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페트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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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45년 출생
- 1964년 데뷔
- 1983년 은퇴
- 2020년 사망
- 크닌 출신 인물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죽은 인물
- 외국인 감독(축구)
- 유고슬라비아의 축구선수
- 유고슬라비아의 축구감독
- 세르비아의 축구감독
- OFK 베오그라드/은퇴, 이적
- 트루아 AC/은퇴, 이적
- OFK 베오그라드/역대 감독
- 세르베트 FC/역대 감독
- 아비스파 후쿠오카/역대 감독
- 아리스 테살로니키 FC/역대 감독
-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상하이 선화/역대 감독
- 쓰촨 관청/역대 감독
- 인천 유나이티드 FC/역대 감독
- 알 아흘리 SC(카타르)/역대 감독
- 경남 FC/역대 감독
- 유고슬라비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74 FIFA 월드컵 서독 참가 선수
- 유고슬라비아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68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감독
- 미드필더
- 축구감독
1. 개요[편집]
세르비아(舊 유고슬라비아 SFR)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17년에 세르비아 U-20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와 경남 FC의 감독을 역임하며 국내에 이름을 알렸다.
2. 감독 경력[편집]
2.1. 한국행 이전[편집]
1990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지역 예선에서 구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의 코치직을 맡았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유럽 지역예선에서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같은 조에 속해 있던 스페인, 벨기에 등을 제치고 단 1실점으로 조 1위에 올라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그러나 본선 때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코트디부아르와 엮인 조에서 3전 전패 2골 10실점에, 아르헨티나전의 마테야 케즈만, 코트디부아르전에서 알베르트 나지의 퇴장까지 겹치며 광탈한다.
J리그의 아비스파 후쿠오카, 중국 슈퍼 리그의 상하이 선화 및 쓰촨 관청의 감독을 수행하며 '아시아 통'으로 알려졌다. 특히 상하이 선화의 경우 하위권 팀을 단숨에 리그 2위로 끌어올리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2.2. 인천 유나이티드[편집]
2009년 1월, 장외룡 감독이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로 팀을 옮김에 따라 감독이 공석이 되자, 인천 유나이티드 구단은 페트코비치에게 동계훈련 기간 동안 기술고문을 맡긴 뒤 감독 선임 여부를 최종 결정할 계획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때부터 사실상 모든 권한을 가지고 감독 업무를 맡아 지도했다.
2009년 시즌에서 11승 10무 8패, 5위의 성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성남 일화에 패해 준플레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0년 3월, 시즌 도중 부인의 지병 악화로 세르비아로 출국했다 돌아왔다. 결국 6월 8일, "부인의 지병 악화로 더 이상 인천팀을 이끌 수 없다"며 감독을 자진 사퇴했다.[1] 인천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당시 월드컵 휴가 중인 선수들을 배려해 본인의 출국을 선수단에게 알리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졌다.
인천에서는 1년 반 동안 통산 20승 17무 15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2.3. 경남 FC[편집]
인천을 떠난 후에는 카타르 리그 알 아흘리 FC[2] 의 감독을 역임한 뒤 부인의 간호를 위해 한동안 야인으로 지냈다가, 인천 시절 안종복 단장과의 인연으로, 최진한 감독의 후임으로 2013년 5월 경남 FC 감독에 취임했다.[3]
2013년 남은 시즌을 지휘하며, 리그 11위로 팀을 간신히 K리그 클래식에 잔류시켰으나,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
2.4. 이후[편집]
이후 별다른 감독 활동을 안하고 베오그라드 축구협회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2017년 세르비아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다.
3.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한 사망[편집]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감염 및 궤양으로 병원에서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6월 27일 끝내 사망하였다. 페트코비치 감독이 생전에 지도했던 인천 유나이티드[4] 와 경남 FC의 구단 공식 SNS를 통해 국내에도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 인천의 추모글 경남의 추모글
4. 페트코비치의 아이들[편집]
2009시즌부터 2010시즌까지 인천의 감독직을 맡으며, 어린선수들을 깜짝 기용해 성적을 내기도 했다. 이 깜짝 기용했던 선수들이 인천의 주축 선수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2009년 신인 드래프트로 입단해 페트코비치의 열렬한 지지 속에 데뷔전에서 득점을 하며 훗날 득점왕까지 오르는 유병수, K리그에서 꾸준한 활약으로 정상급 미드필더는 아니지만 수준급 미드필더로 불리게되는 정혁, 인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들으며 레전드 임중용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불린 안재준[5] , 이후 인천의 주장을 맡았던 남준재 등이 대표적이다.
5. 여담[편집]
- 인천 감독 재직 시절 세르비아 통역사가 제대로 없어서 페트코비치가 세르비아어로 이야기를 하면 이걸 영어로 통역하는 이가 따로 있었고 그걸 영어에서 다시 한국어로 통역해야 해 시간은 더 오래 걸렸다고 한다. “오늘 좋은 경기를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라는 아주 형식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데도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렷을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