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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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의성과 청송 지역의 호족에 대한 내용은 홍술 문서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개국공신. 남양 홍씨 당홍계의 중시조. 원래는 통일신라 의성부 출신 호족으로 후삼국시대가 열리자 궁예의 밑에서 마군장군을 지냈고 왕건과는 궁예 밑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 보인다. 장수였지만 언변이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이름은 홍술인데, 참고로 922년 고려에 항복하고 929년 전사한 의성부, 진보성의 호족 홍술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 하필 홍유의 출신도 의성이라서 더 헷갈리지만, 다만 이 호족 홍술은 삼국사기, 고려사에는 성씨가 나와있지 않지만 더 후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상 김씨라, 홍씨가 아니라 '홍'이 이름의 일부인 김홍술로도 알려져 있다.
궁예의 포악으로 복지겸,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궁예를 제거하고 왕건을 추대할 것을 결의한 뒤 왕건에게 찾아가
홍유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로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유금필과 함께 청주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은 홍유에게 은열이라는 이름을 사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후에 유금필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출전할 때 홍유는 일단 죽령을 점령해서 퇴로를 확보하자고 의견을 냈지만 유금필은 결사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반대 의견을 내서 왕건이 유금필의 의견을 수용했다.
935년 나주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박술희와 함께 지원했지만 왕건은 홍유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는 어렵겠다고 하며 유금필을 보내는 바람에 박술희와 함께 물먹었다.
936년 후백제와의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는 우익의 기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삼국이 통일된 해인 936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4] 일리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나 아마 견훤처럼 통일이 된 직후 얼마 안 가 바로 세상을 뜬 듯하다.
홍유 역시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냈는데, 왕건의 26번째 왕비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이 바로 홍유의 딸이다.
자세한 내용은 홍유(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ASMR 유튜버에 대한 내용은 홍유(유튜버)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개국공신. 남양 홍씨 당홍계의 중시조. 원래는 통일신라 의성부 출신 호족으로 후삼국시대가 열리자 궁예의 밑에서 마군장군을 지냈고 왕건과는 궁예 밑에 있을 때 만난 것으로 보인다. 장수였지만 언변이 상당히 좋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 이름은 홍술인데, 참고로 922년 고려에 항복하고 929년 전사한 의성부, 진보성의 호족 홍술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 하필 홍유의 출신도 의성이라서 더 헷갈리지만, 다만 이 호족 홍술은 삼국사기, 고려사에는 성씨가 나와있지 않지만 더 후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상 김씨라, 홍씨가 아니라 '홍'이 이름의 일부인 김홍술로도 알려져 있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궁예의 포악으로 복지겸, 배현경, 신숭겸과 함께 궁예를 제거하고 왕건을 추대할 것을 결의한 뒤 왕건에게 찾아가
라며 거사를 제안했지만 왕건이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홍유가 나서서,"삼한이 분열되고 뭇 도적이 봉기하였을 때 지금 임금이 용기를 분발하고 크게 호통침으로써 그만 도적들을 쳐 없애고 요좌(遼左)[2]
지방의 3분의 1에서 그 절반 이상을 점유한 후 나라를 건설하고 도읍을 정한 지도 이미 2기(紀: 12년)가 넘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끝을 잘 맺지 못하고 포악한 행위가 태심하여 형벌을 남용하여 처자를 살육하고 관료들을 죽여 없애니 백성은 도탄에 빠져 임금을 원수같이 여기게 되었는바 걸(桀)이나 주(紂)의 죄악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
라며 설득했고, 결정적으로 류씨 부인이 갑옷을 들고 입혀주면서 결국 왕건은 봉기를 결심했다고 《고려사》에 나온다."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해독을 입은 온나라 백성들이 밤낮으로 그를 전복할 것을 생각하고 있으며 또 지위 높고 권세있는 자들도 모두 학살당하여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은 자로서 당신의 위에 설만한 사람은 없는 까닭에 모든 사람들의 뜻이 당신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는 형편인데 만약 당신이 수락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왕창근(王昌瑾)의 거울에 나타난 글도 그와 같이 예고하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을 위반하고 폭군의 손에 죽겠습니까?"
홍유는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로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유금필과 함께 청주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다.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은 홍유에게 은열이라는 이름을 사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홍유를 얻음은 은(殷)나라가 부열(傅說)[3]
을 얻은 것과 같도다."
이후에 유금필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출전할 때 홍유는 일단 죽령을 점령해서 퇴로를 확보하자고 의견을 냈지만 유금필은 결사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반대 의견을 내서 왕건이 유금필의 의견을 수용했다.
935년 나주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박술희와 함께 지원했지만 왕건은 홍유가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는 어렵겠다고 하며 유금필을 보내는 바람에 박술희와 함께 물먹었다.
936년 후백제와의 최후의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는 우익의 기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삼국이 통일된 해인 936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4] 일리천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나 아마 견훤처럼 통일이 된 직후 얼마 안 가 바로 세상을 뜬 듯하다.
홍유 역시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냈는데, 왕건의 26번째 왕비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이 바로 홍유의 딸이다.
4.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홍유(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둘러보기[편집]
[1] 남양 홍씨 판밀직공파보 등 족보에 따르면 남양 홍씨의 시조 홍은열이 바로 홍유라 한다.[2] 요동을 뜻한다. 동양 전통적인 관점으로는 왕이 북면하는 입장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방향을 정하기 때문에, 그 입장에서 왼쪽은 동쪽이고 오른쪽은 서쪽이다. 조선시대의 무슨 좌도 우도도 다 마찬가지다. 한편, 요동은 딱 현대의 요동반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여러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문맥상 요동반도 너머의 한국 문화권 전체를 가리킨다.[3] 상나라 무정 대의 재상. 천자문에도 언급되는 유명한 설화이다.[4] 공교롭게도 같은 4기장 중 1명이었던 배현경은 물론 견훤까지도 후백제가 멸망한 936년 모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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