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리에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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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군사평의회 의장 →
1. 1924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2. 대통령직 부활
3.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 폐지 및 사회주의 공화국 체제
4. 대통령직 부활
5. 1973년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 폐지
6. 1980년 헌법 개정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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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án Riesco Errázuriz
1854년 5월 28일 ~ 1916년 12월 8일

1. 개요
2. 생애
3. 대통령 시절
3.1. 공공 정책
3.2. 국제 정세
4. 사회적 불안
4.1. 고기 폭동
5. 발파라이소 대지진




1. 개요[편집]


헤르만 리에스코 에라수리스는 칠레의 정치인으로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칠레의 대통령을 지냈다.


2. 생애[편집]


그는 스페인 상인 마우리시오 리에스코와 바스크계 대통령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사냐르투의 누이 카를로타 에라수리스 자냐르투의 아들로 랑카과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미나의 콩세미나리오와 칠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7세(변호사 졸업 4년 전)에 그는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것을 돕기 위해 법무부에서 서기로서 첫 번째 공공 직업을 얻었다.

그는 1875년 4월 19일에 변호사로서 졸업했고, 1880년에 법무부의 서기로 승진했다. 같은 해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에라수리스 에차우렌과 결혼하여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의 처남이 되었다. 1891년 산티아고 항소법원 서기가 되었고, 1897년 대법원 서기가 되었다. 1898년 사법부에서 은퇴하여 개인 업무에 전념하였다.


3. 대통령 시절[편집]


헤르만 리에스코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1900년 탈카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을 때였다. 대통령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에차우렌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1901년 3월 8일 자유동맹에 의해 후보로 선언되었다. 이 동맹은 리에스코 에라수리스가 보수당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급진파, 민주파, 발마세다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처음부터 그의 입후보는 성직자-보수 단체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다. 그들의 신문 엘 포르벤은 그를 "종교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난하는 캠페인을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사법부에서 보냈기 때문에 정치적 노출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덕분에 엄청난 수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호소를 요약했다. 그는 1901년 9월 18일에 취임했다.


3.1. 공공 정책[편집]


리에스코 대통령은 의회 분열에 직면했다. 그는 17개 이상의 다른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각각의 정부는 평균 3개월 반 동안 지속되었다. 자유연대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버림받았고 보수연합(그의 이전의 반대자들)의 지지를 구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임기를 마치기 위해 두 그룹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의회 과반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효과나 영속성이 결여된 관리 장관들을 임명할 수 밖에 없었다.

전직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그의 주된 노력은 법률 개혁에 집중되었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는 새로운 민사소송법(1902년)과 거의 100년 동안 지속된 형사소송법(1906년)을 제정하는데 성공했다. 1905년 그는 1911년 완공된 대법원의 새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산티아고 시의 하수구와 새로운 전기 트램 네트워크와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공공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특히 여성을 위한 중등 교육을 크게 확장했고, 새로운 교사들을 준비하기 위해 사범학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치솟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는 금속 전환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절하고, 지폐의 새로운 배출을 허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조치는 환율의 급격한 하락과 더 높은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이는 결국 더 높은 사회 불안으로 자리를 내주었다.


3.2. 국제 정세[편집]


1901년 말, 국제무대에서 칠레아르헨티나는 국경 분쟁으로 인해 전쟁 직전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해군 군비 경쟁이 있었고, 양국은 예비군을 소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가 우세했고, 1902년 5월 28일 양국은 5월 조약에 서명했고, 같은 해 11월 20일 파타고니아에 대한 중재가 이어졌다. 이 조약들은 관세의 공통성과 함께 양국의 전신선 연합으로 보완되었다.

그는 1904년 10월 20일 볼리비아와 최종 평화 조약을 맺어 태평양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시켰다. 그는 또한 1906년 타크나와 아리카 논쟁의 해결을 위해 페루와 외교 관계를 재정립했다.


4. 사회적 불안[편집]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소위 "사회적 질문"이 갑자기 비판적이 되었다. 1903년에서 1905년 사이에 북부에서 광부, 선하역 노동자, 철도 노동자, 산티아고에서 주택 페인트공, 무두공, 우편 노동자, 경찰, 쓰레기 수집가, 버스 운전사, 라칼레라, 레부, 로타, 코로넬에서 석탄 광부, 발파라이소에서 시위대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는 선하역 노동자 였다.


4.1. 고기 폭동[편집]


1905년 10월 22일, 산티아고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일부는 고기의 높은 가격에 항의하기 위해 행진을 조직했다. 고기의 가격은 국내 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서 수입하는 소에 적용되는 특별 관세와 높은 인플레이션을 결합함으로써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제품의 가격을 높은 비율의 인구의 재정적 수단을 넘어서게 한다. 행진이 라 모네다에 평화적으로 도착하여 리에스코 대통령과의 접견을 요청했을 때는 이미 2만 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불어났다.

대통령이 나타나지 않자 국민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경찰이 해산시키려 하자 맞서 싸우며 대통령궁을 습격하려 했다. 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며 대응했고 폭동이 이어졌다. 폭력은 거의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고, 광범위한 폭동과 약탈이 있었고, 이를 고기 폭동 또는 붉은 주라고 불렀다. 이 기간 동안 200명에서 250명 사이의 시위자들이 살해되었다. 이 반란은 사회 문제가 당국이 믿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4.2. 안토파가스타 총파업[편집]


몇 달 후, 비슷한 반란이 안토파가스타에서 일어났다. 안토파가스타-볼리비아 철도의 레일을 깔고 있던 근로자들은 경영진에 요구서를 제출했지만 회사는 이를 완전히 거부했다. 그 결과 총파업이 실시되었다 육류 폭동의 이전 경험은 에스메랄다 연대와 유람선 블랑코 엔칼라다를 파견하여 지역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정부에 경고를 주었다.

1906년 2월 6일, 약 3,000명의 노동자들이 그의 요구에 찬성하는 시위를 하기 위해 안토파가스타의 공공 광장에 모였다. 군대는 비무장 노동자들에게 발포하여 약 58명의 사망자와 300명 이상의 부상자를 냈다.


5. 발파라이소 대지진[편집]


지진은 해군 기상청장에 의해 열흘 전에 발표되었다. 1906년 8월 16일은 매우 맑은 날로 시작했지만, 오후가 되자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첫 번째 충격이 왔다. 그것은 약 4분 동안 지속되었다.

첫 번째 충격 이후, 사람들은 생존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약 15분 후, 두 번째 충격이 항구를 강타했다. 이것은 1분 정도 더 짧았지만, 첫 번째 것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그것은 도시의 파괴를 완료했고 대부분의 희생자들을 발생시켰다. 도시의 대부분은 평지가 되었고, 약탈이 일어났다. 주지사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현장에서 잡힌 약탈자는 즉시 사살되었다.

통신이 전면 중단되면서 도시는 고립되었다. 첫 소식은 17일 오후 산티아고(내륙 120km에 불과하다)에 도착했다. 사흘 뒤인 20일 내무부 장관들이 가까스로 항구에 도착했다. 리에스코 대통령과 새로 선출된 페드로 몬트가 25일 도착했다. 그들은 파괴된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 기차, 도보,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그는 1916년 12월 8일 62세의 나이로 심장병으로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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