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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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관료.
2. 생애[편집]
1407년 영의정부사 황희와 청주 양씨 양진(楊震)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음서로 벼슬에 나갔고 그 후 과거 시험을 보러갔다가 시험관이 황수신의 학문이 부진하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음서로 영의정이 된 마지막 인물. 1446년에 도승지까지 올랐다가 인사비리를 저질러 파직당하였다. 이후 병조참판이 되어 수양대군 및 집현전 신료와 함께 병법서를 편찬하는데 역할을 한다. 의정부 우참찬, 좌참찬, 우의정을 거쳐 1467년(세조 13) 영의정이 되었고 그 해에 죽었다.
세조실록의 졸기에서는 그야말로 가열차게 까이는데 성이 황이니 마음도 황이라는 평가는 거의 인신공격 수준. 사실 비리가 많았던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아산에 땅을 사면서 관아의 땅을 자기 마음대로 빼돌렸고, 아산현이 행정구역 조정으로 사라지는 것을 알고 관아를 아예 초가집이라고 장부 사기를 쳐서 해먹고 나서 그대로 팔아먹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 사실이 2년 뒤 관노비가 사헌부에 고발을 했는데도 세조가 뭉개버리는 바람에 관노비만 잡혀가게 된다. 사헌부는 시간만 되면 이를 들추어 비난했지만 세조는 계속 이를 무마한다. 뇌물도 어마어마하게 받아서 금품뿐만 아니라 땅, 노비 등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먹고 사헌부와 사간원에 끝까지 까였는데도 결국 죽을 때까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
3. 기타[편집]
- 야사엔 당시 장안의 유명한 점쟁이인 홍계관이란 인물이 자신의 미래를 점쳐보니 아무리 점을 쳐봐도 '쥐'때문에 개죽음을 당할 운명인지라, 살아남을 방도를 찾던 중 우연히 황희 정승의 아들 삼형제의 사주를 봐주게 되었다. 장남과 차남은 별 볼일이 없었지만, 막내인 황수신이 훗날 정승반열에 오른다는 점괘를 본 홍계관은 황수신에게 자신을 살려달라 부탁했고, 황수신은 못미더웠지만 일단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은 했다. 세월이 흘러 세조대에 이르러 홍계관의 점이 용하다는 소문이 대궐까지 알려져 세조가 홍계관을 불러 상자를 하나 내밀며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고 질문하자 홍계관은 '쥐 세 마리'가 들어있다고 대답했지만 상자를 열어보니 쥐는 한 마리만 들어 있었다. 이를 본 세조는 홍계관을 혹세무민하는 자라 하여 끌어내 죽이라 명령하고, 홍계관을 심문하기 위해 한 관리가 들어오는데 그가 바로 형조판서가 된 황수신이었다. 황수신과 홍계관은 서로 알아보고, 홍계관은 그 문제의 쥐를 다시 한번 조사해달라 부탁한다. 이에 황수신이 세조의 허락을 얻어 그 쥐를 살펴보니 유난히 통통했길래 배를 갈랐더니 새끼 쥐 두 마리가 나왔다. 홍계관의 점술에 놀란 세조는 즉시 홍계관을 풀어주었고 그렇게 홍계관은 목숨을 건졌다고..[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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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6월 22일.[2] 율리우스력 5월 9일.[3] 율리우스력 6월 21일.[4] 1466년(세조 12) 관제 개정으로 부원군 칭호가 사라진 사이에 죽었다. 묘비명은 1469년(예종 1)에 쓰여졌기 때문에 도로 부원군으로 되어있다.[5] 사실 이 이야기는 아차 고개의 유래가 된 홍계관 이야기에 황수신을 끼워넣은 이야기로 아차산엔 여러가지 바리에이션의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대가 아니라 연산군, 혹은 명종 시대라고도 하고, 홍계관을 죽이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형리가 반대로 알아들어 홍계관을 참수하는 바람에 이곳의 지명이 아차고개가 되었단 얘기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