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키 나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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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레코드대상.png
일본 레코드 대상
(日本 レコード大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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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59년)

제2회
(1960년)

제3회
(1961년)

제4회
(1962년)

미즈하라 히로시
<黒い花びら>
마츠오 가즈코
와다 히로시
마히나스타즈
<誰よりも君を愛す>
프랭크 나가이
<君恋し>
하시 유키오
요시나가 사유리
<いつでも夢を>
제5회
(1963년)

제6회
(1964년)

제7회
(1965년)

제8회
(1966년)

아즈사 미치요
<こんにちは赤ちゃん>
아오야마 가즈코
<愛と死をみつめて>
미소라 히바리
<柔>
하시 유키오
<霧氷>
제9회
(1967년)

제10회
(1968년)

제11회
(1969년)

제12회
(1970년)

잭키 요시카와
블루 코멧
<ブルー・シャトウ>
마유즈미 준
<天使の誘惑>
사가라 나오미
<いいじゃないの幸せならば>
스기와라 요이치
<今日でお別れ>
제13회
(1971년)

제14회
(1972년)

제15회
(1973년)

제16회
(1974년)

오자키 키요히코
<また逢う日まで>
치아키 나오미
<喝采>
이츠키 히로시
<夜空>
모리 신이치
<襟裳岬>
제17회
(1975년)

제18회
(1976년)

제19회
(1977년)

제20회
(1978년)

후세 아키라
<シクラメンのかほり>
미야코 하루미
<北の宿から>
사와다 켄지
<勝手にしやがれ>
핑크 레이디
<UFO>
제21회
(1979년)

제22회
(1980년)

제23회
(1981년)

제24회
(1982년)

쥬디 옹
<魅せられて>
야시로 아키
<雨の慕情>
테라오 아키라
<ルビーの指環>
호소카와 타카시
<北酒場>
제25회
(1983년)

제26회
(1984년)

제27회
(1985년)

제28회
(1986년)

호소카와 타카시
<矢切の渡し>
이츠키 히로시
<長良川艶歌>
나카모리 아키나
<ミ・アモーレ>
나카모리 아키나
<DESIRE -情熱->
제29회
(1987년)

제30회
(1988년)

제31회
(1989년)

제32회
(1990년)

콘도 마사히코
<愚か者>
히카루GENJI
<パラダイス銀河>
Wink
<淋しい熱帯魚>
호리우치 타카오
<恋唄綴り(엔카)>
B.B.QUEENS
<おどるポンポコリン(팝)>
제33회
(1991년)

제34회
(1992년)

제35회
(1993년)

제36회
(1994년)

키타지마 사부로
<北の大地(엔카)>
KAN
<愛は勝つ(팝)>
오츠키 미야코
<白い海峡(엔카)>
코메코메 클럽
<君がいるだけで(팝)>
코자이 카오리
<無言坂>
Mr.Children
<innocent world>
제37회
(1995년)

제38회
(1996년)

제39회
(1997년)

제40회
(1998년)

TRF
<Overnight Sensation
~時代はあなたに委ねてる~>
아무로 나미에
<Don't wanna cry>
아무로 나미에
<CAN YOU CELEBRATE?>
globe
<Wanna Be A Dreammaker>
제41회
(1999년)

제42회
(2000년)

제43회
(2001년)

제44회
(2002년)

GLAY
<Winter, again>
사잔 올 스타즈
<TSUNAMI>
하마사키 아유미
<Dearest>
하마사키 아유미
<Voyage>
제45회
(2003년)

제46회
(2004년)

제47회
(2005년)

제48회
(2006년)

하마사키 아유미
<No way to say>
Mr.Children
<Sign>
코다 쿠미
<Butterfly>
히카와 키요시
<一剣>
제49회
(2007년)

제50회
(2008년)

제51회
(2009년)

제52회
(2010년)

코부쿠로
<蕾>
EXILE
<Ti Amo>
EXILE
<Someday>
EXILE
<I Wish For You>
제53회
(2011년)

제54회
(2012년)

제55회
(2013년)

제56회
(2014년)

AKB48
<フライングゲット>
AKB48
<真夏のSounds good!>
EXILE
<EXILE PRIDE 〜こんな世界を愛するため〜>
三代目 J Soul Brothers from EXILE TRIBE
<R.Y.U.S.E.I.>
제57회
(2015년)

제58회
(2016년)

제59회
(2017년)

제60회
(2018년)

三代目 J Soul Brothers from EXILE TRIBE
<Unfair World>
니시노 카나
<あなたの好きなところ>
노기자카46
<インフルエンサー>
노기자카46
<シンクロニシティ>
제61회
(2019년)

제62회
(2020년)

제63회
(2021년)

제64회
(2022년)

Foorin
<パプリカ>
LiSA
<>
Da-iCE
<CITRUS>
SEKAI NO OWARI
<Habit>
제65회
(2023년)

발표 예정
<발표 예정>
※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잠시 엔카 장르와 팝 장르로 나누어 대상을 시상했다.
※ 우수 작품상 수상자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수상자가 일본레코드대상의 '대상'을 수상한다.





ちあきなおみ
치아키 나오미 | Naomi Chiaki


파일:chiaki03.jpg

본명
瀬川(せがわ 三恵子(みえこ (세가와 미에코)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출생
1947년 9월 17일 (76세)
일본 가나가와현
신체
162cm
직업
가수
학력
신주쿠 구립 오오쿠보 중학교
데뷔
1969년 6월 「雨に濡れた慕情」
활동시기
1969년 ~ 1992년
레이블
일본 컬럼비아 (1969년 ~ 1978년)
CBS 소니 (1980년 ~ 1981년)[1]
빅터 인비테이션 (1981년 ~ 1988년)[2]
테이치쿠 (1988년 ~ 1992년)[3]
서명
파일:치아키 나오미 서명.png[4]

1. 개요
2. 약력
3. 결혼 후
4. 활동 중단



1. 개요[편집]


일본의 가수이다.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지만 도쿄도 이타바시구에서 성장했다.

2. 약력[편집]


파일:DXWNWEgU8AALNRF.jpg
파일:DXWNasCV4AAbrV5.jpg
5세 당시 모습
13세 당시 모습
3자매의 막내로 태어나 예능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4세에서 탭댄스를 배우고 5살 때 일본극장에서 첫 무대를 밟았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하고, 4살 때부터 미군캠프를 돌며 재즈를 노래. 초등학교 2학년 때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에 이사하고 후지사와 시립초등학교를 졸업 후지사와 시립중학교에 진학한다. 중학교 3학년때 전학 신주쿠 구립 오오쿠보 중학교(현: 신주쿠 구립 신주쿠 중학교)에 다시 전학. 데뷔 전에는 다리 유키오와 코마도리 자매의 오프닝 가수를 역임했다.

일본 컬럼비아 오디션을 보다가 작곡가 스즈키 준의 도움으로 1년 4개월 레슨을 받았고 1969년 21세 때 비에 젖은 모정으로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 당시의 캐치프레이즈는 "성이 없어서 이름이 2개" "매혹의 허스키보인". 예명은 당시의 후지 TV의 프로듀서 치아키 요시오의 성을 치아키라고 읽게 하고 사카모토 료마의 사위(본명)의 직유에서 나오미라고 하였다.

1970년 네 가지 부탁과 X+Y=LOVE가 히트하면서 인기 가수가 된다. 같은 해, "네 가지 부탁"으로 "제21회 NHK 홍백가합전"에 첫 출장, 이후 1977년의 제28회까지 8회 연속 출장했다.

네 가지 부탁이나 X+Y=LOVE 때는 소위 색기 아이돌 노선에서 활약했다. 원조 몰래 카메라 콩트 55호 막후 프로그램을 날려라 등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해 가수이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일도 해냈다.

1972년, 대표곡이 되는 "갈채"가 제14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해, 그 해 연말부터 다음 해에 걸쳐 오리콘 집계로 80만매를 매상하는 대히트를 친다. 이 곡은 당시 치아키의 실체험을 바탕으로 작사되었다고 하는 선전으로 프로모션되었지만, 실은 완전한 픽션이었다. 실제로는 전좌가수 시절에 형과 같이 따르던 젊은 배우가 급사한 체험을 가져, 그것과 가사의 내용이 우연히 비슷했기 때문에 "실체험"으로 하는 것으로 프로모션에 활용한다고 하는 전략을 취했다고 한다. 갈채, 극장, 야간비행등의 악곡은 가사 설정이나 내용으로 볼 때 드라마틱 가요로 통했다.

레코드대상 수상 후에도 1973년 야간비행, 1974년 원무곡 등의 팝계 히트곡을 발표하는 한편 엔카에서는 후나무라 엔카라면 해보고 싶다고 1975년 다이센, 1976년 사카바가와, 야키리의 나룻배(술집 강의 B면곡으로 발표), 1988년에는 홍잠자리 등의 작곡가 후나무라 토오루의 작품을 많이 불렀다.

또한 뉴뮤직 아티스트로부터 악곡을 제공받아 1977년에 나카지마 미유키의 "루즈", 도모카와 가즈키의 "밤으로 서두르는 사람", 1978년에 가와시마 에이고의 "아마그모", 1988년에는 아스카 료의 "전해집니까" 등을 레코딩했다. "밤으로 서두르는 사람"은 " 제28회 NHK 홍백가합전"에서도 불려져 홍백의 무대에서의 치아키의 귀기 넘치는 퍼포먼스가 시청자의 간담을 누르고, 백팀사회의 야마카와 시즈오는 "정말 기분나쁜 노래입니다야~"라고 발언하는 등, 화제가 되었다. 또한 1980년대 전반에는 앨범 <각 테이블>에서 샹송, <THREE HUNDRED CLUB>에서는 스탠다드 재즈, 그리고 포르투갈 민요의 화드를 부른 앨범 <대몽>을 발표하였으며, 양악 커버·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1976년 2월, 텔레비전 드라마 "대도시 투쟁의 나날"의 제8화로서 "내가 사랑한 치아키 나오미"(극본 쿠라모토 츠토무, 감독 무라카와 토오루)라고 하는 서브 타이틀의 작품이 방영되었다.실존하는 현역 가수가 부제에 피처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며, 치아키의 대표곡 "갈채"가 드라마 내용과 깊이 관계되어 있는 것이었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의 출연도 계속해 연예 프로그램에서는 미소라 히바리의 흉내를 본인 앞에서 피로해 종달새의 폭소를 자아내거나 "킨짱의 쿵과 해보자!"에서는 하기모토 킨이치와 시청자로부터의 엽서에 의한 콩트를 연기하는 등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3. 결혼 후[편집]


파일:enn1907110001-p1.jpg
남편과의 모습
1973년 원조 몰래카메라와 드라마 빙글빙글 등에서 함께 출연해 교류가 있었던 배우 시호가 치아키에게 친동생인 배우 고우센치를 소개, 1978년 결혼했다. 그 남편은 배우를 은퇴. 치아키의 개인 사무소를 설립해, 고우가 사장 겸 매니저, 프로듀서가 되었다. 치아키는 "히트곡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에 차분히 임하고 싶다"라고 잠시의 "충전 기간"에 들어가, 이후 가수로서의 텔레비전 출연의 기회가 줄어 들었지만, 레코딩은 마이페이스이면서도 전력적으로 실시했다. 고우는 부부의 생활의 기반으로서 히로오에 순수 찻집 "COREDO"를 개점. 고우가 커피를 타는 찻집은 업계인의 집합소가 되어, 치아키도 충전 기간에는 가게를 돕기도 했다. 1980년에는 영화 코끼리 이야기 주제가인 아프리카 테마 바람의 대지의 자장가/아프리칸 나이트를 레코딩, 동 영화의 산트라반에도 수록되었다. 1981년 10월 빅터로부터 샹송을 부른 앨범 각각의 테이블이 발매되었다. 같은 해 11월 4일 신주쿠 루이드에서 약 3년 만에 무대에 섰고, 옛날 레퍼토리는 한 곡도 부르지 않고 모두 샹송을 불렀다. 또한 최근에는 여배우로서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1982년, 1976년에 발매된 싱글 "사카바가와"의 B면에 수록되어 있던 "야키리의 나룻배"가 우메자와 후미오의 무용 연희로 이용되어 화제가 되어, 일본 컬럼비아로부터 싱글 A면으로 재발매되었다. 그러나, 치아키가 당시 빅터에게 이적하고 있던 것이나, 치아키 당시의 활동 방침등에서 다음해 1983년 2월에 호소카와 타카시반이 발매되었을 때에 폐반이 되었다. 이후 호소카와반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제25회 일본 레코드 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유선차트에서는 치아키반이 1위를 독주했고 작곡자 후나무라 토오루도 과연 좋은 점을 찍지 말라고 생각했다. 다만 노래하는 모습이 거의 짐작도 안 간다. 미성이지만 호소카와군의 창법은 단조로워서 치아키군은 관상용. 세부까지 제대로 들려주는 노래니까. 솔직히 말하면 호소카와반은, 악곡의 어려운 부분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뭐야, 이것이라면 나도 부를 수 있지"라고 세상에 생각하게 하는 창법이었다.

1983년 빅터 시절 유일한 싱글 Again이 발매됐다. 그 해 화드를 담은 앨범 대몽도 발매됐다.

4. 활동 중단[편집]


1992년 9월 11일에 남편이 사고로 죽었다. 남편이 화장을 할 때, 치아키는 관에 매달리면서 "나도 함께 태워 줘"라며 목 놓아 통곡했다고 한다.

그 며칠 후 치아키는 "고인의 강한 희망으로 여러분께 말씀 드리지 않고 가족끼리만 보냈었습니다. 남편의 죽음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기엔 아직 당분간 시간이 필요할까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라는 서면의 코멘트를 공표. 이를 마지막으로 치아키는 가수업을 포함한 전면적인 연예 활동을 완전히 정지했다. 이후 정식 은퇴 선언이 나오지 않고 공개 석상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 매스컴의 취재에도 일절 응하지 않고 아직도 침묵을 지키는 상황이다.

무덤이 있는 도쿄 도심부 사찰 근처의 아파트에 살고 있어 추석, 춘분, 월 기일에는 향 성묘를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5. 홍백가합전[편집]



{{{#000000 1971년 제 22 회 홍백가합전 - 나란 여자 私という女
}}}


{{{#000000 1972년 제 23 회 홍백가합전 - 갈채 喝采[5]
}}}


{{{#000000 1973년 제 24 회 홍백가합전 - 야간 비행 夜間飛行
}}}


{{{#000000 1974년 제 25 회 홍백가합전 - 슬픔의 기미 かなしみ模様
}}}


{{{#000000 1975년 제 26 회 홍백가합전 - 운명의 강 さだめ川
}}}


{{{#000000 1976년 제 27 회 홍백가합전 - 주점의 강 酒場川
}}}


{{{#000000 1988년 제 49 회 홍백가합전 - 고추 잠자리 紅とん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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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2] 현재는 JVC 켄우드 빅터 엔터테인먼트[3] 백지영을 일본에 데뷔시킨 그 엔터테인먼트.쇼치쿠 산하[4]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만들었다.[5] 일본 레코드대상 대상 수상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