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몬 프레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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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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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ón Freire Serrano
1787년 11월 29일 ~ 1851년 12월 9일

1. 개요
2. 생애
3. 독립 전쟁
4. 최고 감독
4.1. 무지 파견
5. 대통령 으로
6. 이후의 삶




1. 개요[편집]


라몬 프라이레 세라노는 칠레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국가 원수를 지냈으며, 연방 전쟁까지 수많은 추종자들을 누렸다. 라몬 프레이레는 자유주의 피피올로 운동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역사가 가브리엘 살라자르에 의해 칠레의 초기 공화정 시대의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로 칭송되었다.


2. 생애[편집]


그는 1787년 11월 29일 산티아고에서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프레이레 파스와 게르트루디스 세라노 아레체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고아였던 그는 콜리나 마을 근처의 외삼촌들에 의해 하시엔다에서 자랐다. 그는 16세에 다시 고아가 되었고, 콘셉시온으로 이주하여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했고, 후에 상선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3. 독립 전쟁[편집]


1810년 독립투쟁의 시작에 그는 첫 번째 군사정권의 설립에 수반된 공개적인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811년, 그는 드라고네스 데 라 프론테라의 사관생도가 되었고, 칠레 독립 전쟁 동안 우일킬레무, 탈카후아노, 엘 로블, 엘킬로의 전투에 참가했다.

랑카과 참사가 일어나고 파트리아 비에자가 끝날 무렵, 그는 이미 대위가 되었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안데스 산맥을 건너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망명했다. 1816년 그는 안데스군에 입대했고, 1817년 2월 11일 탈카 시를 점령한 칠레 남부 플랑숑 고개(플랑콘 고개)를 통해 칠레로 돌아왔다.

마이푸 전투에서 싸웠고, 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오히긴스 행정부 하에서 콘셉시온의 인던트를 임명했다. 오히긴스와의 우정은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고, 1822년에 그는 의견 불일치로 자신의 지위를 사임했다. 그의 이름은 오히긴스에 대한 불만을 모으는 지점이 되었지만, 그들 둘은 결코 무력 충돌에 이르지 못했다.


4. 최고 감독[편집]


1823년 4월 4일부터 1826년 7월 9일까지 오히긴스의 후임으로 군사정부에 의해 지명되었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1827년 1월 25일 사무실로 돌아왔다. 1827년 2월 5일 그의 새로운 사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같은 해 2월 15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27년 5월 5일 그는 다시 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노예제 폐지, 발파라이소 항구의 방어 체계 개편, 세계 무역에 대한 칠레 시장 개방과 같은 거대한 영향의 계획들을 추진하였다. 그는 또한 언론의 자유를 강조했고 모든 수도원과 수도원들에게 무료 학교를 열라고 명령했다.

1823년 12월 29일, 그는 후안 에가냐가 제시한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매우 도덕적인 문서로 여겨지는 그것은 사람들의 본질은 그것의 법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반영했다. 그것은 시민의 공적인 행위와 사적인 행위를 모두 규제하려고 했다. 그러한 접근은 곧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헌법은 불과 6개월 후에 폐기되었다.

독립 전쟁으로 칠레 국고가 고갈되고 영국 은행들과 계약한 첫 번째 외국 대출로 인해 심하게 저당 잡혔기 때문에, 프레이레는 담배, 술, 카드, 세금 서류에 대한 정부 독점(estanco)을 만들었고, 이는 포르탈레스, 세아, 그리고 회사에 할당되어 큰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훗날 세계 총대신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처음으로 공공 정부에 관여한 사건이었다.

그는 또한 여전히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칠로에 섬을 점령하면서 전 영토의 독립을 완성했다. 1824년 모코풀리 전투에서 패배하고 1826년 푸도와 벨라비스타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는 탄타우코 조약에 서명했고, 스페인은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확실히 포기했다.


4.1. 무지 파견[편집]


.비슷한 시기에 교황이 파견하고 몬시뇰 후안 무지(Juan Muzi)가 이끄는 사도 사절단이 칠레에 도착했다. 이 임무의 목적은 칠레교황청 사이의 관계를 고치는 것이었다. 칠레는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을 권리를 물려받았다고 느꼈고, 성좌는 다르게 느꼈기 때문에 곧 분쟁이 일어났다. 그동안 정부는 수도회 개혁, 교회 재산 압류, 독립에 적극 반대했던 주교 추방 등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었다. 무지 몬시뇰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두 국가 간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여권을 요구했다.

국내에서는 특히 오히긴스의 지지자들과의 갈등이 악화되어 1825년 프레이레가 전역 중에 해임되고, 그의 귀환과 함께 복권되었다. 1826년 7월 9일, 제독 마누엘 블랑코 엔칼라다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그는 새로운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5. 대통령 으로[편집]


새로운 혁명은 1827년 1월 25일 그를 임시 대통령으로 다시 권좌에 오르게 했다. 질서가 회복된 후, 그는 2월 5일 다시 사임하였으나, 2월 15일 그를 대통령으로 승인하기 위해 진행된 의회에 의해 그의 사임은 거부되었다. 그는 마침내 1827년 5월 5일에 사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호세 미겔 인판테가 이끄는 연방 정부 시스템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사실, 칠레 의회는 그 취지의 많은 법을 지시했다. 미국의 예를 바탕으로 연방공화국을 수립하자는 취지였다. 새로운 제도를 매우 빠르게 붕괴시킨 새로운 주들-주들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


6. 이후의 삶[편집]


원래 그는 쿠차쿠차 하시엔다로 은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829년 칠레 내전에서 정치적 내분으로 돌아왔다. 그의 마지막 패배는 리르카이 전투에서 일어났다. 그 후 그는 투옥되었고 나중에 페루로 추방되었다. 페루에서 안드레스 데 산타크루스 원수의 도움으로 그는 작은 탐험대를 조직하여 칠로에 섬을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목적에 실패한 후, 그는 다시 한번 발파라이소 항구에 수감되었고, 처음에는 후안 페르난데스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 타히티로 유배되었고, 1837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임시 정착했다.

그는 1842년 칠레로 돌아가 1851년 12월 9일 사망할 때까지 평화롭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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