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행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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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80802170104.jpg
복원된 안산행궁의 모습

파일:20180802170104_2.jpg
파일:안산행궁 장대석과 기와의 모습.jpg
안산행궁터의 모습
현재 남아있는 안산행궁 장대석의 모습

1. 개요
2. 상세
3. 위치 및 용도
4. 관련사건



1. 개요[편집]



정조가 1797년(정조 21) 8월에 김포의 장릉(章陵)에 능행한 뒤 화성의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하는 도중에 임시로 경기도 안산 관아에 설치한 행궁. 이후 공식적으로 행궁의 명칭을 받게 되었다.


2. 상세[편집]



안산행궁(安山行宮)은 왕의 임시 처소로서 행행 지역의 행정 명칭을 붙인 행궁이다. 왕이 안산행궁을 이용한 것은 김포의 장릉을 거쳐 화성의 현륭원에 가는 경우뿐이었다. 물론 조선전기에 사냥과 강무로 안산행궁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되지는 않는다. 특히 안산 인근에 왕실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나 능·원·묘가 없고 왕의 보장처 등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행궁으로서 유지, 이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는 1796년 9월에 현륭원에 원행하면서 안산행궁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일이었던 9월 27일에 비가 많이 내려서 행행을 정지하였다. 그리고 1797년에 안산행궁을 이용하였다.

안산행궁에 도달하는 여정은 도성을 지나 주교를 통해 한강을 건넌 뒤 노량진부터 고산현, 방하곶지[方下串之], 영등촌전로, 당산리전로, 양평리간포, 주교염치현, 압천비립우, 양천현 주정소, 복정우부석리, 담포교, 천등현, 구분교, 능소 동구, 김포, 부평행궁, 발라현, 부평부 주정소, 약대현, 소도야현, 대도야현, 구음리고송현, 송우송언하교, 중림천, 흘이천, 무지내방축두, 석전이 등을 거쳐서 왔다. 정조는 1797년 8월 15일 양천현 주정소를 거쳐 김포에 도착한 뒤 장릉의 친제를 마치고 통진행궁에서 경숙하였다. 8월 16일 낮에 부평행궁에서 주정(晝停)했다가 40리를 지나 구포(鷗浦)에서 다시 주정하였고, 이후 25리를 더 가서 안산행궁에서 경숙하였다. 정조의 행차가 안산행궁에 이를 때는 장용영(壯勇營)과 훈련도감(訓鍊都監), 경향의 보군들이 호위하였다. 당시 장용영 대장은 선기대(善騎隊)와 경보군(京步軍) 2초, 향보군 3초, 훈국보군 1초를 선상군(先廂軍)으로 해서 안산까지 호위하였다. 정조는 안산행궁에 머물면서 다른 행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근 백성들의 소원을 처리해 주었다. 정조는 안산의 부노(父老)들이 1,000여 석에 달하는 구환(舊還)을 납부할 방법이 없다고 하자 처리해 주겠다고 했으며, 안산 주변에 있는 유명인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8월 17일 화성에 이르러 현륭원에서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안산행궁은 정조가 장릉현륭원을 동일한 여정 내에서 소화하려는 방안으로 마련한 임시 행궁이었다. 정조의 능행 이후 안산행궁이 이용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3. 위치 및 용도[편집]



정조가 김포의 장릉을 거쳐 화성의 현륭원에 가는 도중에 경숙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행궁이다. 행궁으로 사용할 관아들은 퇴락해 있어 수리가 필요하여, 정조는 행행 이후에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하게 했다. 안산행궁은 양천행궁부평행궁과 같이 수리하였는데, 2,220냥이 소요되었다.


4. 관련사건[편집]



1797년 8월 16일에 부평행궁에서 안산행궁으로 떠날 때, 정조는 인근의 왕족 및 고관들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명하였다.

1846년에는 안산행궁에 모신 전패(殿牌)가 훼손된 일이 발생하였고, 전패를 훼손한 박용수와 유한원은 주살(誅殺)되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