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페트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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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페트코비치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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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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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일리야 페트코비치
Ilija Petković
본명
일리야 페트코비치
Илија Петковић
출생
1945년 9월 22일
유고슬라비아SFR 크로아티아SR
시베니크크닌주 크닌

사망
2020년 6월 27일 (향년 74세)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국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1945~1992)
[[세르비아|

세르비아
display: none; display: 세르비아"
행정구
]]
(1992~2020)
신체
170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OFK 베오그라드 (1964~1973)
트루아 AC(1973~1976)
OFK 베오그라드 (1976~1983)
감독
OFK 베오그라드 (1990~1993)
세르베트 FC(1993~1995)
아비스파 후쿠오카(1998~1999)
아리스 FC(1999~2000)
유고슬라비아 대표팀(2000~2001)
상하이 선화(2001)
쓰촨 관청(2002)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대표팀(2003~2006)
인천 유나이티드(2009~2010)
알 아흘리 SC(2010)
경남 FC(2013)
세르비아 U-20 대표팀(2017)
국가대표
43경기 6골(유고슬라비아 / 1963~1974)

1. 개요
2. 감독 경력
2.1. 한국행 이전
2.2. 인천 유나이티드
2.3. 경남 FC
2.4. 이후
4. 페트코비치의 아이들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세르비아(舊 유고슬라비아 SFR)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17년세르비아 U-20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와 경남 FC의 감독을 역임하며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2. 감독 경력[편집]



2.1. 한국행 이전[편집]


1990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지역 예선에서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의 코치직을 맡았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유럽 지역예선에서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같은 조에 속해 있던 스페인, 벨기에 등을 제치고 단 1실점으로 조 1위에 올라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그러나 본선 때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코트디부아르와 엮인 조에서 3전 전패 2골 10실점에, 아르헨티나전의 마테야 케즈만, 코트디부아르전에서 알베르트 나지의 퇴장까지 겹치며 광탈한다.

J리그아비스파 후쿠오카, 중국 슈퍼 리그상하이 선화 및 쓰촨 관청의 감독을 수행하며 '아시아 통'으로 알려졌다. 특히 상하이 선화의 경우 하위권 팀을 단숨에 리그 2위로 끌어올리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2. 인천 유나이티드[편집]


2009년 1월, 장외룡 감독이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로 팀을 옮김에 따라 감독이 공석이 되자,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은 페트코비치에게 동계훈련 기간 동안 기술고문을 맡긴 뒤 감독 선임 여부를 최종 결정할 계획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때부터 사실상 모든 권한을 가지고 감독 업무를 맡아 지도했다.

2009년 시즌에서 11승 10무 8패, 5위의 성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성남 일화에 패해 준플레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0년 3월, 시즌 도중 부인의 지병 악화로 세르비아로 출국했다 돌아왔다. 결국 6월 8일, "부인의 지병 악화로 더 이상 인천팀을 이끌 수 없다"며 감독을 자진 사퇴했다.[1] 인천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당시 월드컵 휴가 중인 선수들을 배려해 본인의 출국을 선수단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인천에서는 1년 반 동안 통산 20승 17무 1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2.3. 경남 FC[편집]


인천을 떠난 후에는 카타르 리그 알 아흘리 FC[2]의 감독을 역임한 뒤 부인의 간호를 위해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가, 인천 시절 안종복 단장과의 인연으로, 최진한 감독의 후임으로 2013년 5월 경남 FC 감독에 취임했다.[3]

2013년 남은 시즌을 지휘하며, 리그 11위로 팀을 간신히 K리그 클래식에 잔류시켰으나,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


2.4. 이후[편집]


이후 별다른 감독 활동을 안하고 베오그라드 축구협회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2017년 세르비아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다.


3.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사망[편집]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 및 궤양으로 병원에서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6월 27일 끝내 사망하였다. 페트코비치 감독이 생전에 지도했던 인천 유나이티드[4]경남 FC의 구단 공식 SNS를 통해 국내에도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 인천의 추모글 경남의 추모글


4. 페트코비치의 아이들[편집]


2009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인천의 감독직을 맡으며, 어린선수들을 깜짝 기용해 성적을 내기도 했다. 이 깜짝 기용했던 선수들이 인천의 주축 선수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2009년 신인 드래프트로 입단해 페트코비치의 열렬한 지지 속에 데뷔전에서 득점을 하며 훗날 득점왕까지 오르는 유병수, K리그에서 꾸준한 활약으로 정상급 미드필더는 아니지만 수준급 미드필더로 불리게되는 정혁, 인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레전드 임중용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불린 안재준[5], 이후 인천의 주장을 맡았던 남준재 등이 대표적이다.


5. 여담[편집]


  • 인천 감독 재직 시절 세르비아 통역사가 제대로 없어서 페트코비치가 세르비아어로 이야기를 하면 이걸 영어로 통역하는 이가 따로 있었고 그걸 영어에서 다시 한국어로 통역해야 해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오늘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라는 아주 형식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데도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렷을 정도였다고 한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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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교롭게도 인천 유나이티드 베르너 로란트 초대 감독도 같은 사유로 사임했다.[2] 일설에 따르면 감독 자리를 제안함과 동시에 부인의 간호를 지원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3] 다만 바로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었고, 중간에 송광환 2군 코치가 감독 대행 역할을 수행했다.[4] 인천은 1년 뒤인 2021년 6월 7일에는 유상철 감독까지 췌장암으로 별세하면서 1년 사이에 2명의 감독이 고인이 됐다.[5] 실제 데뷔는 이전 감독인 장외룡 감독 시절이나 인천에서 본격적 두각을 나타낸건 페트코비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