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2세 헥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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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
Joachim II. Hector, Kurfürst von Branden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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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05년 1월 13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쾰른[1]
사망
1571년 1월 3일 (향년 65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쾨페니크 궁전
재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선제후
1535년 7월 11일 ~ 1571년 1월 3일
배우자
작센의 막달레네 (1524년 결혼 / 1534년 사망)
폴란드의 야드비가 (1535년 결혼)
자녀
요한 게오르크, 바르바라, 프리드리히, 엘리자베트 막달레네, 지기스문트, 헤트비히, 조피
아버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
어머니
덴마크의 엘리자베트
형제
안나, 엘리자베트, 마르가레테, 요한[2]
종교
가톨릭루터교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종교 개혁을 실시하여 루터파를 받아들였으며, 프로이센 공국 상속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독일을 통일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등장 배경을 마련하였다.


2. 생애[편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엘리자베트의 맏아들로 그의 숙부는 종교 개혁의 원인을 제공한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 1490~1545)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푸거 가문으로부터 막대한 빚을 져가면서 선제후로 취임한 알브레히트를 좋게 보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 종교 개혁에 헌신한 오촌 아저씨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3]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루터파에 호의를 보였다.

부친 요아힘 1세는 가톨릭 신봉자였으나 부인 엘리자베트와 종교 개혁 문제로 충돌했고, 부인이 작센 선제후국으로 도망간데에 굴욕감을 느껴 분사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물려받은 초창기에는 루터파에 대한 탄압도, 가톨릭에 대한 지원도 하지 않고 방관하다가 1539년 슈판다우(Spandau)[4]에서 마르틴 루터의 주관으로 루터파로 개종했다. 단, 이는 개인적인 개종이었을 뿐이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눈치를 보느라 국가적인 개종은 보류하고 있었다. 이후 독일왕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를 도와 오스만 제국에 맞서 헝가리 왕국 전역에 참전했으나 수준 미달의 지휘력만 보이며 물러났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루터파가 공인되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종교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단위 개종을 시행하였으며 수도원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튼튼히하고자 했다. 또한 오촌 아저씨인 알브레히트가 1568년 죽고 어린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즉위하자 후견인을 맡았으며 프로이센 공국의 종주권을 가진 폴란드 왕국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협상하여 프로이센 공국 호엔촐레른 가문 가계가 단절되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협약을 체결했다.

1571년 자신이 건립한 쾨페니크(Köpenick)[5] 궁전에서 사망했으며 첫번째 부인 작센의 막달레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요한 게오르크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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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베를린 미테구.[2] 브란덴부르크퀴스트린 변경백.[3] 작센 선제후 요한, 헤센 방백 필리프와 더불어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인물이다.[4] 현재는 베를린로 편입되었다.[5] 슈판다우와 마찬가지로 현재 베를린 외곽의 트렙토-쾨페니크구이며, 쾨페니크 궁전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