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안토니오 리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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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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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an Antonio Ríos Morales
1888년 11월 10일 ~ 1946년 6월 27일

1. 개요
2. 생애
3. 정치적 부상
3.1. 1942년 대통령 선거 운동
4. 대통령 시절
4.1. 국내 문제
4.2. 경제발전
4.3. 대외 관계
5. 죽음




1. 개요[편집]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 모랄레스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사무실에서 죽었다.


2. 생애[편집]


리오스는 칠레 남부 아라우코 주의 석탄 채굴 마을 카네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지주 안셀모르 리오스와 그의 세 번째 아내 루신다 모랄레스의 막내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결혼 당시 그는 69세였고 그의 젊은 아내는 19세였다.)는 그가 매우 어렸을 때 사망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세 형제는 그의 어머니에 의해 혼자 자랐다. 그는 카네테의 시골 학교에서 초등 공부를 마쳤고, 처음에는 레부의 리세오에서 중등 공부를 마쳤고, 나중에는 콘셉시온에서 중등 공부를 마쳤으며, 그의 학교의 부속 학교에서 주어진 과정들에서 법률 공부를 계속했다. 리오스는 1914년 칠레 경찰의 창설과 발전에 대한 설명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3. 정치적 부상[편집]


고등학교 시절부터 칠레 급진당의 보수파 당원으로 활동한 그는 그 당의 청년 지부의 지역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후에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남부 지역을 책임지는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선거 운동을 했다. 그는 알레산드리에 의해 파나마 총영사와 차르제 대사의 임명과 함께 보상을 받았다. 1921년 10월 21일 마르타 이데와 결혼하여 후안, 카를로스, 페르난도 등 3명의 아들을 낳았다.

1924년 칠레 의회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아라우코, 레부, 카네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에 재선되었다. 1925년 칠레의 쿠데타로 알레산드리가 권좌에 복귀한 후, 그는 새로운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고, 1925년 칠레 헌법이 승인되고 선언되었다.

그 사이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는 칠레 급진당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대령이 재임하는 동안 그는 정부의 독재 행정에 대한 그의 당의 반대와 정부의 결과에 대한 개인적인 찬미 사이에 끼였다. 당 총재로서 그는 아라우코, 말레코, 카우틴의 상원의원으로서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대통령에 의해 소집된 선출되지 않은 의회에 참가했다. 1931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이 몰락한 후, 리오스는 전 독재정권과의 협력으로 그의 당에서 쫓겨났다.

1932년은 리오스에 정치적으로 매우 격동의 시기였다. 우선, 그는 1932년 칠레 쿠데타를 지지했는데, 이는 후안 에스테반 몬테로 대통령을 무너뜨린 성공적인 쿠데타였고, 칠레 사회주의 공화국의 선언을 낳았다. 그 후 카를로스 다빌라가 국가원수를 맡았을 때 그는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결국, 3개월 후 다빌라가 사임하자 바르톨로메 블랑슈 장군이 대통령이 되었고, 리오스는 그의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팔마가 당선되고 제도적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외면당했다.

리오스는 1933년 의회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아라우코와 카네테의 대리인으로 선출되었다. 그것이 그의 정치적 복귀의 시작이었다. 1935년 그는 다시 급진주의자로 환영받았다. 1937년, 칠레 급진당, 칠레 사회당, 칠레 공산당, 민주당, 급진사회당은 물론 칠레 노동조합, 마푸체 운동, 프란테 우니코 아라우카노, 페미니스트 무이멘토 프로에마콘 데 라시폰과 같은 조직들을 통합하였다.레스 데 칠레(MEMCh)는 인민 전선에서 동맹을 맺었고, 리오스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오스는 1938년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지명을 받은 페드로 아기레 세르다에게 패배하였다.

아기레 세르다 정권 시절, 리오스는 칠레 최대 은행인 카야 데 크레도 히포테카리오의 총재였다. 그는 또한 그의 당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주요 정치적 경쟁자는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였지만, 곧 그는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자신의 정치적 발전을 추구할 자유가 있었다. 당시 페드로 아기레 세르다 대통령도 그에게 대사직을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통령에게 그의 제의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갈 것이다.'


3.1. 1942년 대통령 선거 운동[편집]


1941년 11월 25일 아기레 세르다 대통령은 자신의 내무부 장관인 제로니모 멘데스를 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1942년 2월 1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것은 리오스가 기다리던 기회였고, 그는 즉시 원정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비 선거를 이틀 앞두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칠레로 돌아와 지명을 반대했다. 결과가 너무 가까워서, 선거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가 마침내 좌파연합의 후보로 선언되었다. 이 민주 동맹이 창당하였다.

좌파연합은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장군을 상대로 연합했다. 1942년 선거에서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를 꺾고 보수파 반파시스트 후보로 부상했다.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는 칠레의 보수당, 자유당, 국가사회당, 인민사회당 뱅가드, 그리고 대부분의 무소속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리오스는 55.95%의 득표율을 얻어 1942년 4월 2일에 취임했다.


4. 대통령 시절[편집]


리오스의 대통령직은 처음부터 그의 내각의 다른 정치적 성향과 의회의 새로운 영향력 증대와 경쟁으로 인한 의회 불안으로 특징지어졌다. 칠레 공산당은 리오스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선택했고 추축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반대했고, 우파는 그가 좌파에 안주했다고 비난했다. 경제적으로 그는 국내 노동 불안에 직면했는데, 이는 대부분 전 세계적으로 구리 가격의 하락에 의해 야기된 것이었고, 동시에 칠레 사회당은 그가 대기업에 너무 연약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노동 법안을 제정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4.1. 국내 문제[편집]


비록 리오스가 칠레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었지만, 그는 이 정당이 정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고, 따라서 그들의 반대를 얻었다. 대신 리오스의 선택은 내각과 고위 정부 직책에 "기술 전문가"와 "개인적 친구"를 임명하는 것이었다.

1943년, 의회는 1925년 헌법의 첫 번째 헌법 개정에 서명했다. 이 개혁은 헌법상 감사관 직위를 부여하고 의회의 승인 없이 공공 지출에 관한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했다.

1944년, 칠레 급진당 스스로가 리오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련의 제안을 했다. 그 중에는 스페인 프랑코주의자들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1943년 1월 추축국과 외교 관계를 끊는 계기가 되었다. 칠레 급진당의 제안들을 이행하는 데 그의 거부와 산티아고 불네 광장에서 일어난 폭동들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은 몇몇 죽음으로 이어졌고, 모든 급진주의 장관들의 사임을 야기하여 대통령은 정당 없이 남게 되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1945년 의회 선거 기간 동안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붕괴였던 '우파 정당들의 성공'을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급진당 자체는 많은 의석을 잃었다.

1946년 1월 17일 알프레도 두할데 내무부 장관에게 대통령 권한을 이양하고 6월 27일 암으로 사망하였다.


4.2. 경제발전[편집]


아기레 세르다의 정책을 계속하는 리오스의 행정부는 철강, 전력, 석유 산업의 발전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지난 정부 때 만들어진 생산개발공사(CORFO)를 통해 자금이 전달됐다.

그리하여 1944년 1월 17일 국립 전기 회사(ENDESA), 1950년 6월 19일 국립 석유 회사(ENAP), 1942년 태평양 철강 회사(CAP)가 탈카후아노 항구 옆에 화치파토 제철소를 열었다.


4.3. 대외 관계[편집]


1943년까지 칠레아르헨티나추축국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거부했고, 칠레 선거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대통령과 그 지지자인 민주연합 사이에 심한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당초 리오스의 정부는 전쟁 기간 중 중립을 지켰지만, 그의 연립 좌파 정당들은 추축국과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결별과 소련의 인정에 찬성했다. 1943년 1월 20일, 그는 추축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독일이탈리아에 선전포고만 하고, 칠레는 1945년까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칠레가 임대차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였고, 경제 회복을 돕기 위해 필요한 대출을 얻었으며, 1945년 칠레는 승리국들에 속했고 따라서 전후 국제회의에 참여할 권리를 얻었다.


5. 죽음[편집]


1945년 12월 3일 리오스는 국빈 방문에서 복귀하여 권력을 회복하였다. 그는 1946년 1월 17일 부통령으로 취임한 알프레도 두할데 내무부 장관에게 대통령 권한을 이양했다.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는 라 레이나에 있는 빌라 파야후에에서 마지막 날을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1946년 6월 27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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