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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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景博)
본관
덕수 이씨[1]
출생
1868년 11월 4일
황해도 해주목 고산방 일리[2][3]
(現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사망
1945년 10월 8일 (향년 76세)
황해도 벽성군 고산면 석담리
묘소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청계당[4] 왼쪽 산기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조선 말기의 문신,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율곡 이이의 12대 종손이다. 독립유공자 이종성은 남동생, 이학희는 장남이다.

2. 생애[편집]


1868년 11월 4일 황해도 해주목 고산방 일리(現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서 아버지 이태영(李台永, 1837 ~ 1902. 9. 11)[5]과 어머니 아산 이씨(? ~ ?. 10. 21)[6]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태영은 1868년(고종 5) 승문원 이문학관(承文院吏文學官), 부사맹(副司猛, 종8품), 1887년 북부 도사(北部都事, 종9품)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출생 이후 율곡 이이의 11대 종손이던 큰아버지 이한영(李漢永, 1826 ~ 1898. 2. 3)[7]에 입양되었다. 이한영은 1848년(헌종 14) 증광 문과에 병과 9위로 급제해 공조 참판(工曹參判, 종2품), 한성부 우윤(右尹, 종2품), 병조 참판(兵曹參判),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정3품)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문신이었는데, 큰어머니 서산 류씨(瑞山 柳氏, ? ~ ?. 2. 17)[8]와의 슬하에 딸만 7명을 두어 이종문이 비로소 양자로 가게 된 것이다.

이종문은 1885년(고종 22) 식년 진사시에 3등 132위로 입격했는데, 율곡 이이의 12대 종손이라는 이유로 사악(賜樂:임금이 신하에게 악사와 악공, 기생 등을 내려주어 잔치를 벌이게 해주는 것)을 받았다. 이어 같은 해 치러진 증광 문과에서 병과 11위로 급제해 마찬가지로 사악을 받았고,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와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종9품)에 임명되어 첫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1890년부터 1891년까지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 서학 교수(西學敎授, 종6품), 경연청 검토관(經筵廳檢討官, 정6품), 부사과(副司果, 종6품),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종5품), 문신 겸 선전관(文臣兼宣傳官), 사간원 정언(正言, 정6품),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 부사직(副司直, 종5품) 등을 지냈고, 1892년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 홍문관 교리(校理, 정5품) 등을 지내다가 돌연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2월 의병장 유인석을 율곡 종가로 초청해 장남 이학희(李鶴熺, 1890 ~ 1918. 10. 15)의 관례를 부탁했고, 유인석의 권유로 이학희의 자를 본래 몽령(夢齡)으로 하려던 것을 학조(學祖)로 바꾸어 지어 주었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이후 황해도 평산군에서 유인석의 의병활동에 호응해 의병이 크게 일어나자, 의병들에 대한 숙식을 제공하면서 배후에서 협조해주기도 했다.

경술국치 이후 1914년 1월, 유인석의 문인이었던 이관구(李觀求)가 중화민국 항주부에서 군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고 귀국해 해주군에 잠입했고,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자 동지를 포섭했다. 이때 이종문은 장남 이학희와 함께 이관구의 포섭에 호응해 5개월간 해주군 미률면 부호 이종규(李宗奎)의 집에 드나들며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어 이관구는 중화민국으로 도주했고, 이 과정에서 장남 이학희가 체포돼 고초를 겪은 뒤에야 훈계 방면되었다.

이듬해인 1915년, 이관구가 재차 귀국해 박상진이 조직한 대한광복회에 가입한 뒤 황해도지부를 결성했다. 이때 이관구는 황해도지부장에 취임했고, 이종문과 이학희 부자는 황해도지부 결성에 동참했다. 또한 족질(族姪) 이석희(李錫熺)는 이관구에게 모금 서류에 필요한 '광복회', '신한국보', '재무총장' 등이 새겨진 인장을 조각해주었다. 이후 대한광복회 황해도지부는 후조(後凋) 고석로(高錫魯), 오찬근(吳讚根), 원춘(元春) 변동환(邊東煥) 등 이항로의 화서학파(華西學派) 문인들을 중심으로 해주군, 송화군, 장연군, 신천군, 옹진군을 넘어 평안도에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어 동지 포섭 및 군자금 조달이 이뤄졌으며,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총독에 대한 암살 작전을 계획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1918년 6월 18일 해주군 미률면 석정리에 사는 조하동(趙夏東)이 해주경찰서장에게 오찬근 등 22명이 이관구와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한광복회에 가입했다며 밀고했고, 이 때문에 이관구와 함께 장남 이학희 또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갖은 고초를 겪다가 같은 해 10월 15일 옥사, 순국했다.

1919년 4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9]에서 조직된 대한독립단의 지단(支團)이 고향 황해도에서도 결성되자, 같은 해 9월 10일 남동생 이종성(李種成)과 함께 입단해 고문 겸 의장에 취임했고, 이후 동지 30여 명과 함께 독립신문과 항일 격문 등을 배포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20년 5월, 대한독립단 산하에 무장독립대[10]가 결성되었고, 대한광복회 동지였던 이근영(李根永)을 비롯해 고두환·민양기(閔良基)·이명서(李明瑞)·박기영(朴技榮)·박기수(朴基洙)·주의환(朱義煥)·이지표(李芝杓)·원사현(元士賢)·변춘식(邊春植)·박기영(朴基永) 등이 7월 중순에서 8월 중순 사이에 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에 반대하거나 자금 모집을 방해하는 자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국내로 진입해 구월산 부근 전역에 대한독립단 관련 기관을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1920년 8월 15일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은율군수(殷栗郡守) 최병혁(崔丙赫, 1878. 9. 24 ~ 1920. 8. 15)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사살하는 등 전공을 올렸으며, 8월 25일부터 8월 26일 저녁까지 남동생 이종성의 안내를 받아 소현서원(紹賢書院) 맞은편에 있던 이종문의 집에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 제국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으며, 같은 해 9월 10일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에서 무장독립대원들과 신천경찰서 소속 일본 제국 경찰 88명의 교전이 벌어져 현장에서 5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이종문·이종성 형제를 비롯해 무장독립대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한 해주군 유지 17명이 해주경찰서에 전격 체포되었다.

그 뒤 9월 27일 해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정치범 처벌령 위반 혐의로 송치돼 미결수로서 1년여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 8월 1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이때 남동생 이종성은 무장독립대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뒤 출옥했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5년 11월 19일 사망했다.

출옥 후 이종문은 율곡선생유적보존회 이사를 역임하며 소현서원을 지켰고, 1924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율곡 이이에 대한 제사비용 100엔을 지원받기도 했다. 1931년 11월 21일 충청남도청으로부터 충청남도 서산군 지곡면 대요리, 도성리 해안의 간석지 231,876평에 대한 매립면허를 취득했고, 1932년 5월부터 1935년 12월 31일까지 간석지를 논을 일구기 위한 매립 사업을 실시했다.

1940년대 들어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고향에 은거했고, 1945년 8.15 광복을 맞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8일 별세했다. 유해는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청계당(淸溪堂) 좌측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편집]



  • 생전에 소현서원 주변의 논밭과 임야, 대지 대부분이 이종문의 소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상당수를 소련군정 치하의 토지개혁 때 무상으로 몰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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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당공파(春塘公派)-율곡문성공파(栗谷文成公派) 25세 종(種) 항렬.[2] 구한 말 해주군 고산면 일리 → 1914년 해주군 고산면 석담리 → 1938년 벽성군 고산면 석담리 → 1952년 황해도 벽성군 사현리 → 1965년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3] 인근의 입암리·원평리와 함께 덕수 이씨 집성촌이다.[4] 淸溪堂. 율곡 이이가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해 처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5] 자는 명삼(明三).[6] 이윤천(李倫天)의 딸이다.[7] 자는 명칠(明七).[8] 류한영(柳漢寧)의 딸이다.[9]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10] 이후 황해도 송화군 구월산 부근 전역에 대한독립단 관련 기관을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했다하여 구월산대(九月山隊)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