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에차우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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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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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erico Errázuriz Echaurren
1850년 11월 16일 ~ 1901년 7월 12일

1. 개요
2. 생애
3. 대통령 시절
3.1. 공공정책
3.3. 승계 논란
3.4. 건강 문제와 사망




1. 개요[편집]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은 칠레의 12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사냐르투 대통령과 에우로기아 에차우렌 가르시아-휘도브로의 아들이다. 그는 산티아고의 산 이그나시오 학교와 산티아고 국립 연구소에서 공부하여 학사 학위를 받았다. 1873년 3월 23일 칠레 대학교에 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1875년 그는 칠레의 마르틴 데 무지카 총독의 직계 후손인 게르트루디스 에체니케 무지카(Gertrudis Echenique Muhiica)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6명의 자녀를 두었다: 후안 호세, 엘레나, 페데리코, 에울로지아, 호르헤, 마리아 헤수스.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은 1876년 자유당에 입당하여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879년에 재선되었고 중도 정치인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는 태평양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대신 자신의 하시엔다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도밍고 산타 마리아 대통령 치하의 교회와 국가 사이의 종교적 논쟁 동안 그는 보수 세력에 가담했다. 1890년 8월, 대통령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는 그를 벨리사리오 프라츠의 조정 내각 아래 전쟁 및 해군 장관으로 임명했다. 1891년 그는 발마세다 대통령 퇴위법의 서명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91년 칠레 내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내전이 끝난 후, 그는 카우케네스와 콘스티투시온 (1891–1891년 ~ 1894년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전문가를 찾아 독일로 여행을 가야 했다. 1년 반 동안 그는 유럽을 여행했고 심지어 교황 레오 13세를 방문하기도 했다. 1894년 그는 칠레로 돌아왔고, 1894년 마울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호르헤 몬트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과 공공교육장관을 맡았다.


3. 대통령 시절[편집]


1896년 9월 18일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46세의 나이로 취임했지만, 그 무렵 그는 이미 그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죽을 병의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지지자들과 야당들 모두 그를 대단한 정치적 교활함을 가진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진정한 애국자로 보았지만, 야당은 그를 최악의 과잉 행동을 할 수 있는 부패한 정치인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처음부터 그의 통치를 어렵게 만들었는데, 그가 상원에서는 다수를 차지했지만 하원에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질산염 산업의 점진적인 위기와 그로 인한 실업과 사회적 위기로 인해 경제 상황이 꾸준히 악화되었던 국가를 받았다. 불안정성에 대항하기 위해 그는 자유당 아니발 자냐르투와 함께 3명의 자유당과 3명의 보수주의자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지지 연정의 정치적 합의를 넓히려고 노력했다.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이 합의는 겨우 두 달 동안 지속되었다.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은 17개의 내각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부터 1897년까지 카를로스 안투네스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자유롭고 "깨끗한" 선거를 보장한 혐의로 기소했다. 안투네스는 1897년 3월 총선이 끝날 때까지 총재직을 맡았고, 이후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판단하고 사임했다. 이 선거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정부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했다. 1898년 카를로스 워커 마르티네스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할 때까지 에라주리즈 에카우렌은 보수당과 점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자신을 선출한 연합에 충성했고, 예를 들어 칠레 급진당의 어떤 구성원도 그의 내각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각의 위기, 선거,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의 행정부 내의 모든 문제에 대한 에라수리스의 반응은 항상 일관적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먼저 상의하지 않고는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고, 항상 정당들의 의지에 종속되었다.


3.1. 공공정책[편집]


에라수리스의 행정은 공교육의 현저한 발전으로 특징지어졌다. 그의 충동으로 보건 전문가 구성을 위한 여러 기관들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에는 산티아고 상업 연구소, 산티아고이키케에 있는 새로운 고등학교, 발파라이소의 에스쿠엘라 프로페셔널 데 니냐스(Escuela Professional de Ninyas)가 있다. 이 행정부는 산티아고, 발파라이소, 산 펠리페, 산 베르나르도의 새로운 트램 시스템에도 기여했다.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은 산티아고를 위한 새로운 하수 시스템과 발파라이소를 위한 물을 제공하는 페뉴엘라스의 저수지를 계약했다.

그는 통화 정책 분야에서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다. 그가 원하던 금속 전환으로의 복귀는 아르헨티나와의 전쟁 위협으로 인해 보류되었다. 1902년까지의 조치의 지연은 은행에 대한 공개적인 운영을 야기했고, 거의 은행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정부가 지폐를 발행하고 유통시키도록 강요했다.


3.2. 아르헨티나 문제[편집]



정부가 직면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국제문제였다. 칠레아르헨티나는 1881년 평화 조약에서 비롯된 오랜 국경 분쟁, 푸나 데 아타카마(이전에 볼리비아가 소유하고 양국이 영유권을 주장했던 분쟁 지역)의 상황, 그리고 계속되는 해군 군비 경쟁으로 인해 전쟁 직전이었다. 에라수리스 대통령은 분명히 평화주의자였지만, 어느 순간 양국은 예비군을 소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 해결책은 에라수리스 대통령의 사촌이자 후계자인 헤르만 리에스코가 통치하던 1902년까지 해결되지 않은 잉글랜드 국왕의 중재에 문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중재와 전쟁 회피 결정을 축하하기 위해 에라수리스 대통령과 아르헨티나 대통령 훌리오 로카는 마젤란 해협에서 국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해협의 포옹" (스페인어: El Abrazo del Estrecho)으로 알려져 있으며, 1899년 2월 15일 푼타아레나스 시 앞에서 열렸다.


3.3. 승계 논란[편집]


당시 대부분의 대통령들처럼, 그는 그의 후임자의 선출에 일찍 관여했다.


3.4. 건강 문제와 사망[편집]


에라수리스의 병은 그의 모든 기간 동안 계속해서 그를 괴롭혔다. 그는 1893년 독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고, 1897년 큰아들이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더욱 쇠약해졌다. 1900년 6월 11일, 그는 엘리아스 페르난데스 알바노 부통령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해야 했다. 그는 같은 해 10월 11일 자신의 임무를 다시 수행했지만, 1901년 7월 12일 발파라이소에 있는 동안 뇌혈전증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는 헌법상 그의 내무부 장관 아니발 자냐르투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는 그의 남은 임기 동안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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