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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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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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Antonio Pinto y Díaz de la Puente
1785년 7월 23일 ~ 1858년 7월 18일

1. 개요
2. 생애
3. 정치 경력
3.1. 이후의 삶




1. 개요[편집]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이 디아스 데 라 푸엔테는 칠레의 정치인으로, 1827년부터 1829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냈다.


2. 생애[편집]


그는 호아킨 핀토와 메르세데스 디아스 데 라 푸엔테의 아들로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1808년 10월 11일, 산 펠리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 상업에 전념했다. 당시 사회 규범에 따르면, 그는 또한 왕의 연대 (Regimiento del Rey)에서 민병대 장교가 되었다. 1810년, 리마에 있을 때, 그는 왕국의 정부 군정이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그 나라로 돌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외교 사절단을 맡았다. 그 성공적인 첫 번째 임무 후에, 그는 독립 운동에 대한 지지를 모으는 임무와 함께 영국으로, 그리고 나서 다른 유럽 국가들로 보내졌다. 유럽에 있는 동안 그는 랑카과 전투에서 칠레군이 패배하고 스페인군칠레군을 탈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군대의 편성에 협력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핀토는 루이사 가르멘디아 알두랄데와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조카이자 호세 미겔 카레라의 손자인 이그나시오 카레라 핀토는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이 되었다.


3. 정치 경력[편집]


1820년에 그는 마침내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페루의 독립을 돕기 위해 베르나르도 오히긴스에 의해 페루로 보내졌다. 1824년 코킴보 총독, 1825년 코킴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827년, 대통령 아구스틴 에이야기르의 사임으로 라몬 프레이레 장군이 대통령으로, 그리고 핀토 장군이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827년 5월 5일, 라몬 프레이레 장군이 사임하자, 핀토 장군은 "우발적인 대통령"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1828년 헌법 초안에 참여하였다.

1829년 5월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핀토 장군은 118명의 선거인단(29.06%)을 얻어 9명의 후보 중 확실한 승자로 10월 19일 당선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9년 칠레 내전이 발발했다.

혁명을 일으킨 문제는 부통령 선거에서 발생했다. 2위 프란시스코 루이즈 타글레(98명 선거인단 24.13%)이나 2위 호세 호아킨 프리에토 장군(61명 15.02%)이 모두 보수당원이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되었고 또한 자유주의자인 프란시스코 라몬 비쿠냐에 의해 주재되었다. 부통령 후보가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상원 의장의 형제인 호아킨 비쿠냐를 선출했는데, 호아킨 비쿠냐가 선거인단 48표(11.82%)를 얻는데 그쳤다. 그것은 보수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핑계였다.

핀토는 11월 2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1829년 7월 16일 핀토가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에게 권한을 위임한 이래 이미 "우발적인 대통령"으로 활동하던 프란시스코 라몬 비쿠냐가 그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다.


3.1. 이후의 삶[편집]


핀토는 1841년 하원의원으로서 공직 생활로 돌아왔다. 1841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그의 아들 마누엘 불네스 장군에 대항하여 그를 대통령 후보로 선언하였다. 그는 어떠한 적극적인 형태로도 그 캠페인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43년 5월 30일 라 세레나의 대리인이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846년에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영구적인 전쟁과 해군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또한 마누엘 불네스 대통령에 의해 추밀원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식물학자 클로드 게이는 칠레에서 온 현화식물인 핀토아를 발표했는데, 핀토아는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핀토(Francisco Antonio Pinto)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1847년 7월 5일 그는 상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855년에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858년 7월 18일 산티아고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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