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플로이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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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리처드 라이트
로저 워터스
시드 바렛

{{{#808080
[ 데뷔 이전 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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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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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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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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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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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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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vision Bell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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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dless River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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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ve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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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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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There Anybody Out There?
The Wall Live 1980-81

200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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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pil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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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997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A1110; font-size: .8em"
Echoes: The Best of Pink Floyd
200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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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n-album Singl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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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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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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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Hey Rise Up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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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데뷔부터 시드 배릿 시절까지(1963~68)
3. 과도기(1968~71)
4. 전성기(1972~75)
5. 로저 워터스의 독주 체제(1976~85)
5.2. The Wall, 릭 라이트의 탈퇴[1]
6. 데이비드 길모어 리드 체제(1986~)
6.2. A Momentary Lapse of Reason, 라이트의 재가입
6.4. 그 후
6.5. Live 8에서 일시적인 재결합
6.6. 멤버들의 솔로 활동, 배릿과 라이트의 죽음
6.8. 마무리, 그 이후
7. 현재, 핑크 플로이드와 워터스와의 분쟁


1. 개요[편집]


핑크 플로이드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데뷔부터 시드 배릿 시절까지(1963~68)[편집]



2.1. 초기[편집]



파일:pinkfloyd1965.jpg

1965년 초기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 로저 워터스, 시드 배릿, 닉 메이슨, 밥 클로스, 릭 라이트

1963년 당시 리전드 스트리트 폴리테크닉(현재 웨스트 민스터) 대학에서 노래를 부르던 학생 키스 노벨과 첼시 예술대학 출신의 기타를 치던(이후 베이스로 변경) 클라이브 메트컬프가 리전드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에서 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밴드에는 건축학을 공부했던 로저 워터스가 기타로, 친구이자 같은 건축학 학생인 닉 메이슨이 드럼으로 지원했고, 그외 노블의 여자형제 셰일라도 지원했다. 이후 건축학 동기 였던 리처드 라이트[2] 키보드로 지원하면서,[3] 밴드 시그마 6(Sigma 6)가 결성되었다.[4] 그때 라이트의 여자친구였던 줄리엣 게일[5]이 보컬로 도와주기도 했다.

이후 1964년엔 밥 클로스가 기타로 밴드에 들어왔고, 이때 워터스는 베이스로 포지션을 바꾼다. 이후 'Meggadeaths어?'The Abdabs', 'The Screaming Abdabs', 'Leonard's Lodgers', 'The Spectrum Five' 등의 많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가, 결과적으로 'The Tea Set'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클라이브 메트컬프와 키스 노벨은 자신의 밴드를 만들기 위해 밴드를 떠났고, 두 사람을 대체하는 사람으로 기타의 클로스와 같은 예술대학을 다니던 시드 바렛과 보컬의 크리스 데니스가 밴드에 참여했다. 여담으로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 밥 클로스는 똑같이 케임브리지셔 고등학교 출신이다.[6]

1965년 크리스 데니스가 밴드를 떠나게 되어 시드 바렛이 보컬과 기타를 모두 맡게되면서 리더가 됐다. 또한 이름 교체의 필요성을 느낀 바렛은 당시 유명했던 블루스 연주자 핑크 앤더슨과 플로이드 카운슬의 이름을 각각 따와 그룹 이름을 The Pink Floyd Sound라고 지었다.[7] 이후 밴드는 당시 음악학교를 다니던 라이트의 연줄으로 처음으로 데모녹음을 했다. 이때 녹음한 곡들은 주로 밴드가 커버했던 블루스 커버곡이나 시드의 초기 자작곡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자료들은 후일 2015년에 1965: Their First Recordings EP로 공개 되었다.

이후 밴드는 계속 클럽에서 활동을 전진해 나가고 있었는데, 1966년 밥 클로스가 부모의 반대로 밴드에서 탈퇴하고, 런던정치경제대학의 강사인 피터 제너가 우연히 마키 클럽에서 밴드의 공연을 보고 감명받아 밴드의 매니저로 합류한다. 이후 그의 절친인 앤드류 킹도 합류했다. 비슷한 시기 밴드 음악성에도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름이 비롯한 것처럼 평범한 블루스 밴드였지만, 점점 사이키델릭 록으로 음악적 성향이 변해갔다. 비슷한 시기 밴드활동이 점점 많아지면서 맴버들은 모두 다니던 학업을 포기했다.

2.2. 데뷔와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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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시드 배릿, 릭 라이트



1967년 BBC에서 Pow R. Toc H. & Astronomy Domine 공연[8]

당시 그들은 피터 화이트헤드 감독의 “Tonite Let's All Make Love in London”라는 영화에 "Interstellar Overdrive"[9][10]와 "Nick's Boogie"의 라이브 버전을 삽입하게 된다. 이 음원은 이후 1995년EP London 66-67로 출시된다.

밴드의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지자 1967년 EMI 음반사와 계약을 맺고 《Arnold Layne》를 발표 했다. 복장 도착에 대한 주제 때문에 일부 라디오에선 곡의 재생을 거부했지만, 영국 음악 차트의 20위에 등극해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둔다. 이후 《See Emily Play》를 발표해 영국 음악 차트의 6위에 등극했다. 이후 밴드는 BBC 방송 등에 출연하며 영국의 메이저 밴드로 등극했지만, 이 무렵부터 시드 바렛의 정신건강이 점점 안좋아지기 시작한다.

이후 밴드는 노먼 스미스와 녹음 계약을 협상하고 애비 로드 스튜디오[11]에서 녹음해서, 첫 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발표했다. 이 데뷔 앨범은 사이키델릭 록의 절정기였던 1967년에 나온 많은 앨범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이키델릭 앨범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후 밴드는 Top of the Pops 같은 방송에도 출연하기 시작했고,[12] BBC 라디오에도 자주 출연했다. 또한 밴드는 아서 브라운과 함께 저예산 영화 ‘위원회(The Committee)’의 영화음악에 참여했고,[13] 지미 헨드릭스 투어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밴드의 인기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멤버들은 압박감을 느끼게 됐고, 핵심 인물이었던 시드 배릿은 이를 이겨내기 위해 마약을 복용하게 되고, 심각하게 중독 상태에 이르러서 결국에는 작곡은커녕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게 될 정도로 정신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다.[14] 특히 밴드는 당시 미국 투어를 계획했으나, 배릿이 음악방송인 Pat Boone Show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American Bandstand에서 See Emily Play를 연주하는걸 거부하는 등 이상행동을 보이면서 매니저 앤드류 킹은 투어를 취소시킨다.


3. 과도기(1968~71)[편집]



3.1. A Saucerful of Secrets, 시드 배릿의 탈퇴, 데이비드 길모어의 가입[편집]


결국 1968년 시드 배릿은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15] 탈퇴한다. 그를 대체할 멤버로 라이트는 처음에는 제프 벡을 영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제프 벡이 노래를 하는 기타리스트도 아니고 최종적으로 제프 벡이 거절하여 결국 조커스 와일드(Jokers Wild)라는 블루스 록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데이비드 길모어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엔 시드 배릿을 대체하는 세션 멤버였는데 시드 배릿의 정신증세가 심각해지자 시드 배릿은 결국 2집 앨범 《A Saucerful of Secrets》의 발매 전 밴드를 탈퇴하고, 길모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그 덕에 두 번째 앨범은 시드 배릿이 참여한 곡과 데이비드 길모어가 참여한 곡이 섞여있다. 이 시점 밴드의 매니저였던 피터 제너와 앤드류 킹은 밴드와의 매니저 관계를 정리했다. 이후 밴드의 새 매니저로 전부터 두 매니저 밑에서 일했던 스티브 오루크가 위임받았다.

그런 상태에서 2집 A Saucerful of Secrets [16]을 발표하는데, 전작보다 소음과 소리 왜곡, 테이프 루프등 다양한 효과들이 비교적 많이 쓰였다. 커버도 사진을 사용한 1집과 다르게 과거 워터스와 배릿, 길모어와 친구였던 스톰 소거슨이 오브리 파웰과 설립한 디자인 회사 힙노시스가 디자인 했다.[17] 밴드의 음악적 상황도 변화가 있는데 거의 시드 배릿이 주도한 1집과 달리 이 음반은 거의 워터스와 라이트의 주도로 만들어졌다.[18] 작사, 작곡, 편곡을 거의 도맡아 하던 시드 배릿의 탈퇴 이후 밴드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내 생각에 《A Saucerful of Secrets》는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한 음반이었어요.”

-닉 메이슨

이 앨범의 경우 영국에선 9위에 올랐지만, 미국 차트는 진입조차 못했다. 또한 비슷한 해 발표한 싱글 It Would Be So NicePoint Me at the Sky는 차트 진입에 실패했다. 이후 밴드는 11년간 영국에서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다.

1969년 초에 바벳 슈로더 감독의 히피를 주재로 한 영화 'More'에 사운드 트랙으로 참여했다. 이 음원은 단 9일간 폭주로 녹음했다고 하며 EMI의 사운드 트랙 차원에서 허락을 받아 비공식 사운드 트랙겸 3번째 정규음반 Music from the Film More 를 발표되었다. 해당 영화는 지나친 마약장면과 섹스장면 때문에 금방 묻혔지만, 사운드 트랙은 영국 차트 9위에 진입하면서 차트 진입에 성공한다.

”슈로더는 영화 뒤에 숨은 사운드트랙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의 말은 정말 글자 그대로 였어요. 예를 들어 차 안에서 라디오가 켜진다고 하면, 그는 차 안에선 뭔가가 튀어나오는 장면을 원했죠. 슈로더는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음악을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 시키고 싶어 했어요.”

-로저 워터스


3.2. Ummagumma[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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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 릭 라이트,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1969년 10월 독일에서 열린 Essener Pop & Blues Festival에서 A Saucerful Of Secrets 공연
1969년 여름 계속 소규모 공연장에서만 공연을 했던 밴드는 처음으로 대형 공연장인 로열 앨버트 홀에서 공연을 갖는데, 더 매스드 가제츠 오브 디 옥시먼스(The Massed Gadgets Of The Auximines)라는 제목의 이 공연은 The Man and The Journey라는 모음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곡들은 모두 밴드가 발표한 곡과 미발매한 곡들을 모아서 구성된 곡으로, 여러 효과와 다양한 퍼포먼스와 함께 공연되었다.[19][20] 그외 비슷한 해 아폴로 11호의 BBC 착륙 생방송에서 즉흥 라이브를 의뢰 받아 Moonhead라는 곡을 달이 착륙하는 장면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고,[21] 프랭크 자파와 합동공연을 가지기도 했다.[22]

69년 말에는 Ummagumma 라는 음반을 발매했다. 이 음반은 밴드 역대 음반중 가장 실험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음반으로, 당시 유행하던 Live+Studio 형식으로, A, B면(Live)은 무관중 라이브로 녹음된 라이브를 들려주는 반면 C, D면(Studio)은 각 멤버 별 사이키델릭 성향이 강한 실험작들을 통해 독특한 음악 세계를 만들어내었다. Ummagumma은 밴드의 공연 투어 스케줄로 인해 다소 급하게 녹음 되었고, 음악도 굉장히 전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차트 5위에 진입했고 평론가들에게도 시드 배릿의 핑크 플로이드 이후 가장 높게 평가 받았다.

”진정 위대한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

- 발매 직후 레코드 미러의 평

하지만 이후 밴드가 여려 명반을 발매하고 시대가 많이 지나면서 현재는 호불호가 갈리는 평가를 받으며, 훗날 멤버들은 인터뷰에서 이 음반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우린 길가에 있는 이정표를 애써 무시하고 Ummagumma를 만들었죠. (중략) 이 음반은 우리가 개개인으로서가 아닌 함께 작업할때 더 나은 결과를 보여줄수 있다는 걸 증명한 작품이었어요.”

-닉 메이슨

비슷한 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자브리스키 포인트(Zabriskie Point)》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참여했다. 원래는 사운드트랙 전체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안토니오니의 고집으로 결국 5곡만 수록시킨다.[23]

”완전 X같은 일이 었어요. 는 늘 뭔가 잘못되었다며 꼬투리를 잡았죠. 완벽한 작품을 만들려면 뭔가 멈춰야 했어요. 맘에 안드는 부분을 다 바꿔줘도 그는 늘 불만족스러워 했어요.”

-로저 워터스


3.3. Atom Heart Mother, Meddle[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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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Live at Pompeii 중. (왼쪽부터)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릭 라이트, 로저 워터스



Live at Pompeii 중 Echoes Part 1

1970년에 들어서 밴드는 라이브 투어를 계속 돈다. 같은 해 워터스는 메이슨에 의해 소개받은 아방가르드 작곡가이자 첼로 연주자인 론 기신과 함께 다큐멘터리 바디의 사운드 트랙을(Music from The Body) 작업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워터스는 그에게 다음반에 참여해줄 것을 권유했고, 이 합작은 초기에 The Amazing Pudding라는 이름으로 투어에서 초연 되었다가 후에 Atom Heart Mother로 변경 되었다. 이 음악은 또한 69년에 로열 앨버트 홀 공연을 계기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스튜디오 앨범에 써먹어야겠다는 워터스의 구상이기도 했다.[24]

그렇게 1970년 후반에 Atom Heart Mother 라는 음반을 발표하는데, 음반 내에서 기존의 사이키델릭 성향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타이틀 곡은 오케스트라와 의미없는 가사의 혼합, 앨범 제목조차도 신문 기사에서 따온 '인공 심장을 가진 어머니'를 사용하며 자신들의 음악을 사이키델릭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발심리를 표출한다. 그리고 Alan's Psychedelic Breakfast라는[25] 곡에서는 밴드의 공연 매니저인 Alan Stiles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으며, 이 음반의 엔지니어인 알란 파슨스[26]와 함께 작업하며 계란 굽는 소리, 오줌 소리 등 각종 효과음을 사용하며 음악을 만들었다.[27] 이 음반은 엄청난 실험성에도 불구하고 영국 차트 1위를 찍었고, 미국에 빌보드는 70위까지 진입했다. 이 기록은 당시 핑크 플로이드의 역대 차트성적중 가장 좋은 성적이다. 하지만 훗날 멤버들 특히 워터스와 길모어는 Ummagumma와 더불어 이 음반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Atom Heart Mother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다시는 아무한테도 들려주지 않을 겁니다.”

-로저 워터스


”쓰레기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정말 침체기에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비슷한 해 탈퇴한 시드 배릿은 새 솔로 앨범 The Madcap Laughs를 발매한다. 이 음반은 길모어와 워터스가 제작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영국 차트 40위로 비교적 묻힌다. 이후 이 음반에서 빠진 곡들을 모아 다음 음반 Barrett을 발표하고 배릿은 은둔생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1971년, 밴드는 투어를 계속 돌면서 스튜디오에서 두가지 작업일 진행한다. 첫 프로젝트는 Household Objects로 말 그대로 집안 물건만 사용하여 녹음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 멤버가 각자 좋아하는 걸 같은 음로 연주해 보자는 아이디어다. 이중 전자는 중간에 중단되었고, 후자는 시행착오를 격긴 하지만 이후 Return Of The Son of Nothing이라는 이름을 거쳐 Echoes라는 대곡으로 탄생하게 된다.

다음음반을 준비중이었던 1971년 중반에 다음음반에 대해 걱정했던 EMI는 산하 레이블인 스타라인을 통해 이전에 싱글로 발표된 곡들과 미발표곡 Biding My Time를 포함시킨 컴필레이션 앨범 "Relics"를 발매했다.[28]

이후 약 6개월뒤 Meddle 를 발매하는데, 시드의 탈퇴 이후 겉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핑크 플로이드는 이때 와서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B면의 23분 정도의 길이의 대곡인 Echoes는 핑크 플로이드가 추구하는 음악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블루스와 사이키델릭의 융합, 그러면서 동시에 프로그레시브적인 곡 구성, 예술적인 가사로 우주적인 사운드를 구현해냈다. Meddle은 영국차트 3위, 미국차트 70위를 기록했고, 평론가들에게 Atom Heart Mother보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Echoes는 플로이드가 지금까지 한 가장 훌륭한 트랙 중 하나입니다.”

-릭 라이트


”Meddle은 제 인생 최고의 음반입니다. 그리고 핑크 플로이드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 작품이죠.”

-데이비드 길모어


데이비드 길모어의 출현은 밴드에게 실질적인 힘을 불어넣는 요소다.”

-롤링 스톤의 평가.

Meddle이 거의 완성될 무렵 프랑스의 영화 감독 애드리안 마벤이 밴드를 찾아와 미술가들의 그림이미지를 배경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이 흐르는 영화를 제안 했지만 밴드는 거절했다. 이후 마벤은 이탈리아 폼페이의 베수비오산 아래 원형 극장을 여행하던 도중 여권을 잃어버려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내면서 당장 귀신이 나올거 같은 분위기와 유적 사이로 날아다니는 곤충과 박쥐소리들이 꼭 앰프를 사용하는것 처럼 자연적으로 증폭 되는 것에 인상을 받았다. 이후 마벤은 밴드를 한번 더 찾아가 그림 영화가 아닌 텅빈 폼페이 원형극장에서 라이브를 하는 록 음악 영화를 제안했고, 멤버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밴드는 10월에 폼페이로 가서 라이브에서 자주 연주했던 Careful with That Axe, Eugene, A Saucerful of Secrets,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은 물론 신곡 Echoes, One of these Day, Mademoiselle Nobs[29]를 촬영했고 이후 12월에 파리에서 필요한 장면들을 추가로 촬영 했다. 이 영화는 1972년 에딘버리 영화제에서 Live at Pompeii라는 제목으로 첫 공개 되었다. 이 영화은 핑크 플로이드 최고의 라이브로 뽑히는 영화로, 특히 밴드의 라이브와 폼페이의 유적이 교차하는 장면이 이 영화에 백미다.[30]

4. 전성기(1972~75)[편집]



4.1. The Dark Side of the Moon[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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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rk Side of the Moon 시절 포스터 멤버들 사진.[31]



The Dark Side Of The Moon에 수록된 Money 뮤직비디오

1972년 들어서 밴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 작품으로 오프닝을 열었다. 사운드 효과가 들어 있는 테이프를 재생한체 연주 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공연은 오디오 장치에 오작동으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곡은 훗날 Money라는 곡으로 탄생하게 된다. 1년전 워터스는 멤버들에게 ‘한사람의 인생에 돌연히 나타나 불안감을 안기는 압박감과 어려움, 의문들에 대한 총체’에 대해 곡을 쓰자고 제안하는데 이는 1972년에 The Dark Side Of The Moon이라는 구상으로 완성 되었다.[32] 이후 아직 미완성된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레인보우 극장에서 첫 초연되는데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냈다.

같은해 영화 More의 감독이었던 바벳 슈로더의 영화 '구름 낀 계곡'의 사운드트랙를 맡으면서, 프랑스에서 2주간 녹음했다. 이때 부터 사용 장비에 변화도 생겼는데 평소 오르간과 피아노만 사용했던 릭 라이트가 신디사이저 EMS VCS3를 최대로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이 악기들은 훗날 The Dark Side Of The Moon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영화음악은 비공식 사운드트랙 겸 정규 음반 Obscured by Clouds 로 발표되었다.

Obscured by Clouds가 나온 이후에도 밴드는 계속 미완성된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를 돌았었고, 11월에는 마르세유 발레단과 합동 공연을 갖기도 하였다.

비슷한해 밴드는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33] 이 시절 라이트는 재즈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음반에 여러 부분 영향을 미쳤고,[34] 워터스는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래 자신의 경험과 정신세계에서 기반한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가치관을 건조하고 냉담한 선율로 앨범에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몇몇 음반의 몇몇 효과음들은 엔지니어 앨런 파슨스에 의해 여러 사물들의 소리들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으로 만들어 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973년 3월 The Dark Side of the Moon 을 발매하는데, 이 음반은 핑크 플로이드의 모든 앨범 중에서 가장 상업적, 음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 된다. 이 앨범은 미국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전세계적으로 4천만 장 이상 팔렸으며, 영국 앨범 차트에 301주 이상, 빌보드 앨범 차트에 741주 이상 기재[35]되었다.[36]

”록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멜로드라마 이상의 웅장함을 갖춘 작품이다. Dark Side of the Moon엔 번뜩이는 섬광이 있다.”

-발매직후 롤링 스톤의 필자 로이드 그로스먼의 평가.


”핑크 플로이드 최고의 음악적 모험.”

-발매직후 NME의 평가.


Ummagumma 이후 최고작.”

-발매직후 멜로디 메이커의 평가.

《The Dark Side of the Moon》 는 멤버들에게 엄청난 성공을 안겨주었다. 멤버 전원이 새 저택을 장만했고, 특히 메이슨은 스포츠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외 이미 1972년부터 진행되었던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는 1973년 끝무렵 까지 이어졌고 투어에는 밴드 외에도 색소폰 연주자 딕 패리와 백킹 보컬 2명이 같이 무대에 올랐다.[37]

“이 음반을 저를 많은 면에서 변화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돈을 벌여들었고, 2년 동안 이 음반이 계속 팔릴 때, 매우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에 대한 나의 태도를 변화 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성공을 거뒀음에도 다른 모든 음반들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음악을 내놓는데 대한 기준은 우리가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전부 였습니다. 이 음반은 상업적인 음반을 만들려는 의도적인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런 식으로 일어난 거예요. 우리는 이것이 기존의 핑크 플로이드 음반들보다 훨씬 더 많은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관통하는 컨셉이 있었습니다. 그 음악은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고 여성 백보컬을 추가한것은 우리의 음반들 중 어느 음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상업적인 감성을 더했습니다.”

-릭 라이트

또한 1973년 말 하비스트에서 컴필레이션 음반 A Nice Pair을 발매했다.[38]

4.2. Wish You Were Here[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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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윔블던 스타디움에서.[39]



1975년 네브워스 콘서트 일부 영상[40]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를 마친 밴드는 다시 애비 로드 스튜디오로 돌아와 1971년 이후 보류중이 었던 Household 프로젝트를 제개한다. 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집안에 있는 물건을 이용해서만 녹음하겠다는 것이다. 이후 1974년 초반에 밴드는 잠시 휴식기를 가지면서 메이슨은 소프트 머신의 전 멤버였던 로버트 와이어트의 음반 Rock Bottom을 프로듀스 해주었고, 길모어는 케이트 부시를 소개 받고 그를 자신이 스튜디오에서 데모녹음을 할수있게 해준다.

1974년 중반 투어를 다시 시작하면서 공연 세트리스트에 변화가 왔다. 전에 밴드가 주로 공연했던 Careful with That Axe, Eugene나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 같은 곡이 빠지고 대신 Shine On과[41] Raving and Drooling[42], Gotta Be Crazy[43][44] 라는 신곡이 추가되었며, 그중 Shine On은 밴드의 전 멤버 시드 배릿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은 곡으로 시드 배릿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곡이었다. 그외 1974년 투어에서 밴드는 처음으로 대형 원형 스크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에서 진행중이었던 Household 프로젝트는 녹음 난이도에 부딪혀 결국 무산되었고,[45] 방향을 바꾸어 소외와 상실에 대한 주제로 다음 앨범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날엔 라이트와 워터스가 Shine on You Crazy Diamond의 보컬 파트를 작업하고 있던 도중 한 대머리의 수상한 청년이 들어와 갑자기 양치질(...)을 하고 다시 앉기를 반복하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보였는데 멤버들은 처음엔 엔지니어줄 알았다가 한 45분쯤 작업하다 어느 순간 그가 시드 배릿[46]이라는 걸 알아차렸다고한다. 나중에 멤버들은 이러한 상황을 슬퍼했다. 라이트에 따르면 배릿은 이후 라이트에게 ‘라이트, 언제 기타를 칠까?’라고 물어봤고 기타가 없는걸 본 라이트는 ‘미안해, 시드, 기타로 할 건 더 없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시드의 변한 모습을 본 멤버들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난 그 모습을 보고 X나게(...) 울었어요.”

-로저 워터스


”로저가 말하더라고요. ‘저녀석 누군지 알겠어? 시드야.’ 정말 이루 말할수 없는 쇼크를 먹었죠. 시드는 계속 선 채로 이를 닦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칫솔을 치우곤 자리에 앉았죠.”

-릭 라이트

이렇게 1975년 9월에 Wish You Were Here[47]를 발표했다. 이때 당시 몇년동안 이어온 투어에 지친 밴드는 1975년 여름 네브워스 콘서트 이후 1977년 까지 어떠한 콘서트도 열리 않았었는데, 음반은 홍보 없이도 영국 차트와 미국 차트에 모두 1위를 기록했고, 처음에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으나,[48] 이후 점점 재평가와 호평을 받아 현재는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더불어 핑크 플로이드 최고의 음반으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길모어와 라이트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으로 뽑기도 했다.


5. 로저 워터스의 독주 체제(1976~85)[편집]



5.1. Animals[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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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릭 라이트

1975년 말 밴드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나와 이슬링턴에 있는 3층짜리 교회 홀 건물을 구입해 이곳을 브리타니아 로우라는 이름에 스튜디오로 개조하였다.

1976년 브리타니아 로우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 작업에 들어 가기 시작했는데 당시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던 영국의 상황에 대중들은 이에 항의하는 펑크에 열광하기 시작했으며,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은 하락세의 못이겨 해산하거나, 팝적으로 장르를 바꿔서 활동했는데, 핑크 플로이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Animals에선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전보다 더 거친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고, 조지 오웰동물 농장에서 영감을 얻어서 개, 돼지, 양으로 나눠 만들어졌다. 그렇게 1977년 1월에 음반을 발표해 영국 차트 2위, 미국 차트 3위에 올라 성공을 거두지만, 워터스의 강력한 영향력과[49] 그에 불만을 가진 멤버들간의 불화가 시작되었고, 특히 릭 라이트가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첫 음반이기도 하다.

”Animals는 고투 끝에 나온 음반이에요. 음반을 만들면서 그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했어요. 로저가 자신이 밴드의 유일한 작곡가라고 믿었던 바로 그 시점 부터일거예요. 그는 밴드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는게 자신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죠. 그건 명백한 자아도취 였어요.”

-릭 라이트

이후 Animals 음반 투어인 In The Flesh 투어를 시작했는데, 이 투어의 특징이라면 예전보다 훨씬 많은 소품을 사용했고, 특히 이후 핑크 플로이드의 상징중 하나가 되는 돼지풍선도 이때 처음 사용되어지기 시작했다. 그외 기존의 백킹보컬이 빠지고 기존에 색소폰을 불던 딕 패리가 중간에 키보드 세션을 맡고, 기타리스트 스노위 화이트가 기타/베이스 세션멤버로 참여한것이다.

Animals 투어는 표가 매진될 정도로 성공했지만, 멤버들은 굉장히 힘들어하고 피곤해 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공연에서 무대앞 드라이아이스를 너무 많이 사용한 바람에 객석에서 무대가 안보이자, 객석의 팬들이 무대로 병과 캔을 던진 사건도 있었고, 또 필라델피아에선 공연전 백스테이지에서 워터스가 위경련으로 쓰러져 의사에게 근육 이완제 응급처치만 받고 손의 감각이 없는 상태로 연주했던 일도 있었다.[50] 이후 마지막 공연인 몬트리올 공연에선 워터스가 Pigs on the Wing Part 2를 연주하던 도중 객석에서 훨씬더 큰 소리의 폭죽이 터졌고, 워터스는 분노해 노래를 끊고 폭죽을 터트린 관객에서 욕설을 날리고[51] 이후 Pigs (Three Different Ones) 공연 도중 관중석 앞쪽의 그 관객을 찾아 침을 뱉은 사건도 있었다. 이날 공연은 앵콜곡으로 블루스 잼을 했었는데 이때 길모어는 앵콜 요청을 거절하고 무대에 올라오지 않았다.

5.2. The Wall, 릭 라이트의 탈퇴[5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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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로저 워터스, 릭 라이트,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1980년 8월 런던 얼스 코트에서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 공연[53]

1978년 밴드는 제임스 캘러헌노동당 정부에 의해 세금으로 수입의 83%를 때가야 했다.[54] 이에 밴드의 투자 자문 회사 노턴 워버그는 밴드가 벌어들이는 소득을 여러 회사로 분산투자하면 세금을 절약할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 투자가 실패하여 밴드는 재정이 파탄나기 시작했고, 결국 밴드는 노턴 워버그를 계약 철회하고 미투자금을 반환하라고 요구하기 이른다. 그러나 결국 밴드의 재정은 파산 직전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다급해진 워터스는 곧바로 다음 앨범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였다. 그 후 브리타니아 로우 스튜디오에 모인 멤버들에게 워터스는 하나는 지금의 《The Wall》의 컨셉을, 또 다른 하나는 나중에 워터스의 솔로음반으로 나오는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의 컨셉을 제안하였고. 최종적으로 The Wall로 결정되었다.

다른 멤버들이 딱히 반응을 안보이자 조력자가 필요한 워터스는 캐나다 프로듀서 밥 에즈린을 만났다. 워터스와 에즈린은 음반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에즈린은 이 구상에 주인공을 워터스에서 핑크라는 3인칭 가상의 인물으로 확대 시켰다. 하지만 언급한 세금문제 때문에 멤버들은 영국을 떠나야 했고, 결국 워터스는 스위스, 메이슨은 프랑스, 길모어와 라이트는 그리스로 떠났다. 이때 브리타니아 스튜디오의 장비 일부를 니스 인근의 Super Bear 스튜디오로 옮겨졌고, 이곳에서 길모어는 David Gilmour를, 라이트는 Wet Dream를 녹음하는 등 솔로 음반에 집중했다.

밴드가 유럽과 미국의 여러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구상하고 있는 동안 워터스와 라이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틀어졌다. 핑크 플로이드는 항상 앨범 프로듀서에 핑크 플로이드라고 표기해 왔는데, 워터스가 라이트와 메이슨에게 The Wall에선 프로듀서 크레딧에 워터스, 길모어, 에즈린만 표기하고, 이번 앨범엔 프로듀서 크레딧을 줄 수 없겠다고 전하게 되었고, 메이슨은 승낙한 반면 라이트는 자신도 음반 프로듀싱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이후 워터스는 프로듀스를 할수 있는지 수습기간이라는 전제로 프로듀서 음반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리는것에 동의했지만, 이후 라이트의 기여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에즈린이 라이트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한 이후 라이트는 본인 파트를 연주할때 이외에 스튜디오를 찾아오는 일을 멈췄다. 당시 라이트는 밴드 문제 말고도 In The Flash 투어때 부터 아내 줄리안과 사이가 급격이 나빠졌고, 세금 문제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식들을 못 만나면서[55] 굉장히 우울해 했었다고 한다. 이때 라이트의 우울증과 밴드의 재정 상황이 겹처 다른 멤버들도 라이트에게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릭의 행동은 모두를 뚜껑열리게 했습니다.”

-데이비드 길모어[56]


”라이트는 압박상태에서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로는 워터스가 그를 완전히 망가뜨리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라이트는 자유롭게 창작하려면, 그를 간섭하지말고 혼자 있도록 해줘야 했었습니다.”

-밥 에즈린

The Wall 녹음이 진행되던 중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크리스마스 시즌때까지 음반을 발매하면 저작권료 비율을 높여주겠다고 제안하였다. 제정이 파탄난 밴드 입장에선 좋은 소식이긴 하나 이는 결국 원년 멤버의 탈퇴라는 비극적인 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밴드는 빨리 앨범을 만들기 위해 중간에 가족들과 함께하는 짧은 휴가를 끝내고 LA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서 부터는 멤버들에 이야기가 각각 다른데, 워터스는 메니저 스티브 오루크에게 라이트에게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올것을 시켰는데, 라이트가 엿이나 먹으라고 전했다고 말했고 여기에 대한 최후통첩으로 그를 해고했다고 말했고, 라이트는 그런 말 한적 없고 오루크에게 알겠다고만 한다음에 스케줄에 맞춰 도착 했을때 워터스가 본인을 밴드에서 나가길 원하고 있다고 들었다고 한다. 중간에 길모어가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워터스가 라이트를 해고하지 않으면 The Wall 음반을 핑크 플로이드 이름으로 발매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스티브 오루크를 시켜 릭에게 전화해 새로운 계획을 가져오라고 했어요. 이틀 후 스티브로 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릭의 소재를 알아냈어요. 지금 그리스에 있어요.’ 나는 이렇게 말했죠. ‘좋아, 그래서 대답이 긍정적이야?’ 그러자 스티브가 ‘아뇨, 로저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전하라고 그러던데요’라고 말하더군요. 간신히 버티던 관계가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어요.”

-로저 워터스


”난 ‘로저 엿이나 먹어!’라고 말한 적 없어요. 나는 ‘알았어, 약속 날짜 맞춰 볼게’라고 답했어요. 모두 동의했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우리가 예정된 스케줄보다 한참 뒤처졌다는 어떤 암시도 없었어요. 스티브는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 그게 내가 그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어요. LA에 도착한 순간 스티브는 ‘로저가 당신이 밴드에서 나가길 원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더군요.”

-릭 라이트


”난 그때 로저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로저, 그래선 안 돼. 릭은 우리랑 내내 함께해온 친구잖아. 네가 그게 싫더라도, 누군가를 팀 바깥으로 내보내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야. 그리고 이거 너무 독단적으로 결정한거 같지 않아?’ 그때 그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요. 릭이겐 이렇게 말했어요. ‘네가 마음을 좀 굳게 먹어야 할 것 같아, 릭. 하지만 너, 따지고 보면 이번 음반 작업에서 열심히 한 건 없잖아?’라고요.”

-데이비드 길모어

결국 라이트가 The Wall 작업이 끝난후 조용히 물러나거나, 워터스가 The Wall을 핑크 플로이드 이름으로 발매를 안 하거나로 결론이 났고 당시 밴드의 재정 상황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결국 전자가 선택되어 라이트가 The Wall 작업이 끝난뒤 밴드를 떠나는것으로 마무리 됐다. 하지만 라이트는 라이브 투어까지 함께하길 원했고, 워터스 또한 음반홍보를 위해 단결된 밴드를 보여줄 필요성을 느껴, 라이트의 탈퇴 소식은 The Wall 투어가 끝날때 까지 알려지지 않았다.[57] 이때 라이트가 녹음못한 몇몇 피아노/키보드 파트는 결국 에즈린과 키보디스트 프레드 맨델[58]이 대신 녹음하였다.

”난 우리에게 닥친 재정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밴드가 갈기갈기 찢어질 거라고 생각했죠. 그렇지만 나는 결국 음반 녹음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어요. 멤버들에게 라이브까지 함께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죠.”

-릭 라이트


”로저는 ‘이건 내 레코드야. 내가 너희에게 연주할 기회를 준 거야’라는 입장이었어요. 사실 모든 건 밴드가 겪던 재정 문제 때문이었어요. 로저는 모든 것을 현찰로 가득 찬 가방처럼 보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밥 에즈린

그런 우여곡절 끝에 1979년 11월 발매한 The Wall은 영국 차트 3위, 미국에서는 1980년에 15주 동안 1위를 차지하며 정상에 올랐고, 11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59] 앨범 커버는 제럴드 스카프의 작품으로, 이는 1집이후 힙노시스가 참여하지 않은 첫 음반이다. 독주 체제 하에 나왔다고는 해도 핑크 플로이드 커리어 상 최고의 앨범의 자리를 다투는 작품임은 틀림이 없다. 그외 약 11년만에 싱글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를 발매해 미국, 노르웨이, 서독, 남아공등에서 1위를 기록했고, 특히 교육에 대한 비판적인 가사는 전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이르켰다. 특히 데일리 메일등 영국에 보수 언론에선 이곡을 격렬하게 비난했고, 남아공에선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흑인 학생들이 이곡을 투쟁가로 부르면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앨범의 성공과 함께 밴드는 《The Wall》 투어를 진행하는데, 이 투어는 역대 핑크 플로이드 투어 중 가장 스케일이 큰 투어였다. 각 캐릭터를 상징하는 인형에, 밴드는 공연에 MC와 4명에 남성 백킹 보컬리스트와 키보디스트 피터 우드, 베이시스트 앤디 보운, 드러머 월리 윌슨, Animals 투어에서 함께했던 기타리스트 스노위 화이트를[60] 세션 멤버로 고용해 첫곡 In The Flesh?에서 이 세션 멤버들이 해당 멤버에 마스크를 쓰고 관객들이 진짜 핑크 플로이드인 것처럼 믿게 한 후 이후 진짜 멤버들과 같이 연주하도록 공연을 구성하였고, 그외 소품도 늘어났는데 특히 1부에서 무대 중간에 마분지로 제작된 벽을 쌓다가(밴드는 벽 안에서 공연), 2부에선 다 쌓아진 벽 속에서 밴드가 연주하고 마지막엔 무너지는 형식으로 이루어 졌었다.[61] 하지만 이를 다 옮기기 위해선 막대한 돈이 들었고, 이전 투어들보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한 결과 투어는 적자를 기록해 런던, LA, 뉴욕, 도르트문트에서만 진행되었고, 멤버들이 투어 때 빌린 돈을 다 갚지 못한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탈퇴 당해 세션 멤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릭 라이트만 핑크 플로이드 멤버 중 유일하게 The Wall 투어로 돈을 번 멤버가 되었다. 물론 그때까진 외부에서 라이트에 탈퇴소식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투어를 시작하면서 안 그래도 음반 제작 막바지에 멀어지기 시작했던 워터스와 에즈린의 관계도 틀어졌다. 워터스와 에즈린에 계약엔 공연 관련 기밀사항이 있었는데 에즈린이 이를 위반 했기 때문이다. 이후 워터스는 모든 The Wall 공연에 에즈린을 출입금지 시켰다.

5.3. The Final Cut[편집]




《The Final Cut》 단편영화 중 The Fletcher Memorial Home

이후 메이슨은 《The Wall》 녹음이 끝나던 시점에 녹음한 첫 솔로 음반 Nick Mason's Fictitious Sports를 발표했고, 몇 달 뒤 EMI에서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 컴필레이션 음반《A Collection Of Great Dance Songs》을 발매했다.[62][63]

1982년 알란 파커 감독으로 《The Wall》Pink Floyd - The Wall로 영화화되었고, 얼마 후 워터스는 라이트의 탈퇴 소식을 언론에 알렸다.

이후 《Pink Floyd : The Wall》의 담긴 새로운 곡들을 포함한 사운드트랙 형태의 음반 Spare Bricks를 제작할 예정이었지만, 같은 해 일어났던 포클랜드 전쟁에 영향으로 반전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로저의 아버지에 대한 컨셉트로 변경되었고,[64] 컨셉트 음반 The Final Cut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음반 제작 도중 길모어와 워터스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따로 녹음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 시점에 메이슨도 길모어 편을 들기 시작했다.

《The Final Cut》은 1983년 3월에 발매되어 영국 차트 1위와 미국 차트 6위를 기록했지만, 평론가들에 반응은 엇갈렸고 워터스만 작곡에 참여하고 다른 멤버들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상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이라기보다는 로저 워터스의 솔로 앨범이었다.[65] 이후 The Final Cut의 뮤직비디오 형태의 단편영화도 공개되었다.

이후 멤버들은 투어 없이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1984년에 워터스는 이전에 구상했다가 버려진 컨셉트 음반 The Pros and Cons of Hitch Hiking를 발매해 앨범에 참여한 에릭 클랩튼과 투어를 돌았고,[66] 길모어는 워터스와 틀어져 있던 밥 에즈린과 공동 프로듀싱으로 제프 포카로와 피노 팔라디노 등의 유명 세션맨을 고용해 두 번째 솔로 음반 About Face를 발매해 역시 투어를 돌았다.[67]

그 외 워터스로부터 탈퇴당한 릭 라이트는 1984년에 하비스트 사와 계약을 맺고 뉴웨이브 그룹 '패션'의 싱어송라이터 데이브 디 해리스와 일렉트로 팝 듀오 'Zee'를 결성해 Identity를 발매했다.

같은 해 캐피톨에서 새 컴필레이션 앨범 《Works》를 발매했다. 여기에는 밴드가 초창기 라이브에서 많이 연주했지만, 그간 공개하지 못한 곡 <Embryo>가 수록 되었고, <Brain Damage>가 다른 믹스 버전으로 들어갔다.

1985년에 메이슨은 아트록 그룹 10CC의 리더 릭 펜과 함께한 《Profiles》를 발매했다. 같은 해 밴드는 몇 년 전 《Pink Floyd - The Wall》에서 핑크 역을 연기한 밥 겔도프가 기획한 라이브 에이드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길모어만 록시 뮤직의 보컬 브라이언 페리와 무대에 올랐다.[68]

6. 데이비드 길모어 리드 체제(1986~)[편집]



6.1. 로저 워터스의 탈퇴[편집]


1985년 중반 워터스는 핑크 플로이드는 끝났다고 생각하며, 밴드의 매니저 스티브 오루크에게 솔로 매니저 계약을 제안했는데, 오루크는 이를 나머지 멤버들에게 알렸고 워터스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이후 워터스는 오루크를 핑크 플로이드에서 해고하려 했지만, 나머지 멤버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밴드의 이름을 다른 멤버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고등 법원에 신청서를 제출하지만, 길모어는 워터스의 소관이 아님을 명확히 하면서 밴드활동을 계속 할것을 밝혔다. 길모어의 말이 가능할거라고 믿지 않았던 워터스는 12월에 밴드를 탈퇴하고 ‘핑크 플로이드는 끝났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길모어는 이 선포를 뒤집어 다음 음반을 작업을 시작했다고 알렸고, 결국 이는 워터스와의 법적 공방으로 이어 졌다. 이후 1986년 워터스는 밴드 블리딩 하트 밴드를 결성해 반전 애니메이션 바람이 불 때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하고, 1년 뒤 발매될 솔로음반 Radio K.A.O.S.의 제작에 들어갔다.

6.2. A Momentary Lapse of Reason, 라이트의 재가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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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닉 메이슨,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



1988년 8월 뉴욕 나소 베터런스 메모리얼 콜리시엄에서 Learning To Fly 공연.

비슷한 시기 길모어는 조력자로 (전에 워터스와 공동으로 The Wall을 제작했고, 이후 길모어의 솔로음반에 참여한) 밥 에즈린을 협력 시킨다. 또한 연주자로 전에 브라이언 페리와 라이브 에이드에서 함께 공연했던 세션 키보디스트 존 카린을 영입했고,[69] 워터스의 부재로 빠진 베이스 파트는 킹 크림슨의 멤버이자, 당시 피터 가브리엘의 So 녹음을 마친 토니 레빈이 연주했다. 또한 작사/작곡 조력자로 록시 뮤직의 기타리스트 필 만자네라와 마돈나의 Like A Prayer과 Live To Tell에서 작곡가로 참여한 패트릭 레너드, 재즈 록 밴드 슬랩 해피의 싱어송라이터 앤서니 무어가 참여했다.

같은 해 길모어는 대형 선박 아스토리아를 구입해 이곳을 스튜디오로 개조해 음반 데모 작업에 들어간다. 비슷한 시기 밴드는 새 조력자를 한명 더 찾았다. 바로 전에 워터스에 의해 탈퇴 당했던 릭 라이트로 당시 라이트의 아내였던 프랭카가 길모어를 찾아가 라이트도 합류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후 멤버들과 라이트는 햄스테드에서 만났고, 길모어는 라이트를 합류시켰다. 하지만 전에 라이트가 서명한 탈퇴 조항이 재가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워터스와의 법적공방이 더 까다로워 질것을 우려해 정규 멤버로 가입하진 않았다.

당시 워터스와의 법적공방은 두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매니저 스티브 오루크와의 계약상 문제였고, 두번째는 바로 워터스가 제출한 핑크 플로이드를 해체 요구하는 소장이었다. 게다가 두개 모두 구두합의로만 된것이기 때문에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70]

그외 밴드 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메이슨이 과거 만큼 드럼을 못 커버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드럼은 대부분 드럼머신으로 교체 되었고, 라이트 또한 밴드에 돌아오긴 했지만 몇몇 백 보컬과 몇 개의 키보드 파트를 연주하는 것에 그쳤다.[71]

이렇게 힘든 작업여정을 거쳐 1987년 새음반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을 발매하게 된다. 이 음반은 상업적으로 영국, 미국 차트 3위에 올라갈 정도로 성공했지만, 비평가들에게 무지막지한 혹평을 받았는데, 특히 워터스는 이 음반을 형편없는 음악에 가사는 삼류라고 깠고,[72] 음반에서 세션을 맡은 라이트 마저 이 의견에 동조해 밴드의 음반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몇몇 평론가들은 The Final Cut에서 워터스가 그랬듯이 이 음반은 길모어의 솔로 음반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전반적으로 곡들이 형편 없어요. 가사는 눈뜨고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요. 길모어가 쓴 가사는 저열한 삼류에요.”

-로저 워터스


”로저의 비평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건 밴드의 앨범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릭 라이트

앨범 발매 이후 밴드는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를 시작하는데, 투어 멤버로는 세 멤버 말고도 위에 언급한 존 카린과, 길모어의 친구이자 전에 워터스와 투어를 돌았던 기타리스트 팀 레윅, 퍼포먼스의 특화된 퍼커션주자 게리 월리스와 색소폰 연주자 스콧 페이지, 백킹 보컬리스트 레이첼 퓨리, 마가렛 테일러, 두르가 맥브룸이 참여했고, 워터스의 부재로 생긴 베이스는 처음에는 음반에 참여한 토니 레빈에게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이후 젊은 베이스 연주자 가이 프랫으로 확정되었다. 처음 리허설때는 아무래도 거의 6년만에 맞춰보는 합주라서 그런지 우려가 많았고, 이때 북미에서 《Radio K.A.O.S.》 투어를 열던 워터스는 북미의 모든 기획자들에게 핑크 플로이드 티켓을 팔면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첫 투어인 북미 투어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오히려 워터스보다 핑크 플로이드가 훨씬 더 많은 수익을 내고 있었다.[73]

그리고 《Animals》 투어 때부터 쓰기 시작한 돼지 풍선에 관한 저작권도 있었는데 핑크 플로이드는 워터스 것과 구분하기 위해 돼지 다리 사이에 남성 성기(...)를 달아놓기도 했다.

투어가 진행중이던 1987년 말 워터스와의 법적 공방은 결국 길모어, 메이슨측이 승리로 끝났다. 스티브 오루크와의 문제는 워터스가 오루크로 부터 자유로워 지는것으로 결론 났고, 밴드의 이름은 길모어와 메이슨이 가지는 데 성공했다. 대신 《The Wall》《The Final Cut》은 워터스의 것이 되었다.[74]

이후 밴드는 유럽, 북미, 일본으로 이어지는 투어를 계속 진행하면서, 투어 전에는 굉장히 위축돼 있던 메이슨과 라이트의 연주는 점점 그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투어가 시작할때 고통스러워 보였던 라이트는 투어 중반에 들면서 자신이 지금껏 해본 투어중 가장 행복한 투어라고 밝히기도 했다. 투어 멤버들 끼리 공연이 끝나면 파티를 즐기기도 했었고, 피셔멘스(Fishermens)라는 밴드를 만들어 200명 앞에서 비공식 잼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외 젊은 베이스 연주자인 가이 프랫은 당시 10대였던 라이트의 딸 갈라와 사귀기 시작했다.[75]

1988년 8월 뉴욕의 나소 베터런스 메모리얼 콜리시엄에서 4일간 공연은 녹음/녹화 되었고, 이 실황은 라이브 음반 《Delicate Sound of Thunder》로 11월에 발매되었다. 또 밴드는 비슷한해 소련을 방문하여 소유즈 TM-7호 발사에 참석했고,[76] 1년뒤 1989년 다시 러시아로가 5일간 무료 공연을 진행했다. 이후 7월에는 밴드는 길모어의 제안으로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에서 야외 공연을 개최했고,[77] 18일 마르세유 공연을 끝으로 3년간 지속 됐던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를 마무리 지었다. 이 투어는 핑크 플로이드 역사상 가장 길게 진행된 투어이며, 마이클 잭슨Bad 투어를 제치고 1980년대 모든 아티스트 투어 중 가장 큰 수익을 낸 투어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 밴드는 1990년 6월 30일에 네브워스 파크에서 열린 노르도프 로빈스 음악 치료센터를 위한 자선 공연인 Knebworth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참여했다.[78][79] 이는 1975년 첫 참여 이후 두번째로 참여는 것으로, 밴드 말고도, 폴 메카트니, 필 콜린스, 로버트 플랜트,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등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공연이었다. 이 무렵 라이트는 계약상 완벽한 신분은 아니지만 정규 멤버로 가입했다. 비슷한 무렵 워터스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해 베를린에서 The Wall - Live in Berlin을 개최했다.

1년 뒤 밴드는 멕시코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 La Carrera Panamericana의 참여한다. 차덕후로 유명한 메이슨은 물론 길모어와 매니저 오루크도 참여했고, 경기에서 오루크는 다리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밴드는 이 경주를 담을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하기 위해 올림픽 스튜디오로 모여 즉흥 연주로 곡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녹음한 음악의 특징이라면 The Dark Side Of The Moon 이후 오랜만에 메이슨과 라이트가 작곡에 참여 했다는것이다.[80]

1992년에는 시드 바렛에게 바치는 박스 세트 Shine On을 출시했다. 이 박스세트는 A Saucerful of Secrets, Meddle,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Animals, The Wall, A Momentary Lapse of Reason이 리마스터링되어 들어있고, 1967년 ~ 1968년 발매한 싱글에 음원을 모은 The Early Singles도 들어있다. 같은 해 워터스는 1987년부터 제작했던 새 음반 Amused to Death를 발매했다. 이 음반은 천안문 사태걸프전등에 영향을 받은 반전을 주제로한 컨셉트 앨범으로 전에 밴드 합류 제안을 거절했던 제프 벡이 기타로, 몇년전 길모어와 작곡 파트너로 일했던 팻 레너드가 키보드를 맡았다. Amused to Death는 영국차트 8위를 기록했고,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이후 워터스는 전부터 준비하던 오페라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투어를 열지 않았다.

6.3. The Division Bell[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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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닉 메이슨, 데이비드 길모어, 릭 라이트



1994년 런던 얼스 코트에서 High Hopes공연

1993년 밴드는 새 음반 작업에 착수했다. 처음에는 브라티나아 로우에서 세 멤버 끼리만 시작했다가, 이후 베이스로 가이 프랫이 합류했다. 전 앨범 작업 때와는 다르게 멤버간 불화나, 법적공방 같은 걸림돌이 없어서 그런지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순식간에 65곡이나 만들어 낸다. 이후 멤버들은 곡을 추려나갔고, 이중 27곡이 선택되고, 그중에서 개별곡들을 합치거나 새 아이디어를 더해 15곡으로 줄려졌고 이중 4곡을 버려 최종적으로 11곡으로 결정났다.[81][82]

앨범작업이 중간쯤 되어갔을때 길모어는 작사 협력자로 여성 기자 폴리 샘슨을 만났다. 샘슨은 High Hopes등 음반 몇몇 곡에서 가사를 썼고, 이를 계기로 길모어 친해져 연인관계로 발전하여 두 사람은 앨범 발매 후 결혼했다. 그외 A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때 참여 했던 존 카린, 게리 월리스, 두르가 맥브룸이 중간에 앨범 작업에 합류 했고, 특히 카린은 라이트가 전에 밴드에서 사용했던 파피사 오르간, Prophet 5 신디사이저를 다시 고쳐 앨범에 사용했다. 또한 전에 밴드에서 색소폰 세션을 맡았던 딕 패리가 참여해 색소폰을 불었다.[83] 비슷해 밴드는 서섹스에 코드레이 루인스 캐슬에서 지역병원을 위한 자선 공연에 참여했다.[84] 음반 작업 막바지에는 전에 The Wall에서 오케스트라 편곡을 맡았던 영화 음악가 마이클 케이멘이 오케스트라 편곡으로 참여했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로 유명한 작가 더글러스 애덤스의 제안으로 음반 제목이 The Division Bell으로 결정났다.

이렇게 1994년 초 14번째 음반 The Division Bell를 발매했다. 발매 이후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지금도 호불호가 갈리긴 하나,[85] 상업적으론 당시의 음악적 조류와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의 차트에서 모두 1위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86][87]

이후 밴드는 《The Division Bell》 투어를 여는데, 멤버로는 전에 투어에 참여했던 팀 레윅, 가이 프랫, 존 카린, 게리 월리스, 두르가 맥브룸은 물론 새로 백킹 보컬리스트 샘 브라운, 클라우디아 폰테민이 합류했고, 색소폰의 딕 패리 또한 투어의 합류했다. 이때 밴드는 공연 테마를 업그레이드 했고, 대형 스크린에 나올 영상도 소거슨의 의해 새로 만들어졌다. 그외 무대도 3개를 준비해 밴드가 1곳에서 공연할 때 다음 공연장에서 설치되는 식으로 진행했고, 이에 들어갈 비용를 보충하기 위해 폭스바겐의 스폰서를 받았다.[88]

세트리스트 방식도 변화가 왔는데,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에선 1부에서 앨범 전체를 연주한 반면, 이 투어에선 밴드의 전성기 시절 곡들과, The Division Bell의 곡이 섞여 있는 식으로 구성됐다. 또한 투어가 시작할 무렵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다시 차트를 진입하면서, 아에 The Dark Side of the Moon 음반 전체를 2부로 구성하기도 했고, 이 차트 재진입의 영향으로 음반이 나올 당시엔 태어나지 않았던 당시 젊은 사람들도 공연장에 많이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덕에 거의 모든 공연의 표가 매진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밴드를 보러 왔다.[89]

또한 이때 무렵 길모어와 메이슨은 새 아내와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기 시작했고, 라이트 또한 이후 결혼 하게될 밀리랑 연인관계로 인해 Momentary Lapse of Reason 투어처럼 투어 멤버들이랑 파티를 하는 일도 줄어 들었다고 한다. 그것때문에 세션 멤버들과 균열도 생기기도 했지만, 큰 균열은 아니었다. 이후 밴드는 과거 The Dark Side of the Moon 투어와 The Wall 투어를 열었던 런던의 얼스 코트 엑시비션 선터에서 14일간에 공연을 끝으로 투어를 마무리 했다.[90] 거의 1년 남짓한 투어 였지만, 이 투어는 1990년대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린 투어 3위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많은 수익을 얻은 투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위에 얼스 코트에서의 실황을 중심으로 투어 때 실황을 담은 라이브 음반 P.U.L.S.E가 1년뒤 발매 되었다.

6.4. 그 후[편집]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각기 다른 음악을 만들었던 두 멤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로저시드에게...”

-데이비드 길모어

1996년 1월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 빌리 코건의 추천으로 밴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멤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워터스는 참석하지 않았고, 길모어와 라이트는 빌리 코건과 함께 기념공연으로 Wish You Were Here를 연주하였다.

이후 다른 멤버들이 휴식기를 보내던 중, The Division Bell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 시키지 못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라이트는 새 솔로음반 Broken China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음반에선 라이트와 The Division Bell에서 Wearing the Inside Out를 같이 만들었던 앤서니 무어가 공동 제작으로 참여 했으며, 전에 밴드의 투어에서 세션기타를 맡은 팀 레윅이 기타를 맡았고, 그외 시네이드 오코너가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음반에 경우 영국 차트 61위까지 올라갔고, 평론가들에게 The Division Bell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해 메이슨은 밴드의 일대기를 담은 책 Inside Out: 내가 바라본 핑크 플로이드를 쓰기 시작했다.[91]

몇년뒤 1999년 워터스는 In The Flesh라는 제목에 투어를 돌기 시작했다. 이 투어에선 길모어 시대의 핑크 플로이드에서 세션 키보드를 맡았던 존 카린이 참여했고, 그외 기타리스트 스노위 화이트와 더불어 도일 브램홀 2세가 메인 기타를 맡았다. 또한 세트리스트로는 워터스가 플로이드에 있을때 만들었던 곡들이랑 솔로음반에 곡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밴드가 자주 연주 안했던 DogsThe Final Cut의 곡들도 포함되었다. 이때 애틀랜타 공연에서 카린에 초대로 라이트가 공연장에 왔고, 공연이 끝나고, 카린과 라이트의 아내 밀리의 설득으로 백스테이지로 내려가 거의 18년만에 워터스와 재회했다. 물론 둘다 어색해 하긴 했지만(...)

”난 로저를 한 18,19년 정도 만나지 못한 상태였어요. 악수를 하곤 ‘잘 지냈어?’라고 물었죠. 둘다 어색해 죽을 뻔했어요. 더 이상 할 말도 없었죠. 뭐 의미 있는 대화라곤 없었어요. 하지만 ‘우린 다 큰 성인이야 욕설 같은건 하지 말자’며 자신을 달래고 있었죠.(...)”

-릭 라이트

이후 2000년엔 The Wall 20주년 기념으로 당시 투어 실황을 담은 《Is There Anybody Out There? The Wall Live 1980-81》가 발매되었다. 비슷한해 멤버들은 다시모여 밴드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제작하기 시작했다.[92] 이때 또한 전 멤버인 워터스도 트랙 목록을 짜는 일에 참여했는데, 이때 네 멤버 끼리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93] 결국 시드 배릿 시절을 제외한 밴드의 초창기곡이 다 빠지면서 간신히 26곡으로 추려졌고, 여기에는 밴드가 이전에 싱글로 발표한 When the Tigers Broke Free도 포함 되었다. 이 음반은 엔지니어 제임스 거스리의 편집을 거쳐 2001년 《Echoes: The Best of Pink Floyd》로 출시되었다.

같은해 6월 길모어는 친구이자, 캔터베리신 거장인 로버트 와이어트의 초청으로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열리는 멜트다운 페스티벌에 참여해 솔로 콘서트를 열었다. 이공연은 평소 길모어의 공연과 다르게 언플러그드 방식으로 공연 되었고, 와이어트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이후 6개월 뒤 2002년 1월에 다시 이곳에서 공연을 열었고, 이공연엔 라이트가 게스트로 참여해 솔로 음반 Broken China에 수록된 Breakthrough를 불렀고, 영화 Pink Floyd - The Wall에서 Pink를 연기한 밥 겔도프가 엥콜에서 나와 길모어와 Comfortably Numb를 불렀다.

비슷한해 카리브해에서 휴가를 보내던 메이슨은 우연히 이곳에서 워터스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은 그날 오후를 같이 보내며 여러 대화를 나눴고, 당시 1년 쉬고있던 In The Flesh 투어를 재개하기 시작했던 워터스는 6월 런던 공연에 메이슨을 초청했다. 이 투어에선 카린이 빠지고, The WallGoodbye Blue Sky에서 어린이 목소리로 출연했던 워터스의 아들 해리 워터스가 성인이 되어 하몬드 오르간을 맡았다.[94] 메이슨은 6월 런던 공연에 참여해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을 연주했다.

2003년 말 밴드의 매니저를 맡았던 스티브 오루크가 사망했다. 1985년 이후 오루크와의 계약 문제로 사이가 멀어져 있던 로저 워터스는 그의 장례식의 참석하지 않았고,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그의 장례식에서 Fat Old SunThe Great Gig in the Sky를 연주하였다. 그리고 한달뒤 밴드와 워터스의 음반에서 오케스트라 편곡을 맡던 영화음악가 마이클 케이멘이 사망했다. 길모어는 몇년뒤 발매될 솔로 음반 On an Island에서 이 두 친구를 추모했다.

6.5. Live 8에서 일시적인 재결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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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Live 8 당시 멤버들 사진. (왼쪽부터) 데이비드 길모어, 로저 워터스, 닉 메이슨, 릭 라이트



Live 8 공연

2005년, 밥 겔도프의 기획으로 7월 2일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빈곤퇴치를 위한 대형 자선 록 콘서트 라이브 8을 열 계획이었다. 이 공연에 폴 매카트니, U2, 마돈나등등이 섭외 되었고, 전설적인 뮤지션을 찾던 겔도프는 핑크 플로이드를 섭외했고, 거기다가 로저 워터스와의 재결합까지 생각한다.

처음에 겔도프는 두 멤버와 그나마 친한 메이슨에게 연락했지만, 시간낭비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고, 이후 길모어와 만나 그에게 이 뜻을 전했고, 길모어는 며칠간 결정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 사이 메이슨은 워터스에게 겔도프의 재결합 구상을 이메일로 보냈고, 워터스는 즉시 겔도프와 연락을 한다. 이후 상황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중간에 메이슨의 중재로 워터스와 길모어가 통화를 한다. 이 둘의 대화는 1987년 법적 공방 이후 처음있는 일이며, 2003년 방영 했던 The Dark Side of the Moon 다큐멘터리에서 서로 논쟁을 펼친 후 2년 뒤었다. 예상외로 둘의 대화는 좋게 진행되었고, 이후 길모어는 재결합을 승인한다. 이후 라이트 또한 이 콘서트 참여에 동의했다.

이후 세트리스트를 짜기 위해 멤버들은 한자리의 모였고, 워터스는 그곳에서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와 Run Like Hell을 추천 했지만, 아프리카 빈민을 위한 자선 콘서트와 적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멤버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이후 세트리스트는 Breathe, Money(이곡은 겔도프의 요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Wish You Were Here, Comfortably Numb으로 결정되었고, 세션 멤버로는 오래전부터 밴드와 협력관계 였던 색소폰주자 딕 패리와 길모어의 핑크 플로이드와 워터스의 솔로 투어에서 모두 활약했던 기타리스트 팀 렌윅, 키보디스트 존 카린, 그리고 The Division Bell에서 백보컬을 맡았던 캐롤 케니언으로 결정났다.[95]

이후 드디어 2005년 7월 2일 로저 워터스를 포함한 모든 멤버가 라이브 8 콘서트에서 공연을 하였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 가려던 맴버들을 워터스가 불러 서로 포옹하였고, 포옹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 공연 직후 핑크 플로이드의 과거 앨범 판매량이 급등하였다. 《The Wall》3,600% 증가, 《Wish You Were Here》2,000%증가, 《The Dark Side Of The Moon》1,400% 증가, 《Animals》1,000%증가하였다.[96] 밴드는 이러한 음반 판매의 수익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멤버들은 엄청난 개런티 투어 제안을 받지만 모두 거절한다. 이후 11월에 밴드는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에서 헌액식에 참석했다. 이곳에선 더 후의 기타리스트이자 밴드의 팬인 피트 타운센드가 개회사를 했고, 이날 라이트는 눈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불참, 워터스는 로마에서 오페라 Ça Ira를 준비하던 중 비디오 스크린으로 참석했다.

6.6. 멤버들의 솔로 활동, 배릿과 라이트의 죽음[편집]



파일:Roger Water&Rick Wright 2007.jpg

2007년 시드 바렛 추모 콘서트 백스테이지에서 (왼쪽부터) 로저 워터스, 릭 라이트



2007년 시드 바렛 추모 콘서트에서 Arnold Layne을 연주하는 밴드[97]

1년뒤 길모어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솔로앨범 On an Island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영국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핑크 플로이드 멤버의 솔로 앨범 중 가장 좋은 기록이다. 이 음반에서 라이트가 두 곡에서 하몬드 오르간과 보컬을 맡았고, 이 외에도 핑크 플로이드의 초기 맴버였던 밥 클로스, 길모어의 친구 로버트 와이어트, 록시 뮤직의 필 만자네라, 데이비드 크로스비, 그레이엄 내시 등이 참여했다.

이후 길모어는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다. 여기서 라이트가 키보드/보컬로 참여했으며 특히 그가 과거 핑크 플로이드에서 많이 연주했던 파피사 오르간을 공연에서 같이 세팅해 연주했다. 이외에 베이스의 가이 프랫, 키보드의 존 카린, 색소폰의 딕 패리 등 핑크 플로이드의 팬이라면 다 알만한 인물들이 참여했고 그외 록시 뮤직의 필 만자네라가 기타로, 스티브 디스테너슬로가 드럼으로 참여했다. 이 투어에선 핑크 플로이드가 전성기 이후 거의 연주 안했던 Fat Old SunWot's... Uh the Deal?, Echoes도 세트 리스트에 포함 되었고, 특히 Echoes에선 라이트의 키보드, 하몬드 오르간 연주가 돋보였다.[98] 길모어의 투어가 끝날 무렵인 2007년 워터스도 새로 Dark Side of the Moon 투어를 돌기 시작했다. 길모어 투어에도 참여한 세션 키보디스트 존 카린이 여기서도 참여 했다. 메이슨은 이 시기 카 레이싱에 참여하면서 비교적 조용히 지내다가 길모어의 로열 앨버트 홀 공연에서 막바지 등장해 드럼을 쳤었고, 이후 워터스의 투어에도 등장해서 The Dark Side Of The Moon 전곡을 연주했었다. 원래 워터스는 이 공연에서 라이트도 게스트로 초대했으나, 당시 라이트는 솔로 음반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워터스의 게스트 초대를 거절했다.

같은 년도 7월 7일 초기 리더였던 시드 배릿이 당뇨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가족들에 의해 장례식이 열렸지만, 가족들과 불편한 관계였던 워터스를 포함한 핑크 플로이드 멤버들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후 1년뒤인 2007년 밴드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40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 했다. 이 음반은 모노, 스테레오믹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맛을 느낄수 있다. 또한 같은해 겨울에는 Oh, by the Way라는 밴드의 전집을 담은 LP 미니어처 CD 박스 세트를 발매했다.

2007년 5월 Madcap’s Last Laugh라는 이름의 배릿의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이 공연에선 배릿을 존경하던 수많은 뮤지션들이 참여했고, 여기에는 그와 동시대 활동했던 케빈 에이어스[99]블러의 리더 데이먼 알반도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서 네 멤버가 약 2년만에 모이긴 했지만, 같이 공연은 안했다. 이날 워터스는 자신의 솔로곡 Flickering Flame를 연주하며 배릿을 추모했고, 핑크 플로이드는 존 카린, 오아시스의 베이시스트 앤디 벨과 함께 라이트의 보컬로 Arnold Layne을 연주했다. 이후 워터스는 공연장을 바로 떠났고, 공연에 참여한 뮤지션들은 단체로 마지막으로 Bike를 연주했다. 이 공연은 핑크 플로이드의 마지막 공연이자 키보디스트 리처드 라이트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공연이 되었다.

2008년 9월 15일 리처드 라이트가 런던에 있는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9개월간 으로 투병 중이었다. 이후 길모어, 워터스, 메이슨은 그를 추모했고, 특히 길모어는 23일 BBC에 출연해 라이트의 초기 자작곡 Remember a Day을 연주하며 그를 추모했다.

”누구도 릭 라이트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저의 음악적 파트너였고 친구였죠. 누구 혹은 무엇이 핑크 플로이드였는지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논쟁 속에서도 릭의 막대한 기여는 자주 잊혀졌습니다. 그는 온화했고 잘난 체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얘기를 잘 안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감정 풍부한 목소리와 연주는 가장 잘 알려진 핑크 플로이드 사운드의 필수적이며 매혹적인 요소였습니다. 저는 정말 그와 같은 사람과 연주해본 적이 없어요. 그와 제 목소리의 조합, 그리고 우리의 음악적 텔레파시는 1971년 〈Echoes〉에서 활짝 꽃을 피웠죠. 제 생각에 가장 좋았던 핑크 플로이드의 순간은 그가 모든 역량을 다 발휘하던 때입니다. 결국 그가 작곡한 〈Us and Them〉과 〈The Great Gig in the Sky〉가 없었다면 《The Dark Side of the Moon》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조용한 손길이 아니었으면 《Wish You Were Here》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밴드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를 정확히 계량화할 수는 없죠. 하지만 릭이 없었다면 핑크 플로이드는 핑크 플로이드가 될 수 없었을 겁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사운드는 기타, 베이스와 드럼이 만들어내는 그 이상의 음악이니까요. 릭의 사운드는 이 모든 걸 긴밀히 결합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닉 메이슨


”60년대와 70년대의 핑크 플로이드에서 그의 음악적 역량의 중요성은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재즈에 영향을 받은 지극히 흥미로운 조음과 하모니의 작법은 그가 작곡한 〈Us and Them〉과 〈Great Gig in the Sky〉로 친숙하죠. 여기서 볼 수 있는 인간적 매력과 장엄함은 그 시절 우리 네 명이 함께 한 모든 작품들에 담겨 있습니다. 화성적 진행에 대한 릭의 귀는 우리 음악의 기반이었습니다.”

-로저 워터스


몇 년뒤 2010년 밴드는 EMI를 계약 위반으로 고소했다. EMI가 핑크 플로이드의 곡들을 개별적으로 인터넷 음원 다운로드를 할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밴드 측은 핑크 플로이드의 곡들은 개별적으로 판매되어서는 안되며, 어디까지나 앨범 형태로 판매 되어야 한다고 내세웠다. 하지만 EMI는 이 계약은 CD, LP 같은 음반형태에서만 적용되고 MP3 다운로드는 해당 사항 없다고 반박했다. 비슷한 시기 워터스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다친 어린이들을 돕는 자선 단체 호핑 파운데이션의 행사에 참여했다. 여기서 그는 데이비드 길모어를 초청해 거의 5년만에 같이 무대에 올랐다. 여기서 길모어는 워터스에게 테디 베어스의 To Know Him Is To Love Him을 연주 해줄 것을 요청했고, 대신 이후 워터스의 공연에서 Comfortably Numb을 연주해주기로 약속했다. 이 공연에선 라이트의 사위인 베이스 연주자 가이 프랫과 워터스의 아들인 키보디스트 해리 워터스가 참여했다. 이후 워터스는 새로 The Wall 투어를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길모어는 앰비언트 듀오 오브와 함께 Metallic Spheres를 발매한다.

2011년 밴드는 위에 법정공방을 정리하고 EMI와 새로운 5년간에 파트너십을 채결했다. 물론 곡들의 개별 다운로드도 허용했다. 그해에 Why Pink Floyd...?라는 캠페인으로 밴드는 모든 음반을 새롭게 리마스터링해서 발매했고, 이를 모아 박스세트 Discovery를 발매했다. 그외 The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그리고 1년뒤에 The Wall의 익스피어리언, 박스세트를 발매했다. 이 박스세트에는 2011 리마스터링 음원 뿐만 아니라 밴드가 이전에 공개 안했던 미공개곡, 1974년 윔블던 라이브, 다른 믹스 버전, 책자수준의 커버, 티켓/백스테이지 패스 복사본, 밴드의 아트가 그려진 컵받침(...), 구슬(...)등이 포함되었고, The Wall 박스 세트에 경우 워터스가 초기 데모의 일부를 완전히 공개했다. 이후 새로운 컴필레이션 음반 The Best of Pink Floyd : A Foot in the Door를 발매했다.

같은 해 이전에 워터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모어는 워터스의 런던 O2 아레나 The Wall 공연에서 특별 출연해 Comfortably Numb를 연주했다[100]. 또한 그날 마지막 곡인 Outside the Wall에서 길모어는 물론 메이슨도 특별출연해서 워터스의 세션 멤버들과 같이 연주했다.

이후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메이슨이 등장해 에드 시런의 보컬으로 Wish You Were Here를 연주했다. 워터스는 2013년까지 The Wall 투어를 이어갔고, 이전 1980~81 투어때와는 다르게 2012년 가장 많이 돈을 벌어들인 공연 3위로 기록될 정도로 엄청난 수익을 기록했다.

2013년 4월 18일 밴드의 오랜 커버 디자이너이자 힙노시스의 맴버인 스톰 소거슨이 숨을 거두었다. 그는 이미 2003년 뇌졸중으로 인해 일부 마비가 되었었고, 암으로 투병 중 이였다고 한다. 길모어와 메이슨, 그리고 워터스는 그를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4년 The Division Bell 20주년 기념으로 박스세트를 발매했다. 이 박스세트엔 The Division Bell CD와 LP, 싱글 음반과 새로 제작된 Marooned의 뮤직비디오가 포함되어 있다.

6.7. The Endless River[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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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리처드 라이트 사후 핑크 플로이드. (왼쪽부터)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2014년 The Endless River에 수록된 Louder Than Words

2014년 7월, 길모어의 아내 폴리 샘슨이 트위터로 20년만에 신보 The Endless River가 나온다는 소식을 알렸으며, 그 해 11월 10일에 발매되었다. 1993년 The Division Bell 세션 때 녹음한 위에서 말한 65곡중 안쓰이고 버려진 곡들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1993년 당시 릭 라이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음반에 최대로 반영하고 싶어 했지만 계약적 위치등 이유로 그렇게 못해 한이 남아있었다. 이 음반은 2008년 세상을 떠난 라이트를 위한 스완 송으로 원래 인스트루멘탈 앨범으로 가려 했으나 고민 끝에 마지막 곡에 길모어의 보컬이 녹음되었다고 한다.

음반이 나오자마자 인스트루멘탈의 보컬이 거의 없는 앰비언트 음반 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차트 1위, 미국 빌보드 3위를 기록 했으며, 한국에서도 가온차트 해외 음반 4위까지 올라갔다. 평가도 비록 호불호가 갈리는 평을 받긴했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6.8. 마무리, 그 이후[편집]


2015년 페이스북 계정에 핑크 플로이드의 활동을 마무리한다고 발표했다. 길모어는 라이트 없이는 공연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후 길모어는 이전부터 작업한 새 솔로 음반 Rattle That Lock을 발매했고, 2016년까지 투어를 돌기 시작했다. 동년 11월에는 1965년 녹음한 음원이 EP형태로 1965: Their First Recordings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었다.

1년뒤 2016년 11월엔 1967년부터 1972년까지 밴드의 자료를 담은 박스 세트 The Early Years 1965–1972가 공개 되었다. 이 박스 세트는 연도 별로 나뉘어져 있으며, 한동안 부틀렉으로만 돌아다니던 밴드의 BBC 공연 실황들, 미발표곡, 라이브 실황, The Man the Journey 실황 음원, Zabriskie Point때 작업한 미공개곡, Live at Pompeii 음원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외 밴드의 공연 포스터와, 일부 콘서트 영상도 같이 들어가있으며, 밴드가 음원을 맡았던 바벳 슈로더의 영화 More, Obscured by Clouds도 들어 있고, More의 미수록곡, Obscured by Clouds에 리믹스 버전도 공개되었다. 또한 1974년 윔블던 실황중 유일한게 공개 안됐던 Echoes 실황도 공개 되었다. 이후 이 박스세트에서 몇곡을 담은 2CD 컴필레이션 음반 Cre/ation: The Early Years 1967–1972가 출시되었다.

2017년 워터스는 새 솔로음반 Is This the Life We Really Want?를 공개했고 Us + Them 투어를 2018년까지 진행했다.

2018년 메이슨은 가이 프랫과 몇몇 연주자들과 함께 Nick Mason's Saucerful of Secrets를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연 세트리스트는 밴드 이름에서 보이듯이 초창기 핑크 플로이드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9년 4월 뉴욕 공연에선 워터스가 특별 출연해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을 불렀다.

2019년 12월엔 길모어 시대 핑크 플로이드의 자료를 담은 박스 세트 The Later Years를 공개했다. 여기선 A Momentary Lapse of Reason에서 라이트의 1987 ~ 1989년 당시 라이브 연주와, 메이슨이 새로 재녹음한 연주를 입힌 리믹스 버전이 공개 되었고,[101] 라이브 앨범 Delicate Sound of Thunder도 모든 실황을 담은 리믹스 버전으로 공개 되었다. 그외 Endless River에서 공개 안했던 1993년 음원 자료 일부와 High Hopes의 초기 버전도 공개되었고, 1990년 네브워스 실황도 공개되었다. 이외에도 이때 공식적으로 발매했던 영상들이 새로 다듬어져 공개 되었으며, 1989년 산 마르코 광장 공연과 1990년 네브워스 공연 영상도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이외 1994년 얼스 코트 투어의 리허설 음원 일부와, 2007년 시드 배릿 추모 콘서트의 밴드의 마지막 공연 음원도 공개 되었다. 이후 이 박스세트에서 몇곡을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The Later Years: 1987–2019이 발매되었다.

한편 2018년 메이슨이 밝히길, 길모어랑 워터스는 아직도 사이가 나쁘다고 한다. 두 사람과 친한 메이슨의 반응은 '작작 좀 싸워'. (...) 출처

현재 길모어는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지내면서 아내 샘손의 책홍보를 돕거나, 간간히 가족들과 페이스북 라이브를 틀면서 지내고 있고, 메이슨은 원래 Nick Mason's Saucerful of Secrets의 2020 유럽 투어를 계획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1년 연기되었고, 9월에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Roundhouse를 발매하는 등 간간히 활동하고 있다. 워터스는 간간히 정치적인 발언을 SNS에 올리면서 현재 2021년부터 계획된 This Is Not a Drill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투어를 준비하고 있다.

6.9. Hey Hey Rise Up[편집]



파일:Pink Floyd 2022.jpg

2022년 핑크 플로이드.(왼쪽에서 두번째)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Hey Hey Rise Up 뮤직비디오

2022년 4월 8일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2014년 이후 약 8여년 만에 새로 녹음한 싱글 Hey Hey Rise Up을 발표했다. 우크라이나의 밴드 Boombox의 Andriy Khlyvnyuk가 보컬으로 참여했으며, 모든 싱글 수익은 우크라이나 인도주의적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저는 이음악이 폭넓은 지지와 홍보를 받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인도주의적 자선단체를 위한 기금을 모으고 사기를 높이고 싶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표명하고 싶고, 세계의 대부분이 초강대국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길 원합니다.”

-데이비드 길모어



7. 현재, 핑크 플로이드와 워터스와의 분쟁[편집]


2022년 9월 16일 Animals 2018년 리믹스 음반이 공개되었다. 워터스에 따르면 The Wall을 공동 프로듀싱한 제임스 거스리가 2018년 새로 믹싱하고 리마스터링한 음반을 준비했지만 길모어와 메이슨이 거부했다고 한다. 결국 워터스 자체적으로 스테레오 및 5.1 서라운드 믹스가 포함된 새 릴리스를 발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후 핑크 플로이드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출시 되었다.

이 시점 안그래도 험악했던 데이비드 길모어와 전 멤버인 로저 워터스와의 관계가 급속도록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워터스는 2021년에 길모어가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음반 재발행 및 크레딧에 대한 분쟁이 있다고 언급했으며, 2023년에 워터스는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핑크 플로이드 싱글인 Hey Hey Rise Up를 비난했다. 이러한 워터스와 길모어의 분쟁은 길모어의 아내 폴리 샘손이 워터스를 트위터로 비난하는 글을 올리면서 더욱 나빠지게 된다.

슬프게도 당신은 골수까지 반유대주의자입니다. 또한 푸틴의 변호인이자 거짓말, 도둑질, 위선, 탈세, 립싱크, 여성혐오, 질투심에 질린 과대망상증 환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요.

--

폴리 샘손


''모든 말이 진실임을 증명합니다.''

--

데이비드 길모어 (위에 샘손의 글을 공유하며)

이에 대해 워터스는 도발적이고 극도로 부정확하다고 말했다.

2023년 핑크 플로이드는 Dark Side of the Moon 50년 에디션을 발매한다고 공표했다. 발매일은 2023년 3월 24일이며, 제임스 거스리에 의해 새로 리마스터된 음원과, Dolby Atmos 음원, 그리고 과거 The Dark Side of the Moon Immersion 에디션에서 공개 되었던 웸블리 1974년 라이브 실황의 리마스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2023년 2월 로저 워터스는 솔로 명의로 Dark Side of the Moon을 재녹음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Youtube 심지어 핑크 플로이드 멤버인 길모어와 메이슨 그리고 라이트의 유족 허락 없이. 워터스는 또한 이 프로젝트를 언급한 인터뷰에서 다른 멤버들의 작곡에 대하여 이렇게 덪붙었다.

그래, 닉은 그런 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길모어와 릭은? 그들은 곡을 쓰지 못했다. 그들도 할 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그들은 아이디어가 없다. 그들은 한 번도 생각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 점이 미치게 만들 것이다.

--

로저 워터스

사실상 워터스는 50년전 Dark Side of the Moon 뿐만 아니라 한때 밴드의 동료기도 했던 데이비드 길모어와 지금은 고인이 된 리처드 라이트가 밴드에서 작곡하며 이루어낸 객관적인 성과를 혼자 전면으로 부정했으며, Dark Side of the Moon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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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상 로저 워터스와의 갈등으로 인한 해고에 가깝다.[2] 이 시기 라이트는 리전드 스트리트 폴리테크닉을 다니면서 에릭 길더의 음악학교에서 음악이론과 작곡 레슨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건축학이 안맞았는지 1학년 말 자퇴하고 런던음악대학(London College of Music)에 등록했다.[3] 당시에는 공연장에 피아노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라이트의 역할이 달라졌고, 없을때는 리듬기타를 맡기도 했다. [4] 주로 서처스라는 그룹의 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이 그룹의 노래 중 Love Potion No.9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편이다.[5] 나중에 리처드 라이트의 아내가 되다가 1982년 이혼한다.[6] 이후 밴드의 들어오는 데이비드 길모어 또한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7] 처음엔 장난식으로 막 지은 이름이었는데 멤버들이 들을수록 귀에 착착 감긴다며 정식 밴드 네임으로 채택했다고 한다.[8] 배릿의 연주와 인터뷰를 볼수 있는 몇 안되는 영상중 하나다.[9] 이후 첫 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에도 수록되는데, 사이키델릭 연주곡의 정수로 꼽히는 곡이다.[10] 라이브 버전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라이브 버전을 듣고 싶으면 라이브 EP나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여러 부틀렉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11] 당시 EMI 스튜디오[12] 하지만 시드 바렛은 "존 레논은 Top of the Pops에 출연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우리가 출연해야 하냐고"라고 불평했다.[13] 이 사운드트랙의 일부는 2016년 박스세트 The Early Years 1967–1972를 통해 공개 됐지만, 아직까지 모든 음원이 공개되지 않아 부틀랙을 통해서만 들을수 있다.[14] 이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시드가 무언가를 열심히 휘갈기다가 '내가 작곡한 곡이야 들어봐'라며 멤버들에게 건네줬는데 그 종이는 백지였다고...[15] 그의 의견은 '건강상의 문제'이지만 그의 팬들은 실제로는 마약 중독이 원인임을 기정사실화한다.[16] 수록곡중 9분짜리 대곡인 A Saucerful of Secrets는 스페이스 락의 정수로 뽑히는 곡이다.[17] 이후 힙노시스는 The Wall, Final Cut을 제외한 핑크 플로이드의 모든 음반 커버에 참여한다.[18] 2집 마지막 곡 Jugband Blues는 시드 배릿이 작곡한 유일한 앨범 수록곡이다. 원래 Vegetable Man 등 시드 배릿이 만든 곡이 더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음반 분위기상 결국 수록되지 못했다.[19] 여담으로 이 공연 피날레엔 대포 두대를 발사 했는데 이 때문에 멤버들은 로열 앨버트 홀로부터 한동안 공연 금지를 먹었었다. 이곳은 이후 2006년에 길모어의 On an Island 투어 일환으로 길모어와 라이트가 다시 공연을 하게 되는데 이날에도 똑같이 대포를 사용했다고 한다(...)[20] 실황은 한동안 부틀렉으로만 돌아다니다가, 2016년 박스 세트 The Early Years 1967–1972에서 공개되었다.[21] 길모어에 따르면 분위기 있고 멋진, 우주적인 12마디 블루스였다고 한다.[22] 전체 실황은 현재까지 부틀렉으로만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때 공연한 Interstellar Overdrive가 2016년에 박스 세트 The Early Years 1967–1972에서 공개되었다.[23] 사운드트랙 음반엔 3곡만 들어간다. 이후 이때 작업했던 세션은 1997년 사운드트랙 재발매반과 2016년 박스 세트 The Early Years 1967–1972를 통해 공개되었다.[24] 이 시기에는 록밴드가 오케스트라랑 협연하는 일이 잦았다. 무디 블루스가 최초로 Days of Future Passed에서 오케스트라랑 협연을 시도했으며, 딥 퍼플존 로드의 주도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를 발매했고, 키스 에머슨이 있던 나이스도 Five Bridges Suite에서 오케스트라랑 협연했었다.[25] 원래는 시드 바렛을 참여시키려고 했으나, 시드가 참여를 거부해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26]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는 그룹으로 유명하다.[27] 이는 그들과 알란 파슨스가 작업한 두번째 앨범인 The Dark Side of the Moon 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28] 커버는 메이슨이 디자인 한 증기 오르간으로, 이후 이것을 힙노시스의 스톰 소거슨이 실물로 제작해 1995년 재발매판에 사용한다. 그외 하비스트 미국반은 눈 4개 달린 탈 모양의 병따개를 사용했고, 호주반에 경우 밴드 허락없이 동전커버를 사용했다가 유통에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29] Meddle의 수록곡 Seamus의 다른 개의 버전[30] 이후 인터뷰 장면과 1972년 Dark Side Of The Moon을 준비하는 장면을 더해서 1974년 감독판으로 나왔다.[31]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릭 라이트, 로저 워터스 [32] 처음에는 록밴드 메디슨 헤드가 Dark Side Of The Moon 타이틀을 써버려서 잠시 Eclipse로 타이틀이 바뀌었지만, 이 음반이 상업적으로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다시 타이틀을 갖고 올수 있었다.[33] 위에 언급한 Live at Pompeii 감독판에서 이 시절 멤버들에 모습을 볼수 있다.[34] Us and ThemBreathe, The Great Gig in the Sky가 대표적이다.[35] 최종 기록은 958주인데, 이는 차트 아웃된 후 2007년 Live 8 때 차트에 재진입했을 당시의 기록까지 합산한 것이다.[36] 이는 기네스북 기록이다.[37] 여담으로 이 투어의 마지막 공연은 캔터베리씬의 거장, 소프트 머신의 전 멤버이자 같은해 불의의 추락사고로 평생 휠체어에 의존하게 된 로버트 와이어트를 위한 자선 콘서트로 열렸다. 이 공연에선 The Great Gig In The Sky에서 보컬을 맡았던 클레어 토리가 게스트로 참여했다.[38] 구성은 1,2집으로 구성되어있으며, 힙노시스의 언어유희적인 커버가 인상적인 음반이다.[39] 자세히 보면 왼쪽부터 백보컬 2명, 데이비드 길모어, 닉 메이슨, 로저 워터스, 딕 패리, 릭 라이트 [40] 여기서 연주되는 음악은 Breathe (In The Air), Money, 후일 Animals에 들어가는 Sheep의 초기버전인 Raving and Drooling이다.[41] Shine on You Crazy Diamond의 초기 버전. 파트 1과 전체적인 편곡이 원곡과 살짝 다른 버전이다.[42] 후일 Animals에 들어가는 Sheep의 초기버전. 도입부가 살짝 다르다.[43] 후일 Animals에 들어가는 Dogs의 초기버전. 음이 Dog보다 한키 높으며, 길모어 파트 가사와 일부 구성이 다르다. 길모어가 부르기 힘들어 했던 버전이기도 했다.[44] 이 3곡들은 후일 2011년에 재발매된 Wish You Were Here Experience Edition에서 리마스터링 되어 공개되었다.[45] Shine on You Crazy Diamond 파트 1에 유일하게 그 흔적이 남아있다. 물을 채운 와인잔 가장자리를 문지르는 소리를 다중녹음해 만들었다고 한다.[46] 위에 나온 모습과는 전혀 달라진 대머리의 뚱보 아저씨가 되었다.[47] 이 앨범에는 핑크 플로이드의 명곡 중 하나로 꼽히는 Shine on You Crazy Diamond가 수록되어 있다. 9개의 파트로 나눠진 이 곡은 수많은 팬들이 꼽는 명곡 중의 명곡인데, 가사를 들어보면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 노래는 위대한 천재성, 그리고 어떤 의미로는 그 천재성 때문에 부서져버린 시드에 대한 헌사에 가깝다.[48] Wish You Were Here 발매된 초 몇몇 언론사들에서 The Dark Side Of The Moon와 비교하여 이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었다.[49] Animals은 데이비드 길모어와 같이 만든 Dogs를 제외하면 나머지 곡은 모두 로저 워터스의 곡이다.[50] 이 일은 후일 The WallComfortably Numb의 모태가 된다.[51] 이때 실황을 담은 부틀렉 Road Ends(33분 10초경)에서 들을수 있다.[52] 사실상 로저 워터스와의 갈등으로 인한 해고에 가깝다.[53] 자세히 들어 보면 곡 뒤에 길모어의 기타솔로 뒤에 스노위 화이트의 기타 솔로와, 라이트의 하몬드 오르간 솔로가 추가 되었다.[54] 이 당시 수많은 록 밴드 들이 세금문제에 부딪치곤 했다. 특히 60년대 영국병을 불러일으킨 수입의 97% 세금제가 문제였는데, 당시 비틀즈는 곡 Taxman으로 세금제도를 풍자했고, , 레드 제플린등 몇몇 밴드는 아에 세금을 피할 목적으로 다른 국가에서 녹음하기도 했다.[55] 다른 멤버들의 자식들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같이 다닐수 있었지만, 이때 라이트의 자식들은 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이 였기 때문에, 라이트와 함께 다닐수가 없었다. 라이트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때 자식들이 끔찍하게 그리웠다고 언급했다.[56] 다만 훗날 인터뷰에서 이때 워터스가 라이트를 퇴출시킨 것은 반대 했었다고 한다.[57] 라이트의 탈퇴이유가 코카인 복용이라는 루머가 많이 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라이트가 수차례 인터뷰에서 부인한 바 있다.[58] 이후 퀸(밴드)Hot Space 투어에서 키보드를 맡은 인물이기도 하다.[59] 미국음반산업협회 RIAA에서는 하나의 더블 앨범을 샀을 때 두 장 판매한 걸로 인정하기에 2300만 장이 판매된 것으로 나온다.[60] 1981년엔 앤디 로버츠로 교체되었다.[61] 이때 실황은 2000년에 《Is There Anybody Out There? The Wall Live 1980-81》라는 이름으로 나왔다.[62] 타이틀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데, 커버를 제작한 힙노시스도 이를 우스꽝스럽게 여겨 커버에 춤추는 남녀를 자세히 보면 줄에 묶여 있는 모습으로 표현해 조롱했다.[63] 이 음반의 한 가지 특징이라면 바로 <Money>의 재녹음이다. 이 곡의 판권을 갖고 있던 캐피틀 사가 허가를 하지 않아 결국 다시 녹음한것으로 여기서는 길모어가 라이트 대신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했다.[64] 이로 인해 이때 제작했던 Spare Bricks는 현재까지 미공개 상태로 남아있다.[65] 실제로 앨범에는 로저 워터스에 의한, 핑크 플로이드가 연주한 앨범이라 표기되어 있다. [66] 또한 이 투어에서 케임브리지에서 워터스의 동문이자, 이후 길모어의 핑크 플로이드에서 세션 기타를 맡게 된 팀 렌윅이 참여했다.[67] 투어 중 런던 공연에서 메이슨과 라이트가 참석했고, 특히 메이슨은 앙코르 곡 <Comfortably Numb>에서 드럼을 연주했다.[68] 밴드의 라이브 에이드 불참은 당시 밴드의(정확히는 워터스-나머지 멤버간의) 깊은 불화를 상징했지만, 이후 2005년 밥 겔도프가 기획한 후속공연 라이브 8은 밴드의 화합을 상징한다는 것도 아이러니. 다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단합이었고 2021년 현재는 다시 사이가 나빠졌다.[69] 카린은 이후 밴드에서 Learning To Fly를 공동 작곡하게 된다.[70] 길모어에 따르면 이때 거의 5분에 한번씩 변호인단의 전화가 온적도 있었다고 한다.[71] 이후 2019년 출시한 박스 세트 The Later Years에서 A Momentary Lapse of Reason에서 메이슨의 드럼 연주를 재녹음하고 라이트가 투어에서 연주한걸 입힌 리믹스 버전이 공개 되었다.[72] 이에 대해 길모어는 워터스 더러 ”그는 과대망상증 환자다"라고 응수했다.[73] 여담으로 이때 세트리스트의 첫곡으로 의외로 Echoes가 선택됐는데, 멤버들과 나이차가 많이 나는 세션멤버들과의 연주가 안 맞아서인지 몇번 하고 Shine On You Crazy Diamond로 교체되었다.[74] The Wall 수록곡 중 Comfortably Numb과 Run Like Hell은 원작곡자 길모어가 가져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의 콘서트에서 빠질 수 없는 Comfortably Numb과 Another Brick in The Wall 같은 곡들은 서로의 공연에서 사용할 경우 상대방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도록 결정되었다.[75] 이 둘은 이후 결혼해 프랫이 라이트의 사위가 되었다.[76] 이때 이 우주선엔 Delicate Sound of Thunder의 테이프가 실려져 있었다.[77] 이공연은 라이브 생중계 되었으며 후일 2019년 The Later Years를 통해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78] 이 공연에선 기존 투어 멤버 말고도 위에서 언급한 클레어 토리와 팻 레너드 그리고 여성 색소폰 연주자 캔디 덜퍼가 참여했다.[79] 이때 음원은 훗날 2019년 박스세트 The Later Years에 리믹스되어 포함되었고, 2년뒤인 2021년 Live at Knebworth 1990라는 제목으로 공식 출시되었다.[80] 이 경기 영상은 당시 DVD,VHS로 출시되었고, 이때 올림픽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사운드트랙은 현재 미발매 상태로 A Tree Full Of Secrets같은 부틀랙을 통해서만 들을수 있다.[81] 이때 라이트는 이 결과를 뒤집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최대로 반영하고 싶어 했지만 그렇게 못했다. 일단 라이트가 정규 멤버이긴 하나 다른 멤버와 동등한 계약적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 앨범과는 다르게 앨범에서 훨씬 더 많은 키보드 파트를 연주했고, 앨범곡중 5곡이나 작곡에 참여하기도 했다.[82] 엔지니어 앤디 잭슨에 의해 이때 빠진곡중 일부 앰비언트 성향의 곡들을 모아 The Big Spliff라는 가제를 붙이기도 했으나, 결국 공개 되지 않다가, 후일 2014년에 나올 The Endless River에서 일부 공개되었다.[83] 페리가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에 참여한것은 Wish You Were Here 참여 이후 약 20년 만이다.[84] 이공연엔 핑크 플로이드 말고도, 에릭 클랩튼, 제네시스,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뒤 (존 디콘, 로저 테일러)도 참여했다.[85] 그래도 혹평이 줄을 이었던 Momentary Lapse of Reason 보단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86] 수록 곡중 경음악인 Marooned은 1995년 그레미 경음악상을 받기도 했다.[87] 싱글로 출시한 Take It Back은 빌보드 싱글 73위, 메인 록 스트림즈 차트 4위까지 올라갔고, High Hopes는 메인 록 스트림즈 차트 7위, 프랑스 차트 4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스티븐 호킹의 연설을 삽입시킨 Keep Talking은 메인 록 스트림즈 1위, 영국 차트 26위까지 올라간다.[88] 이후 길모어는 이를 후회하고, 폭스바겐에서 지원받은 돈을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89] 특히 미국의 폭스버러 경기장과 베테랑스 스타디움, 양키 스타디움, 캐나다의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 등에서 개최한 공연은 십만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할 정도로 많은 관객을 모았다.[90] 첫 공연에선 첫곡이 시작되기 직전 아레나 좌석이 붕괴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 큰 부상자는 없었지만, 그 덕분에 밴드는 일부 일정을 조정하기도 했다.[91] 이책은 길모어의 반대로 잠시 보류 되었다가, 이후 2004년에 길모어, 라이트, 워터스가 원고를 모두 본후 출판되었다.[92] 위에서 말한대로 핑크 플로이드가 이전에도 컴필레이션 앨범을 발표한적은 있지만, 모두 재대로 된 형태의 컴필레이션 앨범이 아니었다.[93] 워터스는 The Final Cut에서 6곡이나 목록에 넣었는데 당연히 나머지 멤버들의 반대로 결국 1곡만 들어가게 되었고, 길모어는 Atom Heart Mother에 수록된 Fat Old Sun을 넣고 싶어 했지만, 다른 멤버들의 반대로 못 넣었다.[94] 메이슨은 해리의 대부이기도 하다.[95] 원래는 길모어의 핑크 플로이드의 베이스 세션멤버이자 라이트의 사위인 가이 프랫이 같이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독일에서 열리는 Live 8에서 록시 뮤직과 이미 계약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함께 참여 못한다.[96] '0'이 실수로 하나 더 붙은 게 아니다. 즉 《The Wall》 은 기존 판매량의 36배만큼이나 더 팔렸다는 소리다.[97] 이 공연은 밴드의 마지막 공연으로도 알려져 있다.[98] 이때 실황은 라이브 앨범 Live in Gdańsk로 라이트의 사후 발매됐다.[99] 초창기 소프트 머신에서 베이스를 연주했던 인물로, 캔터베리 신에 대표적인 뮤지션중 하나로 알려져있는 인물. 배릿의 친구이기도 하다.[100] 초창기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The Wall 공연에서는 마분지로 만든 실제 벽을 스테이지에 쌓아 올리면서 진행을 했었으나, 이 공연에서는 초대형 스크린을 스테이지에 올려놓고 각종 영상을 활용하면서 진행하였다. 이 곡에서도 엄청난 digital effect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101] 원래 A Momentary Lapse of Reason에선 드럼은 거의 전자드럼머신으로 사용되었섰고, 메이슨은 거의 연주를 안했다. 키보드도 거의 다른 뮤지션들이 녹음해 놓은 상태에서 라이트가 합류한 거여서 라이트는 일부 파트만 연주했었다.[102] Dark Side of the Moon의 전반적인 컨셉을 구상한것과 가사를 쓴것은 워터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근데 음악은? 워터스가 기여한 면도 많지만 길모어와 라이트 특히 라이트의 기여가 컸다. The Great Gig in the Sky는 사실상 라이트가 대부분 작곡했으며, 워터스가 Dark Side of the Moon 수록곡중 가장 좋아하는 Us and Them도 처음 작곡의 스타트를 한 사람은 라이트 였다. 또한 음반 커버인 프리즘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커버도 라이트의 제안으로 힙노시스가 고안해낸 작품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이 있는데도, 워터스 혼자 이루어낸 성과라고 말하는것은 위에 폴리 샘손이 언급한 데로 위선적으로 보일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