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나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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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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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왕국 제임스 2세의 왕비
모데나의 마리아
Maria di Modena


파일:Mary_of_Modena.jpg

이름
이탈리아어
마리아 베아트리체 엘레오노라 안나 마르게리타 이사벨라 데스테
(Maria Beatrice Eleonora Anna Margherita Isabella d'Este)
영어
메리 베아트리스 엘리너 애나 마거릿 이자벨라
(Mary Beatrice Eleanor Anna Margaret Isabella)
출생
1658년 10월 5일
모데나 공국 모데나 공작 저택
사망
1718년 5월 7일 (59세)
프랑스 왕국 파리 생제르맹앙레 궁
배우자
제임스 2세 (1673년 결혼 / 1701년 사망)
자녀
이사벨, 제임스, 루이자 마리아
아버지
모데나 공작 알폰소 4세
어머니
라우라 마르티노치
형제
프란체스코 2세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MaryOfModenaSignature.svg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유년기
3.2. 결혼
3.3. 자녀
3.4. 첫번째 망명
3.5. 잉글랜드의 왕비
3.6. 두번째 망명
3.7. 말년
4. 가족관계
4.1. 자녀
5. 여담



1. 개요[편집]


Mary of Modena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2세의 왕비. 모데나의 메리, 모데나의 마리아 또는 메리 왕비로 불린다.


2. 작위[편집]


파일:Coat of Arms of Catherine of Aragon.svg
문장

3. 생애[편집]



3.1. 유년기[편집]


1658년에 모데나 공작 알폰소 데스테의 장녀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여 동생 프란체스코가 공작위를 물려받고 어머니가 섭정이 되었다. 어머니 라우라 마르티노치는 루이 14세의 수상 쥘 마자랭의 조카로 똑똑하고 능력있는 여인이었다. 라우라는 자식들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덕분에 메리는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 프랑스어, 라틴어, 영어에 능했다.

1672년에 잉글랜드의 요크 공작 제임스와의 혼담이 들어왔다. 제임스는 첫 아내 앤 하이드와 사별한 홀아비로 메리보다 25살이 더 많았다. 게다가 제임스의 첫째딸은 메리와 4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라우라는 이 혼담이 탐탁치 않았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3.2. 결혼[편집]


1673년 11월 잉글랜드에서 메리와 요크 공작 제임스는 가톨릭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제임스는 나이가 많고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으며 말더듬이였다. 15살의 메리는 결혼식날에 처음으로 남편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제임스는 양심이 있었기에 어린 아내를 잘 대해주었고 부부는 사이좋게 지냈다.

잉글랜드 의회는 요크 공작의 결혼에 불만이 많았다. 찰스 2세는 적자가 없었기에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는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다. 왕위계승자가 가톨릭교도인 것도 못마땅한 일인데 가톨릭교도 아내를 들인 것이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메리를 냉담하게 대했다.

제임스는 두 딸들에게 메리를 '너희들의 새로운 친구'라고 소개했다. 메리는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는 첫째딸 메리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둘째 과는 그다지 잘 지내지 못했다. 1677년에 친구같은 딸 메리가 네덜란드오라녜공 빌렘과 결혼했을 때 메리는 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다.


3.3. 자녀[편집]



파일:Prince_James_Francis_Edward_Stuart;_Princess_Louisa_Maria_Theresa_Stuart-1.jpg

제임스와 루이자 마리아 테레사, 1695년

결혼하고 2년 후인 1675년에 첫 아이 캐서린 로라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는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사산을 경험한 후에 딸 이사벨을 낳았으나 망명으로 떨어져 있던 중에 사망하였다. 캐서린 로라와 이사벨을 포함해 메리는 7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중 영유아기를 넘긴 아이는 제임스와 막내 루이자 마리아 테레사 뿐이었으며 루이자는 19살에 천연두로 요절하였다. 연이은 사산과 자식들의 요절은 메리가 종교에 매달리는 계기가 되었다.


3.4. 첫번째 망명[편집]


1678년에 잉글랜드 가톨릭교도들을 노린 '교황의 음모(Popish Plot)' 사건이 일어났다. 가톨릭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하고 요크 공작 제임스 2세를 왕위에 앉히려 한다는 소문이 잉글랜드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의 의혹의 눈초리에 시달리던 요크 공작 부부는 브뤼셀로 떠났다. 망명 중에 메리는 남편이 자신의 시녀 캐서린 세들리와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로 지냈다.

얼마 후 찰스 2세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요크 공작 부부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찰스 2세는 오래지 않아 쾌차했지만 요크 공작 부부를 향한 적대적인 분위기는 여전했다. 제임스와 메리는 쫓겨나듯이 스코틀랜드에든버러로 거주지를 옮겼다. 1682년에 소문이 날조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부부는 잉글랜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3.5. 잉글랜드의 왕비[편집]



파일:James_III_and_Mary_of_Modena.jpg

모데나의 메리와 아들 제임스

1685년에 요크 공작 제임스가 제임스 2세로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종교 문제로 의회와 충돌했다. 국왕을 향해 불만은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전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메리 왕비는 연이은 출산과 유산으로 건강에 문제가 있었으며 낳은 아이들은 전부 요절한 상황이었다. 이에 가톨릭교도 왕비를 경계한 귀족들은 안심했다. 귀족들은 왕비가 다시는 임신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신교도인 메리 또는 앤이 왕위에 오르는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1688년에 메리가 아들 제임스를 출산했다. 가톨릭교도들은 환호했으나 신교도들은 의심했다. 신교도들은 메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 진위를 의심했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아이를 바꿔치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교도들이 소문을 퍼뜨리는 상황 속에서 제임스 2세는 늘그막한 나이에 아들을 얻은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발하는 신교도 귀족들을 누르기 위해 상비군을 조직했다.

이에 귀족들은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와 오라녜 공작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1688년에 오라녜 공작 부부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도착했다. 제임스 2세와 메리는 자식들을 데리고 제임스 2세의 사촌 루이 14세가 있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3.6. 두번째 망명[편집]


루이 14세는 사촌 부부에게 생제르맹앙레 성을 내주었다. 아름답고 재치있는 메리는 프랑스 궁정의 인기인이 되었다. 메리는 베르사유를 오가며 루이 14세의 부인 맹트농 후작부인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반면 제임스 2세는 프랑스 사교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프랑스 귀족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1689년에 제임스 2세는 복위를 노리고 아일랜드에서 전투를 벌였다. 자코바이트 항목 참조. 메리는 보석을 팔아가며 군자금을 모아 남편을 지원했다. 허나 제임스 2세는 패주하고 1701년에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이후 메리의 아들 제임스가 제임스 3세로 선포되었지만 이름뿐인 왕이었다. 메리는 망명정부에서 어린 아들을 위해 섭정으로 활동하다가 아들이 성인이 되자 수녀원에 몸을 맡겼다.


3.7. 말년[편집]


메리는 파리 근처의 사요 수녀원에서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를 만나고 친하게 지냈다. 종교 활동에 열중하던 메리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연달아 전해들었다. 1711년에 프랑스 궁정은 제임스 3세의 왕위계승권 지지를 중단했고 제임스 3세는 프랑스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다음해인 1712년에는 막내 루이자 마리아 테레사가 천연두로 사망했다. 메리는 연이은 불행으로 비탄에 빠졌다. 파리의 수녀원을 전전하며 여생을 보내던 메리는 1718년에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4. 가족관계[편집]



4.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이자벨 스튜어트
(Isabel Stuart)
1676년 8월 28일
1681년 3월 2일

1남
웨일스 공 제임스
(James, Prince of Wales)
1688년 6월 10일
1766년 1월 1일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슬하 2남
2녀
루이자 마리아 스튜어트
(Louisa Maria Stuart)
1692년 6월 28일
1712년 4월 18일



5. 여담[편집]


도박 중독이었다. 거의 매일 도박을 했다고 하며 도박빚에 시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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