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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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특별자치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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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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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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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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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3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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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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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강원도지사
이창근

李昌根 | Lee Changgeun

파일:이창근.jpg

창씨명
리바라 쇼콘(李原昌根)
본관
우계 이씨[1]
출생
1911년 2월 14일
강원도 춘천군
사망
2003년 12월 13일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춘천공립보통학교 (졸업)
춘천고등보통학교 (졸업)
소속 정당
민주당

1. 개요
2. 약력
3. 일생
4. 강원도지사 시기
5. 선거시기
6. 이후
7. 출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10대 강원도지사를 역임했다.


2. 약력[편집]


1949년 4월 ~ (?) 강원도체육회이사
1958년 8월 ~ (?) 민주당춘천시당 부위원장
1958년 9월 ~ (?) 춘천시교육위원회 부의장
1958년 10월 ~ (?) 민주당 중앙위원
1959년 11월 ~ (?) 민주당강원도당부위원장(춘성군당위원장)
1959년 12월 ~ (?) 민주당중앙당사업부차장
1960년 10월 7일 ~ 1960년 12월 3일 강원도지사
1972년 12월 23일 ~ (?)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


3. 일생[편집]


이창근은 1911년 2월 14일 강원도 춘천군(현 춘천시)에서 아버지 이한익(李漢益, 1890. 11. 4 ~ 1944. 3. 16)과 어머니 진주 강씨(1888. 2. 10 ~ ?)[2]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춘천공립보통학교와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강원도 공무원양성소를 수료한 뒤 강원도 농회 서기를 거쳐 1939년 강원도 농사시험장 지방서기, 1941년 강원도 홍천군 속(屬) 등을 역임했다.

강원도섬유작물장려협회 이사, 동선인쇄주식회사 전무, 강원도인쇄공업협회장, 강원도 야구협회장, 강원도 체육회 이사, 대한야구협회 이사, 대한체육회 이사, 춘천시 교육위원회 부의장, 민주당 춘천시당 위원장,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민주당 강원도당 상무위원회 의장, 강원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 강원민생상호신용금고 정상화 대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되자 바로 입당하였다.

1959년 대한체육회정기평의원회 평의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1959년 9월 29일 민주당 강원도당 연차대회에서 부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1959년 12월 28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중앙당부 산업차장으로 뽑혔다.

1960년 4월 6일 3.15 부정선거로 인해 데모가 일어났고,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70여명 역시 데모를 준비했다. 이때 이창근은 강원도당에 20여명과 같이 데모에 참가할 것이라고 알렸고, 구파(舊派)측에서 반대하였으나[3] 막상 농성을 벌이자 여러 명이 참가하여 신파계 상무위원들과 같이 밤을 세웠다.

1960년 5월 5일 4.19 혁명으로 자유당이 무너져가자 김병로(金炳魯)[4] 계열과 서상일(徐相日) 계열한테 민주당의 독주를 우려하여 군소정당의 통합을 외치던 혁신파(革新派) 중 서상일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세력통일촉진회와 김병로를 중심으로 하는 구국민족연맹의 신당 창당 제안에 김병로는 잠깐의 동맹인지, 단일 정당인지에 대해 토론할려고 각당각파의 대표를 불렀다. 이때 이창근은 독노(獨勞)의 대표로 갔다.

1960년 5월 27일 혁신동지총연맹을 창당하였다.

1960년 6월 30일 강원도 입후보 등록을 했다.

4. 강원도지사 시기[편집]


1960년 10월 8일 장면 내각에서 전국에 도지사를 임명했다. 이때 이창근은 강원도지사로 임명됐다.

1960년 10월 16일 신당 발족을 서두르고 있는 구파에 대한 기사에 혁신동지총연맹의 이름이 적혀있고 신당에 흡수할려던 것 같다.

1960년 12월 3일 첫 민선 선거를 하자 사퇴하고 선거에 후보자 등록을 했다.

5. 선거시기[편집]


1960년 12월 9일 후보자 등록을 했으나 같은 박영록(朴永祿)에게 결국 천거에서 지고 말았다 그 후 이용택(李瑢澤) 전북도지사가 낙천하자 대규모 인사이동을 해 공천자 김상도(金相道)의 선거운동의 악영향을 끼치는 등 구파와 신파간 알력다툼이 심화되가자 장면 대표와 중앙상원위장 등에게 강원도지사공천변경서신청서 라는 이름의 유인물이 왔는데 내용은 공천자 박영록(朴永祿)에게는 당선 가능성이 없으니 차라리 이창근에게 공천을 바꾸어달라라는 내용의 유인물인데 이창근이 직접 쓴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5]

1960년 12월 27일 선거 도중 공천자 박영록과 낙천자 이창근 양파의 갈등이 최고조로 올라가 통일 된 선거전을 못 하고 서로 헐뜯고 있다고 한다

1960년 12월 25일 평창군 평창읍 중리 소재 자유시장에서 시국강연회에서 민주당공천전에서 낙천되었는대도 불구하고 이창근을 밀어달라고하자(이창근이 말한게 아니다) 민주당평창군당위원장 백낙삼(白樂三)이 민주당간부로써 무소속후보자을 미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해 스피커 선을 자르는 등 소란이 벌어져 강연이 중단 되었다.


6. 이후[편집]


제1, 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82년 11월 10일 제18대 대한적십자사 강원도지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2003년 12월 13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7. 출처[편집]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139219590116m1024&set_date=19590116&page_no=2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164919590930m1017&set_date=19590930&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173919591229m1017&set_date=19591229&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183819600406m1017&set_date=19600406&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186819600506m10117&set_date=19600506&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02319601008m00120&set_date=19601008&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03119601016m1014&set_date=19601016&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03119601016m1014&set_date=19601016&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08519601209m10127&set_date=19601209&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08619601210m1017&set_date=19601210&page_no=1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210319601227m10113&set_date=19601227&page_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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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장공파 28세 근(根) 항렬.[2] 강임희(姜任熙)의 딸이다.[3] 이것을 보면 이창근은 신파로 분류된 것으로 보인다.[4] 확실하지는 않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고 초대 대법원장도 했던 그 사람인 것 같다.[5] 실제로는 이 편지의 반대가 되었고 박영록이 당선되고 이창근은 무소속으로 나왔지만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