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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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관련된 문서는 틀:공산주의 참고
파일:낫과 망치.svg 공산주의 · 파일:마르크스 투명.svg 마르크스주의





1. 개요
2. 초반
3. 혁명 운동
3.1. 프로이센
3.2. 망명
3.3. 공산주의 태동
3.4. 1848년 혁명
4. 저술 활동
4.1. 신문 기고
4.2. 정치경제학 관련 서적
4.3. 자본론
5. 혁명운동과 인터내셔널
6. 제1인터내셔널 성립
6.1. 노선 갈등 및 이론 투쟁
7. 사회 운동
8. 사망
9. 일화
10.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



1. 개요[편집]


카를 마르크스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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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마르크스
마르크스 생가

만일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활동한다면, 그는 유명한 학자나 위대한 현자, 또는 탁월한 문학가일 수는 있으나 결코 완전한 인간,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일 수는 없다. (중략) 온 힘을 다해 인류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우리를 굴복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초라하고 제한된, 이기적인 기쁨을 향유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수백만 명의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나지움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 (1835) 번역


"자네는 가장 위대한, 아마도 현존하는 유일한 진짜 철학자를 만나게 될 테니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네. (중략) 나의 숭배 대상인 마르크스 박사는 중세 종교와 정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게 될 아직 대단히 젊은 사람(기껏해야 24살 정도)이라네. 그는 심오한 철학적 위엄과 날카로운 재기를 겸비하고 있다네. 루소볼테르, 홀바흐, 레싱, 하이네, 헤겔이 이 한 사람에게 통합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게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있다고 말했네. 자네도 마르크스 박사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느낄 걸세."

청년 헤겔학파 모제스 헤스(Moses Hess)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1841) 中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트리어[1] 브뤼교로 644번지 이층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 집안 출신[2]으로 당시 프로이센 내 유대인 차별 경향 때문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에 루터교회로 개종한 이력이 있는 변호사였으며 자유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자유주의적 사고를 많이 물려받았고, 특히 아버지가 17~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장 자크 루소, 볼테르)에 관심이 있어서 그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또한 유대인 집안이었으나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으며, 루터교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편 그는 모계를 통해서 필립스와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1830년 트리에에 위치한 김나지움에 입학했으며 라틴어, 희랍어, 작문, 수학 등에서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 또한 자유주의 성향의 스승들을 만나며 봉건주의와 전제정에 대한 반감을 키워갔다. 또한 사회개혁의 의지도 있어서 1835년 졸업 논문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을 써서 "인류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김나지움 졸업 이후 마르크스는 법학 공부를 바라는 아버지에 뜻에 따라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본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거기서 그는 법학에 열심히 몰두했지만 곧 종교, 철학, 문학, 거기에 술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탓에[3] 아버지는 그를 베를린 대학교[4] 법학과로 전학시켰다.

베를린에서 마르크스는 법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 공부에도 계속 열을 올렸다. 특히 베를린 대학교는 헤겔이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했던 곳이라 헤겔주의가 성행했다. 비록 마르크스가 다니던 시절은 헤겔이 사망한 후였으나 헤겔의 제자들이 아직 베를린대에 남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헤겔의 제자들은 헤겔 우파와 헤겔 좌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헤겔 좌파들과 주로 어울리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38년 20살이 된 해 학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마르크스는 법학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이제 그는 철학에 완전히 몰두했으며 1839년부터 철학사 연구를 시작해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비록 급진 헤겔 철학을 공부했지만 정작 연구 대상은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였다. 그렇게 1841년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Über die Differenz der domokritischen und epikureishen Naturphilosophie)>[5][6]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베를린대에서는 박사 논문을 내 봤자 학위를 안 줄 것이라 생각하여 당시 학위 논문 심사가 빠르고 프로이센 정부의 입김이 덜 닿는 예나 대학교[7]에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해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3. 혁명 운동[편집]



3.1. 프로이센[편집]


검열의 근본적인 치료법은 검열의 폐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저열한 것이기 때문이다.'

-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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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arl-marx-friedrich-engels-en-la-imprenta-de-la-rheinische-zeitung-colonia-museo-marx-engels-moscc3ba-e29c86-e-chapiro-c2a9-c3b1c3a1ngara-marx1.jpg
라인신문 (Rheinische Zeitung)
라인신문을 발행하는 마르크스(가운데)와 엥겔스(오른쪽)

베를린 대학 졸업 뒤 마르크스는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강연을 하며 살려고 했었지만 이는 곧 좌절됐다. 당시 대학에서는 프로이센 정부의 압력으로 헤겔 좌파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베를린대는 수도에 있어 탄압의 영향이 강력했다. 그러다보니 베를린대에 남아있던 마르크스의 스승인 헤겔의 제자출신 학장 브루노 바우어 교수가 해임된다. 이때문에 마르크스는 교수가 되려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결코 얌전한 학생이 아니었고 '청년헤겔주의자당 사건'에 연루되는 등, 당대 자유주의 운동에 깊이 공감하여 매우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인, 말하자면 당대의 '학생 운동권'에 속했으니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강사의 꿈이 좌절되자 그는 점차 정치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였다. 그 시작이 프로이센의 검열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 제도에 대한 견해>(1842)였다. 참고로 이 기사는 프로이센 검열당국의 탄압으로 1년 동안 출판되지 못하다가 1843년에야 스위스에서 출판될 수 있었다.

1842년부터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인 라인신문[8]의 기고가로 일했다. 그는 독일의 현 정치에 대한 기사들을 썼으며 이는 큰 반향을 낳았다. 곧 그는 신문 편집장[9]으로 일하게 되었다.[10] 편집장이 되면서 라인신문은 기고가의 범위를 늘렸으며, 라인 지역을 넘어서 프로이센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이때의 프로이센은 봉건주의적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막 산업사회로 넘어가던 때였기에 봉건주의와 자유주의와의 충돌이 두드러지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문은 마르크스의 편집 아래 혁명적, 민주주의적 색채를 분명히 했으며 사회의 현실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쏟아냈다. 마르크스는 신문에서 검열과 정부당국의 탄압을 규탄했으며, 프로이센 내의 봉건체제를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사회적 약자들과 민중의 권익을 지지하는 활동도 펼쳤다. 예를 들어 여태까지 농노들에게 전통적으로[11] 묵인해오던 나뭇가지 줍기(즉 장작)를 금지하는 삼림도벌법을 통과시키자, 그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 외에도 부르주아지들의 우유부단함과 반동적 낭만주의에 단호히 맞서며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을 외쳤다.

이런 투쟁 속에서 라인신문은 1842년 1월 정기 구독자 400명의 작은 신문에서 1년 만에 3400여 부를 찍는 대형 신문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과 검열은 계속되었다. 일반 검열관은 물론이고 주 장관까지 검열을 시행하는 이중 검열을 받아야 했으며, 신문이 제대로 발행되지 못한는 일이 빈번했다. 프로이센 당국은 라인신문을 매우 위험하게 바라봤고[12] 마르크스가 계속 저항하자 이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그러던 중 라인신문이 일련의 사설에서 러시아를 신랄히 공격하는 일이 있자,[13]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이 맹렬한 탄핵문들이 실린 신문 한 부를 우연히 보고는 깜짝 놀라 프로이센 대사에게 노여움을 표시했다. 이를 기회로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힘이 강한 러시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1843년 4월, 결국 라인신문은 폐간되었고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라인 신문에서 보낸 1년 동안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정부들에게 거침없이 비판을 하는 탁월한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게다가 이 시기 그의 평생 동지가 되어 줄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만났다.[14]

폐간 이후 크로이츠나흐로 향한 마르크스는 귀족 집안 출신의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기로 했다.[15] 예니의 집안은 극심하게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베를린대에서 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출신성분도 좋고 학구적 가풍까지 여러 모로 좋은 집안의 딸이 왜 하필 사회에 불만 많은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적인 마르크스의 풍모에 반한 예니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1843년 6월 결혼을 강행했다. 신혼 생활을 하면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라는 원고를 틈틈히 썼고, 헤겔의 사상에 대해 재고하며 그의 관념론적 사상을 비판하였다. 또한 이 와중에도 혁명운동을 위한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3.2. 망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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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불연보.jpg
파리의 카페에서 토론하고 있는 마르크스
독불연보

모든 혁명은 낡은 사회를 해체시킨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사회적이다.
모든 혁명은 낡은 권력을 전복시킨다. 그런 한에서 혁명은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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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의 메모 中


"마르크스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의지가 굳세며 흔들림 없는 사람이다. 그는 확신을 품고 있는 인물형에 속했다.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검었으며 손에는 털이 무성하게 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구불구불하게 단추가 달려 있는 프록코트였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풍모가 있었다. 그의 행동거지는 굼뜨기는 했지만 자신에 차 있었다. 그는 사교상의 관례적인 예의범절을 무시했다. 그의 태도는 오만했으며 거의 남을 깔보는 듯했다. (중략) 그의 거친 목소리는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어서 그들의 존재 법칙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굳은 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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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자유주의 문인 폴 안넨코프(Paul Annenkov)의 마르크스 평가


라인신문 폐간과 결혼을 거치고 1843년 10월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망명하기 전부터 프랑스와 독일의 혁명가들 간의 교류를 꿈꾸고 있었고, 그들의 협력을 모아 1844년 <독불 연보>를 발행했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여러 기고자들의 논문과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독불 연보는 계속 발행될 수가 없었는데, 당시 마르크스를 돕고 있던 아르놀트 루게(Arnold Ruge)와의 갈등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루게는 청년 헤겔파 출신으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적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혁명성이 과격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둘은 결별하고 말았다.[16] 대신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다시 만나 둘의 우정의 초석을 쌓았다.

<독불연보>는 비록 실패했지만 마르크스는 다시 혁명가들과 함께 <전진!>이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했다. 마르크스는 잡지에서 슐레지엔 지방 방직공들의 봉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프로이센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지지하였다. 또한 자신과 결별한 루게를 비롯한 부르주아 사상가들과도 대립하였다. 이런 활동은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획득에 대한 필요성을 마르크스에게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다가 잡지를 준비하면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짐에 따라 둘은 정기적인 서신 교환과 만남을 시작했다. 둘의 교류는 계속 이어져 1844년 말 헤겔 청년파를 겨냥하여[17] 비판하는 <신성가족>(1848)을 공동으로 저작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며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을 철저하게 비판했다.

한편 파리에 망명한 동안 마르크스는 많은 철학자, 혁명가, 사상가들을 만났다. 당시 파리는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 이끄는 프루동주의, 샤를 푸리에를 포함하여 이상주의자들의 사상을 따르는 공상적 사회주의,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주장한 블랑키주의, 미하일 바쿠닌이 말하는 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혁명적 사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상가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자유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되었다. 또한 '의인동맹'[18]이라는 독일의 혁명적 클럽과도 관계를 맺었고, 문학가들과도 접촉하면서 이들의 문학에 혁명성을 띄게 영향을 미쳤다.[19] 또한 연구 활동도 계속하여 프랑스 혁명 당시의 지롱드파자코뱅파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아담 스미스데이비드 리카도를 비롯한 고전학파 경제학에 대한 공부도 했다. 이때의 경제학 연구 성과는 <1844년 경제 철학 수고>(1844)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20]

하지만 파리에서의 활동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의 잡지 <전진!>이 곧 정부와 반동적 언론으로부터 광범위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곧 프로이센 정부도 마르크스를 노렸다. 1844년 7월 프로이센 대사는 <전진!>이 프로이센 국왕의 시해를 설파한다면서[21] 프랑스 정부에 정식으로 고발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세금을 빌미로 탄압에 들어갔고 잡지가 이를 교묘히 빠져 나가려고 하자 마르크스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에게 추방을 선고했다. 프로이센의 요구에 밀린 프랑스의 이같은 조치는 프랑스 지성계에 큰 항의를 가져와 일부는 추방령이 해제되었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추방 대상으로 남아야 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5년 2월 벨기에 브뤼셀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였다.

비록 프로이센 정부가 벨기에 정부에게 그를 추방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마르크스는 시국에 대해 아무것도 발행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계속 체류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마르크스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자 했다. 비록 프랑스에서 추방당했음에도 파리의 혁명가들과의 서신 교류는 계속 되었으며,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전역의 혁명가와 진보적 인사들이 그를 계속 찾아와 주었다. 거기에 더불어 엥겔스가 브뤼셀까지 따라와 자신과 합류하면서 마르크스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22]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연구도 시행했으며, 동시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론 또한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물론을 전수해 준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철학 저서를 집필하였다. 그것이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845)이다. 이 책은 비록 다섯 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소책자지만 마르크스의 주요 철학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3.3. 공산주의 태동[편집]



파일:marx-engels.jpg

파일: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mmunist-manifesto.png

<공산당 선언> 집필을 하고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23]
공산당 선언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제11번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이후, 마르크스는 동시대 독일 철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철학 이론을 담은 저서를 발행하고자 했다. 그는 엥겔스와 함께 1845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24] 집필을 시작하여 1년만인 1846년에 완료하였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훗날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기초를 닦았다. 기존 독일 철학에 만연하던 헤겔 철학의 관념성과 비과학성을 비판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철학을 새로이 세웠다. 또 과학적 이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역사에 유물론을 적용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순환적 상호작용이 역사 발전의 동력이 된다고 봤다.

이후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피력했던 경제학적 사상을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에서 보다 구체화시켰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주요 생산단계인 단순 협업, 매뉴팩처, 공장제 기계공업의 개요를 훌륭히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노동의 분업과 기계제 생산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데, 혁명적 측면들을 강조한다. 즉 자본주의적 공장의 노동조건은 분명 인간적인 것은 아니지만 산업발전에서 필연적인 단계이며, 생산의 발전과 집중에 크게 촉진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현대적 노동계급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혁명운동을 위한 실천적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겼고 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그 정당은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를 결집시킬 수 있도록 국제주의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망명지 브뤼셀에서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타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락과 연대를 지향했다. 또한 독일의 혁명적 클럽 의인동맹이 점차 과학적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이며 마르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정식으로 의인동맹에 가입하였다. 이후 의인동맹은 1847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같은 해 독일의 망명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 동맹의 도움으로 독일 노동자 협회를 결성하였다.

이런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곧 다른 혁명가나 사상가들과 충돌했다. 브뤼셀 공산주의 연락 위원회 때에는 사회주의자 빌헬름 바이틀링과 공산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혁명 참여를 놓고 대립했다. 바이틀링은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에 큰 기여를 했지만 정작 노동자 계급의 혁명에 대해 줄곧 회의적인 입장을 취해 왔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바이틀링에 대해 마르크스는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라고 일갈했고 그렇게 둘은 결별했다. 아나키스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과도 견해 차이가 두드러졌다. 처음에 마르크스와 프루동은 서로를 좋게 여겼으나 프루동의 개혁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소시민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한 이상론이었다. 프루동이 1846년 <빈곤의 철학>을 쓰자, 마르크스는 프루동주의를 비판하고 자신의 철학관과 경제관을 다룬 <철학의 빈곤>(1847)을 집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공산주의자 동맹의 기관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1847년 말부터는 사회주의 신문 <브뤼셀 독일어 신문>을 장악하여 1848년 2월까지 비공식적 기관지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주관하는 국제 자유 무역 회의에 참가했지만 회의 주최자들의 독단적 진행으로 발언을 하지 못하자 언론을 통해 크게 비난했다. 이때 그가 작성한 기사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자 계급의 혁명을 통한 사회 질서 전체의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세력과 민주주의 세력의 규합에서 힘써서 1847년 11월 '브뤼셀 민주주의회'를 발족시켰다. 공산주의자 동맹도 성장하여 노동자 정당을 위한 대회를 개최하였고 각지의 내로라하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원리를 정리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미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회에서 문답 형식의 글을 써서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부족한 편이었다. 엥겔스는 문답 형식을 버리고 선언의 형식으로 공산주의의 신조에 대해 논해보자고 제안했고 마르크스는 이에 동의했다. 마침 1847년 11월의 대회에서 참가자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마르크스가 강령 작성을 위탁 받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선언 집필을 시작했다. 1847년 말부터 시작된 집필은 1848년 초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의 강령을 담은 <공산당 선언>(1848)이 출판됐다.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옹호했으며 그 전위로서 공산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3.4. 1848년 혁명[편집]


이제 안녕, 이제 안녕, 너 투쟁하는 세계여,

이제 안녕, 너희들 격투하는 군대여!

이제 안녕, 너 포연으로 그을린 전장이여,

이제 안녕, 너희들 칼과 창이여!

이제 안녕 - 허나 영원히 이별은 아니지!

정신이 파멸되지 않았으니, 형제들!

이제 곧 떨치고 일어나,

전열을 가다듬어 돌아가리!

(...)

말로, 칼로, 도나우 강가에서, 라인 강가에서-

언제나 신성한 동반자는

왕자를 파괴하는 군대가 되리

파문당한 자, 반란자!

-

<신라인신문> 폐간호에 실린 시


공산당 선언이 집필된 1848년은 유럽에 있어서 혁명의 해였다. 그 해 2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 2월 혁명이 발생하여 루이 필리프가 폐위되고 공화정이 선포됐다. 또한 3월에는 독일에서도 혁명의 바람이 몰아쳐 메테르니히가 실각해 빈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외에도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마르크스는 이 일련의 혁명들에 열광하였고, 특히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역할을 중요하게 바라봤다. 그는 유럽의 여러 혁명 조직을 모아 민중의 비조직성을 극복하려고 했으며 조직 간의 통일 또한 도모하였다. 또한 이 시기 혁명을 겪은 프랑스가 보다 관대한 태도를 취함과 동시에 벨기에가 브뤼셀을 떠날 것을 명령하면서 마르크스는 파리로 되돌아 왔다. 파리에 돌아온 후에는 공산주의자 동맹의 새로운 중앙위원회 창설에 착수하며 독일의 혁명가들과 접촉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1848년 5월 조국으로 향했다. 그는 쾰른에서 주거 허가를 받아 그곳에 거주하며 혁명운동에 동참했다. 1848년 6월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뒤를 잇는 <신라인신문>을 발행하였다. 민주주의 기관지라는 부제를 단 이 신문에서 마르크스는 편집장이 되어 1848년에 발생한 유럽 전역의 혁명들을 상세히 보도하고 분석했다. 또한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민족해방 운동을 지지했으며 그 안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입장을 반영하였다.[25] 특히 독일 혁명에 있어서 그것이 지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정신조차도 아직 완전히 성취하지 못했다며 혁명을 두려워하는 수구 세력과 타협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반동 부르주아지를 비난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민중이 새로운 혁명적 권력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량주의적 자세를 보이는 공산주의자 동맹 내 분파들을 공격하며 혁명의 투쟁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기운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꺼져갔다. 그해 6월 파리에서는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봉기가 있었지만 부르주아 공화정에게 패배했고, 10월에는 에서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변혁명 세력은 혁명 세력에 대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어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이 탄압을 받았다. 이에 맞서 마르크스와 <신라인신문>은 대중 집회, 반정부적 논조, 납세 거부 등으로 맞섰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계엄령, 체포, 신문 정간, 고발 등의 갖가지 방법으로 언론 탄압을 일삼았다.[26] 그럼에도 <신라인신문>은 자신의 혁명적 논조를 포기하지 않으며 독일의 혁명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849년 5월에 들어서자 독일 남부 지역의 여러 도시에서 혁명 세력의 봉기가 발생했다. <신라인신문>은 혁명 세력을 응원하며 봉기를 진압하려는 프로이센 당국의 야만적 처사를 낱낱이 폭로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프로이센 정부는 일련의 봉기들이 진압되고 나자 <신라인신문>을 폐간하려고 들었다. 앞서 1845년 12월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했던 마르크스는 당국으로부터 24시간 내에 프로이센을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엥겔스[27]를 비롯한 그의 동지와 조력자들도 기소되거나 추방 명령을 받았다. 이에 마르크스는 정부가 강제로 폐간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끝내버리자며 1849년 5월 19일 <신라인신문> 마지막 호를 발행했다. 폐간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하는 계급의 해방!"이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노동자들에게 전했으며, 페르디난드 프라일리그라트라는 시인의 고별시를 붉은 잉크로 인쇄하였다.

<신라인신문> 폐간 이후 마르크스는 쾰른을 떠나 독일 남서부를 떠돌다가[28] 빙겐에서 엥겔스와 헤어져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파리에서의 승리가 유럽에서의 혁명 승리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래서 그곳의 비밀 조직들과 접촉했지만 이들의 6월 중순에 일으킨 봉기는 실패했다. 프랑스 정부는 대탄압에 들어갔고 마르크스는 8월 23일 24시간 내에 파리를 떠나 브르타뉴로 향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다. 결국 마르크스는 1849년 8월 24일 임신 중이었던 부인과 자녀들을 파리에 남기고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4. 저술 활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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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의 마르크스 가족과 엥겔스
중장년의 마르크스

1848년 2월과 3월에 걸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혁명이 발발(1848년 혁명)하였으나 늦어도 가을 쯤에는 모두 진압되고 만다. 혁명의 좌절에 실망한 마르크스는 1849년 독일 쾰른에서 추방되어[29]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다. 그렇지만 밑천을 까먹은 채로 추방당해서인지 이전까지 풍족하게 살았던 마르크스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게 되었다. 신문 기고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펼쳤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웠다. 런던에 살면서 낙후된 주택에서 주거하고 그 자신도 질병에 시달리는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결국 자식 6명 가운데 3명이 죽는 비참한 경험을 하고 만다.[30] 이후 경제적 어려움은 엥겔스의 지원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상황의 변화[31]를 통해 겨우 개선되었다. 그렇게 마르크스는 런던 중심부에 있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34년 동안 거주하며 지속적인 저술 활동을 펼쳤다.


4.1. 신문 기고[편집]


당시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신문사[32]이자 공화당 지지 성향의 진보 매체인[33]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런던 특파원으로 취직하면서 벌어먹는 돈으로 그런대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고, 미국에서도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다만 이때 벌어들인 수입은 단순히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지[34] 잘먹고 잘살았다는 얘기는 아니기는 했다. 이때 마르크스는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기에 대영도서관에서 영국과 유럽 각지의 신문들을 살펴보면서 유럽에서 벌어지는 주요 소식에 대한 칼럼을 썼고, 때때로 미국 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기사를 작성했다.

남북전쟁이나 아편전쟁에 대해서 서술한 마르크스의 글도 이 시기에 작성된 것이었으며 현대 기준에서 보았을 때 현장성이나 객관성은 부족한 편이지만[35] 그럼에도 마르크스 자신이 가지고 있던 풍부한 역사적인 지식과 경제적인 지식, 엥겔스가 가지고 있는 군사학적인 지식 등을 백분 활용하면서 칼럼과 기사를 작성했기에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36] 여하튼 미국 신문 특파원을 지냈던 인물이었기에 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매카시즘 광풍이나 미국과 소련이 대립한 냉전시기 모습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하다.[37] 당시 마르크스는 남북전쟁에 있어서 당연히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링컨 대통령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이념을 위해 싸운다고 말할 때, 링컨은 이념을 위해 전쟁을 벌이면서도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라면서 호평했다. 이후로 특파원 일을 때려친 이후로도 링컨과 여러 번 서신 교환을 하면서 노예해방선언과 재선 당시에 축하편지를 내보냈다. 물론 링컨의 모든 면모를 다 호평한 건 아니고 무덤덤한 어법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좀 불만을 가지기는 했다. 사실 냉전기 때의 일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이 당시에는 마르크스가 미국 식자층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물이었던 데다가 링컨이 보호무역론자였던 면도 있었다. 즉, 21세기 기준에서 이상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당대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마르크스와 링컨이 사상 면에서 통하는 면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공화당이 보수주의 정당이 아니라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인식되었을 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뉴욕 트리뷴 지가 1857년 경제 공황과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재정이 흔들거리기 시작하면서 유럽 특파원들을 잇따라 해고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저명한 칼럼니스트였기 때문에 짤리지는 않았지만 마르크스의 입지는 좁아졌고, 결국 1862년에 뉴욕 트리뷴지와의 관계도 끝났다.


4.2. 정치경제학 관련 서적[편집]


여하튼 이때 기사 작성 등의 이유로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혀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한 흔적이 담겨있는 노트 등이 여전히 유품으로 남아있다. 이때 매일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써낸 게 '정치경제학 요강', '정치경제학 비판', '잉여가치론' 등.[38] 영국 체류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중 특히 중요한 인물들에는 그의 맹우 엥겔스 이외에도 카를 카우츠키, 폴 라파르그 등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중요 사상가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르크스와 이들의 활동은 훗날에 세계 최초의 국제노동자연대 운동으로 발전할 "인터내셔널"을 낳게 된다.


4.3. 자본론[편집]


당시 전유럽에 퍼진 산업혁명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정치, 경제적 현실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1867년 자본론을 내놓아 이후 100년도 넘는 오랜 시간 두고두고 떡밥이 될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화두로 던졌다.


5. 혁명운동과 인터내셔널[편집]



6. 제1인터내셔널 성립[편집]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유럽 전역에는 산업혁명의 물결이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과 사회주의 이념 역시 점차 발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의 성장은 여전히 미약한 상황이어서 기껏해야 같은 직종에 국한되고 있는 판국이었다. 또한 어렵사리 파업과 같은 계급 투쟁 운동이 성사된 경우에도, 자본가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쉽사리 어려움을 극복하곤 하였다. 이에 따라 보다 효율적인 계급투쟁을 위하여 국제적인 단위의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1863년 1월 발생한 폴란드의 독립 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명분으로 같은 해 7월 영국 런던에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회합을 갖는다. 칼 마르크스에서 부터 오언주의자, 프루동주의자, 블랑키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파의 좌파 세력이 모인 이 회합을 통하여 마침내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가 탄생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 앞글자를 따서 인터내셔널이라 부른다.

제1차 인터내셔널(1864-1876)은 마르크스 생전에 이루어진 만큼 마르크스가 직접 창립선언을 비롯한 주요 문서를 작성하였다. 1872년까지 6차례 대회를 열며 노동,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 민족 자결주의 지지등 계급주의 투쟁의 기본방향이 정립되었다. 하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등장을 목도한 유럽의 각국들은 공산주의 체제의 등장에 대해 진지하게 공포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탄압을 실시하였다. 마르크스 본인도 인터내셔널 내부 좌파집단의 헤게모니 충돌, 기존 정치세력의 탄압등으로 초창기만큼의 열정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여러 좌파세력이 충돌하며 후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탄압 등 여려 요인으로 인해 1876년 1차 인터내셔널은 해체되고 만다.


6.1. 노선 갈등 및 이론 투쟁[편집]


독일사회주의노동당[39]을 결성하면서 채택한 1875년의 고타 강령에 대해 마르크스는 통렬히 비판하였다.

고타 강령은 독일노동동맹 소속의 페르디난트 라살[40]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작성되어 1891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이 성립될 때까지 당의 지침이 되었는데, 이는 라살파의 국가사회주의[41]와 아이제나흐파의 마르크스주의를 타협적으로 절충시킨 것이었다. 즉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해석한 것이다. 이 이론의 주요 주장은 임금철칙의 철폐이지만, 이론상의 모순을 내포하였으며, 정치적인 요구로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통렬히 비판하여 《고타강령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이라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에 수정주의적 해석에 반대하였다.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여 계급투쟁과 혁명 노선에 반대하면서 분배를 주장한 사회민주주의 역시 자본가의 돈이 없으면 분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본가 그룹이 붕괴되면 같이 무너지게 되어, 마르크스는 사회민주주의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본가의 손을 들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간의 "정치적인 과도기"에서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이외의 그 무엇일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또한 민주주의적 공화제라는 부르주아 사회의 '최후의 국가형태'에서 계급투쟁이 철저히 펼쳐진다는 것을 고타강령비판에서 서술하였다.


7. 사회 운동[편집]


"코뮌이 이러저러한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이를 짓밟아 없애고자 한다면, 정부들은 자기 자신의 기생적 존속 조건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

1871년 파리 코뮌이 좌절된 이후 마르크스의 회고



8. 사망[편집]



파일:칼 마르크스 묘비.jpg

파일:베를린 마르크스 엥겔스 동상.jpg
영국 런던에 위치한 마르크스의 흉상 추모비[42]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43][44]

On the 14th of March, at a quarter to three in the afternoon, the greatest living thinker ceased to think. He had been left alone for scarcely two minutes, and when we came back we found him in his armchair, peacefully gone to sleep-but forever.

3월 14일 오후 2시 45분,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겨우 2분 동안 혼자 남겨져 있던 사이,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안락 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한 연설에서 발췌


저리 꺼져! 유언 따위는 살아있을 때 말을 다 못한 얼간이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마르크스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유언[45]


1870년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만한 주요 활동이 없으며 대중적인 저술만 가끔 하는 등 조용히 살았고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후에 알제리로 요양갔다가 알제리에서 병이 악화되어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한다.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는 최우선 발생국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국프랑스를 꼽았고, 정치적으로 사회주의가 득세했던 독일 역시 후보로 보기는 했다.[46][47] 그런데 세계 정치의 흐름 및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말년의 마르크스는 자신의 초기 이론에 약간의 수정/보완을 가미하여 러시아중국과 같은 낙후된 조건, 정확히는 과도기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했으며, 러시아를 공부하는 등 흥미를 드러냈다. 그리고, 실제로 1905년1917년, 총 세 차례에 걸쳐 혁명을 통해 마침내 러시아 땅에서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도 마찬가지. 한편 미국에서 성행하던 사회주의 운동은 좌초되었고 1948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 하원에서 의석을 확보하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한편으로 아직 내공을 쌓기 이전인 1848년에 프랑스의 알제리 침략을 지지하는 글을 남기는 흑역사스러운 면이 있지만, 내공이 쌓인 이후로는 알제리의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나 인도의 세포이 항쟁에 대해 적극 지지했으며, 아일랜드의 독립도 영국 노동자들의 손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부터는 아일랜드인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입장을 바꾸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마르크스의 정치스탠스나 정국을 보았을 때 마르크스가 심적으로 편치 못한 삶을 살면서 좌절감을 느꼈을 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섰던 1848년 혁명프랑스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 결국 실패로 돌아서면서 해외로 망명을 가야되는 신세로 전락한 데다가, 프랑스에서도 의회를 우파가 장악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나폴레옹 3세였으며, 그나마도 몇 년 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서 제국이 되었다. 이후 미국 신문 기자로 일했을 때 칼럼을 쓰면서 링컨과 공화당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고 남북전쟁에서도 북군이 승리하면서 미국이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트러스트에 의한 강도 귀족 시대가 열렸으며 노예제만 없어졌을 뿐, 인종차별 정책은 다시 부활하고 말았다.

또한 영국에서 살았을 때는 그나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기는 했고, 하층민들이 선거권을 쟁취하는 모습도 지켜 보았지만, 영국이 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나라라서 노동자와 식민지를 열심히 착취해대는 더러운 꼴을 많이 보았고,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 또한 좌절되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파리 코뮌이 일어났지만 이것도 좌절되었다. 이후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철권통치를 하면서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모습을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못보고 사망했는데. 독일 사회민주당이 주요 정당이 되는 걸 보고서라도 갔던 엥겔스보다는 심적으로 편치 못한 삶을 살았다. 마르크스의 서적이나 문집을 연도별로 보면 생각 외로 스탠스가 변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한데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후 그의 유해는 절친한 친구 엥겔스와 자식들, 친구들이 거두어서 장례를 치러주었고 런던의 하이게이트(Highgate) 공동묘지[48] 동편에 안장되었다. 직접 찾아가려면 런던 지하철 노던 선을 타고 Archway역에 내려서[49] 하이게이트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 측에서는 아예 입구에서 마르크스의 묘비 사진을 붙여놓고 홍보하고 있고, 매표소에서 입장권[50]을 구매하면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표를 건네주면서 마르크스의 묘지 위치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묘하게도 마르크스 무덤 맞은편에는 허버트 스펜서의 무덤도 있다.

이원복 교수의 시사만화 <현대문명진단> 초판 2권 '그대의 눈길을 부드럽게...' 편에 따르면[51] 1933년 타계 50주기를 기념해 흉상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했으나, 1948년 British Pathe 영상을 보면 가족묘 형태였고 현재의 것은 1955년에 만들어졌다. 묘비 위에 있는 흉상은 조각가 로렌스 브래드쇼(1899~1978)가 만들었다.

원래는 묘지 주 도로보다 좀 더 안쪽에 묻혔었는데, 마르크스 묘지를 방문하는 참배객과 관광객이 늘자 접근성 문제로 지금의 자리로 이전 안장되어서 훨씬 찾아가기가 쉬워졌다. 예전 무덤 자리에도 석판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금가고 흐릿해져서 읽기 힘들다. 묘비에는 마르크스 얼굴 동상과 함께 그가 남긴 두 가지 유명한 말이 적혀 있다. 묘비 상단에는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구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하단에는 상술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의 글귀가 적혀 있다. 냉전 시대만 해도 세계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성역시했던 곳이었으나 1989년 동구권 붕괴 후 순수 관광객이 전체 참배객의 99%를 점하고 있다.

매년 3월 13일마다 마르크스 기념 도서관 주최로 카를 마르크스 기념 연설이 열리며 초청받은 사회주의 사상가/노동 운동가가 연설한다. 묘지에 입장료만 낸다면 참석은 자유이다. 웃긴 점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매우 동떨어지고 마르크스의 서적조차 검열하는 기형적인 공산주의 국가 출신인 주영국 북한 대사가 매년 참석한다는 것.


9. 일화[편집]


  • 그의 딸 엘리노어에 의하면 매우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가족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하거나 동네 아이들과 놀기도 했다고 한다.

  • 마르크스는 엥겔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많이 얻곤 했는데, 이는 기자 생활을 했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급이 들어오기는 했고, 당대 기준으로 수입이 썩 나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고정적인 것은 아니라서 들쭉날쭉했는데 부족분을 엥겔스의 재정지원으로 메운 것이다. 그런데 엥겔스가 자신의 아내(정확히는 사실혼 관계인 여성)가 죽었다는 편지를 보냈을 때도 이에 대한 답장에 '돈 좀 부쳐달라'고 쓰는 엄청난 결례를 저질렀다. 격분한 엥겔스는 절교를 선언했고, 마르크스의 친지들이 애걸복걸하며 사과하고 달랜 후에야 겨우 화를 풀었다. 이때 마르크스가 사과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진지한 사과 편지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약 당시에 재정적으로 굉장히 궁핍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기적인 인성[52]으로 보아 그 사과조차도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출처 그 외 일화들

  • 어머니인 헨리에타는 네덜란드 네이메헌(Nijmegen) 출신인데, 친척이 그 유명한 필립스였다.[53] 물론 이모부 리온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를 무개념이라고 꽤 싫어했다. 여기에도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마르크스의 아내가 영국에서 살던 시절 너무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필립스를 찾아가서 돈을 좀 지원해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있다. 결과는 당연히 거절. 필립스는 무례하고 이기적인 마르크스를 굉장히 고깝게 보았고 이미 당시 유럽 곳곳에서 마르크스의 악명(?)이 자본가들과 부르주아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마르크스의 아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을 선물해줬다고는 한다.
    • 이모부 리온 필립스와 흠좀무한 일화가 하나 있다. 어머니 헨리에타가 죽기전에 유언 집행인을 이모부로 지정했다. 이모부 리온은 어머니의 유산 중 마르크스 몫을 분배하고 따로 용돈까지 주었는데, 예상대로 마르크스는 빚을 갚는데 사용했다. 이 때 친구 엥겔스한테 보낸 편지가 황당했는데, 나 이모부한테 용돈 더 받아서 빚갚았다!!!

  • 아내가 사망할 당시 둘 다 병은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골골거렸을 때 자기 아픈 건 끝까지 숨기면서 아내의 임종을 지켰다. 평생 혁명 생각만 하면서 아내를 고생시킨 마르크스가 유일하게 아내에게 잘한 일로 꼽힌다. 그나마 자식들에게는 잘해준 편이지만 반대로 형제자매나 모친을 멀리했다고 한다. 부친은 예외로, 죽는 날까지 아버지 사진을 갖고 다녔다고 한다. 부친이 모친보다 훨씬 일찍 죽은 영향도 있다고 평가되고, 변호사였던만큼 말을 안 듣던 카를에게 최대한 합리적으로 대화해왔던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도 본다.

  • 마르크스가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긴 했으나, 낭비벽이 심하다보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파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행했던 사치와 향락의 파티를 했던 돈은 그가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은 바로 그 아버지의 재산으로 이루어졌다.[54] 그는 아버지가 유산으로 물려준 예술작품을 팔려 할 때 그의 어머니가 반대하자[55] 엥겔스를 찾아가 "어머니가 죽는 게 더 나은 때가 온 것 같다"며 망언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거기다가 아버지 유산을 다 팔고 돈이 없자 역시 귀족 딸이었던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주로 예술품)까지도 다 팔아버렸다. 그래도 사치를 감당못해 파산을 했다. 경제관념은 역대 경제학 관계자 중 최악이다. 그리고 그렇게 써댄 재산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누이까지 가난하게 살게 되어버렸고 그들은 카를 마르크스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56] 그나마 인생 후반기에는 정신을 차렸는지 주식으로 돈좀 벌기도 할정도로 좀 살림살이가 펴지기는 했다.

  • 특히 어머니가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유명하다.[57] 그의 어머니는 집 재산을 다 날려먹은 아들이 책을 써서 꽤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전한 사람에게 책의 이름을 물어봤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녀에게 그 책 이름이 자본(자본론으로 알려져 있지만 진짜 이름은 자본이다)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어머니는 "자본이라는 책을 쓸 시간에 자기 자본이나 지킬 것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 그러나 마르크스가 빈곤에 시달린 이유가 오로지 사치와 향락 때문이라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서술이다.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이 일어났을때 신라인신문을 발간하며 상속받은 유산을 모두 썼고, 1848년 혁명의 실패 이후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해 프랑스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면서도 많은 재산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도 마르크스는 영국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으며, 저작을 발간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고작 3주씩 여행 가고 정원딸린 저택에서 하녀 고용해서 살고 하는건 딱히 사치가 아닌 모양이다.

  • 마르크스는 훗날 신라인신문 발간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단지 엄청난 재정적 희생과 개인적 위험만을 대가로 해서 신문사를 유지•관리했다." 라고 했다.

  • 마르크스의 천재성과 반신분주의적 성향은 일찍부터 싹이 보였다. 이미 고등학교 졸업 직전 만 17세였을 때 '어느 젊은이의 직업 선택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젊은이는 직업 선택을 할 때 젊은이의 의무와 자기 희생과 인류의 미래를 모두 심사숙고를 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 젊은이의 직업 선택이 모여 인류의 진보가 일어나고 그 직업 선택에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과정 자체가 인류의 진보 과정과 닮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 상황은 신분주의가 다 가시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부분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 걸 당연히 여겼을 때였는데 마르크스는[58] 그 어린 나이에도 이미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직업 선택은 정해진 것을 따르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관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아가 단순한 사회 개념을 넘어 그 직업 선택이 전인류 진보사에 영향을 준다는 범인류적 사상까지 보이고 있었다.[59]

  • 뛰어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생활에서의 경제관념은 별로였다고 한다. 매일 대영도서관에서 책 읽고, 책만 쓰고, 가끔씩 신문사에 기고하는 글로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60] 그런데 여기에 부잣집 출신 엥겔스의 지원금까지 포함하면 당시 노동자의 세배 정도로 벌이가 괜찮았다고 한다. 그는 집에 하녀를 두고[61], 종종 온가족이 예쁘게 차려입고 소풍을 가며, 집안의 가구를 수시로 바꾸었으며 자주 친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 베를린의 고위 관료의 1년 평균 수입이 800탈러였고, 부잣집의 돈 잘 쓰는 한량도 1년에 500탈러 이상을 쓰는 일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1년 지출은 700탈러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에 진노한 아버지가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아이가 여섯 명이 있었는데, 밥은 못 먹여도 춤과 피아노 교습은 시켰다. 어쨌든 세명이 일찍 죽었는데. 딸이 죽었을 때 외상으로 관을 사려 했는데, 외상을 못해서 절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비싼 집에 살면서 딸들한테 댄스학원 보내는게 어때서? 그래야 얘들이 상류층이랑 어울릴거 아냐?' 라는 편지를 보냈다.

  • 그의 자녀들 중 유명한 인물은 여섯 번째 자녀인 엘리노어 마르크스(Eleanor Marx)이다. 카를은 그녀를 가리켜 사내아이로 태어나야 했어야 했다고 자주 농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은 다정하고 인간을 그대로 사랑할 줄 알아 적들도 인간적으론 존경했다 한다. 부전여전이라고 딸도 영국에서 진보적 활동을 많이 했다. 사회민주연맹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인 활동. 43살의 나이에 독약으로 자살했다.

  • 그나마 부인이라도 금전 관념이 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을 것이나 마르크스보다 4살 연상이었던 그의 부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도 남편처럼 사치스러웠다. 특히 밥은 굶어도 '폰 베스트팔렌 남작부인'(베스트팔렌 남작의 영애)이라는 문구가 쓰여진 금박달린 비싼 편지봉투만 애용했다고 한다.

  • 노동자의 해방을 외치던 그도 집에선 헬레네 렌헨 데무트란 이름을 가진 가정부를 고용해서 생활했는데 예니 마르크스가 생활비를 마련하려 유럽으로 떠난 사이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1851년 6월 23일 프레더릭 데무트란 아들을 보았지만 그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아이를 처리하는 데도 엥겔스가 도움을 줬다.[62] 엥겔스가 그 아이는 사실 내 아이라고 둘러대주고 자신의 세례명인 프레더릭을 쓰도록 했다.[63] 마르크스는 이스트 런던에 사는 어떤 노동자 부부에게 프레더릭을 입양보냈다. 프레더릭은 성장한 후 재단사와 선반공 일을 하면서 살았고 연합기술자회의(노조)회원이었다. 후일 엥겔스는 런던으로 이주했는데 마르크스가 죽은 후 데무트를 가정부로 고용했다. 프레더릭은 아들 해리를 데려가 엥겔스의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생모인 데무트를 만나곤 했고. 그럴 때마다 엥겔스는 조용히 자리를 뜨곤 했다. 이 일은 내내 비밀에 붙여지다가 엥겔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어에게 진실을 털어놓으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이후 엘리노어는 프레더릭과 남매처럼 지내면서 프레더릭의 정신적 고통을 보상해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한다.
카를 마르크스.
올해로 탄생 200돌을 맞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인간 해방의 위대한 투사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아버지에게는 평생 감추어야 했던 비밀이 하나 있었다. 1851년 여름 망명지 런던의 누추한 딘 스트리트 28번지 비좁은 집에서 태어난 남자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가 결혼할 때 데려온 하녀 헬레네 데무트였고 아버지는 마르크스였다. 사생아의 존재는 마르크스에게도 다른 가족에게도 함구의 대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할 경우에도 이 사실은 암호문처럼 모호하게 처리됐다. 예니는 훗날 쓴 회고록에서 이때를 이렇게 기록했다. “여기서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1851년 초여름에 우리의 걱정을 가중시키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
일부일처제의 부르주아 미덕 안에서 산 마르크스에게 이 아이는 가족 안으로 난데없이 들어온 이방인, 자신이 만들어냈지만 받아들일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완전한 타자였다.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마르크스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독신이었던 엥겔스는 사생아를 자기 아이인 것처럼 꾸며 다른 노동자 가정의 양자로 보냈다. 마르크스의 가족은 엥겔스의 도움으로 부르주아적 정상성의 울타리 안으로 안전하게 돌아갔다. 헬레네는 그 집의 하녀로서 평생을 살았고 마르크스 가족이 묻힌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함께 묻혔다.
과거 사회주의 진영에서 나온 마르크스 전기들은 이런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을 기리는 ‘성인전’이 인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추문을 입에 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마르크스의 신성한 지위가 무너지고 난 뒤에야 ‘인간 마르크스’를 조명한 전기 속에 이 비밀이 편입됐다. 마르크스가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예니와 헬레네는 또 어떻게 했을까?

고명섭 한겨레 논설위원#

  • 이렇게 빈민촌에서 고생한 시절도 있지만 그래도 유산 받은 것과 엥겔스의 도움 등으로(엥겔스는 회사 판 돈으로 마르크스에게 평생 350파운드 연금을 보내줬다. 상류층이 사는 정원딸린 저택 임대료가 65파운드인 시절이다.) 교외 괜찮은 집에서 말년을 보냈다. 고로 흔히 알려진 마르크스가 가난해서 노동자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 그도 천생 기자인지라 마감이 닥쳤을 때만 능력을 발휘했다. 만화가, 소설가, 기자들의 창작 욕구는 마감에서 나오는 듯하다(출처). 반면에 마감에 대한 거부감은 당연히 강해서, 자본론의 경우도 엥겔스는 빨리 낼 것을 독촉하였지만, 정작 마르크스는 초저속 마감 시스템을 추구했다. 그래서 자본론 2, 3권은 아예 끝을 못냈다!

  • 심각한 악필로도 유명하다. 아내와 엥겔스 정도만 그의 글씨체를 해독할 수 있었다고.

  •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말도 마르크스가 한 말이다. 이는 마르크스가 지은 1844년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 나온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계의 가슴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 잘 알려진 대로 혈통은 유대인이다. 하지만 아버지 대에 기독교개종했기에 당시 분류로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고 유대인 사회에서도 유대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 마르크스처럼 후대 사회주의자 중에 유대인 출신으로 알려진 인물들(레프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도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없던 건 마르크스와 마찬가지였다. 이론상으로는 국가나 민족같은 개념은 종국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란 자각이나 민족 의식, 해방 같은것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그의 사상에 대한 반대자들이 유럽서 수천년 동안 천민 취급을 받은 유대인 드립과 엮어서 "조국과 민족이 없는 유대인의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 물론 가장 많이 울궈 먹은건 나치다.
자신을 전혀 유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을 유대인 드립으로 디스한 적도 있다. 하지만 세계주의자답게 마르크스는 유대인 차별에 반대했다. 아직 마르크스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인 1843년에 이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유대인 차별에 반대했다.

  • 시대를 초월한 포스 넘치는 명언을 여럿 만든 사람 아니랄까봐, 유언[64]에 대한 일화에서도 상당한 포스가 느껴지는 양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길 유언이 뭔가?"라는 친구이자 동지인 엥겔스의 질문에 대한 이 양반의 대답이다.
"꺼져! 유언이란 살아서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한 얼간이들이나 남기는 거야..."
"Hinaus! Letzte Worte sind für Narren, die noch nicht genug gesagt haben..."

  • 주식에도 투자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죽기 1년 전에 엥겔스가 요양여행 보내주려고 보내준 돈으로 자신의 경제적 인식이 얼마나 맞는지 한번 시험해보려고 투자해본 것이라고 하던데 미국 철도회사와 철강회사 주식을 사서 2주만에 4000파운드라는 상당한 거액을 벌어들였다고.[65] 위에 나와있는 것과는 상반되어 보이지만[66] 어쨌든 경제학자 가운데서는 주식으로 돈을 번 흔치 않은 사람이다. 이런 일화는 케인즈도 비슷하다.[67]

  • 인생 후반기 들어 드디어 자기의 사상이 유럽 전역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68] 재정적으로도 어느 정도 돈을 벌며, 각지의 추종자가 도움을 주면서[69] 어느 정도 삶이 펴서 자기가 그리도 까던 부르주아 라이프를 누리다 죽었다. 특히 자신의 언변을 이어 받은 로라와 라파르그 커플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이 노년의 낙이었는 듯 하다.

  •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실제로도 많은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나 개혁주의자와도 자주 교류를 나누웠지만,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당대의 혁명론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스탠스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젊었을 적에 참여했던 1848년 혁명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철저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었고, 1857년 경제 공황이 일어났지만 혁명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하면서 경제 공황이 반드시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체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르크스는 1857년 경제 공황이 일어나자 조만간 혁명이 올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실제 혁명이 일어나지 않자 경제학에 대해서 공부를 매진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자본론 1권이다.


10. 프리드리히 엥겔스와의 관계[편집]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관계는 굉장히 두터웠다. 처음 엥겔스는 영국 자본가의 아들이었지만 변혁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라인신문>에서 특파원을 하다가 그곳의 편집장인 마르크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이어진 관계는 마르크스가 프로이센에서 추방당하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둘은 사상적으로 아주 잘 맞았고, 평생 서로의 동지가 되었다. 1848년 출판된 《공산당 선언》은 그런 둘의 공동 집필이 낳은 역작이다.

또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경제적 지원자였다. 그가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그 어려운 망명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이러한 협력 관계는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마르크스 사후, 여전히 유효했던 우정으로 엥겔스는 그의 유고를 모아 《자본론》 제2권, 제3권을 출판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사망 때까지 혁명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 트리어는 독일과 룩셈부르크를 흐르는 모젤 강변에 위치한 독일의 서부 지방으로, 당시 독일 동부 지방은 농촌이 많고 전통적 색채가 강했으나 서부는 영국, 프랑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산업화,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된 상태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의 폐단에 반대해 나타난 사상임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배경이 쉽게 이해된다.[2] 원래 집안의 성씨는 구약성경의 등장인물 모르드개에서 유래한 유대계 성씨 Mordechai였으나 후에 마르크스(Marx)로 바꾸었다.[3] 본 대학교 시절에는 친구들끼리 술 먹고 소란 부리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 당시 독일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이었던 결투 경험까지 있다. 그러다보니 당시 문제 학생들만 수감되는 학생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4] 마르크스가 입학하기 전인 1826년에 프로이센 국왕의 이름을 따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로 정식 명칭을 바꿨다. 그런데 보통 독일 대학들의 명칭은 예컨대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처럼 지역명에 α(대체로 설립자나 유명한 출신 인물의 이름)를 추가해서 결정하는데, 의식해서 정식 명칭을 부를 때가 아니면 지역명만 남긴 대학명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 뮌헨대, 프라이부르크 알베르트 루트비히 대학교 → 프라이부르크대) 즉 저때만 해도 그냥 '베를린대'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베를린이 분단됨과 동시에 교명을 베를린 훔볼트대로 바꾸었고, 여기에 소련을 반대하는 대학 인사들이 서베를린에 베를린 자유대를 설립하면서 '베를린대'라는 호칭이 사라지게 된다. 대체로 독일엔 도시 하나에 종합대학교(Universität)가 하나만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특이하게도 베를린은 분단으로 인해 예대 간판을 달고 있지 않은 종합대학교가 2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베를린대'라고 부르면 둘중에 어느 대학을 지칭하는지 확실하지 않아서 '훔볼트대', '자유대'로 부르게 된 것이다.[5] 사실 후일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큰 관련이 없어서 마르크스주의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 논문을 찾아볼 필요는 없다. 사실 따지자면 에피쿠로스보다는 헤라클레이토스-스토아 학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우리나라에서 이진경 등을 중심으로 알튀세르주의가 범람하자 알튀세르가 주요 텍스트로 삼은, 그다지 학술적 가치는 없는 이 논문까지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6] 이 논문은 문과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현대 사회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을수록, 오히려 박사 논문 만큼은 더욱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써 볼 필요가 있다.는 사례로 자주 활용된다.[7] 이 대학이 있는 예나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국 소속이었다.[8] 이 신문은 1842년부터 발행되었으며 청년 헤겔파, 반정부 세력 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개혁파,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이 기사를 썼다.[9] 실제로 신문의 편집장은 신문사 내에서 매우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다.[10] 당시 라인 지방은 개발이 본격화되던 산업도시였기에 정부와 산업 부르주아지와의 충돌이 꽤 있었던 모양인데, 아마 정부를 까려고 부르주아지들이 마르크스를 신문 편집장 자리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정부 비판적 기사를 꽤나 많이 다루었다.[11] 여기서 '전통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한데, 유럽 봉건시대의 판단 기준(법)은 이전의 관례/관습에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법적 확신에 의해 지속된 관습법 수준이란 말이다.[12] 여담으로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라인신문을 '라인강의 창녀'라고 씹었다고 한다.[13] 당시 러시아 정부는 유럽에서 19세기 내내 반계몽주의와 야만적 관습 및 탄압의 대명사였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프로이센에 비해 힘이 강했다.[14] 다만 이때에는 그저 편집자와 기고자의 관계에 불과했기에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였다. 둘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은 마르크스가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후의 일이다.[15]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서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기 전의 기간에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이미 약혼을 맹세했었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고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 에 관심이 있던 마르크스는 예니를 위하여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곤 하였다. 하지만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할 것을 우려한 예니는 약혼 사실을 바로 공개하지 않았고, 약혼한 지 7년이 지나서야 둘은 결혼할 수 있었다.[16] 이후 마르크스는 루게를 두고 부르주아 적대자라고 비난해 왔으나 경찰이 루게를 잡으려고 할 때는 주의하라는 편지를 보내는 배려를 보이기도 하였다.[17] 당대의 헤겔 청년파 중에서도 기존의 반정부적 태도를 버리고 마르크스와 그의 활동에 적대적이었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가 비판의 주요 대상이었다.[18] 1836년 조직된 단체로서 독일계 이민자 기술공들이 주축이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상적 사회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노동자 출신의 빌헬름 바이틀링의 주도 하에 있었다.[19] 이때 마르크스와 교류한 대표적인 시인이 낭만주의로 유명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하이네는 파리에 온 마르크스 부부와 자주 만났으며, 자신의 시를 읽어주면서 마르크스의 편집을 받았다. 그로 인해 하이네의 시는 점차 참여문학의 형태를 가지게 되어 <슐레지엔의 방직공>, <독일, 겨울 동화집> 등의 걸작이 나오게 된다.[20] 여기서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노동의 소외(Alienation of Labor)를 다루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생산해내지만 정작 이들은 부유해지지 못하며 자신의 생산물인 자본의 지배하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적 존재로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야 하지만 결국 그 기회를 상실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자본이 임금 노동을 자신 것으로 만듦으로써 노동자는 일하지 않는 동안만 자기 자신일 뿐이다. 이런 경향은 노동을 분업하는 생산 방식에 이르러서 더욱 극대화된다.[21] 의인동맹의 영향을 받은 분파 중 하나가 프로이센에서 국왕 암살을 기도하다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전진!>이 그 소식에 관심을 보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22] 마르크스는 브뤼셀 망명 기간 도중에 잠깐 엥겔스와 함께 영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한 달 반에 가까운 여행 동안 마르크스는 영국의 노동 상태를 살펴보았으며 당시 영국에 불고 있던 차티스트 운동의 열풍을 목도했다. 또한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들과 독일 의인동맹 활동가들을 연결하여 '우애 민주주의자(Fraternal Democrats)"이라는 조직을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23] <독일 이데올로기>에 수록된 내용으로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담고 있다. 중요한 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라는 그 유명한 문구가 여기서 나온다.[24] 원제는 <독일 이데올로기 -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및 '진정'사회주의 등에 의해 대표되는 독일철학>[25] 이런 활동으로 인해 러시아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은 <신라인신문>을 두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훌륭한, 비할 데 없이 탁월한 기관지"로 평가했다.[26] 프로이센 정부가 <신라인신문>을 대상으로 행한 고발과 재판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판조차 자신의 사상을 알리고 민중의 혁명을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재판정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화려한 언변으로 자신을 변호했고 그 결과는 으레 무죄석방으로 나타났다.[27] 5월 9일 엘버펠트에서 일어난 봉기 중에 취한 행동을 이유로 기소되었다.[28] 이때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이미 발생한 봉기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펼쳤지만 그 결과는 여의치 못했다. 의회 내의 좌파 세력조차도 봉기를 지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들은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더 이상의 혁명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직 봉기가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 가서 새로운 혁명의 시기 전까지는 승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견해는 봉기자들을 격분시켰지만 끝내 마르크스의 견해대로 봉기는 진압당하고 말았다.[29] 추방되지 않으려고 국적을 포기한 것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는 이를 비열한 행위로 간주하여 추방했다.[30] 다만 손씻기가 아직 보편화되기 이전일 정도로 위생관념이 열악했고 항생제도 개발되지 않아 영아사망률이 아직은 높았던 시절이었기는 했다. 애초에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절이 올리버 트위스트의 배경이 된 시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31]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기대며 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철도 공무원이 될려고 했지만, 남루한 옷차림과 수염으로 인해 험악해보이는 외모, 그리고 악필로 인해서 결국 취직되지는 못했다. 다만 불행 중 다행이라 할수있는지 이후로는 유산을 상속받고 씀씀이도 줄어들어서 어느정도는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32] 20만부 정도지만 당시에는 인쇄술이나 교통의 발달이 아직 덜 이루어졌기 때문에(철도가 깔리기 시작한지 몇 년이 채 안 되었고, 증기기관차였기 때문에 현대 기준으로 보면 속도는 느리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은 발행부수였다.[33] 1860년대 당시에는 공화당은 노예제의 적극 폐지를 주장하는 진보 스탠스의 정당이었다. 하지만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보수 성향으로 점차 쏠리게 되고 이 기조가 정착된 것. 물론 시어도어 루스벨트아이젠하워 같이 잠깐 진보적인 정치를 펼친 대통령은 있었지만 이것도 닉슨이 끝물이다.[34] 사실 1857년 경제 공황과 1860년대 남북전쟁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탓도 있다. 그래도 기사를 잘 썼기 때문에 편집부와의 마찰에도 꾸준히 기사를 썼지만 결국엔 결별하게 되었다.[35] 다만 이건 당시 마르크스가 정치범으로 낙인찍혔고 그리 부유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럽 각지로 돌아다닐 형편이 안되었던 탓도 있다.[36] 다만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기고한 기사들이 호평을 얻은 것과는 별개로 저속 마감을 했던지라 편집부에서 원고를 빨리 좀 내라고 압박을 가해서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뉴욕 트리뷴지에 실린 마르크스의 원고 상당수를 엥겔스가 대신 써서 내주었을 정도다.[37] 케네디 대통령도 마르크스의 기자 이력에 대해 공부한 모양인지 신문 편집인을 앉혀놓고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1851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카를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저널리스트를 런던 특파원으로 고용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회당 5달러라는 괜찮은 원고료를 받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원고료를 올려달라고 졸랐다는군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친구는 다른 생계 수단을 찾아 나섰고, 결국엔 ‘트리뷴’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 세상에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혁명과 냉전의 씨앗을 뿌리게 될 그 사상에 풀타임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치게 되었지요. 만일 뉴욕의 그 자본주의 신문이 그에게 원고료를 조금 더 올려주고 계속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했더라면 아마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38] 이외에도 그가 개인적으로 썼던 원고들이 많았다. 소련 말기에도 카를 마르크스나 레닌 등의 미공개 원고가 상당수 존재했는데, 소련이 해체되기 직전 완전한 전집을 출간하려 했으나, 소련이 해체되며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이들 공산주의자의 문헌은 소련 해체 당시는 물론, 현대에도 소실되고 있다. 예시를 들자면, 모스크바 사회과학정보대 도서관 3층에서 불이 난 2015년 초의 대화재가 있다. 이때 200만점 이상의 문헌이 소실되었다. 디지털 자료로 보존한 비율은 러시아측 뉴스를 참고 바란다.[39] 1890년에 독일사회민주당으로 개칭[40] 1825년 ~ 1864년 독일 출신 철학자이자 노동운동 지도자이다. 한때 독일에서 마르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철학자로 간주된 적이 있는 사회주의자이다.[41] 그 파시즘의 국가사회주의가 아니라 오늘날의 민주사회주의와 가깝다.[42] 진짜 묘는 옆에 있다. 사진의 묘비는 찾는 사람이 많아 묘지 입구에 1954년에 세운 흉상을 얹은 추모비이다. 추모비 윗편에는 공산당 선언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추모비 아래에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11번이 적혀있다.[43] 뒤로 보이는 금빛 건물은 공화국 궁전으로, 구 동독국회의사당이었다.[44] 파일:20230413_002611 마르크스.png 공화국 궁전이 철거된 이후의 오늘날의 모습[45]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4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이름에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있지만 독재 국가인 것처럼 이것도 사회주의라는 단어만 들어가 있지 사회주의 사상과 관련이 없는 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엄청 탄압했다.[47] 사실 따지고 보면 후에 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영국 노동당)이 양당을 형성할 정도의 세를 확장해나가고, 프랑스도 한때나마 공산당이 제1당 자리를 차지했을 정도고, 사회주의적인 정책도 일정 부분 펼쳐지기는 했다.[48] 참고로 더글러스 애덤스도 여기 묻혀있다. 그 무덤 앞에는 참배객들이 꽂아둔 볼펜이 가득 있다.[49] Archway역 다음 역이 Highgate역인데, 이 역을 기점으로 운임 구간이 바뀌기 때문에, 런던 시내에서 출발했다면 Archway역에서 내리는 것이 유리하다.[50] 공동묘지인데도 입장료 4파운드를 받는다.[51] 해당 단행본 p116~117 수록.[52] 학문적 업적이 백년에 한명 나올까말까한 천재라서 그렇지, 사생활은 엘리트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만큼 이기적인 인성으로 주변인들을 대하며 살았다. 그정도의 초천재 학자들, 예를 들어 뉴턴이나 칸트 같은 세기의 대학자들을 봐도, 약간의 기벽 정도야 있었어도 대인관계에서 저런 수준의 심각한 인성을 보인 적은 전혀 없다. 세계사적으로 저정도 천재가 저 정도 인성이기가 힘들 정도.[53] 필립스 창업자가 이종사촌과 그 아들인 오촌 당조카였다.[54] 그의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돈많고 잘 나가던 로펌 변호사였다. 마르크스는 엄연히 금수저였던 것이다. 그래서 수입과 재산도 굉장히 많은 편이었는데 마르크스는 10대 후반부터 주변 귀족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하여 기분이 나쁠 때마다 파티를 자주 하느라 그 재산들이 팍팍 줄어들 만큼 써댔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아빠는 로펌 변호사, 아들은 패리스 힐튼급 파티광이었다. 결국 그 과도한 사치로 약 20년 내외의 시기에 집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파산한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이미 대학생 시절의 마르크스에게 "돈 좀 덜 쓰면 안 되겠냐"는 편지까지 쓴 적이 있다. 물론 마르크스는 무시하고 계속 돈 부쳐 달라고만 답장을 썼다. 마르크스는 법대나 변호사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강력한 권유로 그렇게 된 것에 불만이었다고는 하나, 누구나 알듯이 그게 부잣집 재산 다 날려먹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55] 결국은 어머니 말 무시하고 다 팔았다.[56] 사실 사생활에서 인성 자체가 구리기도 했다. 자기 중심적이다 못해 이기적이었다.[57] 몇몇 작가들이 쓴 마르크스의 전기에 꽤 실려 있으나 사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고 유명한 소문이었다고만 알려져 있다.[58]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했던게 거슬렸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59] 물론 요즘으로 보면 어린 청소년의 반항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사회는 지금과 개방적인 수준이 달랐고, 그의 글은 당시에도 체계가 있었기에 쉽게 볼 수는 없다.[60] 우리도 잘 아는 《뉴욕 트리뷴》의 런던 주재 특파원으로 송고한 기사가 남아 있다.[61]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처가에 부탁을 하니 돈 대신에 하녀를 보냈다. 처가가 귀족가문인 베스트팔렌 남작가였기 때문에 이런 당황스러운 지원이 가능했다.[62] 마르크스 부부의 결혼 생활 유지와 정치적 대의를 위해서였는데, 당시 영국에 망명온 혁명가들은 섹스 스캔들을 빌미로 정적을 매장하곤 했다.[63] 프레더릭은 프리드리히의 영어식 표기.[64] 물론 실제로 마르크스는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65] 이때가 1880년대였으니, 4000파운드를 지금 한국 돈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4억 6800만원으로 상당한 거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66] 사실 위에 나열된 일화들은 그의 낭비벽과 무절제함에 관한 말이므로 투자 지식과는 별개이긴 하다.[67] 물론 이렇게 수익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주식 발행을 해본 적도 있고, 주식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번 투자를 해보았기 때문이었다. 주식으로 돈 벌려는 데 있어서 당연히 주식에 대해서 공부를 기본적으로 해놓은 상태라는 것이다.[68] 물론 그 이전에도 미국 북부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기는 했다만 이때 신문은 식자층들이 읽는 것이라 대중적으로 알려진 수준까지는 아니기는 했다.[69] 그 중에서 두 프랑스인인 샤를 롱게와 파울 라파르그는 자기 두 딸 예니와 로라와 결혼하여 사위까지 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사상적으로 명석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아나키즘 논쟁에서 마르크스와 각을 새웠던 파울 라파르그를 총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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