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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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부산진 전투
釜山鎮戰鬪

시기
1592년 5월 23일 ~ 5월 24일
(음력 4월 13일~14일)
장소



조선 경상도 동래부 부산진성[1]
원인
일본의 조선 침공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정발
고니시 유키나가
장수
이정녕†
장희식†
이정헌†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병력
527명[2]
18,700명
피해
방어군 전멸
사상자 약 140명
결과
부산진성 함락 및 동래성 전투의시작.
영향
7년 전쟁의 시작

1. 개요
2. 부산진 전투의 전개
3. 부산진 전투 종료와 평가
4. 대중 매체에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



1. 개요[편집]


파일:부산진순절도.jpg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조선 후기의 화가 변박(卞璞)의 작품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서막


2. 부산진 전투의 전개[편집]



징비록 중에서 부산진성 전투
1592년 4월 13일, 일본조선에 침략을 감행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는 대장으로써 오전 8시경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에서 자신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함께 700여척의 전선과 18,700명[3]의 병력을 이끌고 오후 5시, 부산 절영도(絶影島)[4]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병력 구성은 고니시가 이끄는 7,000 명과 그를 따르는 장수 소 요시토시 5,000 명, 마츠우라 시게노부 3,000 명, 아리마 하루노부 1,000 명, 고토 스미하루 700 명이었다.

부산진[5] 첨절제사 정발은 1592년 3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건네는 것을 보고[6]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껴 절영도에서 군사 훈련을 겸한 사냥을 하던 참이었다. 13일 대마도 쪽에서 대규모 선단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으나 이를 세견선으로 여기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7]


선조실록에서는 사냥나간 정발이 경계에 실패해 적의 입성을 허용한 후 난전을 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는 선조의 의심도 큰데 어떻게 자기네 나라보다 한참이나 후진국이라고 생각한 일본군이 쳐들어왔는데 몇 시간도 못 버티고 그냥 성을 내주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기사인데, 원양에서 오는 대규모의 일본군 함대를 부산에서 툭 튀어나온 절영도에서 관측을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1군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끌고 온 병력은 1만 8,700명으로[8], 세키부네 한 척에 100명이 탔다고 해도 187척이 필요한데, 왜군 선단은 계속해서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날라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세키부네에 탄 모든 병력이 고니시의 병력은 아니었을 것이며, 때문에 실제 투입된 선박은 187척보다 훨씬 많았을 가능성도 높다. 졸장 중의 졸장인 원균이라도 200척에 가까운 대선단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즉, 수평선에 왜선 선단이 보이는 순간, 침공군임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절영도에서 부산진으로 향하는 것이 원양에서 일본군이 오는 것(+ 일본군의 이함 및 전투준비시간)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왜군이 타고온 배는 현대의 쾌속선이 아니라 세키부네, 아타케부네와 같은 중세시대 일본의 함선이다. 왜군은 큐슈 히젠 나고야성(현 사가현)에 집결해서 쓰시마 섬 혹은 이키 섬을 경유해서 부산진으로 왔는데, 쓰시마 섬 기준으로 부산진까지 약 100km이고, 이키 섬은 더 멀다.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 쇼군의 좌승함으로 쓰인 '天地丸(てんちまる, 텐치마루)'가 순항속도 3.1노트, 최대속도 6.8노트로 추정된다고 하니[9], 대강 추측이 가능하다. 설령 세키부네의 속도가 7노트라고 쳐도 약 13km/h의 속도인데, 쓰시마 섬에서 부산진까지 약 8시간 걸린다. 기껏해야 배수량 100t 정도인 목선 위에서 8시간 이상 시달렸으니 심각한 배멀미를 앓았을 것이다.

일본이 섬나라이고, 왜구가 있어 왜군이 수상전에 익숙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당장 당대 천하인으로 꼽혔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적만 봐도 구키 요시타카가 이끄는 수군이 종종 언급될 뿐이다. 모리와 같이 규모가 큰 다이묘들은 독자적으로 수군을 운용하기도 했지만, 대개 다이묘들은 수군이 필요하다 싶으면 카이조쿠슈(海賊衆(かいぞくしゅう, 해적중))를 고용하거나 복속시켜 해전을 맡기는 수준이었다. 이건 일본의 지형 때문이기도 한데, 큐슈, 시코쿠가 아무리 잘나봐야 혼슈고쿠다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기 때문에 교토를 점거하고 쇼군을 갈아치우며 혼슈를 지배하는 거대 다이묘[10] 앞에서는 감히 까불수 없기 때문이었다. 수군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일본의 패권은 혼슈 내의 전쟁으로 결판이 나니 수군이 주력이 될 이유는 더더욱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수군이 아주 중요한 임진왜란에서도 구키 요시타카,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 같이 좋게 말해도 세력이 작은 무장, 속되게 말하면 좆밥들이 나서서 이순신과 싸우다 박살난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요시아키는 아이즈 번으로 전봉되며 43만 5500석의 다이묘가 되고, 도도 다카토라도 20만석의 다이묘가 되지만[11], 임진왜란, 정유재란 기준, 이 중 가장 고쿠다카가 높았던 사람은 10만석의 가토 요시아키였으며, 능력이 출중한 도도 다카토라만 해도 이 시점에서는 8만석이었다. 반면 왜군 육군 전력의 경우, 선봉과 차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는 고쿠다카 20만 석 이상이어서 수군을 맡은 왜장들보다 급이 훨씬 높았다. 그런데 이들도 세력이나 경력 면에서 시마즈, 모리, 고바야카와, 우키타, 쵸소카베[12] 등의 대다이묘에게는 상대가 안 됐다.

사실, 구키나 구루지마 이상으로 왜군 수군을 지휘할 인재가 있었는데, 제6군 소속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이다. 코바야카와 가문은 모리의 분가로, 모리 휘하의 수군을 맡고 있었으며, 타카카게는 특히나 수군 전문가였다. 이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벌인 규슈정벌에서 공을 세워 37만 1,300석의 고쿠다카를 가진 다이묘로 성장하였기에, 수군 총대장이 될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타카카게를 육전에 투입했다. 왜란에 투입된 수군 전력 자체가 육군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는 점을 보면[13], 이순신에게 개털리고 수륙병진전략 자체가 박살나기 전까지는 히데요시가 수군의 중요성을 크게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여튼 이순신이 상대한 왜군 대장 중 가장 급이 높았던 사람은 노량 해전에서 붙은 시마즈 요시히로로, 고쿠다카 60만 9천석에 달하는 거대 영주였다. 하지만 이것도 노량 해전 자체가 왜군의 퇴각전이었기에 시마즈가 수군의 지휘를 맡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결국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해군 총사령관인 이순신의 급에 맞는 상대는 왜군 수군 내에서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수군과 육군 간 지휘관의 수준 차이가 극명한 만큼, 왜군은 수군에 취약한 정황이 보인다. 전체 왜군에서 5%정도만 차지하는 수군이라면 몰라도, 왜군 전체는 해전에 익숙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도착하자마자 냉큼 상륙해서 단기간 내에 화려한 기동전으로 부산진을 쓸어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왜군이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쉬지도 않고 급습하여 성을 깨뜨린 것처럼 묘사한 선조실록 26권에는 모순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균 급의 졸장이 아닌 한 성에 도달할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 할 수 있으며, 실제 정발은 원균과 달리 전사했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7일 갑오 2번째기사에서도 앞서 인용된 선조실록 26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이러한 모순은 개전 초기 일본군의 쾌속 진격으로 인해 남부지방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현실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絶影島)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戰船)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咆)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14]


이후 인조, 효종 때에 편집된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당시 상황을 보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으며, 모순이 해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 함대가 육지에 접근하며 조총을 쏘자 일본군의 침략임을 파악한 정발은 부산진 소속 전선 3척(전선(戰船), 방패선(防牌船), 중선(中船) 각 1척)을 자침시키는 한편 왜관에 남아있던 일본인 4명을 구금하고 백성들을 성안으로 소개시켜 농성 준비를 갖춘 다음 남문의 성루에서 날을 지새웠다. 그러나 부산진의 병력은 600여명에 불과했고[15] [16] 피난민들을 합쳐서 겨우 천여명에 불과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정발에게 전갈을 보내 목숨은 살려줄테니 항복하라고 말했으나 정발을 비롯한 성 안 군사들은 전부 격노하며 전갈을 가져온 전령의 목을 베어다가 코와 귀는 전서구로 일본군 막사 바로 앞에 떨어뜨려주고 남은 머리는 한양으로 보내버렸다.

1592년 4월 14일에, 고니시는 진중에서 일단은 몇 일동안 부산 지역을 조사한 다음 공격을 하려했으나 조선군이 자신의 전령을 죽인다음 그의 처참하게 베어진 코와 귀를 보고는 격노하여 새벽에 바로 부산진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정발은 서문으로 옮겨가 궁수들을 이끌고 방어했다. 정발의 완강한 저항에 서문을 깨는데에는 실패한 일본군은 서문 밖의 높은 고지로 올라가 아래로 조총 사격을 퍼부었다. 조선군은 활과 각종 총포를 쏘며 맞섰다.[17]

가열차게 전개되던 일본군의 공격은 조선군이 부산진 성벽 밑에 뿌려 둔 뾰족한 마름쇠 때문에 아침 7시에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군을 막아주진 못했고 잠시 물러나서 전열을 가다듬은 일본군은 10시에 다시 공세를 시작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imjin.jpg

정발과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워낙 전력이 열세인데다가 배후 지원조차 받지 못해 더이상 버틸수가 없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한 비장이 정발에게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했지만 정발은 "성을 버리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며 결사 항전했다. 결국 12시쯤, 일본군은 부산진의 취약 지점인 북문을 돌파하여 밀려들었고 정발은 일본군에 맞서다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이때 근접전으로 정발을 제압할 수가 없어서 조총부대를 불러와 겨우 쓰러뜨렸다는 일본측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의 낮은 인지도와 달리 당시 일본 측에선 굉장히 임팩트있게 기억되었던 모양이다.

일본군이 성내에 진입하자 2차례에 걸쳐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단병접전에 익숙한 일본군은 큰 피해 없이 소수의 조선군을 무너뜨렸다. 정발과 함께 싸우던 이정녕과 중위장 장희식, 부사맹 이정헌 등은 전사하였으며 정발의 첩 애향은 자살하였고 그녀의 몸종인 용월, 기장 사람 신옥 등도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으며 부산진에서 싸우던 병사인 가은산 등 세 사람은 시체더미에 숨어있다가 고니시가 살육을 중지하자 항복하여 포로로 있다가 4월 17일에 풀려나고 일본군 점령지에서 탈출한 뒤 부산진 전투에 대한 것을 증언했다.

3. 부산진 전투 종료와 평가[편집]


반나절도 안되어 급박하게 이루어진 전투로 정확한 전개조차 파악이 안되었다. 광해군 때에야 생존자 조사를 통해 비로소 그 전개가 난중잡록에 전하고 있다. 비록 비극적인 패전이긴 했지만, 후에 경상도 위무사[18] 황신에게 왜군 장수 마쓰라 시게노부[19]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적고 있다. 정발과 부산진의 조선군 병사들, 그리고 조선 백성[20]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했던 일본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사실 이는 당시 한국과 일본의 문화의 차이에서 기인하는데, 일본의 경우는 바로 직전까지만해도 중세 봉건 시대의 유럽과 비슷하게 국가 권력부터가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었고, 전투의 성격도 각자 권력을 가진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에 가까웠다. 따라서 한쪽이 전투에서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지며 마무리가 되었다. 게다가 처벌도 패배한 당사자들 및 측근, 가신,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것이 되기 때문에 완전히 씨를 말려죽일 의도가 아닌 이상은 건드리지 않았다. 따라서 말단급 병사나 백성들은 끝까지 항전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멀리 고려 시절부터 500년 이상 단일 정부의 국가였고, 모든 백성은 국왕에게 예속되어있는 존재였으므로 백성과 병사 하나도 열외없이 국가를 위해 싸워야 하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 이전에, 이제까지 왜적의 침입=약탈이었고 성이 떨어지면 성내의 군민들은 대개 몰살 당하는 게 기본 패턴이었다. 이전의 많은 외침에서도 실제로 그러하였다. 대대적인 외적의 침공이 들어올 때마다 살육과 약탈을 모두 감내해야 했던 역사 탓에, 부산진성에서 끝까지 저항을 시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고니시는 정발의 투지에 감복하여 그 시체를 온전히 보존하게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본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신속하게 동래성으로 진군했고, 부산진성이 떨어진 바로 다음날 동래성 전투가 시작된다.

정발은 잠시 적전 도주 의혹을 사기도 했으나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전쟁 초기에는 보고도 제대로 되지도 않고 루머만 돌아서 정발과 송상현이 왜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부산진 전투에서 생존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가은산의 증언과 정발의 처 이씨의 탄원으로 전란후 현지에서 조사를 거친 후에 누명을 벗었고, 송상현, 윤홍신과 함께 부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현재 부산 시내에는 정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21]

다만 워낙 병력이 열세였던데다가 일본군의 연락병 차단 및 공성 수준도 훌륭했기 때문에, 정발의 대응은 흠잡을 수 없었음에도 전황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일본군의 심리에 불안정한 균열을 일으켰기는 했겠지만 어차피 일본군은 조선군이 동원되기 전에 끝장을 봐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이후 상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의 연전연승으로 그 불안감 역시 손쉽게 봉합되었을 것이다.

훗날 외교관계가 복원되어 통신사가 갔을 때 일본측에서 인상깊게 본 장수로 꼽은 정발을 정작 조선 측에서 누군지 몰라서 이야기가 엇나간 해프닝이 있었다.

4. 대중 매체에서 묘사된 부산진 전투[편집]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는 9회에 다루었다. 병사들과 함께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일본군의 압도적인 군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 성 전체가 전몰되는 모습을 묘사하며 정발과 병사들의 장렬한 최후를 다루기는 했지만, 정작 전투 후의 내레이션에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을 빼앗겼다고 설명하며 한심한 패배였다고 디스한다. 이 드라마가 제작할 때까지만 해도 고증이 엉망이었는지라 조선활보다 몇 배나 사거리가 긴 조총(...)때문에 패했다고 설명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아니며 당시 조선각궁과 조총은 사거리가 비슷하다. 그렇기에, 실전에서의 일제사거리(50~100m)는 각궁과 조총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징비록에서도 임진왜란의 역사적 첫 전투인만큼 디테일하게 다루었다. 두 드라마의 부산진 전투씬을 비교해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임진록임진록 2 일본 시나리오의 시작을 담당하며, 당시 상황을 묘사한 부산진순절도가 임진록 1의 일본 시나리오 브리핑 배경으로 나온다. 그런데 좌우 반전이다.


4.1. 불멸의 이순신[편집]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57화의 초반부, 6분 ~ 7분에 걸쳐 다루었다. 절영도에 상륙한 일본군 선발대에 의해 생선들을 말리던 백성들과 달려오던 일부 수군들이 거의 몰살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가 사냥 후 장수들과 병사들이랑 같이 회식을 하던 정발에게 보고할 수 있었고, 정발은 전선들을 자침시킨 후 밤새 백성들을 부산진성으로 소개시킨다. 이후 와키자카 야스하루[22]의 명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정발의 명에 따라 조선 수군은 활로 저항하지만 이내 일본군의 조총 사격에 무너지게 되고, 정발도 다수의 일본군과 싸우다가 조총의 일제사격에 주변에 있던 다른 일본군과 함께 사살당한다.


4.2. 징비록[편집]


13화의 초반부, 30여 분에 걸쳐 연출되었다.





역시 정발은 병사들을 데리고 사냥 후 회식을 하였는데, 그동안 일본군은 척후병들을 보내어 조선군의 상태를 확인한 후 봉수대를 무력화 시킨 뒤 상륙을 한다. 정발은 부산진으로 복귀하던 중 다가오는 일본군 전선들을 보고 처음엔 대마도무역선으로 파악했으나, 곧 노략질을 하러 온 왜구들로 파악하고 급히 백성들을 소개시키며 전투 태세를 갖추며 박홍과 원균 그리고 동래부사 송상현에게도 이 소식을 알린다. 이후 정발의 연락을 받고 합류한 박홍과 함께 일본군을 맞이하고, 이때쯤에야 정발은 그들이 단순한 왜구 수준이 아닌 정규군임을 알게 된다. 소 요시토시의 명령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조선 수군은 정발의 명령에 따라 총통과 화살 등을 쏘아 일본군을 잠시 저지하지만, 곧 일본군이 방어 태세를 갖춰 조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자 곧 전열이 무너지게 된다. 결국 일본군이 성내에 돌입해 병사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보이는 즉시 마구잡이로 도륙하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박홍은 한참 싸우다가 불리하다고 여겨 군량 창고를 불태우고 퇴각하며, 나머지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처절하게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학살당한다. 정발도 조총에 치명상을 입은 후 일본군의 칼을 맞고 전사한다.

그래서 징비록의 부산진 전투는 조선군의 복장 고증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기록을 반영해서 재현했기에 대단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1] 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2] 부산진의 민(民)·관(官) 총 인원 중 전투 가능 인원은 600명 ~ 800명으로 추정한다.[3] 이는 모리 가의 문서의 기록이고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16,7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4]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후에 러시아 제국이 조차를 시도한 곳이기도 하다.[5]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일대. 현재 부산에는 부산진구가 따로 있지만 부산진성은 동구에 있다.[6]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4일 갑오 2번째기사. 여기서의 '평의지(平義智)'가 소 요시토시이다.[7]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3일 임인 1번째기사[8] 경남도청 충무공 이순신 > 7년간의전쟁 > 임진왜란 경과 > 임진왜란의 발발 > 일본의침입과 관군의 붕괴 출처.[9] 일본어 위키백과 '天地丸' 출처.[10] 이게 가능한 사람을 '천하인'이라고 했다.[11] 둘 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귀순하여 전공을 크게 세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12] 쵸소카베 모토치카는 일시적으로나마 시코쿠를 통일한 인물이었고, 아무리 시코쿠가 깡촌이라도 크기가 크기인 만큼 어지간한 다이묘들의 석고보다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천하인으로 도약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구로다 간베에(임진왜란에 참전한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 도요토미 히데나가로 구성된 올스타 팀을 동원해 쳐버리는 바람에 몰락했다.[13] 적어도 17만, 크게 잡으면 20만의 왜군이 투입되었는데, 그 중 수군은 약 1만명이었다.[14]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번째기사[15] 명종실록 12권, 명종 6년 10월 24일 무인 1번째기사에서는 527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삼포왜란 등이 일어났기에 병력이 증강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당시 조선의 국토방위체제를 고려하면 부산진에 유의미하게 많은 병력이 증원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병력이 적은 이유는 제승방략상 부산진은 요즘으로 치면 휴전선 GOP개념의 전방 기지고 본격적인 경상도 남부 지역 방어는 동래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 남부지방의 방어 전술은 큰 전투는 거의 없고 해적의 소규모 약탈이 많은 남부지방의 특징을 고려해서 소규모 진지를 많이 깔아놓고 대규모 전쟁이 나면 상급부대에서 주변의 진지들을 규합해 한타를 벌이는 식이었다. 일본군의 진격이 규합 속도보다 더 빨랐고, 정발의 경고장을 받은 장군이 하필 원균이라는게 문제였다. 서신을 받은 이후 원균은 판옥선 100여척을 싸워보지도 않고 태워버리고 도주했다. 경상우수영은 조선 수군 최강전력으로, 원균이 불사른 판옥선을 이순신이 가졌다면 왜군이 초전에 박살났을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의 대단위 전력이다.[16] 조선 수군은 기본적으로 2교대제였고 전투진행 과정을 보면 비번인 군사들을 소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전투에 투입된 군사의 실제 수는 이보다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17] 프로이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조선군은 구리로 된 포를 사용하고 가죽으로 만든 흉갑과 철투구를 착용했다고 한다.[18] 조선통신사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임진왜란 이후 조선통신사 목록에 황신의 이름은 없다. 마쓰라 시게노부와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간기에 경상도 위무사로 있던 시기의 황신이 유력한 후보이다. 황신이 이 시기 한 대표적인 행동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순신 낚으려고 했던 책략에 이용당한 것이지만, 역으로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과 연락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임진왜란 이전 왜에 정사로 파견된 경력도 있고.[19] 이것도 이상하게 마쓰우라로 알려져 있다.[20] 물론 직접적으로 싸우기 위해 달려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죽기 전에 저항이라도 해보자는 의미였겠지만, 낫들고 달려들고 지붕 기왓장 들어내서 성벽에서 던져대는 식으로 끝까지 전투에 참여했다.[21] 위치가 오묘하게도 재부산 일본국총영사관 옆인 초량교차로이다.[22] 실제로 와키자카는 부산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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