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

덤프버전 :




1. 개요
2. 상세
3. 비판
3.1. 양비론 오남용
3.3. 이기는 수단으로 악용
3.4. 대안없는 비판
3.6. 정치적 불리함
3.7. 태생적인 어그로
4. 성립과 의의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양비론()은 서로 충돌하는 두 의견이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말한다. 양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인터넷에서는 흔히 '모두까기 인형'이라고 부른다. 영미권에서는 bothsidesism(보스사이지즘, "양쪽주의")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보스사이지즘은 양비론과 양시론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흔히 보이는 "너나 잘해라" 같은 말들이 그 예시.

2. 상세[편집]


상당히 많은 대립되는 주장들은 나름의 근거와 타당성을 지니고 있고,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이 많아 한쪽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접근인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양비론이 나름의 지위를 견지하는 것. 많은 학술 이론들을 살펴보면 어떤 주제에 대한 첫 번째 주장이 나온 이후 이에 반박하는 두 번째 주장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양자를 모두 비판하는 세 번째 주장이 등장하면서 3가지 입장이 많은 이론들의 기본 골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3번째로 나온 이론이 양비론이 된다.

다만 양비론에서도 상황에 따라 좀 다른데, 이름 그대로 끝까지 양쪽 모두에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경우가 있는 한편 필요에 따라서는 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긴 해야할 경우엔 '좀 더 완벽한 쪽'보다는 '좀 더 오류가 없는 쪽'을 기준으로 해서 변호를 해주거나 그쪽의 비판을 덜 하는 경우도 있다.

양비론과는 반대로 서로 충돌하는 두 의견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이론은 양시론이라고 부른다.[1]


3. 비판[편집]



3.1. 양비론 오남용[편집]


양비론 만능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상 모든 갈등을 양비론으로 해석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부분이다. 갈등 사안에 따라서 물론 양비론이 당위성을 가지는 경우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갈등이 보편적인 관점에서 잘못의 경중을 논할 수 있고, 권력 관계의 뿌리를 두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부분을 반드시 양비론을 주장하기 전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양비론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그 갈등에서 핵심적 문제나 중요한 근거들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2] 양비론이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3]

해당 부분뿐 아니라 이하 서술될 모든 양비론에 대한 비판에 적용되는 가장 좋은 예가 가해자에 의한 양비론 남용이다. 가해자에게 있어 양비론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거꾸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딱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악독한 목적의 양비론은 사람끼리의 사소한 다툼에서부터 국가간 분쟁에 이르기까지 매우 즐겨 사용된다. 당장 수많은 역사상 가해국들이 자행하는 역사왜곡의 상당지분을 양비론이 차지한다.


3.2. 피장파장의 오류[편집]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로 대립하는 양쪽 모두 까게 됨으로써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렵게 만들며, 의사결정에 혼선을 줄 수 있다. 물론 정말 까야 할 경우도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덮어놓고 까는 걸 정당화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양비론은 각 의견의 오류를 비판한다라는 의미이지 그냥 뭔진 모르겠지만 둘 다 까고 싶으니까 깐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이유가 없다보니 양측의 대립을 심화시키기만 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예시를 들면 A에 대해 비판할 때 '다른 사람들도 그러지 않냐'라고 대응하는 경우 피장파장의 오류가 발생한다.

반대로 양비론을 함으로써 암묵적으로 한쪽 의견을 편드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A와 B가 각자 상반되는 주장으로 다툴때 한쪽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반대쪽이 상대적으로 합리적으로 할 경우 이 두 경우의 수에서만 고른다면 기본적으로는 좀 더 합리적인 쪽을 고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양비론의 악용이나 오남용을 저지르게 될 경우 결국 둘 다 똑같지 않냐라고 하면서 엄연히 차이가 벌어진 상황을 다시 원점으로 만들어버린다. 때문에 양비론 성향의 커뮤니티 사이트도 우편향 혹은 좌편향 될 때가 있다. 대체로 편향되지 않은 양비론자는 편향된 커뮤니티에서 거부감과 괴리감 때문에 난민으로 추방되어 보이지 않으니 대부분의 양비론성 집단은 편향되었다.

때문에 더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제3자가 난입하여 양비론을 구사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득이 된다. 결국 이러한 상황 고려를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양비론을 꺼내들게 된다면 오히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실제로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모르쇠나 비아냥으로 일관하며 어그로를 끄는 것도 중재를 하려는 제3국들로부터 양비론을 이끌어내고 싶어서다. 양비론이 성립되면 일본은 각종 분쟁에서 최소한 무승부는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3.3. 이기는 수단으로 악용[편집]


양비론은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논쟁에서 이기는 데는 참으로 편안한 방식이다. 양비론 자체가 애초 양쪽 모두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기 때문에 논쟁에서 상대의 비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방어할 것도, 방어할 필요도 전혀 없기 때문. 논쟁도 문제점을 지적하며 공격하는 쪽이 훨씬 유리한데 양비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으로 공격만 한다.

주로 온라인 키배에서 보이는 양상으로, 상대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없는 경우 적당히 "어차피 이런 곳에서 싸우는 너나 나나 다를거 없다"는 식으로 갑자기 핀트를 어긋내어 대화를 종료시키는 방법이다. 여기서 상대가 끝내지 않고 더 토를 달 경우 '나는 대화를 끝냈는데 너는 왜 질질 끄냐'는 태도로 급발진 또는 다혈질 인성파탄자로 상대를 몰아가면 정신승리 완료. 아니면 상대가 끝내려 할 때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나랑 너 둘 다 끝까지 까자'라고도 한다.

쇼펜하우어가 인신공격과 함께 최고의 논쟁 기술로 든 것이 바로 이 양비론이다. 한마디로 "이기려면 졸렬해져라."라는 뜻인 셈.


3.4. 대안없는 비판[편집]


양비론의 또 다른 단점으로는 건설적인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는 점인데, 극단적으로 말해 둘 다 나쁘니까 여기서 전부 입닥치고 세상 망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로 흘러가기 쉽다는 점이 있다. A의 주장이 나쁘고 B의 주장 역시 나쁘기 때문에, A와 B가 주장하는 어떤 이상으로도 나아가지 못한다. 결국엔 갈등의 해결이 정체되고 건설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양비론은 A 측에서든 B 측에서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 측에서든 영 탐탁치 않은 공공의 적 취급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대부분의 논쟁이나 토론에서 대립하는 양측의 주장은 모두 한계나 모순, 단점, 불합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만약 한쪽 주장에만 모순이나 단점, 불합리성, 한계가 있고 다른 쪽 주장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면 애초에 문제가 없는 주장이 당연히 정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니 논란이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쪽 주장 모두 자기 주장에 한계, 모순, 단점, 불합리한 면이 있다는 점 자체는 부정하고 반론하기 힘들 것이므로 그 문제점에만 주목하고 지적한다면 일단 논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토론의 목적은 완벽하지 못한 대안 중에서 그나마 나은 대안을 찾아내자는 것인데, 기존 대안들이 가지는 문제점을 과도하게 물고늘어져 논쟁에서 우세를 점해 봤자 토론의 본래 목적인 건설적인 토론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토론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려면 '양측 모두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만큼 합리적이고 납득가능한 새로운 대안' 을 제시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새로운 대안 제시' 이지 양비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토론 과정에서 무작정 양비론을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

일각에선 양비론에 대해 양측 모두에 대해 특정한 잘못이나 오류를 범했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른 경중을 판단하며 좀 더 나은 의견과 주장이 무엇인지 최종적인 결론을 내야 하며, 이에 함께 양측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고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루어졌다면 양비론에 대해 비판이 나오지도 않았을뿐더러 이미 그것은 양비론의 범주가 아니다.[4]

양비론이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양비론적 입장으로 모두까기를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내놓는 대안이나 해결책에도 문제점들이 존재하거나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측의 태반이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비판하는 선에서 멈추고 그것으로 인하여 반감을 품게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만 해도 평론가들인 진중권, 전원책만 해도 비판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대안이나 해결책은 없이 원론적인 비판에 그치지 대안이나 해결책 제시로는 결코 나아가지 못한다.[5][6]

막상 양비론자들도 자신과 다른 양비론자들과 마주치면 '아무리 사회 문제를 공론화하고 싶어도 알아서 사회적 물의를 빚어 자멸하는 존재들한테 억까를 해버리면 자료의 공신력이 부족해져서 부메랑으로 돌아올 텐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생각할 즈음이면 개입주의, 팽창주의 등에 회의감을 가질 수 있다. 결국 양비론자들이 자연스럽게 바라는 욕구는 큰 정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대부분의 위키는 양비론만 남아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방향의 서술을 지양한다. 잘못하면 디시인사이드의 정치병적인 갤러리와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트위터에 상주하는 지지층들과 특정 팬층들의 정치병적인 모임처럼 단순 화풀이만 무의미하게 반복되기 때문이다.

3.5. 내로남불[편집]


양비론적 관점으로 모두에게 문제점들이 있다고 주장하며 혹독한 비판을 해대지만 정작 양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자신이 남에 대해 지적하거나 비난했던 논란들을 본인들도 똑같이 가진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내가 결백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라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까는 경우도 많다.

한마디로 본인들도 논리적 모순들과 문제점들을 가졌으면서 남의 단점을 어떻게든 지적을 못해 안달하며 오지랖을 떠는 꼰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3.6. 정치적 불리함[편집]


양비론을 펼치는 개인은 조직 내에서 자기 입지를 확보하기 어렵고 잘해야 소장파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특히 자기 식구 감싸기 현상이 극도로 심한 정당 정치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하고 'OOO 2중대' 소리만 듣다가 끝나기 쉽다. 당장 아래 언급된 실제 양비론자들 대부분은 조직에 뿌리를 내리는 데 실패한 야인이나 소장파가 대부분이다.

흔히 극단주의자를 혐오하는 양비론자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극단주의자와 정치병자한테 아무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체로 극단주의자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었기 때문에 그냥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일단 타당한 주장으로 보이는 것이 있으면 듣겠지만 불법적인 행위를 옹호한다고 판단되는 잘못된 자유의지를 말하기만 하면 사기꾼으로 간주하고 안 믿겠다고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극단적인 성악설과 비슷하다. 그래서 극단주의자는 아무리 빡쳐도 자기 편한테는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것이라고 하고, 양비론자는 그딴 건 좆목이라고 한다.

양비론자는 자신을 숭배할 기미가 보이면 본받고 싶다는 사람한테 극단적인 우상숭배의 길을 걸어서 책임감이 있는지도 모르는 타인을 무근거하게 믿다가 할 수 있는 역량 이상의 무리한 이상주의를 품고 강요하려고 하다니 돌은 것이 아니냐고 반응한다. 이러니 양비론자들은 사람이 안 모이고, 사람이 모였는데 양비론자라고 자칭하는 자는 편향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3.7. 태생적인 어그로[편집]


모두까기는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성향을 특정하게 정한 적이 없으며 일시적으로 한 발자국 걸치는 정도라고 여겨진다.

지나치게 깊게 입문해서 자기 편을 깔 수 없게 된 네티즌들과 비(非)일반인 입장에서는 모두까기 인간이 무슨 사정 때문에 자기 삽질과 우리 진영의 삽질까지 마구 까는지 몰라도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면서 자칫하면 멘탈이 붕괴되어 우리 진영이나 상대 진영에 동화될 수도 있는 위험한 개입을 하는데 배가 부른 것이 아니냐고 열이 받는다.

반면 모두까기 인간의 입장에서는 특정 진영에 척을 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극단주의자들한테 정파 분쟁에서 자유로워도 정파들의 삽질이 싫어서 인간답지 못한 짓만 할 거면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그걸 안 하니까 어그로를 끈 정치병자 같은 양반들이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은 자신을 까는 것이 아니냐고 반응할 수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모두까기한테 키보드 배틀에 과몰입하는 것이 아니냐고 조롱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까기 인간의 입장에서 극단주의자의 치부를 까는 것은 즐거워서가 아니라 남한테 도둑질하는 행위를 못 참겠다는 정의, 분노, 증오를 오가는 빡돎이기 때문에 '너도 키보드 배틀꾼일 뿐이다'라는 말은 오히려 모두까기 인간을 자극하여 이왕 까인 거 가루가 되도록 다 까보자는 물귀신 작전에 휘말릴 수 있는 행위다.

결국 모두까기는 극단주의자와 상극이면서도 잘못하면 극단주의자가 될 수 있는 양면성으로 살얼음판을 걷기 쉬운 위치다.

심하게 극단적인 모두까기 인형은 디시인사이드풍의 반말 커뮤니티와 거리를 멀리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제3자가 봤을 때는 무언가 정의로운 말을 하려는 것 같지만 분노해서 이성을 상실한 것 같은 불쾌한 낌새를 풍기기도 한다.

4. 성립과 의의[편집]


양비론은 분명히 한계가 존재하는, 대안이 없는 소모적 논쟁 방식인 것은 사실이다. 애초 양비론은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양비론의 목적도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반드시 어느 한쪽을 옹호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양측이 모두 비판점이 있다면 비판하는 것 역시 필요한 태도이기에, 양비론은 사실 토론에 있어서 양날의 검과 같다.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상에서 양비론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양측의 잘잘못을 따지는 사회적 이슈나 사건사고 관련 글에서 이러한 경향이 많은데, 적잖은 이슈와 갈등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닌 경우도 많다. 하지만 대부분 사회에서는 어느 한쪽의 잘못이 더 중한 쪽에 모든 사회적인 비판이 몰두되어 비교적 잘못이 가벼운 반대쪽을 감싸는 경향이 있고, 단순히 양측 다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양비론자로 몰고 가 원천봉쇄의 오류를 일으키는 현상이 심심찮게 일어난다.[7] 애당초 단순히 잘못을 짚었다고 해서 양비론을 들먹이는 것부터가 양비론의 정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저 자기가 공격하는 대상을 같이 공격해주지 않는 것이 못마땅하여 상대를 특정 성향의 인물로 판정하고 몰아가는 비논리의 전형일 뿐이다.

대안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부부분의 주류 집단과 조직이 내부고발자한테만 책임을 전가하여 양비론자라는 식으로 언론플레이하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문제에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경우는 꽤 많은 일이다.

요약하자면, 사회내의 현상이나 사건사고, 주장에서 한 측이 일방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거나 한 측이 일방적으로 완벽한 주장을 하고 있지 않는 경우들도 명백하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양측 모두의 잘못과 문제점에 대해 비판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15:28:33에 나무위키 양비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일상에서 양시론이라는 단어의 인지도가 양비론보다 매우 적다 보니 양비론의 의미가 양시론까지 확장되어 쓰이는 편이다. 보통 양쪽 다 옳다고 말하는 상황이면 다들 화해하기 직전이기 때문에 양시론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2] 관심을 안 가지면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단순 인신공격에 그친다. 그런데 극단적인 양비론자가 중요한 근거에까지 관심을 가질 경우 아예 자기 기준에서 극단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정신승리를 시전할 만한 부분을 불법적이라고 모조리 반박함으로서 봉쇄하려고 한다. 어찌 보면 양비론자한테 논리가 없는 것이 차라리 상대하기 편할 수 있다. 물론 둘 다 불편하다.[3] 이를 잘 보여주는게 나무위키에선 기적의 논리로 사용된다. 양비론이라고 밀어붙여 다른 편집자들이 그 문제에 접근하는것을 귀찮게 만든다.[4] 표전 국어사전에서 양비론의 정의만해도 맞서서 내세우는 두 말이 모두 틀렸다는 것이다.[5] 여기서 보수의 대표 논객인 전원책은 실제 정치에서 시도를 해보기라도 했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좌절한 케이스이고 진보의 대표 논객인 진중권은 실제 정치에 참여 직접 문제점들을 개선을 해보려고 한 것 자체가 전혀 없었다는 의견도 있는데 전원책이 보수에 대해 비판하며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에 들어갔다가 일방적으로 경질 당한걸 두고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좌절했다라기에는 실제 정치를 시도하자마자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보수와 똑같이 변해 극우친박 행세를 하며 전원책에게 기대하던 많은 사람들의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갈겼으니 애초에 정치에 있어서 진짜 양비론자는 아니라고 보는게 대부분이다.[6] 사실 더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전원책의 전공은 법학과지만 진중권의 전공은 예술계열이다. 정치에 비판을 할 거면 무조건 참여하라는 건 무리수인 주장인 셈이다.[7] 특히나 좌우의 정치극단주의 세력에서 이게 극심한데, 자신에 대한 조금의 비판이라도 하는 사람들을 양비론 혹은 반대 성향의 극단주의자로 몰이를 해버린다. 즉, 한 개인이 동시에 극좌, 극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실제 세상에서는' 정상적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