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 배씨

덤프버전 :

분류



한국의 성씨

[ 펼치기 · 접기 ]

· · · · · 강전 · · · · · · · · · · · · · · · · · · · · ·

· · · 남궁 · · · · ·

· · · · · · · 독고 · · · 동방 · · · 등정

· · · · · · · ·

· · 망절 · · · · · · · · 무본 · · · ·

· · · · · · · · · · · · · ·

· 사공 · · · · · 서문 · · · 선우 · · · · · 소봉 · · · · · · · · ·

· · · · · · 어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장곡 · · · · · · 제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황목 · 황보 · ·
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 펼치기 · 접기 ]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興海 裵氏
흥해 배씨 (興海 裵氏 배씨)

관향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비조
지타(祗陀)
도시조
배현경(裴玄慶)
시조
배경분(裵景分)
중시조
배전(裵詮)
집성촌
경북 안동시 풍산읍
경북 봉화군
황해도 은율군
황해도 신천군
황해도 재령군
대구 달성군
인구
34,259명(2015년)

1. 개요
2. 시조 배경분(裵景分)
3. 주요 인물
4. 분파
5. 역사
6. 유적지



1. 개요[편집]


배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이고, 신라, 고려. 조선이 건국된때마다 중책을 맡아 건국공신이 세 분이다. 득성시조(得姓祖)는 신라건국에 혁혁한 기여를 한 신라 6부 촌장 가운데 금산가리부 촌장이었던 휘(諱) 지타(祗공이며, 중시조는 고려 건국공신이던 무열공 휘(諱) 현경(玄慶)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경주배씨였다. 경주배씨에서 분파된 흥해배씨는 고려후기에 검교장군을 지낸 경분(分)공을 1세로하며, 6세손 휘(諱) 전 충숙왕(1321년) 때 '조적의 난'에 선조께서 큰 공을 세워 흥해군(興海君)으로 봉해져 본관을 흥해로 사용하게 되었다.

흥해(興海)는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 흥해읍 일대의 옛 지명이다. 삼한시대에 다벌국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때에는 퇴화군(退火郡)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창군(義昌郡)으로 개칭하였고 신라 말기에는 남북미질부성(南北彌秩夫城) 이라고도 불렸다. 930년(고려 태조 13)에 남북미질부성을 다시 합쳐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쳤다.

안동 입향시조(入鄕始祖) 백죽당(栢竹堂) 휘(諱) 상지(尙志)공은, 1351년(충정왕 3년) 흥해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조에 통훈대부 판사복시사(정3품)로 재임하던 중, 고려가 패망의 위기에 처하자 벼슬을 버리고 조정을 떠났다. 그리하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백죽당은 고려의 절의파(節義派) 충신을 일컫는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 가운데 한 분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백죽당은 동생 공조전서(工曹典書) 휘(諱) 상공(尙恭)과 함께 외향이자 처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셨다. 백죽당은 안동 서후 금계 마을에 정착하여 집주변에 잣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고려 충신의 기상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호를 백죽당이라 하고, 금오산에 은거해 있던 야은 길재(吉再) 선생과 교유하였다. 오늘날 안동 일원에 거주하는 흥해배씨는 모두 백죽당의 자손이다. 동생 공조전서공은 하회마을에 정착하셨으나, 아쉽게도 손자 대에 무후하여 풍산류씨 문중에서 외외손 봉사를하고 있다.

백죽당의 아들 4형제 가운데 맏아들 휘(諱) 권(權)이 사헌부 지평, 둘째휘(諱) 환(桓)이 삼도관찰사, 셋째 휘(諱) 남(楠)이 사헌부 감찰, 넷째 휘(諱) 강(紅)이 이조정랑을 지냈다.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날려 당시 사람들이 배문(文)이라 하였다. 백죽당 종택은 서후 금계마을에서 1558년에 월곡면 도목(桃木)으로 옮겨졌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4백여 년 세거지였던 유서 깊은 도목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어, 1973년 다시 지금의 안동시 송천동에 옮겨졌다.

백죽당이 안동에 입향한 이래 조선 중기까지는 현달한 조상이 참으로많았다. 그리하여 흥해배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가이다.

2. 시조 배경분(裵景分)[편집]


  •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裵斯革)의 넷째 아들 배오룡(裵五龍)의 아들이며, 고려시대에 검교장군(檢校將軍)을 역임했다. 그의 6세손 배전(裵詮)이 고려 충혜왕 때 호군(護軍)을 거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조적(曺頔)의 난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삼중대광첨의평리(三重大匡僉議評理)에 책록되고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졌다.

3. 주요 인물[편집]


  • 배용길(裵龍吉) - 문과(文科) 선조35년(1602) 별시 을과(乙科)
  • 배상규(裵相奎) - 문과(文科) 헌종9년(1843) 식년시 병과(丙科)
  • 배 남(裵 楠) - 문과(文科) 태종11년(1411)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 소(裵 素) - 문과(文科) 태종8년(1408)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효숭(裵孝崇) - 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식년시 병과(丙科)
  • 배상현(裵象鉉) - 문과(文科) 헌종15년(1849) 별시 병과(丙科)
  • 배윤명(裵胤命 )- 문과(文科) 경종3년(1723) 증광시 병과(丙科)
  • 배 둔(裵 屯) - 문과(文科) 태조2년(1393)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덕문(裵德文) - 문과(文科) 명종8년(1553) 별시 병과(丙科)
  • 배 강(배 강) - 문과(文科) 세종8년(1426) 식년시 동진사(同進士)
  • 배상도 - 고려 말에 보문각 직제학을 지냈다.
  • 배상지(裵尙志) - 고려 말에 판사복시사를 역임하였다.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중 한 명으로,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 배둔 - 조선 태종 때 형조참의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 배지눌 - 조선 예종 때 한성 판관을 지냈다.
  • 배환 - 조선 태종 때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판진주목사를 지냈다.
  • 배용길 -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충청도 도사를 지냈다.
  • 배삼익 - 조선 명종 때 상호군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 배영진 - 독립운동가로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상실된 뒤 만주로 망명하여 한족회의 일원으로 동포들의 정착을 돕고 영춘학교, 협창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4. 분파[편집]


  •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1764년(영조 40)에 편찬(編纂)된 《갑신합보(甲申合譜)》에는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世孫) 배오룡(裵五龍)이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뒤 흥해(興海)로 분적(分籍)하여 시조(始祖)로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계대(繼代)의 내력(來歷)이 자세(仔細)하지 않고 각파(各派)의 이론(異論)이 있다. 《곡강세첩(曲江世牒)》에 밝혀진 대로 배경분(裵景分)을 시조(始祖)로 보는 쪽이 지배적(支配的)이다.흥해 배씨는 경주 배씨(慶州 裵氏)에서 분적(分籍)한 성씨(姓氏)이다.

5. 역사[편집]


  • 흥해(興海)는 경상북도(慶尙北道) 포항시(浦項市) 흥해읍(興海邑) 일대(一帶)의 옛 지명(地名)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다벌국(多伐國)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때에는 퇴화군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창군으로 개칭하였고 신라말기에는 남북미질부성(南北彌秩夫城) 이라고도 불렸다. 930년(고려 태조 13)에 남북미질부성을 다시 합(合)쳐 흥해군(興海郡)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에 경주부에 속하였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었다. 1367년(공민왕 16)에 지군사로 승격하였고 곡강(曲江)·오산(鰲山)이라는 별호(別號)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흥해군(興海郡)으로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으로 동래부 흥해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흥해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폐합으로 흥해군(興海郡)이 6개 면으로 분면되어 폐지되고 영일군(迎日郡)에 병합되었다. 1956년 흥해면(興海面)과 곡강면(曲江面)을 의창면(義昌面)으로 통합하고 1973년 의창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다가 1983년 의창읍이 다시 흥해읍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95년 영일군(迎日郡)이 포항시에 병합되었고 북구(北區)로 신설되어 통합되었다

6. 유적지[편집]


  • 하방상원(下方上圓)의 봉분과 1414년에 세운 비석이보존되어있는 배상지의 묘-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 정자 낙암정(洛巖亭) - 안동시 남후면 단호리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2 04:33:00에 나무위키 흥해 배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