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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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수원이다.
2. 생애[편집]
1930년 전라북도 김제군 월촌면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대학원 경제학 석사, 독일 에르랑겐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이후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지냈다.
1960년 여름, 제2공화국 정부의 대표단을 이끌고 서독의 경제부 노동국장을 만나 3000만 USD의 차관을 빌리는 조건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서독에 파견하는 협상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하의 군정이 실시되고 나서도 그 일을 계속하였다.[2][3] 이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 1964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할때 통역관으로 동행하였으며 이후 박 대통령 경제고문을 맡아 당시 유럽에서 가발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전국적으로 가발 생산을 유도하고, 전자산업 육성을 제안하는 등 여러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65년에 설립된 국내 최초 경제연구소인 한국산업개발연구소(KID·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소장에 취임했다.[4]
1976년 제9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제2기 국회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에서 유신정우회 제3기 국회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제되었고,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82년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에 취임하였다.
이외에도 경제개발계획 자문위원회 위원장,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ECAFE)의 AIDC 상임고문, 국토이용계획심의회 위원, 중화학공업추진위원장,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의원을 역임했다.
1970년 중소기업 육성 공로로 대통령 포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972년 은탑산업훈장(경제개발계획 수립 기여), 1977년 대통령 유공기념비(100억불 수출 기여), 2001년 독일 민간외교 훈장(독일외교협회), 2002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3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한국의 공업화 발전론'(1972), '우리나라 중화학공업정책'(1973), '한국 경제의 도전'(1980),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1997), '한국 자본주의 제3의 혁명'(2001), '대한민국에 고함'(2005), '경제, 4만불 시대의 로드맵'(2008), '위대한 한국 시대는 온다'(2015) 등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2023년 10월 16일 오후 7시36분께 서울 중앙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인해 향년 9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는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에덴낙원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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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앙대 교수로 재직중이다.[2] 당시는 5·16 쿠데타에 부정적이었던 미국이 경제협력을 거절하자 서독에서 차관을 받으려고 할 때였다.[3]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으라"는 지시로 지목됐고, 1961년 말 정래혁 당시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서독 경제 협력단에 장관 특별보좌관 자격으로 포함됐다.[4] KID는 경부고속도로 등 물류 인프라와 구미공단, 여천공단 등 산업공단을 개발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중소기업중앙회 설립을 돕고, 중소기업 전담 은행인 기업은행을 만드는 것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