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반 바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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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1964년 출생
- 위트레흐트 출신 인물
- 네덜란드의 남자 축구 선수
- 네덜란드의 남자 축구 감독
- 공격수
- 스트라이커
- 축구 행정가
- AFC 아약스/은퇴, 이적
- AC 밀란/은퇴, 이적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AFC 아약스/역대 감독
- SC 헤이렌베인/역대 감독
- AZ 알크마르/역대 감독
- 네덜란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네덜란드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88 참가 선수
- UEFA 유로 1992 참가 선수
- 네덜란드의 FIFA U-20 월드컵 참가 선수
- 1983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멕시코 참가 선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감독
- UEFA 유로 2008 참가 감독
- UEFA 챔피언스 리그 다회 우승 선수
- 발롱도르 다회 수상자
-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다회 수상자
- 옹즈도르 다회 수상자
- 유러피언 골든슈 수상자
- 1982년 데뷔
- 1995년 은퇴
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12년이란 짧은 선수 경력에도 네덜란드 대표팀의 유로 1988 우승과 밀란의 유러피언컵 2연패를 이끌며 발롱도르 3회, FIFA 올해의 선수 1회를 수상한 레전드다.[2] 별명은 '위트레흐트의 백조[3] '.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2016년 이후 FIFA 기술위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유년기[편집]
1964년 10월 31일 축구 선수 아버지와 체조 선수 어머니를 둔 운동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반 바스텐은 여섯 살때 지역 축구팀 EDO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1년 뒤 UVV 위트레흐트로 팀을 옮긴 이후 9년간 이 팀에서 뛰었으며 그다음 위트레흐트 지역의 또다른 축구 클럽 USV 엘링베이크에서 잠시동안 뛰게 된다.
2.2. 클럽 경력[편집]
2.2.1. AFC 아약스[편집]
반 바스텐의 재능은 특출났으며 16세 때 명문 AFC 아약스로 팀을 옮기게 되고, 1982년 4월 3일 NEC 네이메헌과의 경기에서 토탈 풋볼의 아이콘 요한 크루이프와 교체되어 들어가 데뷔골을 넣으며 커리어를 시작한다. 시대와 시대, 토탈과 압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경기는 아약스의 5:0 대승.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당시 유럽무대에서 다크호스 역할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약스에서 16세의 나이로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시즌 리그 1경기, 컵 경기 1경기를 뛰고 마무리하게 된다. 하지만 17세의 그에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즌 그는 컵 경기 포함 25경기에 13골을 맹폭했고, 전설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하늘이 내려준 재능도 엄청나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4]
그는 1983-84 시즌부터 1986-87 시즌까지 4시즌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였으며 이러한 기간 동안 112경기 118골을 기록하면서 무려 경기당 1골을 뛰어넘는 미친 활약상을 보여주게 된다. 특히 1985년에는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상을 수상하였고 1985-86 시즌에는 스파르타 로테르담을 상대로 6골, 헤라클레스 알멜로를 상대로 5골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이면서 리그에서만 26경기 37골을 기록하며 유럽 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하는 선수에게 주어지는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된다.
그는 아약스 소속으로 에레디비지와 KNVB 베이커 3회 우승,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를 우승하였으며 리그 득점왕 4회,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와 유러피언 골든부트를 1회 수상하면서 22살의 어린 나이에 네덜란드를 평정하였고 이러한 활약상을 바탕으로 거액의 이적료로 AC 밀란으로 이적하게 된다.
2.2.2. AC 밀란[편집]
1987년 AC 밀란의 회장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반 바스텐과 함께 같은 국적의 선수 루드 굴리트를 영입하였으며, 그다음해 1988년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영입하면서 밀란의 전성기를 이끈 그 유명한 오렌지 삼총사가 결성되었다.[5]
이 때의 밀란이 바로 그 유명한 밀란 제너레이션으로 전 세계 축구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힌다.[6] 특히 이 시기의 밀란은 토탈 풋볼을 한층 발전시킨 압박 축구를 창시하며 전술적 혁신으로도 명성을 높였다. 이는 여러 팀과 축구인들이 그 단초를 마련했다는 배경도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창시자라 할 수 있는 밀란 선수들과 명감독 아리고 사키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 바스텐은 이 위대한 팀의 오렌지 삼총사 중에서도 에이스였다.
반 바스텐의 밀란 첫시즌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비록 첫번째 경기에서 페널티킥으로 데뷔골을 넣으며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 무득점 경기가 이어졌고 고질적인 왼쪽 발목 부상도 겹쳐 계속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리그에서는 11경기에 출전하여 3골만을 기록, 유러피언컵에서는 3경기에 출전해 단 한 골도 넣지 못하는 등 상당히 부진했다. 8년 만에 스쿠데토를 들어올린 밀란이었지만 반 바스텐 본인은 어떠한 활약상도 없이 자신의 첫 시즌을 보내게 된다.
1990-91 시즌은 반 바스텐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인한 후유증, 부상, 심장 트러블 등으로 최악의 슬럼프에 빠진 시기였으며 체력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유러피언컵에서의 출전도 적었다.[10] 밀란 또한 최악의 난조를 보였는데 이 시기 FIFA가 오프사이드 룰을 공격적으로 개편하고 골키퍼가 백패스를 손으로 잡지 못하도록 규정을 바꿨기 때문. 오프사이드 트랩을 즐겨 사용하던 밀란이었기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결국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게 가로막혀 유러피언컵 3연패에 실패.[11] 스쿠데토도 당시 로베르토 만치니가 에이스로서 팀을 이끌던 삼프도리아에게 넘어갔으며 베를루스코니 회장은 사키 감독을 경질하고 당시 팀의 코치였던 파비오 카펠로를 감독으로 선임한다.
1992-93 시즌은 부상으로 신음했으나 실력과 활약은 더욱 원숙해진 시즌이었다. 그는 IFK 예테보리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완벽한 바이시클킥 골을 포함하여 총 네 골을 기록하며 챔피언스 리그 최초로 네 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고 카펠로 감독의 밀란은 이 시즌에도 계속 무패 행진을 이어갔으나 두 시즌 동안 이어진 58경기째에 들어서야 무패 행진이 깨지고 만다. 반 바스텐은 1993년 1월 US 안코니타나전에서 6개월짜리 장기 부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마르세유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장피에르 파팽이 반 바스텐의 공백을 잘 메우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까지 진출하였다. 반 바스텐은 오른쪽 발목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무리한 출장을 감행하나 밀란은 또다시 마르세유에게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무르고 만다.
그리고 이 시즌 무리하게 출전한 경기들이 자신의 프로 생활 마지막 경기가 되게 되는데 경기가 끝난 후, 부상이 재발한 반 바스텐은 선수 생명 연장을 위해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연골 이식 수술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술 결과는 좋지 못했고 결국 그의 커리어는 28세의 나이에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 한편 그가 이 시즌 1월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기록한 6골은 그 시즌 챔피언스 리그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13] 이었다.
반 바스텐은 1993-94 시즌을 재활로 통째로 쉬었기에 팀에 그는 없었지만 밀란은 크루이프 감독의 드림팀 바르사를 4:0으로 격파하고 빅 이어를 되찾는다.
마르코는 제가 코치한 최고의 스트라이커였습니다. 그의 조기 은퇴는 그 자신과 축구 그리고 밀란에 치명적인 불행이었습니다.
2010년,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마르코 반 바스텐의 조기 은퇴에 대해 남긴 이야기
그래도 한 가지 감안해야 될 점은 이 시기 세리에 A는 세계 최고의 리그이면서 결코 한 팀이 독주를 하는 법이 없었고, 동시대 밀란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테르, 삼프도리아 등도 강했으나 역시 가장 컸던 장벽은 마라도나의 나폴리. 허나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있어서는 1등 공신이었다.
반 바스텐은 AC 밀란 통산 201경기 125골을 기록하였고, 리그에서는 총 147경기 90골을 기록하였다. 그는 그렇게 프로 통산 373경기 277골이라는 기록을 남긴채 그라운드를 떠났다.[14]
2.2.2.1. 1993 UCL 결승전[편집]
사족이지만 이 결승전은 여러모로 논란거리가 많은 경기였다.
당시 마르세유는 리그 1 4연패를 기록한 강팀으로 선수단도 파비앵 바르테즈에 아베디 펠레, 루디 푈러, 마르셀 드사이, 디디에 데샹 등 화려한 멤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은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챔피언스 리그에 심하게 갈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 갈증은 상술됐던 시즌 결승전에서 베오그라드에 승부차기 패배를 당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마르세유는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앞두고 있었지만 리그 우승의 향방을 결정할 중요한 경기인 발렝시엔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도 앞두고 있었다. 마르세유는 고민 끝에 승부조작이라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발렝시엔의 선수단 일부에게 현금을 건네 손쉽게 리그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보다 집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약물 복용도 논란 거리다. 이는 당시 주전 멤버였던 장 자크 에들리가 2006년에 발매된 자서전에서 "결승전 경기 전에 루디 푈러를 제외한 선수단 전원이 약물을 복용했다"라고 주장했기 때문.[15] 하지만 UEFA는 이 증언이 너무나도 때늦은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며 별다른 조사에 들어가지 않아 도핑 논란은 프랑스 축구 협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승부조작과는 달리 논란거리로 남게 됐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UEFA와 프랑스를 연관지어 음모론을 펼치기도 한다.[16] 마르세유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리그 1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기도 하니 말이다. 승부조작이 사실로 드러난 이후 마르세유는 승부조작과 직접적 관련은 없는 챔스 우승은 박탈당하지 않았으나 그 해의 리그 우승은 무효가 되었으며 챔스 출전권이 박탈되고 2부 리그로 강등당하게 된다. 1970년대 초, 특히 1980년대 후반은 유럽과 프랑스를 호령하던 거대 명문구단 마르세유는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암흑기라 해도 1990년대 후반부터 다시 대체로 좋은 성적을 내주었으나, 비틀거릴 때도 가끔 있었으니 프랑스에서는 가히 독보적인 관중동원력-약소팀은 평관 10,000명 언저리에 리옹 등 다른 거대 클럽조차 40,000명을 달성하지 못해 쩔쩔매는데 40,000명은 가볍게 넘고 50,000명을 넘보는 평관과 리그 4연패 시절의 위엄을 고려한다면 2009-10 시즌에 와서야 간신히 한 번 우승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길고도 긴 기다림이었다. 거기다가 비참하게도 승부조작이 판명난 이후 몇 시즌 간은 경기장을 찾는 팬들의 발길이 처절하리만치 뚝 끊어지기도 했다. 이후 서서히 예전과 같은 모습을 회복하긴 했지만 말이다. [17]
이듬해 밀란은 반 바스텐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함으로 설욕하게 된다.
2.3. 국가대표 경력[편집]
그의 위상에 비하면 국가대표 커리어는 뭔가 미묘한 편이다. 유로 1988에서의 엄청난 활약과는 반대로 월드컵은 딱 한 번 나갔을 뿐이고 그나마도 무득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한 번의 유로 우승이 현재까지도 네덜란드의 유일한 메이저 대회 우승이다. 반 바스텐의 커리어처럼, 국대 활약상 역시 짧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로 1984 예선에선 별로 뛰지도 못하긴 했지만,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승점은 물론 골득실마저 동일했으나 다득점에서 밀려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의 네덜란드는 벨기에와의 플레이오프 끝에 역시 예선에서 탈락하게 된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선 감독 교체 등으로 팀 전체가 지지부진한 경기력을 보였다. 유러피언컵 2연패를 달성하고 바로 월드컵에 임했는데 우승을 노릴 것이라던 기대와 달리 조별리그에서 3무를 거두게 된다. 조별리그에서 죽을 쑨 탓에 16강전에서 우승후보 서독을 만나게 되었고, 결국은 서독에게 1-2로 패퇴하고 만다. 반 바스텐의 월드컵 경험은 이것이 끝이다.
이후 유로 1992에도 출전했으나 괜찮은 경기력에 비해 득점은 올리지 못했고, 네덜란드도 덴마크와의 4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5:4로 패하며 탈락했는데 이 승부차기의 유일한 실축자가 바로 반 바스텐이었다. 그 뒤로는 설욕의 기회도 없이 1992-93 시즌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나면서 유로 1992가 그의 마지막 국제 대회가 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난 10개의 평범한 골과 9개의 아름다운 골 중 10개의 평범한 골이 좋다. 공격수는 골이 모든 것이니까.[18]
반 바스텐은 볼을 컨트롤하는데 있어서 특출난 강점을 보였다. 이상하게 튕기는 공, 바운드 되는 공, 하늘에서 날아드는 공, 괴이한 스핀이 걸린 공을 시저스킥, 오버헤드킥, 슬라이딩 슈팅 등의 발리슛으로 잡아내는 기술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이때문에 반 바스텐은 매우 우아한 공격수로 회자되곤 하는데, 그의 킥이나 트래핑이 몹시 빠르고 간결했기 때문이다. 골대를 등지다가 트래핑도 하지 않고 발리슛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동작이나 정확한 트래핑을 수비가 막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달인의 경지까지 단련한 오른발은 물론 왼발 역시 남들 하는만큼 찰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렇게 킥 능력이 뛰어났던 만큼 공이 어려워 보이는 위치에 오더라도 슈팅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남이 보기에는 아주 어려운 각도라도 슛하거나, 아니면 약간이라도 각도를 살려낸 후 재빠르게 슛으로 연결하곤 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슛이 예측되지 않는 각도에서 심지어 수비수도 붙어 있는데 엄청 빠른 타이밍에 시도한 슛이 성공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킥의 정확성도 발군이었고, 킥이 정확한 만큼 프리킥도 당연히 잘 찼다.
반 바스텐은 킥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헤딩도 연계도 슈팅만큼 훌륭했으니 무리하게 돌파하기보단 크로스를 기다리는 것이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전형적인 타겟 스트라이커는 공이 공급되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사라진다는 약점이 있으나, 그가 몸담았던 팀들 중 반 바스텐에게 공을 공급해 주지 못할 만한 팀은 없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19][20]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는 별명이 붙는게 이상하지 않은 것.
반 바스텐은 앞서 언급된 호나우두와 같이 강력한 돌파력이나 신기에 가까운 볼 컨트롤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중전과 연계에 뛰어난 데다 킥과 슛을 할 수 있는 능력과 범위가 정말로 탁월했다. 또한 지능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스트라이커의 능력 중 하나인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움직임으로 인한 수비수 몰이에도 뛰어났다.[21] 그의 플레이는 그야말로 명료한 스트라이커의 교본과도 같은 것이어서 당대 최고의 선수면 으레 그렇듯 많은 꿈나무들을 매료시켰고 그들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이후 세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라 할 수 있는 앙리[22] 와 셰브첸코는 반 바스텐이 자신들의 우상이었음을 공공연히 밝히곤 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긴 시간 동안 부상과 싸워야만 했다. 22살 때인 1986년에 당한 발목 부상은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고, 장기 부상을 너무 많이 당했다. 선수 생명이 끝난 1992-93 시즌 그의 나이는 겨우 28살이었다. 이 시기 그는 과감히, 당시로서는 최첨단 수술로 거의 전례가 없던 연골 이식 수술을 받는 결단을 내리지만, 수술은 대실패로 끝났고 그는 커리어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23] 축구 선수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나이이고 실제로도 기량 또한 원숙해져서 마지막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면서도 괴물처럼 골을 집어넣었기에 현재의 의학 기술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평가[편집]
호나우두, 게르트 뮐러와 함께 축구사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013년, 월드 사커 매거진에서 73명의 패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진행했을 때 공격수 부문에서 5표를 받았으며[24] , 각국 언론에서 발표한 역대 축구 선수 순위에서 네덜란드 '부트발 인터내셔널' 10위, 폴란드 '다리우쉬 쿠로프스키' 10위, 영국 '포포투' 14위[25] 에 랭크되었다.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요한 크루이프는 기본 포지션이 중앙 공격수였지만 일반적인 스트라이커보단 플레이메이커형 공격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반 바스텐은 호나우두, 게르트 뮐러와 함께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손꼽히며 동시에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과 AC 밀란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힌다. 비록 호나우두가 AC 밀란을 잠시 거쳐갔다고 하나 밀란 내에서의 두 선수의 위상과 업적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 바스텐이 고평가받는 이유는 커리어가 비교적 짧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다수의 굵직한 업적들을 쌓았기 때문이다. 반 바스텐은 고작 28세에 발롱도르 3회 수상을 달성하였으나 29세가 되기 전에 부상으로 커리어를 사실상 마감했다. 체감이 잘 안 온다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9세[26] , 미셸 플라티니가 30세에 발롱도르 3회 수상을 달성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 기록을 넘어서는 것은 25세에 4회 수상을 달성한 리오넬 메시와 27세에 3회 수상한 요한 크루이프 뿐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건 없고, 발롱도르가 선수 평가의 절대기준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짧은 기간에 보여준 활약이 대단했다는 방증도 된다.
역대 최상위 반열의 스트라이커는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려운데, 반 바스텐은 특히 다른 스트라이커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vs놀이 자체가 흔하지 않은 편이다. 다만 굳이 서술을 하자면, 반 바스텐은 호나우두처럼 폭발적인 스피드와 운동 능력으로 수비진을 초토화시키는 능력을 보유하거나 뮐러처럼 엄척난 득점 감각을 보여주며 어마어마한 득점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애시당초 현역 기간 자체가 짧기에 타 선수들과의 비교에서 불리한 점도 있다.
다만, 반 바스텐은 이 선수들에게 없는 우아함을 가지고 있었다. 반 바스텐은 에우제비우나 호나우두처럼 직접 공을 몰고 질주해서 넣기보다는 타겟맨을 주로 수행해서 그렇지 그의 득점력 이외의 다른 능력 또한 충분히 훌륭하였고, 득점 자체에 있어서는 단순히 골을 넣는 것이 아니라 우아하게 득점하는 신기한 장면을 많이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위트레흐트의 백조, 그라운드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후의 별칭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반 바스텐이 축구사에 남긴 커리어는 그리 길지 못했지만, 그 짧은 시간내에 발롱도르 3회 수상[27] , 자국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 유러피언컵 2연패[28] , 리그 무패 우승[29] 까지 축구 선수로서 일생 하나 이루기 힘든 업적들을 모조리 단기간내에 이루며 임팩트를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났다는 것 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선수였던 것이다.
위에서도 몇차례 서술되지만, 반 바스텐이 이끌던 AC 밀란은 100년이 훨씬 넘는 축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팀 중 하나로 평가된다. 2007년 월드 사커 매거진 평가에 의하면, 이때의 밀란 제너레이션은 펠레의 산투스, 1960년대 알베르토 스펜서와 페드로 로차의 페냐롤, 유러피언컵 3연패를 이룬 요한 크루이프의 아약스와 프란츠 베켄바워의 바이에른 뮌헨[30] , 밥 페이즐리가 이끌던 리버풀의 붉은 제국 시절, 더 나아가 유러피언컵 5연패를 달성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를 모조리 제치고 클럽팀으로는 역대 1위, 국가대표팀을 포함하여 4위에 선정되었으며 이 최강의 클럽팀을 이끌던 에이스가 바로 반 바스텐이였던 것이다.
물론 당시의 밀란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나폴리 마냥 반 바스텐의 원맨팀은 아니었고 오렌지 삼총사를 포함하여 막강한 동료들이 함께하였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분명 반 바스텐이라는 불세출의 스트라이커가 있었고, 팀 스쿼드가 화려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낸다고 무작정 성공하거나 역대급 팀으로 칭송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은 레알 마드리드의 갈락티코스 1기 시절을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득점수가 메시, 호날두에 의해 인플레이션 된 현대 축구와 비교시 반 바스텐의 AC 밀란이 잘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재도 평론가 혹은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역대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는 펩 과르디올라의 바르사와 비견된다는 점에서 당시 밀란의 전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다만, 최강의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 이후 또다시 밀란이 새롭게 부흥하면서, 축구를 즐기는 젊은 나이대는 오히려 카카와 에르난 크레스포, 안드리 셰브첸코를 주축으로 하는 2000년대의 밀란이 더 와닿아 저평가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게르트 뮐러도 마찬가지인데, 적어도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부터 축구를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호나우두라는 전설적인 스트라이커가 강렬하게 남았고, 당시 축구판은 지금과 달리 춘추전국시대였기에 그 이전에의 축구 선수들이 대체적으로 인식 자체가 적고 평가도 박한 편이다.
결국 사람들이 기억하는 스트라이커 마르코 반 바스텐의 추억은
이상이 거의 전부인 셈이다. 그 기껏해야 4~5년 정도의 기간이 반 바스텐의 화양연화였다. 짧아도 너무 짧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했다.
그가 은퇴하던 날, 아드리아노 갈리아니 AC 밀란 부회장은 “축구계는 이제 그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잃었다”라는 한탄을 남겼다.
5.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이후 9년 만인 2004년, 유로 2004가 끝난 이후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감독으로서는 젊은 나이인 40살에 이전까지 감독 경험이 전무한 그가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으나 복병 체코를 누르고 10승 2무 무패, 유럽 예선 A조 1위로 2006 독일 월드컵 본선에 오르며 우려의 목소리를 불식시킨다. 조별리그 C조는 남미의 양대 최강 아르헨티나, 아프리카의 복병 코트디부아르, 스페인을 플레이오프로 떨어뜨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라는 죽음의 조였으나 2승 1무를 기록, 득실차로 조 2위 16강행에 성공했으며 16강에서 포르투갈에게 1-0으로 패배하며 탈락하게 된다.[31] 이때 간판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루이를 명확한 설명 없이 벤치에 앉혀 논란이 되었다.
월드컵 이후 판 바스텐은 클라스얀 휜텔라르를 축으로 로빈 반 페르시, 아르연 로벤, 라파엘 반 더 바르트 등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공격진을 꾸리려고 했다. 그러나 판니스텔루이가 소속팀에서 활약을 하건 말건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해버리며 마음을 상하게 했고 결국 2007년 1월 전격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판니스텔루이가 빠진 자리를 디르크 카윗이나 클라스얀 휜텔라르 등 다른 옵션들이 잘 메웠으면 별 말이 안나왔겠지만 현실은 시궁창... 옆 나라 유럽 최약체 중 하나인 룩셈부르크에게 체급이 걸맞지 않게 달랑 1 : 0 승리에 그쳤고 불가리아와 1 : 1 무승부, 루마니아와의 홈경기는 0 : 0 무승부에 그치면서 본선 진출조차 간당간당한 상황에 이르자 라 리가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판 니스텔루이를 복귀시키라는 네덜란드 국민들의 여론은 거세졌다. 결국 판 바스텐은 여론에 항복하며 그를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고 판니스텔루이는 에드윈 반 데 사르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바꾸어 대표팀에 복귀했다.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를 상대로 판니스텔루이는 잇따라 득점하며 네덜란드를 탈락 위기에서 구했다.
유로 2008에서도 반 바스텐은 네덜란드 대표팀을 지휘했다. 이번에도 조별리그는 죽음의 조였는데, 각각 2006 독일 월드컵 우승국, 준우승국인 이탈리아와 프랑스, 루마니아라는 역대급 죽음의 조였다.[32] 하지만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충격적으로 각각 3-0, 4-1로 완파하고 루마니아에게도 2-0으로 승리해 3전 전승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하며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오른다. 하지만 8강전에서 만난 히딩크 감독의 러시아에게 1-3 충격패를 당하며 탈락했고, 결국 대회가 끝난 후 사퇴한다.[33]
사실 반 바스텐은 네덜란드 팀의 감독을 맡는 동안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꽤나 괜찮은 평을 받았지만, 지도 성향 면에 있어서는 위계 질서[34] 와 조직력을 지나치게 중시한지라 몇몇 선수들과는 불화가 있기도 해서 네덜란드 국대 감독으로써는 그렇게까지 평판이 좋은 편은 아니다. 특히 마르크 판보멀은 이로 인해 반 바스텐과 심각한 불화를 일으키며 대표팀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판보멀 또한 한 성깔 하는 선수였던지라 불화가 일어날 만 했다.
2008-09 시즌 아약스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첼시가 카를로 안첼로티의 후임으로 반 바스텐을 생각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었다. 이후 2012년부터 2014년까지 SC 헤이렌베인을 맡았고, 2014년 AZ 알크마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9월 12일 건강문제로 자진 사퇴하였다. 선수 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심장질환으로 인한 것이라 많은 축빠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 감독직에서 물러난 반 바스텐은 AZ에 자문으로 계속 활동할 예정이다. 2015년 7월 8일 네덜란드 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2016년 9월, 사임하였다.
6. 행정가 경력[편집]
2016년부터 FIFA의 기술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2017년 1월, 오프사이드 폐지를 제안해 축구계에 충격과 공포를 몰고 왔다. 이후 여기저기서 비난이 쏟아지자 "당장 시행하자는 뜻은 아니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오프사이드는 좋은 규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해당 반칙 규정이 생긴 이유는 축구를 재미없게 만들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오히려 오프사이드가 없다면 축구가 더 흥미진진해질 것이라 확신한다. 하키도 오프사이드와 비슷한 규정을 없애고 더욱 재밌어졌다. 지루해지는 것이 아닌 공격이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자연스레 팬들의 재미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 또한 감독들 입장에선 오프사이드가 없어지면서 더 넓은 공간이 활용가능해지기에 전술 폭도 넓어질 수 있다. 재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이다"라며 오프사이드 폐지를 주장했고, 이번엔 한 술 더 떠서 "VAR 도입된 이후에도 판정에 대한 불만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정지 시간이 길어질 경우 경기 자체가 지연되는데 이는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경기 중에는 외부적인 장치보다 오직 축구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FIFA에 VAR 문제에 대해 건의를 했지만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고 VAR 폐지까지 거론하였다. 반 바스텐, "여전히 오프사이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
7. 기록[편집]
7.1. 대회 기록[편집]
- AFC 아약스 (1982~1987)
- 에레디비시: 1981-82, 1982-83, 1984-85
- KNVB 베이커: 1982-83, 1985-86, 1986-87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6-87
- AC 밀란 (1987~1995)
- 세리에 A: 1987-88, 1991-92, 1992-93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88, 1992
- 유러피언컵: 1988-89, 1989-90
- 유러피언 슈퍼컵: 1989
- 인터컨티넨탈컵: 1989, 1990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 UEFA 유로: 1988
7.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1988, 1989, 1992
- 발롱도르 드림팀 3군[35] : 2020
- FIFA 올해의 선수: 1992
- UEFA 유로 득점왕: 1988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8, 1992
- UEFA 유로 올타임 XI: 2016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8-89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83-84, 1984-85, 1985-86, 1986-87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85
- 세리에 A 득점왕: 1989-90, 1991-92
- KNVB 베이커 득점왕: 1986-87
- 유러피언 골든슈: 1985-86
- 브라보상: 1987
- FIFA 100: 2004
- 20세기 유럽팀: 1998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8, 1992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9, 1990, 1992
- 옹즈도르: 1988, 1989
- 옹즈 드 옹즈: 1987, 1988, 1989, 1991, 1992
- 엘 파이스 유럽 축구의 왕: 1992
- IFFHS 세계 최고의 선수: 1988, 1989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36] : 2021
- IFFHS 올타임 네덜란드 드림팀: 2022
- RSSSF 올해의 선수: 1992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 AC 밀란 명예의 전당
7.3. 출전 기록[편집]
8. 반 바스텐에 대한 헌사[편집]
자, 이 녀석이 바로 새로운 크루이프네.
- 요한 크루이프, 마촐라에게 반 바스텐을 소개하며
크루이프는 우리에게 마르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놀라운 선수가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을 즉시 이해했다.
- 산드로 마촐라
내가 본 최고의 선수? 반 바스텐이나 호마리우 중 하나겠지.
- 디에고 마라도나
정말 우아했지. 그는 땀조차 흘리지 않는듯 했는데 견고하기까지 했어. 양발로 골을 넣을 수 있었고 헤딩에도 능했지. 축구사에 있어 그의 족적은 너무나 분명해. 유로 1988 결승전의 골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 프랑코 바레시
난 언제나 반 바스텐이 내가 본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왔다. 그 같은 재능을 펼칠 수 있던 기간이 그렇게 짧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발롱도르를 3번이나 수상했지. 31살에 은퇴했는데 말이야.
반 바스텐은 모든 공격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조차도 그랬고 모두가 그와 닮기를 원할 정도였다.
- 조지 웨아
그는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스트라이커였다. 그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공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 마우로 타소티
현역 시절의 그와 비교될 실력을 갖춘 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로 1988에서 넣었던 그의 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골만 넣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민첩했고 1대1에 강했고 공중에서도 강했고 양발에도 능했어요. 그가 못하는 걸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 필리포 갈리
부상은 그가 커리어 최상의 폼에 있을 때 그를 갉아먹었다. 카펠로의 새롭고 회춘한 밀란의 선봉에 있었을 때 말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미 그는 역대 최고의 9번이라 평가될만한 것들을 이루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유로 1988 결승전에서 소련을 상대로 터진 그의 발리를 이야기하지만, 물론 그 골은 엄청난 골이지. 마르코는 아약스와 밀란에서는 더 멋진 골들을 득점했었다.
- 로날드 쿠만
우리는 그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줄 알고 좋아했죠.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생각해야 했어요. 반 바스텐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선수였어요. 완벽한 선수였죠.
반 바스텐은 플라티니보다도 한 수 위이다.
- 로타어 마테우스
난 절대 선수에게 10점 만점에 10점을 주지 않아. 하지만 반 바스텐이라면 9.5점은 가져야지.
반 바스텐은 내가 훈련시킨 선수 중 최고의 센터포워드였다. 그는 백조였다. 호나우두는 절대적으로 월드클래스이지만, 그 역할에서 마르코가 가장 위대했다.
축구계는 이제 그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잃었다.
- 아드리아노 갈리아니, 반 바스텐의 너무 이른 은퇴를 슬퍼하며
반 바스텐, 그 신성이란!
- 지안니 브레라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우리가 반 바스텐을 다시 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지 느껴지지 조차 않는다.
- 아리고 사키
스트라이커가 갖춰야 할 모든 자질을 갖췄고, 페널티 지역 안에서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기술을 지녔다. 수비수들에게는 악몽 같은 존재였다.
- 게오르게 하지
마르코가 뽑힌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 데니스 베르캄프, 자신의 베스트 11에 반 바스텐을 뽑으면서
80~90년대 밀란은 세계 최강의 팀이였다. 그 곳에는 파올로 말디니, 프랑코 바레시, 루드 굴리트 등과 같이 역사에서 손에 꼽힐만한 선수들이 많이 있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르코 반바스텐과는 더...
- 카를레스 푸욜
어렸을 적 나는 밀란으로의 이적을 꿈꿨었다. 그리고 반 바스텐은 밀란으로 가고 싶었던 이유였다.
- 라울 곤살레스
내가 레블뢰에서 12번을 단 이유는 그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 티에리 앙리
(1981-82 시즌 당시) 마르코는 아직 이 팀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잘 해내고 있었다. 내가 그를 언급하는 이유는 아약스와 미디어가 우리 사이에 거대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마르코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센세이셔널한 재능을 가진 멋진 남자이다. 그때 나는 마르코가 나보다 아약스에 훨씬 도움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스트라이커이다. 난 그저 열심히 뛰는 한 사람이었고, 마르코는 예술가였다.
9. 여담[편집]
- 어린 시절 타 포지션 전향 제의를 받은 적 있다고 한다. 이유는 공격수가 수비수들의 집중 견제를 받기 때문에 부상 당할 확률이 높아서 였다.[38]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 2006년 초,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의 은퇴 경기에서 AC 밀란의 레전드로 참가하여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환상적인 헤딩 골을 넣기도 하였다.
- 2006년에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베르캄프의 은퇴 경기에서 아약스의 유니폼을 입고 클래스는 영원하다를 몸소 증명하기도 했다.
- 은퇴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의 영상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자서전인 '나는 즐라탄이다'에 코치로서 등장한다. 당시 루이 판할 단장과 로날드 쿠만 감독의 코칭에 대해 언급하면서 얘기를 풀어나간다. 당시 전술에 대해 지적이 많았던 판 할 단장이 "내려와서 수비에 가담해야 한다"라고 말하자 그것에 대해 반 바스텐에게 물어보았고, 반 바스텐은 "공격에 쓸 체력을 수비에 쓸 필요는 없다"라고 하며 즐라탄을 지지해준다. 이 때문에 판 할 단장에게 대들게 되고, 서로 껄끄러워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즐라탄이 2번째 시즌에 이탈리아로 진출하고 싶다고 하자 '아직은 네덜란드에 머물러라'라고 하며 조언을 해준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선수,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80년대 최고의 선수 3위, 공격수들 중 1위에 이름을 올렸다.


10.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10.1. 나치식 인사 논란[편집]
생방송 진행 중에 다른 진행자에게 지크 하일(Sieg Heil)이라고 말한 것에 관해 논란이 일었다. 이에 그가 한 해명이 가관이었는데 본인은 네오나치가 아니고 단지 진행자의 독일어 발음을 놀리기 위해 농담으로 나치식 인사를 한 것이었다고.# 이 때문에 방송사에서 1주 동안 정직됨과 동시에 FIFA 20과 피파 온라인 4에서 선수 라이선스를 해지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화해가 잘 되었는지 지금은 다시 방송계에서 잘 활동하고 있고 FIFA 시리즈와 피파 온라인 4에서도 선수 라이선스를 재취득해 축구 게임에 잘 등장하고 있다.[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