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제 린저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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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제 린저
Luise Rinser


출생
1911년 4월 30일
독일 바이에른 주 핏츨링
사망
2002년 3월 17일 (향년 90세)
독일 바이에른 주 오버바이에른 현[1]
직업
작가
배우자
호르네 균터 슈넬 (1939년경 ~ 1942년, 이혼)
클라우스 헤르만 (1944년 ~ 1952년경, 무효화)
카를 오르프 (1954년 ~ 1959년, 이혼)
자녀
크리스토프 린저 (1941~1994)
종교
가톨릭[2]

1. 개요
2. 생애
2.1. 경력 논란
2.2. 친북 논란



1. 개요[편집]


독일의 문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의 대표적 소설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생전 페미니즘, 좌파 지식인, 나치 저항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사후에는 김일성, 호메이니 찬양, 나치 저항은 커녕 나치 협력자였다는 진실이 드러나 평가가 추락했다.

전후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70~80년대 쯤 대한민국의 가정집 책꽂이에 한 권 씩은 꽂혀있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소설 '생의 한가운데(Mitte des Lebens)'의 작가이다.

루이제 린저를 처음 한국에 소개한 작가는 독문과 교수이자 작가였던 전혜린이다. 전혜린이 번역한 '생의 한가운데'가 1961년에 한국에 출판되었다.


2. 생애[편집]


히틀러 정권에 저항한 반(反)나치 여성문인으로 유명하였다. 뮌헨대학교에서 교육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뒤 1935년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1939년 학교에서 나치에 가입하라는 강요에 직장을 그만두고 같은 해 작곡가 슈넬과 결혼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40년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유리반지(한국에서는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 때'라는 이름으로 출판)'를 완성했고 이 소설은 헤르만 헤세가 찬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1944년 남편이 전사하고 자신은 히틀러 정권에 반발했다는 이유로 작품 출판 금지를 당하고 게슈타포의 감시를 받게 되어 결국 반 나치 활동으로 투옥, 1944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전으로 1945년 석방되었다...고 했으나(후술 참조)

첫 남편 슈넬[3] 사이에서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 린저를 얻었다. TV 프로그램 감독이었던 연인 사이에서 둘째 아들 슈테판 린저(1941-1994)[4]를 혼외 출산으로 얻었다. 1944년 작가 클라우스 헤르만(1903-1972)[5]과 결혼하여 1949년까지 함께 살았다. 1954년 독일 작곡가 카를 오르프(1895-1982)와 재혼했다가 1959년 이혼하였다.

루이제 린저 자신의 자전적 색채가 짙은 소설로 평가되었던 '생의 한가운데'(1950)의 여주인공 니나는 파란만장한 생의 한가운데에서 두려움 없는 의지를 가지고 신념 속에 살아가는 이지적인 여성으로 형상화되어있다. 이 소설은 여 주인공 니나를 사랑하는 남자인 슈타인의 입장에서 니나를 그리고 있다. 여주인공 니나는 수동적이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격정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반 나치 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하고 자살 기도까지 하는 격정적인 인물이다.

전후 카톨릭 좌파쪽 입장을 보이면서 1968년 반권위주의 좌파 학생운동이 서독에 퍼지고 극좌 테러단체인 적군파(Rote Armee Fraktion)가 프랑크푸르트 상업지구의 한 백화점을 방화하여 체포되었을 때 이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여 서독 사회를 놀라게 했다. 극좌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양심적 지식인 이미지에서 1972년 서독 하원 총선에서는 갑자기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으로 변신했다.

1970년대에는 낙태 조항 폐지 캠페인에 힘썼다.

이란의 호메이니를 '제3세계 국가들의 빛나는 본보기'라며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김일성한테도 그러더니...

작곡가 윤이상과 절친한 관계가 잘 알려져 있고, 윤이상과의 만남을 다룬 책 '상처받은 용'(1977)을 펴냈다. 윤이상이 말하는 자기 자신이 잘 드러나 있어 윤이상 연구자라면 반드시 접하게 되는 인터뷰 서적이다.

1984년 서독 대통령 선거에서 녹색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의회 투표에서 낙선하였다. 당선자는 80%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인 기민련의 카를 폰 바이츠제커.[6]


2.1. 경력 논란[편집]


루이제 린저와 오랜동안 교류했던 철학자이자 신부인 호세 산체스 데 무리요가 린저의 첫째 아들 크리스토프와 함께 루이제 린저 탄생 100주년인 2011년에 출판한 린저의 전기('모순 속의 삶')가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무리요 신부는 그녀를 독일의 '잔 다르크'로 그리고자 기획했으나 자료 연구를 해가면서 루이제 린저의 숨겨진 사실과 왜곡이 드러난 것이다. 1944년 나치에 체포될 때까지 열성적인 나치 교사로서 나치 찬양 시를 썼고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의 유태인 교장을 비난했던 증거들이 나왔다. 나치의 청년여성 조직인 '독일소녀동맹'의 한 교육소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후 괴벨스의 영화부서인 UFA가 제작하는 선전영화의 대본작가로 활약하면서 두둑한 보수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루이제 린저, 한때 나치주의자였다

무리요 신부는 루이제 린저가 보통의 나치 추종자들을 넘어서는 나치에 꽉 엮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옥중기' 등은 모두 자신을 미화한 거짓 이야기이며 나치 시절 그녀가 출판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음으로 드러났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작가 클라우스 헤르만의 유품(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 중 유고에 따르면 루이제 린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헤르만이 나치를 추종하는 그녀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주기 위해 당시 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히틀러를 지원하는 대기업가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지원정치자금의 규모 등을 말해주었는데 린저는 친구에게 이 말을 전해주었고 그 친구의 남편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린저를 나치의 게슈타포에 고발했다는 것이다. 이에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던 것이다. 린저의 주장처럼 국가반역죄를 받은 것이 아니었고 사형 선고를 받지도 않았으며 1945년 이전 조기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전후 서독 민주주의를 재건하는 가운데 반나치 깃발의 명예를 지킨 '잔 다르크'가 나타나주기를 갈망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루이제 린저가 '생의 한가운데'라는 작품을 발표해 자신이 반나치 저항작가이며 사형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양심이라고 미화하기 시작하면서 첫 거짓의 단추를 채웠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박광작 성균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루이제 린저 사후 독일에서 불거진 논란이 한국에는 소개되지 않았다면서 2017년10월 말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것이 루이제 린저의 정체다’를 4회 연속 게재했다. 이 글에 언급된 바에 따르면 슈피겔에서도 린저를 비판했다고 한다. 링크

참고로 박광작 교수는 반공 성향의 인물로 주로 보수 매체에서 인터뷰를 했지만, 그가 영향력이 큰 언론이라고 언급한 슈피겔은 좌파 성향 매체이다. 즉, 좌우를 떠나서 그녀의 행적이 논란이 되었다는 얘기다.

사실, 박광작 교수가 이런 주장을 소개하기 이전에도 독일 교민 커뮤니티에선 이런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2011년 1월 9일 슈피겔 기사를 독일 교민이 요약한 글이다. 링크

2.2. 친북 논란[편집]


북한을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여러번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서방의 친북 인사로서 북한을 마약중독, 성범죄, 자살 등 서구가 겪는 문제가 없는 '인간적 사회주의'[7]로 나아가는 곳으로 높이 평가했다. 1986년 평양 방문 때에는 김일성대학의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이것이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의 정체다

린저는 ‘북한 기행문’(1981, 한국에는 '또 하나의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에서 북한 체제를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위대한 지도자’, ‘범죄 자체가 없고 가난이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는 형무소가 없다’, ‘교화소는 쇠창살이 없고, 교육생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시점에 교화소에서 출소할 수 있다’, 등 완전히 북한 관변주장을 그대로 옮겨 썼다. 반대로 남한에 대해서는 반민주적이고 종속적인 독재정권이라고 비하했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겸손한 정치가를 본 적이 없다"면서 "북한의 사회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김일성의 사상, 실천, 대안은 이제껏 가보지 못한 제3의 길"이요 "서구가 깊이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등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다.# 이러니 오죽했으면 김일성과 애인관계 아니냐는 억측까지 나왔을 정도. 히틀러와 이란의 신정독재자 호메이니도 찬양한 걸 보면 평생 '카리스마 있는' 독재자를 원했던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린저가 윤이상의 영향을 받아서 친북성향을 가지게 된 점, 박정희를 비판했던 점 때문에 오랫동안 그저 북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것 정도로 에둘러 넘어갔지만 외국 학계에서는 균형감각을 잃고 독재자를 추앙했다고 까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으며[8] 루이제 린저 평전에서도 이 부분은 큰 비중은 없지만 곱게는 보고 있지 않다.

어쨌거나 이한영이나 성혜랑을 비롯해서 고위급 탈북자들의 수기에서도 수차례 언급되는데, 루이제 린저 방북 직전에 북한에 린저 전집이 전혀 없어서 온갖 책이 다 있던 성혜랑 집에 들러 김정일이 루이제 린저 전집을 빌려갔다고 하며, 이한영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외국 남자 손님은 껴안아도 외국 여자 손님은 내외를 한다고 껴안지 않았다고 하는데, 린저는 거리낌없이 껴안을 정도라서 그 모습을 본 김정일이 밥먹다말고 두 노인네가 떨어질줄을 모른다, 둘이 눈이 맞은거 아니냐?라고 김일성 책임부관과 전화하면서 농담할 정도였다. 이후 김일성은 간부들에겐 린저 전집을 주면서 린저를 본받으라고 했는데, 린저가 북한 사회의 문제점도 있다고 좀 지적하기는 해서 인민들에게 배포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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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olfgang Saxon, "Luise Rinser Is Dead at 90; Wrote on Horrors of Nazism", 「뉴욕 타임즈」, 2002.3.24.[2] "Luise Rinser", 「더 가디언[3] 1942년에 이혼했으며 1943년 독소 전쟁에서 전사했다.[4] 어릴 때 고아원에 맡겨졌으며 예술감독으로 활동했다.[5] 전후 동독에서 작가생활을 이어갔다.[6] 내각책임제인 독일에서 대통령은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실권은 거의 없는 자리이며, 선거도 지방의회가 지명한 선거인단의 간선제로 치뤄진다.[7] 박근혜가 읽었다던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저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도 스마트폰 중독이 없는 북한 운운하는 등 좀 가난할지언정 정신적으로 풍족하니, 부정부패가 없니 하는 사실과 전혀 다른 북한관은 남한과 서구에서 꽤 유행했었다. 이는 과거 문혁 중의 중국을 보고 나왔던 개드립이 원조인데 중국에서 문혁을 부정한 이후 소재만 북한이나 다른 3세계 반미 독재국가로 바꿔서 요즘도 나온다.[8] 가령, Joanne Miyang Cho(2018), Luise Rinser’s Third-World Politics: Isang Yun and North Korea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