후 혼란
6. 초기 대외 정책
7. 침략으로 선회하다
9. 몰락과 비참한 최후



1. 파시스트가 되기 전[편집]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북중부 에밀리아로마냐주 포틀리체세나도에서 대장장이로 일하던 알레산드로 무솔리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회주의를 신봉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제1차 세계 대전까지만 해도 열렬히 사회주의를 신봉했는데,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이름인 베니토는 멕시코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공화주의자 대통령 베니토 후아레스의 이름을 따 붙인 것이고, 나머지 이름인 안드레아(Andrea)와 아밀카레(Amilcare)는 무솔리니 아버지와 교류가 잦았던 두 아나키스트 안드레아 코스타(Andrea Costa, 1851년 11월 30일 ~ 1910년 2월 19일)와 아밀카레 치프리아니(Amilcare Cipriani, 1844년 10월 18일 ~ 1918년 4월 30일)의 이름에서 따왔다.

가톨릭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독특하게도 유아 세례는 물론 거의 평생 세례를 받지 않았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 탓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돈보스코 수도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입학시켰다. 미사 후에 학교 건물에 돌을 던지거나 다른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교사에게 잉크병을 던지는 등 반항적인 학생이었던 무솔리니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퇴학당하였다. 그러나 새로 입학한 학교에서는 우등생이 되었는데, 학업 자체보단 종교에 대한 반감이 이전 학교에서의 난동을 유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대학을 중퇴해 대학 졸업장은 없었지만 대학 중퇴의 학력만으로도 당시 교육수준에서는 고학력자에 속했다. 그는 초등 교사 자격을 얻고 교사로서 생활했다. 1902년 징병제로 인해 이탈리아 왕국군 육군 입대 영장이 나오자 병역을 기피하고 스위스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방황하던 시절 노숙해서 경찰에 잡혀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러다 1904년 탈영병 및 병역기피자의 조건부 사면령이 내려지자 육군 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2년간 병역 의무를 마치고 교사로서 복직했다. 혹은 스위스에서 추방되어 할 수 없이 자원 입대하여 죄를 사면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5세이던 1908년부터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트렌티노(독일명 트리엔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시작하였는데,[1] 해당 지역의 영향을 받아서 민족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추구했다. 그는 뛰어난 연설 실력과 카리스마로 대략 5년 만에 일약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관지 <아반티(Avanti!/전진!)>의 편집장이 되었다.


2. 참전 상이용사에서 파시스트로[편집]


Tutto nello Stato, niente al di fuori dello Stato, nulla contro lo Stato.

모든 것은 국가에 있으며, 국가 외에는 어떤 것도 없으며,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925년 10월 28일 로마 진군 3주년 기념 연설, 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사회주의자에서 파시스트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1차 세계대전

그는 초기에는 리비아 전쟁에 대한 반정시위에 참여하는 등 반전주의자였으나, 점차 전쟁을 옹호하는 쪽으로 신조가 바뀌었다.[2]1914년 10월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가 "중부 제국의 침략"에 맞서 협상국으로 참전할 것을 주장하며 편집장을 사퇴할 때부터 이런 변화가 두드러졌다. 이런 행보로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하던 이탈리아 사회당으로부터 변절자 취급을 받아 당에서 제명되자, 그는 같은 해인 1914년 11월 15일에 자신의 독자적인 신문사인 <Il popolo d'italia(이탈리아의 인민)>을 창간해 시위를 선동하는 기고를 이어갔다.

당시 무솔리니는 프랑스 측에 매수되어 주장을 번복했다는 의혹까지 들었으며, 새로 차린 신문사도 프랑스로부터 몰래 지원받은 자금으로 세웠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변신은 기회주의적 행보나 금전적 이유보다는 "언제나 사회주의자이고자 했던 그 자신이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즉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화된 것에 불과했다고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후 1916년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예비역 육군 병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이탈리아 육군의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제111베르살리에리연대에 배치된 무솔리니는 9개월 동안 참호전이 한창인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상병(corporal)으로 진급하였다.# 이 사이에 장티푸스 열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는 박격포탄 혹은 수류탄 폭발로 인해 몸에 40여 개의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고 전역하게 된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이 폭발은 훈련 중에 있었던 일이며 사실 무솔리니는 실전에 나간 적이 없었다는 말도 있다. 여하튼 무솔리니가 전쟁기간 중 군대에서 복무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가 상이용사임을 자처하는 것에 별 문제는 없었다.

전역 후에는 다시 신문사에 복귀해 이곳에서 계속 논설활동을 해나간다. 그는 어느 순간 사회주의를 실패한 이념이라고 보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신만의 사상을 구체화하는데, 사회주의를 신봉할 때나 파시스트일 때나 의회를 증오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면서 폭력을 옹호하는 전체주의적인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로 전향하면서부터 영국의 정치가 사무엘 호르의 도움으로 영국 정보부 MI5로부터 주당 100파운드의 보조금을 받으며 정치 행보를 넓혀갔다.


3. 이탈리아의 전후 혼란[편집]


이탈리아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크리스피 내각 집권기(1887~1891, 1893~1896)에 프랑스의 튀니지 합병에 맞서 독일과 동맹(삼국동맹)을 맺었으나, 이탈리아 통일기에 죽도록 치고받았던 오스트리아 제국과는 전혀 친하게 지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삼국동맹이 범게르만주의로 흐르자 이탈리아는 점차 독일,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 멀어져만 갔고,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중립을 지키면서 형세를 관망하다가 런던 밀약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서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이렇게 이탈리아군은 떡고물이라도 좀 얻어먹을까 하여 거액을 들여 참전했고 카포레토 전투 빼고는 잘 싸운 편이었지만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후 협상국의 논공행상(베르사유 조약)에서 참전 이전에 협상국에게서 약속받았던 영토를 거의 얻지 못했다. 결국 트렌티노알토아디제 지방과 이스트리아 반도를 얻는 게 전부가 된 이탈리아는 내부적으로 거대한 혼란에 빠졌다. 특히 붉은 2년/비엔니오 로소(Biennio rosso)라 불리는 1919~1920년의 혼란이 가장 심하였다. 이 상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이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4. 국가 파시스트당 창립과 로마 진군[편집]


"사보이아 왕가는 우리의 강령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리 강령은 단순하다. 이탈리아를 통치하고 싶을 뿐이다."

1922년 9월 20일, 나폴리 대회에서의 연설.


베니토 무솔리니는 1919년 불공평한 전후 처리에 분노하는 베테랑들을 모아 '전투 파쇼'[3]를 창설하였고, 이는 1921년 국가 파시스트당으로 발전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의 관료, 기업가, 언론인들이 이에 참여했는데, 이중에는 구찌의 창업주 구찌오 구찌의 첫째이자 의붓아들인 우고 구찌도 있었다.

이때 당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검은 셔츠단을 조직했는데 이 셔츠는 이탈리아군 돌격대의 복장인 검은 셔츠에서 유래한 것이다. 검은 셔츠단은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을 테러하는 정치깡패질로 세력을 키웠다. 또한 검은 셔츠단은 다른 조직에서 참고하기도 했다. 나치당은 갈색셔츠를 입는 SA 돌격대를 만들었고 중화민국에서는 중국 국민당의 극우 조직 남의사(청색셔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선 백의사(하얀셔츠) 등의 셔츠 극우 조직이 판을 쳤다.

무솔리니는 기존 원류 파시즘에 조르주 소렐의 생디칼리슴 이론과 플라톤의 철인 정치론,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인론, 20대 80 법칙으로 유명한 빌프레도 파레토 등의 사상을 종합하여 자신의 파시스트 사상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당시 좌우파가 아닌 새로운 "제3의 위치"로 취급되었다. 그는 1932년에 이미 '파시즘의 이념'이라는 저서 등을 썼으며, 수많은 정치 전문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등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최소한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이 대놓고 과대망상성을 띠는 오류투성이의 책을 쓰진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로마 제국의 부활을 내세우는 반동적 흐름은 뚜렷했지만, 유럽 전체에 광범위했으며 후에 나치에 의해 정형화되는 반유대주의는 없었다는 점이다. 도리어 무솔리니는 유대인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마게리타 사르파티와 함께 일했는데 이 때문에 그녀는 "파시즘의 유대인 어머니"라 불린다. 이들의 동행은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38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녀는 무솔리니의 첫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판은 강한 지도력이 없었고 내각제 하에서 단명하는 행정부가 나와 정국은 혼란하였다. 이때 협상국이 약속한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도시인 피우메 (Fiume)[4]를 이탈리아가 아닌 새로 건국된 유고슬라비아에 넘기기로 결정하자 이탈리아 전역에 큰 항의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항의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아닌 언론인 출신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였다. 무솔리니는 단눈치오를 질투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단눈치오를 열렬히 지지하는 척 했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신문사를 통해 단눈치오의 운동을 후원하는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실제로 그 돈은 슬그머니 무솔리니 자신의 사조직 확충을 위해 쓰였다.

덤으로 무솔리니는 단눈치오 조직의 여러 행태를 모방했는데, 여기에는 (훗날 나치식 경례로 더 잘 알려지게 되는) 로마식 경례, 파시스트식 구호, 그리고 피마자 기름 먹이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5]

이렇게 전후 경제난과 연합국의 이탈리아 푸대접 등으로 혼란이 지속되자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27일 도박성을 띤 로마 진군을 감행했으며, 당시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눈에 들어 만 39세의 나이에 총리로 취임하여 집권하였다. 그리하여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수립되었으며, 그는 이와 동시에 '이탈리아 최연소 총리 취임' 기록을 세웠다.


5. 1934 FIFA 월드컵 개최[편집]


1934 FIFA 월드컵의 개최권을 따낸 베니토 무솔리니는 월드컵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심판을 따로 불러서 독대를 여러 차례 한 것. 게다가 원래 아르헨티나 선수인 루이스 몬티, 엔리케 구아이타, 라이문도 오르시에게 귀화 요청을 해서 이탈리아 유니폼을 입혔다. 이들은 원래 이탈리아계, 즉 오리운디였고 이들의 이탈리아 국적 취득은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이탈리아가 우승하자 무솔리니는 본인이 죽을 때까지 이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들에게 거액의 연금을 줘가면서 우대했다.

또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대한 빨리 우승하게 만들기 위해 경기 방식을 올토너먼트로 만들었다. 지더라도 남은 경기만 잘하면 어찌어찌 살아남는 조별리그를 폐지하고 지면 바로 추방해버렸다. 무솔리니가 이렇게 바꾼 월드컵 규정, 즉 올토너먼트 제도는 이 대회와 그 다음 대회인 1938년 월드컵까지만 적용되었으며 그의 사후 치뤄진 1950년 월드컵은 이 두 대회와는 정반대로, 되려 토너먼트를 없애고 올리그로 회귀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월드컵에서 우승해 놓고 그것을 파시즘 홍보에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이용당했다고 평가받는 '막장 월드컵'이 되었다. 이런 스포츠를 이용한 국가적 홍보와 위상 강화는 무솔리니를 열심히 모방하던 히틀러와 나치 독일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다.


6. 초기 대외 정책[편집]


국가주의를 앞세운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이탈리아 국민에게 늘 호언장담했다. 이런 적극적인 복고적 팽창주의 행보는 지중해의 명칭을 로마 제국 시절의 명칭인 라틴어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으로 바꾸고, 군대의 사단(Divisione)을 군단(Legione)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었다. 이탈리아는 스스로를 "신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에는 이탈리아가 집어삼킬만큼 호락호락한 나라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아드리아해 바다 건너의 소국 알바니아에 괴뢰정부를 세우는데 그것마저도 1차 대전 이후 독립시켰다. 그리고 그리스에 찝적거리는 정도였다.

이탈리아의 실상은 그 정도였다. 그리고 의외로 무솔리니는 30년대 초반까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움직였다. 분배된 몫이 적긴 했지만 이탈리아는 명백히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취급받으며 대전 직후 5대 강국인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일본 제국, 미합중국, 이탈리아 왕국 중 하나였고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으로 대접받았다. 해외 식민지 문제로 투닥거리긴 했지만 단지 그 정도일 뿐, 처음부터 영국, 프랑스와 각을 세우면서 침략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도 성실히 이행했다. 심지어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독일을 견제하는데 나섰으며 패전국 오스트리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관계는 30년대 초만 하더라도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무솔리니를 선망하는 것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원래 무솔리니를 열렬히 추종했고 무솔리니의 정치 기법을 배우고 본받았다. 따지고 보면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총리 자리를 차지했을 무렵, 나치당(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은 그저 세계 각국에 있는 수많은 파시즘 정당 중 하나에 불과했고 히틀러도 베니토 무솔리니 워너비일 뿐이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초상화를 얻고자 이탈리아에 신청했다가 거절당하기까지 했고, 로마 진군을 흉내내서 벌인 뮌헨 폭동이 실패하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여하튼 베니토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에도 그를 '시골뜨기 듣보잡(히틀러와 가까워지기 전엔 사석에서 정신나간 미치광이 혹은 위험한 바보로 칭했다고 한다)' 정도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4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의해 오스트리아 연방국의 수상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히틀러가 이것을 기회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려고 하자,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 병합을 시도하면 전쟁을 불사할 것이라는 초강경한 경고 전언을 날렸고 히틀러는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의 희망은 4년 후인 1938년에야 안슐루스로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무솔리니가 침략의 길을 걸으면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제국(에티오피아 제국의 후신)을 수립하고 독일과 손을 잡은 뒤였다. 스트레사 동맹의 허울을 이용한 팽창주의 결과였던 것이다.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이런 애정은 훗날 전쟁이 진행되면서 무솔리니의 돌출 행동에 따른 짜증, 애증으로 변하게 되었고, 이런 관계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반공주의를 내세운 만큼 소련과의 사이는 나빴으나 30년대 초 잠시 관계가 좋았던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자본주의 부르주아들을 적으로 여기고 경계했는데 포드, 테일러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량 생산체제를 '미국주의(Americanism)'라 부르며 비판했다. 미국의 대공황이 세계를 뒤흔들며 자본주의 국가들은 위기에 빠졌는데, 소련은 상대적으로 멀쩡하여서 이때 무솔리니는 소련에 우호적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이탈로 발보를 소련으로 보냈고, 발보는 볼셰비키들과 서로 '동무'라 부르기도 하며 자본주의를 같이 까댔다. 이런 우호 관계는 오래지 않아서 끊어졌다.


7. 침략으로 선회하다[편집]



베니토 무솔리니가 침략 노선을 본격으로 걷게 된 것은 1935년 3월, 나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엔 무솔리니는 독일을 대상으로 한 승전국 간 연합 전선을 여전히 유지하고자 했고, 영국과 프랑스와 합의하여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인 스트레사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 직후 영국이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뒤통수를 쳤다.

이때부터 무솔리니는 기존 승전국과의 공조, 특히 영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했고 "어차피 나치 독일 재군비도 묵인했는데,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것도 넘어가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이었기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가 넘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침략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6]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19세기 말에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려다 패배한 것에 대한 명예회복의 필요성도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무기는 외국에서 수입한 소총이 전부였으나, 아예 창과 칼로만 무장한 부대를 당시까지도 운용하고 있던 에티오피아군은 전차전투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자그마치 병력 50만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1년간의 격전 끝에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고 그 기념으로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 칭호를 얻었다. 이탈리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약 만 명이 전사했으나 무솔리니는 이에 대해 "파시즘을 강화하려는 희생으로서 전사한 만 명은 너무 적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무솔리니는 자기 아들들도 여기 참전시켜 최전선으로 보내긴 했다.

문제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솔리니의 예상처럼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묵인하긴 했지만, 이로 인해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점령에 대응하지 못하며 영프와 함께 구성했던 대독 공동전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어설픈 에티오피아 침략으로 이탈리아는 국제적 왕따가 되었고, 이런 외교상 고립의 탈출을 모색하던 무솔리니는 독일과 밀착하는 오판을 저지른다.

이후 무솔리니는 착실히 주변 파시즘 국가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인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팔랑헤당을 편들며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이탈리아가 획득한 쥐트티롤 지방의 포기를 조건으로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인정하였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때에는 전쟁 직전에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독일 측에 유리하게끔 뮌헨 협정을 성사시킨다. 1939년 4월에는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소국 알바니아 왕국을 침공해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왕조가 알바니아 왕위를 차지했다.[7]

8. 제2차 세계 대전 참전[편집]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무솔리니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스페인 사이에서 어느 정도 설 자리가 있었다. 당장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친독 정책을 잠시 멈추고 중립을 지켰다. 영국과 프랑스도 굳이 적을 늘릴 이유가 없었기에 중립을 인정했다. 독일의 베네룩스-프랑스 침공 전까지는 서부전선 자체가 고요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고, 모두의 예상을 깨고 프랑스의 패배가 빠르게 명확해지자 이탈리아는 중립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한다.

이때 무솔리니의 논리는 '어차피 승패가 갈린 전쟁, 전리품(식민지)을 조금이라도 획득하려면 우리도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였는데, 이 논리 자체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가 중립을 깬 결과 얻은 이득을 생각해보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탈리아가 참전했던 1940년 6월 기점에서 생각하면 더더욱 그런데, 이때는 영국과 사이 좋았던 스웨덴을 위시해 유럽 내 여러 중립국마저 영국에게 독일과의 평화 협정을 중개해 주겠다고 나서던 시점이었다. 이들이 영국에 평화협정을 중재하려 한 이유는 "독일의 위대한 승리를 인정하고 굴복하라"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후일을 도모하여 독일에 대항하자"였다. 친영 국가들이 보기에도 전쟁의 승패가 이미 갈렸던 것이다. 전쟁의 승패가 끝났다는 생각이 오판이라는 결론은 결과를 아는 후대에 사는 사람들만이 내릴 수 있는 것으로 당시 기준으로 이는 지극히 상식에 기초한 판단이었다.

Combattenti di terra, di mare e dell’aria!

육해공 장병들이여!

Camicie nere della rivoluzione e delle legioni!

혁명의 검은 셔츠단파시스트 군단병들이여!

Uomini e donne d’Italia, dell’Impero e del regno d’Albania!

이탈리아의, 이탈리아 제국의, 알바니아 왕국의 남녀들이여!

Ascoltate!

주목하라!

L’ora segnata dal destino batte nel cielo della nostra patria. L’ora delle decisioni irrevocabili.

운명에 의해 정해진 시간이 우리 조국의 하늘을 강타하였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La dichiarazione di guerra è già stata consegnata agli ambasciatori di Gran Bretagna e di Francia.

선전포고가 직전 영국프랑스 대사들에게 전해졌다.

Scendiamo in campo contro le democrazie plutocratiche e reazionarie dell'Occidente, che, in ogni tempo, hanno ostacolato la marcia, e spesso insidiato l'esistenza medesima del popolo italiano.

종군하여, 항상 우리의 행진에 훼방을 놓고, 때로는 이탈리아인들의 존재를 위협해온 서방의 반동 금권주의민주주의를 상대로 맞서 싸우라!

La parola d’ordine è una sola, categorica e impegnativa per tutti.

우리들의 구호는 단 하나이며, 이는 전 이탈리아인들에게 있어 의무적인 것이다.

Essa già trasvola ed accende i cuori dalle Alpi all’ceano Indiano:

그것은 이미 알프스에서 인도양까지 우리의 가슴을 움직이고 있다.

vincere!

승리하라!

E vinceremo!

우린 승리할 것이다!

Popolo Italiano! Corri alle armi, e dimostra la tua tenacia, il tuo coraggio, il tuo valore!

이탈리아 국민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그리고 보여주는 것이다! 제군의 용기를, 제군의 강력함을, 제군의 정의를!

당시 무솔리니의 연설문



로마에서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 일 두체가 국민들을 향해 발표합니다.

(Saluto al duce!)

(두체에게 경레!)

(La dichiarazione di guerra è già stata agli consegnata di Gran Bretagna e di Francia.)[8]

(무솔리니: 전쟁 포고문영국 대사와 프랑스 대사에게 방금 전달되었다.)

무솔리니는 계곡과 마르세유를 비롯해 코르시카튀니지의 무장해제 등을 자기 몫의 전리품으로 얻을 욕심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배신당했다고 했죠.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2차 세계 대전> 2부 "프랑스참패" 中[9]

[10]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전쟁의 첫 행동인 남프랑스 침공에서 이탈리아군은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알프스군에게 참패했는데, 심지어 프랑스 알프스군은 주력 부대도 아니었다.[11] 이 참패로 인해 결국 이탈리아가 프랑스에서 얻은 영토는 쥐꼬리만했다.

무솔리니는 프랑스령 튀니지알제리 일부를 원했으나 정작 그 지역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의 영토 아주 약간밖에 못 얻은 것. 결국 무솔리니는 이걸 만회하겠답시고 1940년 8월, 이집트 왕국을 침공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역의 포문을 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독일 공군의 물량에 영국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고전하고 있었으나,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가 트롤짓을 해준 덕분에 차츰 전세가 뒤집어지면서 영국이 승기를 잡게 되었다. 이에 영국은 독일에 항복하긴 커녕 대영제국의 일체를 긁어모아 독일과의 결전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 당시 리비아까지 쭈르르 밀려버린 이탈리아는 독일에게 징징거려, 결국 독일이 북아프리카 전역을 구하기 위해 에르빈 롬멜을 파견해야 할 상황에 놓이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동맹 독일의 전황까지 힘들게 한 것.[12]

게다가 무솔리니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열심히 붕괴 중인 와중에 능력도 안 되면서 또 다른 전선을 열어제낀다. 처음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략하기 위해 독일에 의사를 타진했으나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던 독일은 "싫어. 하려면 혼자 해보시던가"라며 거절했다.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는 아예 새로운 침략 대상을 몰색했고, 그렇게 골라서 시작한 것이 그리스 침공이다. 딱히 친영도 친독도 아니었던 군부 정권하의 그리스는 이 침략에 대한 반동으로 이렇게 연합국에 가담해버렸다. 물론 이탈리아는 여기서도 졌다.

결국 무솔리니가 거하게 친 사고를 수습하고자 나치군바르바로사 작전을 2달간 늦추면서 전광석화 같은 공세를 다시 폈다. 그렇게 독일의 뒤통수를 친 유고슬라비아를 정복하고 이어 발칸 반도 끝까지 내려와 그리스군을 격파하면서 이탈리아군을 구원했으며 북아프리카에 롬멜과 귀중한 기갑부대를 파병했다. 그러나 이렇게 연기한 두 달 때문에 결과상 모스크바를 칠 수 있는 시간을 날려 버렸고 이것은 결국 독소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13]

뭐 그 후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이탈리아도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원병을 보냈는데 동서부전선 어디서나 이탈리아군은 연합국의 동네북 신세였다.

이런 개삽질의 연속은 무솔리니가 외형상 '뽀대'에 치중해 이탈리아의 국력도 제대로 가늠하지 않은 채 그냥 저지르고 본 대가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열강임에도 사실 다른 강대국에 비해 공업 기반이 한심할 정도로 빈약했다. 일부 사단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화포를 아직도 장비할 정도였고, 이것도 수량이 매우 부족해서 투석기를 제작해서 전투에 사용을 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기술력은 그나마 있었는데,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무기를 양산할 총력전의 설비가 태부족인 상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부족한 전력으로 남들보다 앞서서 침략 전쟁을 시작한 결과 본 게임이 시작될 무렵에는 그나마 있던 장비와 물자도 이미 신나게 바닥낸 뒤였다는 점도 한몫했다. 심지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밀집대형으로 부대를 진군시켜서 적 영국군의 포격과 폭격의 제물이 되게 했다.

다만 변명하자면 사실 이탈리아 국민과 경제, 사회의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에 터진 게 아닌 셈이다. 에티오피아 침공인 1935년에 시작해서 스페인 내전 참전기인 1930년대 후반 내내 지속되다가 1939년이 되니 스케일이 한층 더 커진 것뿐이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공에서도 사실 적은 비용으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효율적인 전쟁을 했다고 하기 힘들고 스페인 내전에서도 큰 자본과 물량을 투입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보낸 지원병 군단(Corpo Trupo Volontarie, CTV)은 5만명이나 되는 완편 군단급 규모에, 전투기도 700대 씩이나 동원했다. 예산 측면에서도 3년 내내 이탈리아 일년 예산의 14%~20%라는 거대한 액수를 잡아먹으며 본판인 2차대전에 대비할 이탈리아군의 전쟁 준비 계획, 신무기 개발, 편제 재편 등을 완전히 아작내면서 쏟아부었다. [14]

즉, 이탈리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여는 사실상 독일보다 3년하고도 반이나 일찍 시작했고, 에티오피아나 스페인 같은 '전초전'에서 이미 국력과 군사력을 까먹은 상태였다. 이탈리아는 당시 유럽 강대국들과 비교했을 때 일본에게도 GDP가 밀리는 공업력에 전쟁은 또 일찍 시작해버렸으니 이탈리아는 당연히 다른 열강들처럼 제대로 된 군비 경쟁과 전쟁 준비에 들어갈 여력이 못 되었다. 애초에 이탈리아 내에서 무솔리니의 지지 기반 자체가 부실했던 탓에, 외국의 전쟁에서 조국 이탈리아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겨주자는 호전적인 팽창주의를 매개로 치열하게 좌-우익과 지역주의로 분리되어 있던 민심을 땜빵하기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 좌파 세력은 한동안 철퇴를 맞고 수그러들어 있었지만, 이탈리아 군이 졸전을 거듭함에 따라 원래 거대한 조직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 사회당 같은 좌파 반체제 운동들은 다시 수면 위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파시즘을 지지했던 우파 진영 내에서도 "무솔리니로는 안 돼"라는 기조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무솔리니는 전쟁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침략에 흥미를 잃었다. 집무도 대충대충 하는 때가 잦아졌고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의 연애로 소일하면서 모르핀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히틀러에게는 스탈린과 강화하고 지중해 방면에만 공세를 집중하라고도 부탁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이렇게 왕년 자신의 영웅이었던 독재자 동지가 의욕을 잃자 크게 실망했고, 무솔리니를 독일로 초청하여 설득해 계속 이탈리아를 동맹국으로 붙들어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이미 권력 자체에도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괴벨스의 일기를 보면, 당시 독일을 방문한 무솔리니는 얼빠진 늙은이 같았다고 한다.


9. 몰락과 비참한 최후[편집]


이런 지리멸렬한 전과 탓에 이탈리아 국민은 베니토 무솔리니 체제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1943년에 연합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여 이탈리아 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뿐만 아니라 국가 파시스트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에 대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파시스트 당 대회에서 무솔리니는 매도의 대상이 되었고, 파시스트 평당원들뿐만 아니라 로마 진군 때부터 함께했던 검은 셔츠단 동지들인 에밀리오 데 보노, 디노 그란디, 체자레 데 베치와 무솔리니의 사위인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마저 등을 돌리고 무솔리니 해임 음모에 가담했다.

1943년 7월 24일, 파시스트 당 대회에서는 치아노 장관과 디노 그란디 파시스트 최고평의회 의장의 주도로 무솔리니 탄핵 결의안이 19대 7로 통과되었고, 다음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탄핵 결의안을 추인하고 무솔리니를 해임했다. 후임 총리로는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가 임명되었다.

무솔리니는 매일 거듭되는 패전에 좌절하여 권력 의지를 완전히 잃었던 듯하다. 그는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주 모르핀메스암페타민을 과다 복용했으며, 샴페인브랜디 같은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무솔리니는 사임한 후 국왕의 명령에 따라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애인 클라라와 함께 아펜니노 산맥 골짜기의 그란 삿소(Gran Sasso) 산에 있는 '캄포 임포라토레' 산장에 연금되었다. 그런데 9월 12일 오토 스코르체니 SS 보병대위가 지휘하는 SS와 루프트바페 공수부대의 합동 특공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해 독일로 호송했다. 이 작전은 '떡갈나무 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스코르체니는 자신이 거느린 SS 소속의 프리덴탈 특수부대와 공군 공수사단에서 차출한 병력으로 구성된 혼성 특수임무부대를 이끌고 무솔리니가 연금된 호텔글라이더를 타고 돌입, 무솔리니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부대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스코르체니 휘하의 특수부대는 이탈리아에 올 때부터 전원 공군 공수부대원으로 위장했으며, 스코르체니를 지원하기 위해 아래쪽 골짜기와 케이블카 정거장을 장악한 지원부대는 진짜 공군 공수부대였다.

글라이더 12기에 나눠 탄 특공대는 그란 삿소 산장 근처 야산 분지의 좁은 평지에 강행 착륙했다.[15] 이 산장을 경비하던 이탈리아 헌병군 1개 중대소총 정도의 빈약한 무장밖에 없었지만 독일군의 습격에 저항했으나 스코르체니가 데려온 친무솔리니파 이탈리아 육군 장성 페르난도 솔레티 장군이 "국왕의 어명으로 무솔리니가 다시 권좌에 복귀한다!"라고 거짓말을 했고, 독일 특공대가 산장의 통신실을 장악해 통신을 끊어버린 바람에 솔레티 장군의 거짓말을 확인하지 못해 결국 저항을 멈췄다. 스코르체니 부대는 무솔리니를 무사히 구출해 단거리 이착륙이 가능한 Fi 156 피젤러 슈토리히 연락기로 무솔리니와 지휘관 스코르체니 중령이 먼저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SS 대원들은 유유히 케이블카로 하산해 공수부대와 합류해 퇴출했다.

뒤이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공군 야전원수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은 이탈리아 주둔 독일 국방군을 동원하여 연합군이 아직 진격하지 못한 나머지 이탈리아 북부 본토를 재장악하게 했다.

파일:MussoliniEscape.jpg
탈출한 무솔리니.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밀라노에다가 괴뢰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살로 공화국)을 세우게 했다. 또 국가 파시스트당의 후신인 공화 파시스트당도 새로 창당하게 했다. 무솔리니는 먼저 국방장관로돌포 그라치아니를 임명했고, 자신을 쫓아낸 사람들에게 자신의 손이 닿는 한 피의 복수를 감행하여 사위인 치아노와 에밀리오 데 보노를 비롯, 7명을 총살하였다. 디노 그란디만이 일이 글렀음을 알고 스페인 프랑코에게로 도망쳐 살아남았다.

하지만 치아노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무솔리니는 마지막까지 고뇌하였다. 독일 측은 반역을 저지른 치아노를 깨끗이 죽여 없애길 희망했으나, 지나치게 간섭해서 죽이라 말라고 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무솔리니에게 맡겼다. 주 이탈리아 독일대사 란은 무솔리니가 사위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큰소리만 치는 것이 분명하니까 그냥 치아노를 스위스로 풀어주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1944년 1월, 치아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치아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자신을 죽이는 기쁨을 주지도, 자신의 죽음으로 영화를 찍는 사디스트 가학쑈를 벌이지도 못하게 하겠다고 독극물을 삼켰으나 독극물이 가짜라서 죽지 못했다. 이후 나머지 피고들을 위해 치아노는 마지 못해서 사면 요청서에 서명했으나, 이를 보고받은 군정장관, 법무장관, 내무장관이 모두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떠넘기면서 무솔리니에게 보고하지 않고 독단으로 이를 반려했다.

한편 무솔리니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실을 서성이면서 치아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뉴스가 왔는지 계속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뉴스도 받지 못하던 와중에다가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또다시 받게 되자 무척이나 심란해져서 이탈리아 주둔 SS 사령관 카를 볼프 장군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전화로 물었다. 무솔리니는 독일어가 유창했기 때문에 전화는 독일어로 이루어졌다. 볼프 장군은 "치아노는 이탈리아 내정의 문제이므로 개입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무솔리니가 사내 대 사내로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의견을 알려달라고 간청하자 "만약 치아노를 죽이지 않으면 무솔리니에 대한 히틀러의 신뢰가 손상될 것이며, 치아노가 살아서 무솔리니를 계속 위협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 말을 들은 무솔리니는 치아노에 대한 구명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치아노가 사면 요청서에 서명했다는 것을 알게 된 무솔리니는 공화국 수반인 자신에게 사면 요청서가 보고되지 않은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거품을 물고 날뛰었다. 또 치아노의 사형 집행 뉴스가 파시스트 국가 조비네차와 함께 보도되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불쾌해하면서 망자에 대한 예우도 없이 무슨 축제라도 벌이는 꼴이라고 심란한 마음을 드러냈다.

오토 스코르체니 자서전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딸 앞에서는 치아노를 반드시 총살할 것이라고 노발대발했으나, 뒤로는 독일군에게 총살 결정을 취소할 수 없는지 문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이미 실권이 없는 상태였기에 총살을 막을 수 없었고, 치아노의 총살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자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코르체니의 자서전은 어디까지나 주워들은 것이 중심이라서 정확하지 않다.

여하간 무솔리니는 명목상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국가원수였지만, 괴뢰국에 불과한 입장에서 그에게 주어진 권리는 많지 않았다. 히틀러는 독일군의 포로가 된 30만에 이르는 구 이탈리아군의 석방도 거부했으며, 일부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무솔리니 실각에 가담했지만 연합군 진영으로 달아나지 못한 이탈리아군 장성이나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무솔리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일군에 의해 처형되어도 그가 할 수 있는것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도 독일군으로부터 소외되어 거의 후방 파르티지아노 진압에 종사했으며 그마저도 자신의 심복이던 라고 믿고 있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이후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며 이탈리아 전선의 전황이 악화하자 그는 국외 탈출을 꾀했다. 4월 초 연합군이 포 강 유역으로 쇄도해 들어왔고, 25일에는 이탈리아 파르티지아노가 총 궐기해 밀라노를 비롯한 북부 도시들을 해방했다. 무솔리니는 밀라노를 벗어나 북부의 코모(Como)로 탈출했다. 그의 주위에는 그간 일 두체(Il Duce)의 권력이 무색하게 소수의 검은셔츠 단원과 일부 파시스트 친위대만 함께했고, 살로 공화국군을 이끌던 로돌포 그라치아니는 사령부로 돌아가겠다는 핑계를 대고 달아나 며칠 후 연합군에 항복했다.

다행히(?) 메나지오 마을에서 200여명의 독일군 행렬을 발견해 합류했지만. 이들은 독일 공군 소속 방공부대였고, 이들의 임무는 독일본토로 탈출하는 것이지 무솔리니의 구출이 아니였다. 여하간 무솔리니는 독일 군복으로 갈아입고 스위스 국경에서 스위스 망명의사를 타진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메나지오 북쪽 10km지점 무소(Musso) 마을에서 매복하고 있던 게릴라들에게 체포되었다. 전투 의지도 바닥이고 하루빨리 독일로 탈출할 생각이던 독일 방공부대는 무기를 놓지 않고 이탈리아를 빠져나가는 대신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들을 게릴라에게 넘기는것을 택했다.[16] 이때 무솔리니는 트럭 뒤편에서 독일 군복을 입은 채 철모를 쓰고 웅크리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는 변장을 알아챈 이탈리아 좌익 게릴라[17]들에게 무솔리니 일행은 독일군으로 위장했지만, 공교롭게도 빨치산 그룹 중에 예전에 해군 수병 시절 무솔리니에게 수훈한 사람이 있어서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빨치산이 무솔리니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알아보고 무솔리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거나, 무솔리니가 신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위장이 들통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은 그저 이야기들일 뿐이고 무솔리니 본인 자체가 굉장히 아주 특징적으로 생겼다. 선이 굵은 얼굴형인데다가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흔히 그렇듯 집권기간 내내 자기를 우상화하는 면상 사진을 전국 곳곳에 걸어뒀기 때문에 모르기가 어렵다.

결국 무솔리니는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힌 다른 측근들 그리고 정부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즉시 총살당해 죽었다. 베레타 M1934 자동권총 2정과 베레타 M1938 기관단총 1정에 의해 무솔리니의 신체가 벌집이 됨으로써 총살집행이 끝났다. 유언은 "그래도 잘 된 거야. 적어도 이탈리아 땅에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죽으니까 그나마 위안이군." 혹은 "내 가슴팍을 쏘아라!"였다고 한다. 다만 아예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고 한손에는 묵주를 꽉 쥐고있는 손이 벌벌 떨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또한 유언의 신빙성에는 의문점이 있다. 미국 언론인 피터 톰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 중 베니토 무솔리니와 윈스턴 처칠이 교환한 서신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으려고 처칠이 영국 정보부원 브루노 로나티와 로버트 마카로네에게 베니토 무솔리니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것. 실제로 1994년에 로나티도 자신이 무솔리니를 총살했고, 동료 마카로네가 무솔리니의 정부 페타치를 총살했다고 밝혔다.

파일:Mussolini_e_Petacci_a_Piazzale_Loreto,_194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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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두번째가 '베니토 무솔리니'고, 무솔리니의 옆에 가운데 매달려 있는 사람이 그의 정부클라라 페타치다.

파일:Nicola_Bombacci_3.jpg
  • 니콜라 봄바치(Nicola Bombacci, 1879. 10. 24. ~ 1945. 4. 28.)
: 청소년기에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1921년에 15인 중앙위원회로 구성된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 멤버가 되었으나 후에 변절하여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공화당인 파시스트 정당의 간부로, 무솔리니를 충성스럽게 지지하였다. 그러다가 파르티잔군에게 붙잡혀 처형될 당시 "영원한 두체 무솔리니! 영원한 사회주의!"라는 유언을 남기고 총살되었다.
  • 알레산드로 파볼리니(Alessandro Pavolini, 1903. 9. 27. ~ 1945. 4. 28.)
: 정치인뿐만 아니라 극우파 언론인, 수필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32년에 이탈리아-아비시니아 전쟁에 참전해 갈레아초 치아노가 이끄는 비행대대의 중대장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 후 1939년에 무솔리니 문화부 장관에 임명되어 1943년 1월까지 일하였다.
파일:Achille_Starace.jpg
  • 아킬레 스타라체(Achille Starace, 1889. 8. 18. ~ 1945. 4. 29.)
: "무솔리니가 이다!!"라는 발언을 한 파시스트 왕당파의 일원. 1920년 트렌토파시스트 운동에 가담했고 곧 그의 눈에 띄어서 지역 정치비서가 되었으며 국가 파시스트 정당의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2년이 되자 국무장관으로 승진하였다. 1935년에는 대령으로 승진하여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에 참가하여 북부 전선에서 싸웠고 1936년 2월 29일에 벌어진 샤이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사진에서는 짤렸지만 맨 왼쪽 매달린 사람 옆에 두 명이 더 매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매달린 사람은 총 7명이다.

총살당한 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시체는 애인이었던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 그리고 측근들의 시체 3구와 함께 밀라노로 인도된 뒤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당시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있는 반쯤 완공된 스탠더드 오일 주유소의 기둥[18]에 거꾸로 매달렸다.[19] 그들의 시체에는 원한을 품던 시민의 침과 욕설 세례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어떤 시민들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거나 총으로 쏘기도 했다. 시민들의 이 같은 분노는 무솔리니의 시신에 특히 집중되었다. 주유소에 매달리기 전부터 시민들의 발길질에 차인 무솔리니의 얼굴은 심각히 훼손되었다.

게다가 주유소에 매달린 클라라 페타치의 치마는 뒤집혀서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시민들은 클라라의 중요 부위에 이물질을 집어넣거나 막대기 등으로 쑤셔박기도 하였다. 그 참상을 보다 못한 어느 노파가 치마를 여며서 가랑이 사이로 끼워넣어 줬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20]라는 관용어가 생겼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도 큰 충격에 빠졌다. 무솔리니가 총살당하고 이틀 후에 히틀러는 자살할 때 내 시체를 불태워 달라는 유서를 남겼는데, 자신도 무솔리니처럼 죽어서 시체가 저런 꼴이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결국 히틀러는 그가 바란대로 죽은 뒤 화장되었다.

도조 히데키 역시 무솔리니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추악한 시체는 되고 싶지 않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끔찍한 처형을 피하고 싶었던 도조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판결대로 처형당한다.

이후 유가족들은 몰래 시신을 회수하였고 아무도 모르게 프레다피오에 있는 무솔리니 가문 무덤에 안장시켰다. 한동안 증오하던 몇 시민들에게 석관이 훼손당하기는 했어도 도난 또는 멸실되지는 않고 무사히 남은 탓에 저 무덤은 보수된 이후로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극우파들의 성지 비슷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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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토 무솔리니의 묘지
두상이 로마 황제의 두상을 본뜬 듯 근엄한 표정이다. 두상 양쪽에 있는 파시스트의 상징인 파스케스 조각이 인상적이다.
[1]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이탈리아의 영토로 남아있다.[2] 훗날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무솔리니에게 리비아 전쟁은 이탈리아가 리비아를 침략한 제국주의 전쟁이고, 제1차 세계대전동맹국무리한 요구를 근거로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한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에서 1차대전 참전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당시 위축되던 국제주의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립이 아닌 침략받은 세르비아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을 주장했다고 밝혔다.[3] 《일 파시 이탈리아니 디 콤바티멘토》(이탈리아어: Il Fasci Italiani di Combattimento, 파쇼 이탈리아 전투 분대).[4] 現 크로아티아의 리예카(Rijeka).[5] 피마자 기름은 몸에 해롭진 않으나 맛과 냄새가 역겹고 강한 복통과 설사를 유발해 상대에게 큰 정신적 피해를 주었기에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잘 써 먹는 테러 수단이었다. 사실 이탈리아 같이 남자의 체면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검은 셔츠단한테 붙잡혀 피마자 기름을 강제로 먹고 백주대낮에 설사를 하게 되면 크나큰 망신거리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에 반대하는 남성들은 이 피마자 기름 먹이기 고문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6]소말리아 중부와 남부.[7] 이때 알바니아의 국왕 조구 1세는 중앙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금괴를 빼내 영국으로 도망쳤다.[8] 무편집 연설에서는 실제로 환호 소리에 "~에게 전달되었다."(agli consegnata)는 말이 묻히면서 30초 후 환호가 끝난 뒤 agli consegnata를 재언급하며 연설을 이어간다.#[9] 원제는 <Apocalypse : The Second World War> Episodes 2 "Crushing Defeat"로,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70주년을 맞아 공개되지 않았던 제2차 세계 대전 영상을 토대로 만든 6부작 다큐멘터리다. 한국에서는 2009년 9월 4일부터 매주 금요일 자정에 방송되었으며 나레이션 성우는 박상일이다.[10] 역사나 역사 게임을 다루는 커뮤니티에서 "Saluto al duce!"를 "달걀 독재!"로, 또는 이탈리아의 졸전을 비꼬는 의미로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힙니다."를 화하여 사용되고 있다.[11] 프랑스의 주력 부대는 북쪽 독일 전선에 있었다.[12] 애시당초 독일은 지중해, 북아프리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비롯한 남부 유럽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이들이 지중해 방면 연합국의 세력을 견제하는 정도로 전력을 소련으로 집중하려 했는데 이 모든게 순수히 무솔리니의 야욕으로 일순간에 날라갔다. 지중해 영국해군의 위협으로 롬멜은 지속적으로 보급품 부족 문제를 위해 역설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 영국군을 완전히 축출하는 전략을 선택했고 초기의 눈부신 그의 활약은 독일군 전체 전역 운영에 굉장한 무리를 안겨주었다.[13] 그런데 이게 한편으론 독소전쟁 초기엔 되려 유리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독일군이 소련과의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도 이오시프 스탈린이 '발칸 문제 때문에 이동 중인 거겠지' 정도로 오판했고, '지금 여름도 저물어가는데, 쳐들어오면 곧 겨울이 될 텐데 설마 오겠어?'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려 방어 준비를 하자는 의견을 오히려 묵살하고 독일군을 자극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던게 독소전 초기의 대승의 이유 중 하나다.[14] 출처: 군사학자 이언 워커의 2003년 작, Iron Hulls, Iron Hearts.[15] 12기 중에 착륙에 성공한 글라이더는 8기뿐이다.[16] 이후 무솔리니는 게릴라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독일 군복을 벗으며 "독일은 이제 질렸어! 그들은 두번째로 날 배신했어!"라고 외쳤다 한다.[17] 빨치산, 이탈리아어로는 파르티지아노라고 부른다.[18] 현재는 맥도날드 지점이 들어서 있다.[19] 이 광장은 반파시스트 게릴라와 시민을 처형한 장소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4년 8월 10일 [20] = 자신의 소신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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