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아기레 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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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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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o Abelino Aguirre Cerda
1879년 2월 6일 ~ 1941년 11월 25일

1. 개요
2. 생애
3. 대통령 시절
4. 유산




1. 개요[편집]


페드로 아벨리노 아기레 세르다(Pedro Abelino Aguirre Cerda)는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제22대 칠레 대통령을 지낸 칠레의 정치인이자 교육자, 변호사이다. 1906년 이래 칠레 급진당의 당원으로서, 그는 1938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좌파인민전선연합에 의해 선택되었고 당선되었다. 그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산 펠리페, 푸타엔도, 로스 안데스 선거구, 1918년 1월부터 9월까지 후안 루이스 산푸엔테스 대통령 밑에서 내무부 장관,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산티아고 대통령 대리, 1920년부터 1921년까지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 대통령 밑에서 법무 및 공공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921년부터 1927년까지 1941년 11월 25일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생애[편집]


페드로 아기레 세르다는 1879년 2월 6일 칠레 로스 안데스 도시 근처의 작은 마을인 포쿠로에서 태어났다. 후안 바우티스타 아기레 캄포스와 클라리사 세르다 에스쿠데로 사이에서 태어났다. 농부였던 그의 아버지는 1887년 그가 8살 때 세상을 떠났고, 홀어머니는 농장을 운영하며 11명의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 그의 가족은 바스크 혈통이었다.

그는 산티아고에 있는 칠레 대학교의 교육학 연구소에서 첫 번째 3차 공부를 마치고 스페인어 교사가 되었다. 1904년 법학부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1910년 그는 프랑스 파리소르본 대학에서 행정법과 금융법,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정치경제와 사회입법을 공부할 수 있는 정부 보조금을 받았다. 1914년 칠레로 돌아와 국립교원 교사로 재직했으며, 국립교원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6년, 그는 후아나 로사 아기레 루코와 결혼하여 자식이 없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교사, 변호사, 대리인, 상원의원이었다. 그는 또한 칠레 대학교의 새로운 경제학교의 첫 학장이었다. 칠레 급진당 소속으로 후안 루이스 산푸엔테스와 아르투로 알레산드리의 행정부 시절에는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군사적 지배 기간 동안 그는 박해를 받았고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의 적극적인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38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으로 구성된 인민전선 연합에 의해 후보로 선택되었고, 자유-보수 연합에 속한 우파 후보 구스타보 로스를 4,111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3. 대통령 시절[편집]


1938년 12월 25일, 아기레 세르다는 "정부가 교육하자"(Governares educar)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통령직을 맡았다. 교사로서, 그의 정부에서의 우선순위는 교육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국가의 초기 산업화를 위한 기술자 형성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술 산업 학교의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는 또한 수천 개의 새로운 정규 학교를 만들었고 전국을 아우르는 대학 시스템의 성장을 장려했다. 아기레 정부는 또한 일부 토지를 재분배하고, 농업 정착촌의 형성을 장려했으며, 저가의 주택과 학교를 건설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을 정치 체제에 통합시켰다.

그의 첫 해 동안 그는 소위 아리오스타조라고 불리는 그의 계획에 대한 군사적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또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을 위한 노벨상을 홍보하고 캠페인을 벌였지만, 그의 후임자인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가 그 결과를 낳았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1939년의 파괴적인 지진에 의해 부분적으로 자극을 받은 그는 보조금과 직접 투자로 수입 대체 산업화의 야심찬 프로그램을 장려하기 위해 생산개발회사(CORFO)를 설립했다. 이것은 칠레의 산업화의 기초였다. 거기서부터 철강, 제조업, 설탕 산업이 생겨났다.

1941년, 급격히 악화되는 병으로 인해 그는 그의 후임으로 내무부 장관 제로니모 멘데스를 부통령으로 임명했다. 1941년 11월 25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멘데스는 1942년 2월 1일에 선출된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가 4월 2일에 취임할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냈다.


4. 유산[편집]


1950년부터 1951년까지 칠레남극 탐험대는 돈 페드로 아기레 세르다의 이름을 따서 르메레 섬과 단코 해안 사이의 아기레 해협을 명명했다.

아기레 세르다의 측근 중 한 명이자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보건부 장관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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