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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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가야 왕사에 관한 기록들은 굉장히 부족한 편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구형왕을 제외하곤 가야의 군주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유사》는 고려 문종 때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썼다는 《가락국기》의 일부만 전해져 오며, 그나마도 금관국과 관련된 내용만 있을 뿐 반파국, 탁순국, 안라국, 보라국, 초팔국 등 다른 가야계 국가의 왕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통해 알 수 있는 이름들이 몇몇 전해지며,[1]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군주도 존재한다.
1.1. 가야 계보[편집]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은 구형왕(9대손)-김세종-김솔지-(김무력)-김서현-문명왕후-문무왕(15대손)으로 김수로의 제사권을 이어받아 시조묘에 김수로를 배알했다. 멸망 이후 숫자는 봉사손의 대수를 따른 것.
2. 금관국[편집]
금관국의 왕사는 다른 가야 소국들에 비해 상세하다.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가락국기》 덕분이며, 각 군주의 생년월일까지 확인할 수가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 《가락국기》의 전편이 실린 것이 아닌 일부만 실려있어서 왕호와 재위 연도만 확인할수 있고 군주의 재위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수로왕 때를 제외하곤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는 삼국유사 권 제1의 '왕력'편과 삼국유사 권 제2의 '가락국기'편에서 전하는 내용이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삼국유사》에 확인되는 군주는 총 10명이며, 존재 여부가 불확실한[2] 11대 말왕(末王)을 포함하면 11명이다.
김해 수로왕릉 옆 숭선전과 숭안전에 역대 군주들의 위패가 있다.
3. 대가야[편집]
금관국과 함께 가야 지역에서 가장 강성한 국력을 떨쳤던 대가야에 대한 자료는 굉장히 부족한 편이다. 시조인 이진아시왕과 관련된 자료도 조선 초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있는 것이 전부. 여기에 인용된 《석순응전》과 《석이정전》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신라사 초기 기록에는 신라의 주변국으로서 그나마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많은 내용은 진위 여부가 불투명하다.
대가야는 1대 이진아시왕부터 16대 도설지왕까지 총 16대로 알려져 있지만 10대 군주로 추정되는 월광태자와 도설지왕과의 공통점들이 발견됨에 따라 10대일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존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가야조에는 1대 이진아시, 9대 이뇌, 16대 도설지라고 정확히 제시되어있다.
금림왕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하지왕은 《남제서》에서, 이뇌왕은 《일본서기》에서 확인이 가능하며 월광태자는 《석순응전》에서, 도설지왕은 《석이정전》과 "진흥왕순수비"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가 있는데 이들 군주들의 실존 유무와 금관국 군주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가설들이 있어 확실하게 대가야 군주라고 확인된 군주는 이진아시와 금림왕, 이뇌왕, 도설지왕 뿐이다. 월광 태자와 도설지왕은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유중 하나로는 9대 이뇌왕이 494년에 즉위하여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기록이 있는데 가야제국들이 멸망하는 562년까지 40년밖에 안 되는데 16대까지라면 40년사이에 군주가 최소 7명이상이 수명을 다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서기에서 382년 (4세기 후엽)에 활동한 임나의 5대 군주 기본한기(己本旱岐)를 대가야의 군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몇 대 군주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며 추측으로서는 금관국처럼 5대 군주라는 추측도 전해진다.
4. 안라국[편집]
안라국은 후기 가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나라였으나 아쉽게도 국내외 사서를 종합해도 군주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금관국, 반파국 다음으로 이들과 더불어 가야의 대표적인 연맹 세력 또는 제국(諸國)들을 이루는 국가였으나 이곳도 가실왕이 안라국 군주라는 추측만 있을 뿐 확실하진 않다. 안라왕 항목 참조.
아이러니하게도 안라국의 2인자격인 차한기(次旱岐) 지위의 이탄해(夷呑奚)·대불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 등은 이름이 기록에 남았는데, 이들이 사비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2차 사비회의 때는 이탄해가 오지 않았는데 노인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관습과 셋 중 가장 먼저 호명된 정황상 군주로 등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신찬성씨록에 임나국왕으로 기록된 풍귀왕(豊貴王)을 안라국 국왕으로 추정하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출처]
5. 소가야[편집]
소가야의 왕사는 문헌과 유적등에서는 거의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족보를 보면 알에서 태어난 여섯동자중 막내가 소가야의 시조 말로왕이라는 것 뿐이다. 고성 김씨 족보에 따르면 9대까지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역시 확실하지않다. 아래 표는 삼국사기 등 사서가 아닌 고성김씨 족보에만 나와있는 내용이다.
6. 탁순국[편집]
탁순국의 군주들은 국내 기록에는 없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만 남아있는 상태다. 다만 말금한기의 경우 실제 이름일 가능성은 적어서, 제대로 이름이 전해지는 군주는 아리사등 뿐이다.
7. 탁기탄[편집]
마지막 군주인 함파한기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한기'가 칭호인 점을 본다면 실제 이름은 '함파(函跛)'다.
8. 신찬성씨록[편집]
이중 가실왕(=하라하실왕), 아리사등(=도로하라아사라지, 도로하아라지지, 도노가아리사등)을 제외한 나머지 군주(이리구모왕, 용주왕, 좌리왕, 풍귀왕, 모류지왕)들은 단지 임나(미마나)의 군주로만 기록되어 있어서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
9. 기타[편집]
《일본서기》에서만 등장하는 군주로 탁순국의 말대 군주 아리사등 및 기능말다간기, 탁국 혹은 탁기탄의 말대 군주 함파한기가 있다.
그 외 벽진국(성산가야)의 벽로왕, 사벌국(고령가야?)의 고로왕을 비롯한 역대 3대 군주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 또한 족보에만 한정하여 나오는 기록이라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이름만 봐도 국명의 앞 글자+수로왕과 돌림자인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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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일본서기를 다룰 때 독이 가득한 복어 회를 손질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워낙 일본의 견해가 심한 사서라 어떤 게 프로파간다이고 어떤 게 사실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지만, 국내 자료가 워낙 부족하니 일단 옛날에 쓰여진 책임은 확실한 이쪽 자료라도 가리고 가려내서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2] 김해김씨의 족보에서만 확인이 된다.[3] 셋째 아들 김무력은 신라의 장군으로 등용되어 백제 성왕과의 관산성 전투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김무력의 손자가 김유신. 즉 김유신은 옛 가야의 군주인 구형왕의 증손자다.[4] 554년 관산성 전투 부근으로 추측[출처] 정효운, 阿羅國의 멸망과 日本列島로 건너간 아라국의 후예들,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