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C-123 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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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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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2년 2월 5일 육군특수전사령부 제707특수임무대대 소속 육군 장병 47명과 공군 장병 6명[2] 이 탑승한 C-123 수송기가 악천후 때문에 한라산 개미등계곡에 추락한 사고. 이 사고로 탑승자 53명 전원이 사망했다.[3]
이는 80년대 대한민국 국군의 전근대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흑역사이다. 특전사의 명예와 자존심은 바닥을 쳤다. 더 나아가 특전사와 국방부는 사건 자체를 '대간첩작전 훈련' 중 발생한 사고라고 하며 진실을 은폐해 유가족들에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권과 군 당국의 추악한 면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며 정권이 수차례 바뀐 뒤에도 완전한 진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이다.
2018년 5월 27일 김의성과 주진우가 진행하는 MBC의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기존에 알려지지 못했던 내용들을 추가로 파악해 알리면서 그 참상이 더욱 드러났다. 전두환 시기에 군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 사고들 중에 무조건 진상을 덮으려 했던 사례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4]
2. 상세[편집]
사고 당시 제주신문 부장이었던 서재철이 찍은 유일한 사진.[5]
사고 병력들은 전두환이 다음 날인 2월 6일 제주국제공항 신활주로[6] 건설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라 경호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이 경호를 '봉황새 1호 작전'이라고 명명하였으며, 대한민국 육군 707특임대원들과 공군 C-123 수송기 세 대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출발지인 서울공항은 물론 도착지인 제주공항 역시 눈이 내리는 악천후로 곤란을 겪었다. 강설이 계속되어 성남 서울공항 통제국은 모든 항공기 이륙을 통제했고 제5전술공수비행단에서조차 이륙이 불가능하다는 보고를 2번씩이나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닥치고 이륙이었다. 결국 무리한 운항 끝에 C-123 선두기가 사라졌다. 다음날인 2월 6일 오후 4시경 한라산 해발 1,060m 지점에서 추락한 기체가 발견되었다. MBC 스트레이트의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최초에는 지역 경찰과 구조대들이 들어가 사고 확인과 사진 등을 찍었으며, 당시 사건현장은 항공기의 폭발로 인해 시신, 수송기 파편들이 사방에 널부러져 있는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군이 도착하였으나 군은 사건 축소와 은폐를 위해 사진을 모두 회수하고 경찰관들에게 평생 동안 이 일을 발설하지 말라는 강요를 했다고 한다.
사고 이후에는 사고지점인 관음사 주차장 옆에 충성공원을 조성하고 여기에 추모비를 세워 매년 추모행사를 연다. 전시된 당시 사고기의 잔해가 이 사고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말해준다. 그런데 2015년 이전까지 추모비에는 여전히 '대간첩침투 훈련 중 사고'라는 허위 문구가 적혀 있었다가 이후 '대통령 경호작전 중 사망'으로 바꾸고 안내판까지 세웠다. 더군다나 당시 특전사 장병들의 월급에서 강제로 각출하여 추모비를 조성했는데 추모비에는 당시 박희도 특전사령관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었다. 그 내용도 아주 가관인데, "네가 죽음으로써, 네가 죽으면 우리가 살고 조국은 지켜지리니... 검은베레는 죽어서 영원히 산다..."고 적어놨다. 정작 박희도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일체에 대하여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해 같은 기종이 청계산에서 6월 1일 추락해 이 사고와 똑같이 육/공군 장병 53명이 순직했다. 또한 두 사고로부터 9년 후인 1991년 3월 14일에 경상남도 밀양시에서도 수송기 추락사고가 발생해 공군 장병 5명이 순직했었는데, 공식 보도자료에서는 정확한 기종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고기종이 C-123이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사고기종인 C-123은 이 세 사고 이외에도 1994년 12월 퇴역 때까지 노후화와 고장이 심각하여 수많은 정비사들을 고생시키고 당시 많은 육공군 장병들을 공포에 떨게 한 기종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육군 특전사 및 공군 출신 예비역들의 제보와 증언들이 있다. 비행 중 엔진이 꺼졌다가 다시 켜고 갔다거나, 심지어 하늘에서 양쪽 프로펠러 성형엔진이 완전히 맛이 가는 바람에 제트엔진 2기로 겨우 착륙했다거나, 이 비행기가 걸리면 바로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고 하고 강하할 때만을 기다렸다는 사례도 있고[7] 사고가 일어났던 1982년 당시 특수훈련과 선임교관으로 복무했다는 한 예비역은 청계산 사고를 직접 수습했고 이후 HALO MAN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8] 고공교육생들에게 교안에도 없는 비상탈출 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
사고 이후에도 사고 현장에서는 5cm만 파도 각종 파편들이 나온다. 사고 처리도 제대로 안 됐다는 증거이다. 기사
3. 군부정권의 은폐, 끝나지 않는 진상규명 투쟁[편집]
사고 당시 제주신문의 서재철 기자가 사고 현장을 상세히 찍었으나 5공 정권의 언론 검열로 신문에 실리지 못했으며 사진 대다수도 군부에 압수되었고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숨긴 사진 1장이 1989년에야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국방부와 특전사 측도 이를 '대간첩침투 훈련 중 사망'이라고 허위로 발표했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추모비에는 '대침투작전'이라고 적혀 있다. 사건 이후 유족들은 '특전사 제주 2.5유족회'를 결성해 청와대와 관계기관을 상대로 진정서와 탄원서를 수없이 내고 1989년에 전두환을 비롯해 주영복 국방부장관, 박희도 특전사령관 등 4명을 고소했으나[9] 1992년에 서울지검은 무혐의 처리했다. 2007년에 2.5유족회 측은 진실화해위에 진상조사를 요청했으나 검토 과정에서 무산되었다. 2013년에 KBS제주방송총국이 <시사파일 제주>에서 해당 사건을 토대로 방송하려 했지만 제주해군기지 갈등을 의식한 총국측이 방송을 무산시켰다.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희생장병 유가족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사고 나흘 뒤 유가족들은 부대원들이 화장되었다며 유골함으로 돌아온 가족들을 국립묘지에서 묻으며 합동 영결식이 진행되었는데 유가족들은 그 안에 과연 시신 조각이라도 있긴 있는거냐고 의문을 표시했다고 한다. 이후 유가족들이 실제로 사고 현장을 방문하게 된 것은 사고 백일제 다음날이었는데 군이 막는 것을 간신히 따돌리고 들어갔더니 그때까지도 널부러져 있던 유해 조각들을 발견하고 수습하기 위해 땅을 파헤쳤는데 군인들이 이마저 막으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사망자에 대한 보상은 한 푼도 없었다.
전두환은 2021년 11월 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사망하였고 책임자인 특전사령관 박희도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
4. 관련 자료[편집]
4.1. 오마이뉴스 발굴탐사 [편집]
4.2. 제주의소리 2012년 2월 7일 기사[편집]
5. 관련 문서[편집]
- C-123
- 청계산 C-123 추락사고
-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 대한항공 376편 동체착륙 사고 : 당시 군용기에 C-123이 있었다면 민항기에는 대한항공 보잉 727이 있었다. 이쪽도 노후화로 말썽이 많았다. 둘 다 도입 시기도 비슷하고 퇴역시기도 비슷하다.[10]
6. 둘러보기[편집]
[1] 현 제주특별자치도.[2] 6.25 전쟁당시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서 전공을 세운 유치곤 준장의 아들인 유용석 대위가 조종사로 타고 있다가 순직하였다.[3] 평시 작전 중 벌어진 군인 최다 사망사건(53명). 2위는 천안함 피격사건(46명).[4] 이 에피소드에 나온 사건은 크게 2가지였는데 전두환이 기자와 해외 요인들을 모아 놓은 상태에서 자신도 참관하는 군사훈련 중에 전차가 강에 빠지는 사건이 벌어진 사례. 훈련 지휘관들이 대통령이 보는 중에 훈련을 중지할 수 없다고 훈련 참가자 전원이 구조도 하지 않고 그냥 훈련을 진행하는 바람에 탑승자들은 전원 익사하고 대통령은 구조지시는 커녕 보여주기용 훈련에서 사고가 난 사실만 언짢아하면서 자리를 떴다고 한다. 두번째가 바로 이 추락 사건이다. #[5] 1982년에 찍혔으나, 실제로는 7년 후인 1989년에 공개되었다. 당시엔 필름이 4통이나 있었지만 3통은 사장에게 반납되었고 나머지 1통에 있었던 유일한 사진 중 하나였다.[6] 해당 활주로는 현재 제주공항의 주 활주로라고 할 수 있는 07-25번(구 06-24번) 활주로이다. 이전의 제주공항에는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13-31번 활주로 하나만 있었다. 본 사고기 역시 13-31번 활주로로 착륙 예정이었다.[7] 이 예비역은 당시 C-130은 그랜저를 타는 거 같았고 미군의 MC-130은 벤츠 S클래스를 타는 거 같았다고 말하기도 했다.[8] 고공침투요원들이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9] 이외에도 82년 당시 육군의 최고책임자였던 육군참모총장 역시 고소장에 이름이 적혔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82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라고만 적혀있다. 5공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라고 하면 정호용을 떠올리겠지만 82년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황영시였고 정호용은 3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어 이 사건과는 무관하다.[10] C-123은 1973년에 도입되어 1994년 12월에 퇴역했고 보잉 727은 1972년에 도입되어 1996년에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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