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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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명
미상
태자 책봉명
월광태자(月光太子)
생몰년도
522년 또는 529년 ~ ?
재위기간
불명, 혹은 도설지왕과 동일

1. 소개
2. 생애
2.1. 대가야국 멸망 후
3. 도설지왕과의 관계
4. 관련 유적
5. 관련 항목


1. 소개[편집]


아득한 풍경소리 어느 시절 무너지고

태자가 놀던달빛 쌍탑 위에 물이들어

모듬내 맑은 물줄기 새아침을 열었네

월광사 비(碑)

(월광사 내에 있는 비석에 새겨져 있다. 전승에 의하면 이 문구는 월광 태자가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모주의 십세손으로 부는 이뇌왕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팔세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반파국태자. 대가야국 9대왕인 이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라 사람이다.

참고로 월광 태자라는 이름은 시호가 아니다. 월광은 석가모니가 과거 세상에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을때의 이름으로 불교식 별칭.

다른 기록에 등장하는 가야의 마지막 왕 도설지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도설지왕 문서 참조.


2. 생애[편집]



그가 태어난 시기는 522년 ~ 529년 사이인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의 기사에는 "9년(522년) 봄 3월에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라고 적혀 있고 《일본서기》 계체기 23년(529년) 3월 기사에는 "가라왕(加羅王)이 신라 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라고 나오기 때문.

이 시기 반파국은 후기 가야의 맹주로 한때 지금의 전라도 동부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할 만큼 나름 위세를 떨치고 있었으나 백제 무령왕이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라도 경영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남 동부를 둘러싼 영유권 다툼이 벌어졌다. 끝내 전라도 동부는 물론 섬진강 유역에 대한 통제권마저 고스란히 내어주면서 백제와 척을 지게 되었고 이에 반대 편에 있던 신라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신라의 법흥왕 역시 가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욕망이 있었기에 양자 간의 혼인 동맹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이대로 반파국과 신라가 잘 지냈다면 월광태자는 당연히 차기 왕위 계승자였겠지만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이후에 한 사건이 벌어진다.

케이타이 덴노 23년 3월 기사에 신라 측은 비조부의 딸을 보낼 때 그녀를 따르는 종자(從者) 100명을 같이 보냈는데 반파국은 가야의 맹주격인 나라였으므로 신라와 친하게 지내겠다는 반파국의 뜻을 알리기 위해 이 종자들에게 신라 옷을 입혀 주변 다른 가야 소국에 나눠 보냈다.

그런데 다른 가야 소국(지금의 창원시에 있던 탁순국으로 비정)의 군주 아리사등이 반파국의 친 신라 정책에 반발해 신라인들을 돌려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라 법흥왕도 수치심을 느껴 결혼 동맹을 취소하려고 했다.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 보내도록 하라”


반파국 이뇌왕은 부부가 되었고 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떨어질 수 있겠냐며 신라에 사정사정했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혼인 동맹을 깨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결국 신라군이 가야 경계의 8개 성을 공격해 동맹은 강제로 파탄났다.

이후 가야 연맹의 친(親) 백제 정책으로 인해 다시 신라와 멀어지면서 신라인의 피가 섞여있는 월광 태자의 정치적 입지 역시 매우 흔들린 것으로 보인다. 만약 도설지왕과 다른 인물이라고 한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강력한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고 도설지왕과 동일 인물이었다면 왕위에 오를 때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도설지왕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에 의하면 월광 태자는 신라로 망명해 장군이 되었다. 단양 신라 적성비창녕 척경비에 의하면 551년과 561년에 도설지가 진흥왕을 보좌하는 신라의 장군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신라의 장수였던 도설지가 562년 9월에 가야 마지막 왕으로 등장하는 것도 신라 측이 대가야를 자연스럽게 먹기 위해서 대가야 왕족 피가 흐르는 도설지를 잠깐 허수아비 군주로 세웠다고 가야사의 권위자 김태식 교수 등이 해석했다. 경순왕, 공양왕, 순종의 사례와 비슷한 셈.

또한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이 월광 태자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순응의 일대기를 담은 《석순응전(釋順應傳)》에 정견모주, 이뇌왕, 월광 태자 등 대가야의 왕계가 소개되어 있다. 단순히 대가야의 건국 신화나 가야산과 관련된 내력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닌 듯하다.

2.1. 대가야국 멸망 후[편집]


말년의 월광 태자는 거덕사(擧德寺)로 옮겨가 그 곳에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월광사(月光寺)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또 562년(진흥왕 12년), 대가야국이 멸망하고 월광태자가 그의 어머니[1]와 함께 지금의 고령으로 피난 간다. 가던 도중 신라의 군대를 만나 다시 합천으로 이동했으나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어찌됐건 망국의 왕족으로서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3. 도설지왕과의 관계[편집]


기록상으로 도설지왕은 대가야국의 마지막 군주로 알려져 있고 월광 태자와 관련된 기록들도 대가야국의 멸망 이후 행적들에 대해 전승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도설지왕의 이름으로 알려진 도설지(道設智)라는 이름이 "달(月)지"로 풀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미에 붙은 지(智) 혹은 지(知)등은 고대 한국어에서 현대의 "~님"에 해당하는 존칭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진짜 이름은 이들을 빼야 된다. 고로 도설 = 달이라는 뜻이 된다.

월광 태자가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도설지왕은 16대 군주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 10을 16으로 잘못 기록하였거나, 10대는 직계이며 16대라는 수를 왕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도설지왕과 월광 태자가 동일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대가야국의 군주 총 대수(代數)가 16대이지만, 도설지왕은 이진아시의 10세손이 될 수 있다.


4. 관련 유적[편집]


거덕사(擧德寺) 절터는 해인사 서쪽 5리에 있다.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에, “그 서쪽 산 두 시냇물이 합치는 곳에 거덕사라는 절이 있는데, 옛 대가야국(大伽倻國) 태자 월광(月光)이 결연(結緣)한 곳이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0권 합천군(陜川郡)

월광 태자가 불교에 입문한 절이라고 알려져 있는 거덕사는 현재 합천 해인사 주차장 입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한 위치

파일:attachment/wulkangsaji123.jpg
그리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는 월광사는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통일 신라 후기 양식의 3층 석탑 2기만이 남아 있다. 건물들은 모두 현대식 건물. 맨위에 언급된 월광사 비 또한 월광사에 위치해 있다.

고령군에 가면 태자가 걸었다는 달빛 길이 있다.


5. 관련 항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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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이름은 양화공주이지만 화랑세기는 위서 논란으로 인헤 정사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