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고려)
덤프버전 : (♥ 0)
분류
1. 개요[편집]
夫子曰, ‘有始有卒, 其惟聖人乎!’ 則我后之功高德冠, 絶于古今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현화사비〉
고려의 제8대 대왕.修政公平, 寘民安輯, 內外底寧, 農桑屢稔. 比之周之成·康, 漢之文·景, 亦無愧矣.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려사》 - 최충의 논평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원문대왕(元文大王),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 승려 시절의 법명은 선재(禪齋), 즉위 전 봉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다.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안종 왕욱의 아들이다.
한국사에서 유일한 사생아 출신 군주로,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유명하다. 태어나자마자 암울한 전란의 시대를 살았고, 몇 년 뒤 고아가 되었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던 중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했다. 이후 요나라의 두 차례에 걸친 대침공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속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 등[2] 큰 시련을 겪었으나, 결국 요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3] .
전쟁의 위기를 극복한 것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제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 이러한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8대 현종에서 제17대 인종 때까지 무려 130년이 넘게 지속되는 기나긴 황금기에 접어들었으며, 동아시아 3국(고려 - 거란 - 북송)간 (균형적) 국제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로 거듭났다. 또한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의 중흥지주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묘호 및 시호, 존호[편집]
공식 묘호는 '현종'(顯宗)이다. 시법에서 '현(顯)'은 "업적이 나라 안팎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다. 태조 왕건의 능호 현릉도 이 '현' 자다.
최충헌 집권기인 제21대 희종 4년, 7묘 9실 종묘 제도를 정비할 때, 혜종과 현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제2대 혜종은 태조의 장남으로서, 제8대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 두 사람을 '문경지치'를 이룩한 전한 태종 문황제 유항, 한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정했다. 제25대 충렬왕의 <시책>에 의하면 현종은 만사불천지종(萬祀不遷之宗)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23대 고종 41년 강도에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에서는 현종을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칭했다.
공식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이다. 장자 덕종(제9대)이 첫번째 시호를 '원문'(元文)으로 올렸다. 이후 셋째 아들 문종(제11대)이 재위 10년(1056년)에 '대효'(大孝), 고손자 인종(제17대)이 재위 18년(1140년)에 '덕위'(德威), 7대손 고종이 재위 40년(1253년)에 '달사'(達思)를 추증했다.
고려 군주들의 시호 중에는 처음 올려진 두 글자 시호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현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때는 '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사서 중 《고려사》 <현종 세가> -총서-, 《동국통감》에서는 줄여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이라고 한다. 《동문선》에는 9대손인 충렬왕이 아버지 원종(제24대)을 태묘에 제사지낼 때 현종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쓰인 <죽책문>에는 현종 성렬대왕(顯宗 聖烈大王)이라는 존호가 나온다.
현종 재위 13년인 1022년에 세워진 '사자빈신사지석탑'엔 '성왕항거만세'(聖王恒居萬歲) 즉
라고 하며 그의 장수를 기원했다. 역시 현종 재위 중에 세워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엔 현종을 '만승'(萬乘)이라 하고, 그의 뜻을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고 표현했다. 현화사비에선 '만승'(萬乘), 독특하게 '제천(諸天)이 수호하는 인왕(人王)'으로 묘사되었다.'성왕(聖王)께서 아주 오랜 세월(萬歲) 동안 (천하에) 문제없이 거주하길 바랍니다.'
3. 생애 및 업적[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종(고려)/생애 및 업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족 관계[편집]
출신이나 권력 기반이 매우 약해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조가 한 것처럼 정략 결혼을 통해 입지를 다졌다. 그래서 후비와 자식이 매우 많다.
- 장녀: 효정공주
- 차녀: 천수전주(天壽殿主)
- 제3비: 원성왕후 김씨 - 김은부의 딸
- 장남: 덕종
- 3남: 정종
- 3녀: 인평왕후 김씨[4] - 문종 제1비
- 4녀: 경숙공주(景肅公主)
- 제4비: 원혜왕후 김씨 - 김은부의 딸
- 4남: 문종
- 5남: 정간왕
- 5녀: 효사공주(孝思公主) → 효사왕후 김씨[5] - 덕종 제3비
- 제5비: 원용왕후 류씨 - 경장태자(敬章太子)[6] 의 딸
- 제6비: 원목왕후 서씨
- 제7비: 원평왕후 김씨 - 김은부의 딸
- 6녀: 효경공주(孝敬公主)
- 후궁: 원순숙비 김씨 - 김인위의 딸
- 후궁: 원질귀비 왕씨[8] - 왕가도의 딸
- 후궁: 귀비 유씨(貴妃 庾氏)
- 후궁: 궁인 한훤영(宮人 韓萱英)[9] - 한인경(韓藺卿)의 딸
- 후궁: 궁인 이씨(宮人 李氏) - 이언술(李彦述)의 딸
- 후궁: 궁인 박씨(宮人 朴氏) - 박온기(朴溫其)의 딸
- 8녀: 아지(阿志) - 검교소감(檢校少監) 정민상(井民相)과 혼인
《고려사》 <후비전>에는 여기까지 나오지만 여기에 누락된 아내도 있었다. 현종 20년 2월 궁인 한씨의 부친 한빈경(韓彬卿)을 '겸 태자빈객 동지중추사 계국(同知中樞使 桂國)'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한빈경은 한인경의 동생으로 여겨진다. 또 현종 22년 3월 상궁 한씨(尙宮 韓氏), 상침 김씨(尙寢 金氏), 상식 한씨(尙食 韓氏), 상침 서씨(尙針 徐氏)[10] 를 임명하는데 두 한씨는 한인경의 딸과 한빈경의 딸이 확실해 보이고, 상침 김씨가 원순숙비 김씨, 상침 서씨가 원목왕후 서씨일 가능성도 있는데, 이미 궁인 신분을 벗어났음에도 《고려사》에 여전히 궁인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원목왕후와 원순숙비 김씨는 사후 계실이 아닌 측실로 간주된 것으로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원정왕후, 원화왕후, 원용왕후는 신정왕후의 직계 후손들이고, 원성왕후, 원혜왕후, 원평왕후 자매는 3명의 아들이 국왕으로 즉위했으므로 정실로 간주된 것이 명확하다. 다만 원목왕후는 1022년 숙비에, 원순숙비는 1024년 덕비에 책봉되는데 1030년에 관등이 다시 내려가 시호도 못받은 상궁 한훤영보다도 낮은 상침과 상침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종 3년(1086년) 기록에 따르면 이예의 아내에게 왕태후의 상궁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여관으로 궁관의 관직을 받았다고 해도 유부녀일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
5. 평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종(고려)/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여담[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종(고려)/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태묘 악장, 글[편집]
고려 성종이 태묘를 만든 뒤, 태묘에 배향된 왕들에게 바치는 악장, 즉 칭송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제16대 예종 11년에 예종 기준 9묘(九廟)의 왕에게 새로 바친 노래가 《고려사》 <악지>에 남아 있다.
예종이 올린 현종 왕순의 찬가 제목은 <흥경>(興慶)이며, 네 글자 운구이다.
크고 위대하신 열조(烈祖)[11]
께선,잠덕(潛德)[12]
을 통해 하늘로 날아 오르셨습니다.어려움과 위험을 날로 겪으셨으나,
성현을 모아 흥할 수 있었습니다.
용산(龍山)엔 옥작(玉爵)이 있었고,
사수(泗水)엔 부반(浮磬)이 있었습니다.[13]
증손(曾孫)[14]
이 효도하고 존경하니,복록(福祿)을 가져다 주시길 빕니다.
우리 아름다운 성조(聖祖)께선,
잠저에 계시다가 으뜸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난을 뽑고 바름을 돌아오게 하니,
신령한 무예[15]
와 아름다운 문학[16] 덕분이었습니다.[17]왕업(王業)을 중흥(中興)하시니,
후손이 계몽되고 보호를 받습니다.
음식을 드시게 하는 걸[18]
멈추지 않으니,자자손손 이어질 것입니다.
제31대 공민왕 12년 새로 악장을 만들었다. 제목은 없다.
하늘이 경업(景業)을 도우시니,
부정한 것을 쓰셔도 창성하였습니다.
삼한이 재조(再造)[19]
되니,백도(百度)[20]
가 융성했습니다.당신의 큰 계획과 열정적인 기운은,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부디 천만년(千萬年) 동안,
우리를 무한히 축복하소서.
제23대 고종 2년, 태묘에 제사를 지내며 글을 올렸다.
왕실(王室)이 어지러울 때,
다스리고 공을 세우셨습니다.
방인(邦人)[21]
을 깨우치고,이치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밖으론 구제(舊制)[22]
를 완성하셨고,안으론 사직(社稷)을 정하셨습니다.
을 없애시고,변성(邊城) 18읍[24]
을 건축하셨습니다.드디어 태평의 기틀에 다다르셨으며,
그렇기에 '중흥지주'(中興之主)라 불리우십니다.
8. 대중매체[편집]
8.1. 영화[편집]
1970년 한국영화 중 비전(秘殿)이라는 영화가 있기는 한데, 19세 영화이고 마지막에 현종이 등장하고 부모인 왕욱과 헌정왕후와 같이 살아가는 내용이여서 제대로 다룬 영화는 아니다. 비전(秘殿)(1970)
8.2. 다큐멘터리[편집]
- 2018년 EBS <다큐프라임>에서 현종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 2019년 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배우 권영민이 연기했다. 용기와 리더십으로 전쟁의 승리와 고려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여담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했던 길승수 작가는 본인의 네이버 블로그 댓글에서 한 네티즌과 담화를 나누다가 자신 역시 나무위키 현종 문서를 꽤 참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JTBC '평화전쟁 1019'-현종(顯宗, 왕순)>
8.3. 드라마[편집]
사생아로 태어난 출생의 비밀, 왕위에 오르기까지 험난한 과정, 전란으로 인한 고초 속에 성장한 명군 등 사극에 특화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사극의 단골소재인 조선시대 및 삼국시대에 비해 고려시대는 자료 부족 등으로 인해 사극 제작이 힘든 편인데다가 현종은 그 동안의 인지도 문제로 2023년에 나오는 대하사극 <고려 거란 전쟁> 이전까지는 사극의 주인공이 된 적이 없었다.
드라마 <천추태후>에 나온 현종은 막판 주역도 아니었고, 천추태후에 대한 무리한 미화 등으로 인해 드라마의 평가는 영 좋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천추태후> 방영 후반에는 '차라리 목종의 비중 대신 현종을 주인공으로 했었으면 좋았겠다.'는 의견도 많이 나왔었다.
8.3.1. 강감찬[편집]
1973년 KBS 일일 사극드라마 <강감찬>에서는 주현이 연기했다.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25]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사수현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김치양이 자객을 보내자 강감찬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드라마 말미인 62화에서 75화까지 현종의 치세가 묘사된다.
8.3.2. 천추태후[편집]
8.3.3. 고려 거란 전쟁[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종(고려 거란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4. 소설[편집]
- 2018년에 연재된 대체역사소설 《더 퍼거토리》는 시대적 배경이 고려 말 14세기 중반으로 현종의 후손을 주인공으로 하는 환생빙의물이지만 현종과 굉장히 닮은 삶을 산 주인공의 행적으로 인해 현종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