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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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에서 공신호를 수여받은 인물의 목록이다.
2.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편집]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삼한일통에 공을 세운 공신을 일컫는다. 줄여서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일컫기도 한다. 940년 신흥사를 중수할 때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건물 내부 동·서쪽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이라고도 한다. 한편 삼한벽상공신이 삼한공신 중에서도 벽에 그려진 공신들을 따로 지칭하는 상위 등급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삼한공신들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을 지칭한다. 삼한공신은 기록에 대체로 삼한공신, 삼한벽상공신, 개국공(開國公) 등의 칭호로 나타난다.
이들은 숫자가 많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금석문 등의 자료를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여러 문제가 겹쳐서 세간에 전해지는 삼한공신 명단이나 특정 가문과 삼한공신과의 연관성은 조선시대까지만 와도 보증되지 않는다. 삼한공신이 되어 중앙으로 진출한 호족 중 다수가 광종의 공포정치로 인해 경우에 따라 후대에 천역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나올 정도로 가문의 부침을 겪은 데다, 여요전쟁으로 공문서 등 각종 사료가 소실된 것의 영향까지 겹친 탓인지 문종 연간에 이르러서는 증명서를 분실한 경우라도 어떻게든 삼한공신 후손이라는 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음서 혜택을 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여요전쟁 이전의 왕실 및 중앙 기록을 복원한 7대 실록조차 극도로 부실한 내용만 남았으리라고 추정되는 마당에 기존의 상훈 체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순탄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에서는 실질적으로 삼한공신이라는 용어가 개국공신이라는 용어를 대신했다. 고려사는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통해 고려를 건국한 후에 쿠데타를 통한 건국 과정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부득이하게 쿠데타 구성원을 포상했다고 말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삼한일통 프로파간다와 통일 과정에서 새로 포섭된 호족들에게 중점을 두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종 때 개국공신에게 공음전을 하사하였다는 기사를 제외하면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기록에서 개국공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쿠데타 당시의 개국공신 2등 중 그나마 통일 전쟁 과정에서의 행적이 풍부한 김락(金樂)은 충렬왕 때의 기록에는 태조통합공신(太祖統合功臣)으로 나온다. 쿠데타로 고려를 건국한 후 당시 포상을 받은 무리들을 개국공신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를 정할 때의 기록도 정확히는 개국이나 공신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단지 포상의 등급만 나눠놓고 있다. 애초에 3등이 2천여 명이나 되어 명단조차 알 수 없던 것을 보면 실제로 의미있는 공을 세웠다기보다 단순히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 전원이나 기존 행정 및 치안 조직이 포섭 대상이 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대신 왕건에게 배향된 6공신(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 최응)과 삼한공신이 한 묶음으로 국가 보훈 차원에서 사실상 개국공신 대우를 받았다.[1] 고종 때 실시된 보훈 행정에서는 구체적으로 6공신 및 삼한공신이 최고 등급, 삼한후벽상공신이 그 다음, 그 외 배향공신이 또 그 다음 등급의 대우로 나타난다.
- 신숭겸(申崇謙)
- 금용식(琴容式)[고려사]
- 김극렴(金兢廉)[2]
- 나총례(羅聰禮)[고려사]
- 대승(大丞) 류차달(柳車達)[고려사]
- 소격달(蘇格達)[고려사]
- 염형명[고려사]
- 왕경(王景)[고려사]
- 원극유(元克猷)[고려사]
- 이금서(李金書)[고려사][3]
- 최정헌(崔貞獻)[4]
- 허선문(許宣文)[5]
3.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편집]
삼한벽상공신은 고려 시대 공신 등급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현종 이후에 이에 버금가는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게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이라고 해서 맞먹는 등급으로 해주었다.
- 양규 :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김숙흥과 더불어 1,700명[6] 의 결사대를 이끌고 20만의 거란군 후미를 흔들며 2차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 퇴각하는 거란군 본대를 맞이해 애전에서 싸우다 전사.
- 김숙흥 : 제2차 여요전쟁 당시 양규과 더불어 1,700명[7] 의 결사대를 이끌고 20만의 거란군 후미를 흔들며 2차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 퇴각하는 거란군 본대를 맞이해 애전에서 싸우다 전사.
- 두경승 : 무인정권(경대승, 이의민) 시기의 인물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등의 활약과 집권층과의 친분으로 인해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러다 명종이 이의민에 대한 견제를 위해 두경승에 대한 지지를 보냈고 그 결과가 삼한후벽상공신인 것이다. 앞의 두 인물과 다르게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는 승진인셈.
참고로 김방경, 강감찬이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잘못 언급되는 글들을 인터넷 상에서 볼수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이 외에도,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의종을 폐하고 명종을 세운 후 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나 이들이 실각한 후 모두 취소되었을 것이다. 이의민이나 그 다음 최충헌, 최우도 벽상공신이었으나 역시 삭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무오공신(戊午功臣)[편집]
고종 45년(1258) 무오정변으로 최씨 정권을 무너트리는데 공을 세운 공신
5. 수종공신(隨從功臣)[편집]
5.1.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편집]
1352(공민왕 원년), 공민왕이 왕자 시절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신
6. 중흥공신(中興功臣)[편집]
폐가입진의 논리로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이른바 흥국사 9공신이라 불린다.
7. 회군공신(回軍功臣)[편집]
1388년 위화도 회군 및 개성 시가전에 가담한 인물들로, 당초 공신으로 선정된 것은 45명이고 추가로 변안열 등 고인 7명과 윤소종·남재에 대한 포상이 검토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조민수·왕안덕·지용기·최공철·변안열·김백흥 등 6명이 삭훈되면서, 최종적으론 48명에게 공신전이 수여되었다. 회군공신은 조선 때에도 재책록되었기에 회군공신전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 이 중에서 3명이 제외되었다. 『고려사』에는 박총·안경·김상·윤소종·남재 등이 추록 명단에 거론되고 있으나, 이들은 조선 때 회군공신으로 추록된 점으로 보아 고려 당시에도 논의는 있었으나 실제 추록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남성리·이지·장자충·최윤수·황순상 등이 실제 추록된 인물로 판단된다.
8. 기타[편집]
- 안국공신
- 강감찬: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 정원공신
- 최충헌: 익성정국동심좌명치리우모일덕안사제세희대찬화협보익량상견주번한주당경광찬우익복벽재조격천관일늑정기상문경호위향리석안산기촉물전수결승한광한상악강천수평행보아정전서일금려미매속사득체선구명○질주택초대외소회반국정세제빈인사보상광구총관○○사종덕화민게부재성제천보애변리윤촉유정원공신(翊聖靖國同心佐命致理訏謨逸德安社濟世熙載賛化夾輔翼亮商楫周藩漢柱唐鏡光賛羽翼復辟再造格天貫日勒鼎紀常文經虎緯嚮理措安先機燭物轉籌决勝寒纊旱霖嶽降天授平衡保阿定典畫一金礪羹梅練事得軆先口明○叱秦吒楚大畏小懷磐國鼎世帝賚人師輔相匡救揔管○○事種德和民啓沃裁成濟川補哀燮理綸燭幽定遠功臣)[최충헌묘지명]
- 김방경: 삼한벽상추충정난정원공신
- 창국공신(昌國功臣)
- 찬도공신
- 최원호: 1050년
- 최충: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 1050년
- 치리공신
- 최충: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 1053년
- 강제공신
- 최충: 추충찬도좌리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 1055년
- 익명공신
- 이자겸: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 익성공신(翼聖功臣)
- 좌리공신
- 이자겸: 추성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
- 최충헌: 충성좌리공신(忠誠佐理功臣), 1197년
- 제세공신
- 최항: 강민제세공신(康民濟世功臣)
- 호종공신(扈從功臣)
- 강지연(康之淵)
- 양절공신
- 이제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 1325년
- 수종공신(隨從功臣)[13]
- 1등 공신
- 윤석(尹碩)
- 채하중(蔡河中)
- 김석견(金石堅)
- 이능간(李凌幹)
- 홍빈(洪彬)
- 김영돈(金永旽)
- 임자송(任子松)
- 김인연(金仁沇)
- 김륜(金倫)
- 이제현(李齊賢)
- 이조년(李兆年)
- 한종유(韓宗愈)
- 김영후(金永煦)
- 이몽가(李蒙哥)
- 이운(李雲)
- 윤신계(尹莘係)
- 이엄(李儼)
- 윤환(尹桓)
- 박청(朴靑)
- 강윤충(康允忠)
- 안천길(安千吉)
- 노영서(盧英瑞)
- 한의신(韓義臣)
- 배전(裵佺)
- 최유(崔濡)
- 황석기(黃石奇)
- 손수경(孫守卿)
- 윤원우(尹元祐)
- 김첨수(金添壽)
- 김선장(金善莊)
- 남궁 신(南宮信)
- 임성(林成)
- 2등 공신
- 김승택(金承澤)
- 박인수(朴仁壽)
- 안자유(安子由)
- 김경(金鏡)
- 전윤장(全允藏)
- 손원(孫遠)
- 이광원(李光遠)
- 김장(金莊)
- 진교화(陳敎化)
- 승신(承信)
- 이헌(李軒)
- 손습(孫襲)
- 왕석(王碩)
- 이충(李沖)
- 이원룡(李元龍)
- 이광계(李光桂)
- 전경(全卿)
- 홍매노(洪買奴)
- 찬화공신
- 좌명공신
- 이무방(李茂芳):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1] 6공신 중 최응을 제외한 나머지는 삼한공신에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최응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태조 6공신은 실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더라도 대개 삼한공신 앞에 별도로 언급된다.[고려사] A B C D E F G H [2] 허재 묘지명 기록.[3] 신라 병부령 이금현(李金現)의 아들로, 고려에 귀부한 신라 경순왕과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 왕씨 사이의 딸인 신란궁부인 김씨와 혼인하였다. 1375년 목은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文忠公李氏墓誌銘, 문충공이씨묘지명)에서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문충공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선계(先系)를 기록하면서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를 언급하였다. 그동안 문헌으로만 내용이 전했으나 2007년 12월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동에 있는 이제현 무덤에서 청석(판암)을 다듬어 만든 세로 1.68m, 가로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의 역대급 규모의 묘지석이 실제로 출토되었다.[4]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사도(司徒) 삼중대광(三重大匡). 용문사중수비 기록.[5] 공암촌주(孔巖村主). 허종신도비 기록.[6] 1,000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7] 1,000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8] 후에 김준(金俊)으로 개명[9] 후에 이인환(李仁桓)으로 개명[10] 후에 김충(金冲)으로 개명[11] 혹은 김석재(金碩材)[12] 혹은 이제(李禔)[유자우묘지명] [최충헌묘지명] [삼국사기] [13]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한 뒤에 충혜왕을 수종하면서 보필한 공신, 13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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