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카레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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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공상 예술부문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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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카레라스
Jose Carreras


파일:호세 카레라스.jpg

본명
주제프 마리아 카레라스 이 콜
Josep Maria Carreras Y Coll
출생
1946년 12월 5일 (77세)
스페인국 바르셀로나
국적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국(1946~1975)
[[스페인|

스페인
display: none; display: 스페인"
행정구
]]
(1975~현재)
직업
성악가
활동
1954년 ~ 현재
신체
170cm
가족

1. 개요
3. 음악적 성향
4. 내한


1. 개요[편집]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더불어 '쓰리 테너'라 불렸다.

동향 출신의 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와 이탈리아 로비고[1] 출신의 성악가 카티아 리치아렐리[2]와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기도 했고, 필립스와 EMI, 도이치 그라모폰에서도 많은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리스 출신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와도 여러 편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2.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호세 카레라스/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음악적 성향[편집]


리리코 테너로 분류되며, 발성이나 기교보다는 호소력 짙은 노래와 연기로 유명하다. 또, 이러한 점이 카레라스의 매력이라는 평가가 많다. 백혈병 치료 이후 성량이 줄면서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가를 적시게 했다. 비슷한 성향의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시작해서 음역을 넓혔기에 풍성한 저음의 음색이 있지만, 카레라스는 (상대적으로)깨끗하고 맑은 고음의 음색이라는 점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카레라스의 진가는 PP에서 드러난다. ff에서 부드럽게 PP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당장 밑의 50주년 바르셀로나 앵콜을 뒤 관객들을 향해 불러주는 노래 마지막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섬세한 감정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카르멘(1986년 공연)은 그의 연기와 연주의 진면목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명반. 실제로 카르멘의 돈 호세와 같이 불쌍한가련한 남자주인공 역할을 맡을 경우, 그의 목소리의 진가가 멋지게 드러난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오페라 공연보다는 주로 연주회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은 오페라 무대도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하지만, 나이가 상당히 든 만큼 오페라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듯 하다.


4. 내한[편집]


외국 성악가로서는 드물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3]인지 자주 내한해서 콘서트를 가지는 편.[4]

국내 연주를 자주 왔던 몇 안 되는 성악가로, 한국 출신 성악도들에게도 호의를 보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좋은 감정이 있는 듯. 파바로티와 도밍고의 내한 횟수가 7회 이하인데 비해 카레라스는 15회 이상이다. 아무래도 박수와 브라보, 환호소리를 제대로 선사해주는 곳이 한국이기 때문인 듯하다. 카레라스 고향과도 비슷한 국가이고. 연주회에서 몇 차례 앵콜을 받으면, 그중 한 곡은 무대 뒷쪽 좌석 방향으로 돌아서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위해 한 곡을 불러주는, 좋은 매너로 호평을 받기도 했다. 17년 3월 4일 공연에서도 첫 번째 앵콜곡은 합창석 자리를 보고 불러주어서 노래시작과 동시에 환호와 박수의 도가니가 되었고, 노래를 마치자마자 합창석은 물론 일반석에서도 기립박수와 환호가 들렸다.

해당 영상... chitarra romana 로마의 기타


바르셀로나 데뷔 50주년 앵콜에서도 뒷 관중들을 향해 불러주었다. 카레라스의 무대 매너를 확실히 보여준다.
노래 시작할 때 뒤를 부드럽게 돌아보는 것이 백미. 1분 13초부터 볼 수 있다. 마치고 전체 기립박수를 받았다.



1993년 2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4000여 석의 당시 우리나라 가장 많은 좌석을 가진 공연장에서 4000여 명의 기립박수를 받은 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이 공연은 mbc에서 방영되었다.

본 공연


앵콜 공연


다만, 2014년 내한 연주회[5]에서는 11월 23일자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준비하던 중, 급성 후두염과 감기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는데, 언론에서 자극적인 기사로 이를 비난하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 공연 포스터 자체가 "전설을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홍보했기에 그의 생전 한 번 더 공연을 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할듯. 토요일은 공연을 했는데, 공연 시작 직전 안내 멘트로 '호세 카레라스씨가 감기 걸렸으나 최선을 다해 부른다고 관객의 양해 부탁드립니다'가 나왔다. 공연 도중에도 계속 코나 입주변을 손수건으로 닦기도 했다. 언론에선 토요일 공연은 애기도 안 하고 일요일 공연취소에 대해서 매우 신랄하게 까댔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게 주최측에서는 일요일 공연을 무리하게 진행하려는 의지로 관객들을 공연장에 입장시켰고, 입장한 관객들은 약 30분 동안이나 주최측의 별다른 설명없이 기다리기만 하였다. 알고보니 그 당시에도 호세 카레라스는 병원에 있었던 모양. 추후에 일요일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에게는 추가로 10프로를 더 환불해 주는 걸로 일단락됐다.

2017년 3월 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세계투어 공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도 공연할 계획이 전해졌다. 그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번이야말로 그를 무대에서 접할 마지막 기회가 될듯. 이 투어는 서울이 마지막이라고 알려졌다. 16년부터 시작한 그랜드 월드 파이널 투어를 유럽부터시작해서 마지막 한국 서울에서 공연할거라고... 알려졌지만 터키에서도 하는 걸 보니 더 계약이 된 듯 하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AKR20170305035900005_01_i.jpg

2017년 3월 4일 예술의 전당 공연에서는 무려 앵콜만 6곡을, 커튼콜만 4번 이상을 보여주었다.(확실친 않다. 그렇지만 횟수는 물론 무대에 있어준 시간이 엄청 길었다.) 1부에서는 아끼듯이 노래를 불렀으나 2부에서는 클래식 매들리부터 뒤를 생각않고 열창했다. 다만 고음이 힘들기에 팔리아치는 고음은 1키 내렸고 브린디시에서는 마지막 부분에선 소프라노에게 넘겨주었다. 그렇지만 다수의 공연 후기와 기사에서 보듯이 고음만[6] 안 나왔을 뿐 나머지에서는 마에스트로, 3대 테너,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카레라스가 옛날부터 즐겨 불렀던 Cardillo : Core 'ngrato는 정말 잘 표현해주었다. 마지막 인사 중에 사진 찍고 있는 앞좌석 관람객에게 권총?꺼내는 장난도 하고 장사익으로부터 받은 꽃다발에서 장미 한 송이는 옆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도 선사하는 듯. 14년 11월 22일 공연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컨디션 관리를 잘 했고, 한국 관람객들의 열띤 호응과 박수에 공식적인 마지막 무대를 세계를 호령했던 테너로서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이날은 마이크를 쓰지 않고 콘서트홀이 떠나가게 열창했다. 2부 후반에선 매 노래와 커튼콜마다 전원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2500여석 좌석 가운데 2400여석이 넘는 관중이 있었고, 2100여석의 일반판매석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장비 등으로 인해 관람이 여의치 않은 자리와 초대석 일부를 제외하면 가득 찼다.

더불어 도밍고가 그리운 금강산을 내한 공연 때 자주 불렀다면, 카레라스는 공연에서 부르진 않았지만 역시 한국노래를 불러서 녹음한 적이 있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노래이다. 역시 한국인보다 발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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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베네치아 지방의 일부이다.[2] 심지어 리치아렐리와는 연인관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설명들 참조.[3] 실제로 인터뷰에서 한국은 자신의 고향과 굉장히 비슷해서 친숙하다고 얘기했다.[4] 단, 2011년 11월 23일,24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내한공연은 취소되었다. 공연 주최사인 애셋 &밸류 인베스트 그룹(Asset & Value Investment Group)의 사정 및 부가적인 문제가 그 이유였다고...[5] 플라시도 도밍고의 연주회와 겹친 데다 최고가 티켓 값이 44만원에 달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참고로 파바로티가 150만불, 도밍고가 135만불 카레라스가 80만불 정도이며 3태너 합동 땐 각자가 10억원의 게런티가 있었다. 모든 콘서트가 저 게런티는 아니다. 보통 저 당시에 잘나가는 태너들은 1억 내외의 게런티를 받았다. 파바로티가 90년대에 내한했을 땐 30만불 정도 받았다. 물론 평소보다 게런티를 무척 적게 받은 계약이었지만 21세기에 와서 이 게런티를 받는 테너는 없다. 오직 3대 테너만 가능했다. 더군다나 3대 테너 공연을 하면서 합동으로 공연시에 게런티가 더 주어지는 경향이 있다. 더하여 이 3명 모두 전용기가 있다. 서울 3태너 공연 때도 3명 모두 전용기를 탔다. 서울 3태너 공연시 3테너에게만 30억의 게런티가 있었다. 정확히는 3사람에게 2001년 당시 324만불이 게런티였다. 당시 한국 3대 테너 공연 최고가는 25만원으로 당시 역대 최고 표값이었다. 그런데 같은 공연의 시카고라던지 일본의 공연값이랑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다. 최고가가 일본은 69만원, 미국은 75만원 수준이다.... 저 게런티가 20세기 금액이다. 21세기에 조수미가 1억원 정도이며 안나 네트렙코는1억4천만원 수준이다. 그 20세기 당시에 3-4-5억 인데 지금에서야 몸값이 많이 낮아졌어도 티켓값이 비싼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6] 하지만 전체 프로그램 중 2곡 정도(Cardillo : Core 'ngrato, Leoncavallo : Pagliacci - Vesti la giubba)에서 한순간 고음이 시원하게 나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