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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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李楨)과 복선군 이남(李枏)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장옥정, 즉 희빈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숙종실록》 숙종 12년 12월 12일
조선 제16대 인조부터 제19대 숙종 재위 연간까지 활동한 역관으로 당대의 공적인 기록인 《숙종실록》에서도 '국중(國中)의 거부' 즉, 나라 안의 큰 부자라고 할 정도로 부유한 인물이었다.
또한, 중인의 신분으로 궁녀에서 왕비의 자리까지 오른 희빈 장씨의 5촌 당숙이었다.
2. 생애[편집]
1613년(광해군 5) 역관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을 지낸 아버지 장경인(張敬仁)과 어머니 영산 신씨 판관(判官:종5품) 신철수(辛哲壽)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래로 동생 장찬(張燦)이 있었다.
2.1. 효종의 총애[편집]
1639년(인조 17)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식년시 역과 한학(漢學) 전공에 1등 1위, 장원으로 입격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갈 때 수행하여 6년 동안 머물면서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했고, 조선으로 귀국한 뒤에는 당상관이 되어서 역관의 우두머리로 40년간 30여 차례 북경을 다니며 외교를 도맡았다. 소현세자와 심양 주재 수행원들은 볼모로 잡힌 기간 내내 역관들의 능력 부족으로 고생을 했고 역관들 역시 여러차례 교체되며 극한직업을 찍었는데 6년이나 살아남고 30번 넘게 청나라에 드나들던 것을 보면 실무 능력은 출중했던 듯하다.[1][2]
풍채가 좋고 사무 처리에 부지런했다. 일찍이 뱃길을 경유하여 중국에 갔으며, 정축년[3]
에 소현세자를 배종해 심양에 가서 6년 동안 머물렀으므로 저들의 정상을 자세히 알았다. 돌아와서 그 공로로 승자(陞資)하여 수임(首任)이 되었고, 수임으로 있던 40년 동안 연경에 간 것이 30여 번이었으며, 여러 공무에 있어 그의 주선에 힘입은 것이 많았다. 벼슬은 숭록대부에 이르렀고, 여섯 번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통문관지》
특히 효종은 장현을 무척 신뢰하여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곤 했는데, 이는 지난날 심양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까닭이었다. 1653년(효종 4) 당시 삼화(蔘貨: 상품으로 판매하는 인삼)를 지나치게 많이 가져가 무역한 일을 두고 탄핵을 받았다. 특히 압록강을 건널 때 싣고 간 짐은 50여 수레나 되었는데 '내패'(內牌)라고 하는 내수사의 표식이 꽂혀 있어서 현장에서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며칠 만에 사면령을 내려 없던 일로 만들어 주었다.[4]
이때의 기록을 보면, 장현을 두고 '나인(內人)의 아비'라고 썼다. 사실 장현은 일찍이 자신의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는데, 이처럼 왕실의 이름을 빌려 내수사를 이용해 더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종질녀인 희빈 장씨의 입궁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중에 장현의 딸은 1701년(숙종 27) 무고의 옥이 일어날 때 '장 상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1657년(효종 8) 청나라에 인평대군을 호종하여 사은사로 다녀온 뒤에 정2품 자헌대부에 가자되었다.[5]
2.2. 삼복의 변[편집]
1677년(숙종 3)에는 이미 숭록대부가 되어있어 더이상 높여줄 품계도 없었다. 그래서 숙종은 자식이나 조카 중 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하라고 명했다.[6] 사대부가 아닌 중인 신분의 역관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또한, 이 시기의 장현은 재산 축적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사재를 털어 청나라의 기밀을 알아내고, 화포를 사서 들여오는 등 사실상 대청 첩보 활동도 같이 했다.[7] 당연히 역관이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국왕의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주강(晝講) 입시 때 특진관 목내선(睦來善)이 아뢰었다. 신이 작년에 연경에 갔을 때 설관(舌官: 역관)을 시켜서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탐문했으나 일행 가운데는 갖고 있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역관 장현·김기문·방이민·김진립 등이 사재인 은화를 많이 소비하여 사정을 탐지했습니다. 그러므로 별단으로 서계하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수단으로 논상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비변사등록》 숙종 1년 4월 23일
그러나 평상시 복선군, 복창군 형제[8] 와 가까웠으므로 삼복의 변에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았고, 이에 따라 장현과 장찬 형제와 그 아들들은 유배를 떠났다.[9] 지금까지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그가 겪는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2.3. 정계 복귀와 활동[편집]
1686년(숙종 12)까지 계속해서 역모에 연루된 장현 등을 제대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가 잇따랐다. 이때 구원 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그의 종질녀 장옥정(희빈 장씨)이었다. 장옥정이 궁녀로 입궁한 시기를 두고 말이 많은데, 궁녀의 직업적 특성상 20세가 넘어서 되는 경우는 없으므로 어릴 때 궁녀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10]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 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의 상소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 명문가 출신도 아니고, 중인 신분의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고 있었고, 지난날 삼복의 변 관련 인물인 장현의 종질녀인 것이 서인의 위기감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곧이어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면서 장현 또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심지어 장옥정이 새 왕비로 책봉되면서, 숙종이 장씨 집안의 3대를 추증했다. 증조부 장수는 좌의정, 조부 장응인은 우의정, 사촌 장형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1] 역관 집안이 정국의 핵심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왕의 외척이자 왕세자의 외가가 되었지만, 정계에서의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했다.
특히 1691년(숙종 17) 그의 동생 장찬이 청나라에서 해외 반출을 금지한 《일통지》(一統志)[12] 를 몰래 사서 조선으로 갖고 들어오려다가 책문(柵門)에서 발각되었다.[13][14] 이 일로 인해 곤란해지자 조정에서는 장찬에게 모든 책임을 미뤘고, 장찬은 금오산성 변경에서 군역을 지게 되었다.[15]
동생에 이어 장현도 조선으로 밀반입하려던 화포 25대가 봉황성에서 발각되는 바람에 관직이 깎이는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숙종실록》에서는 사관에 의해 장현의 노력이 평가 절하되고 있다.
장현은 오랫동안 수역관(首譯官)을 지냈기 때문에 온 나라에 부자로 소문이 났다. 그 사람에게 과연 일컬을 만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사대부(士大夫)로서는 입에 올리기가 수치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몰래 문서(文書)를 구입하여 공상(功賞)을 노린 것이어서 본디 숭장(崇奬)하기에 부족한 것은 물론 말을 내린 것도 외람되다 하겠다. 그런데도 목내선과 권대운이 그의 공로를 성대히 일컫고 심지어 대신(大臣)의 은례(恩例)로까지 대우하려 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숙종실록》 숙종 15년 윤3월 13일
2.4. 죽음[편집]
1694년(숙종 20) 사헌부 장령 심극(沈極)은 장현을 탄핵하면서 '재물은 온 집안에서 으뜸'이고 '가옥이나 의복은 장식은 사치'라고 표현했다. 재밌는 사실은 탄핵할 때도 그가 쌓은 부(富)는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현(張炫)ㆍ장찬(張燦)은 장희재(張希載)와 가까운 친족(親族)으로서 타고난 성질이 매우 흉악하고 교활하여 재물은 온 집안에서 으뜸이요, 자질(子姪)들은 모두 수재(守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옥이나 의복의 장식은 사치하여 법도를 넘어서고 경상(卿相)과 서로 결탁하여 동류처럼 보며 크고 작은 조정의 논의에 반드시 끼어들어 모의를 하고 장희재를 지도하여 흉모(凶謀)를 이룩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여러 자식들을 풀어 조정의 관원들을 반열(班列)의 사이에서 돼지처럼 꾸짖기도 하고 그의 종들을 사주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 가서 시비를 엿듣게 하더니, 성화(聖化)가 새로워져서 여러 간신(奸臣)들이 쫓겨나자 밤낮으로 쏘다니므로 그들의 하는 짓을 헤아릴 수가 없으니, 청컨대 모두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소서."
《숙종실록》 숙종 20년 윤5월 13일
희빈 장씨와 장희재가 몰락하자 장현 일가도 마찬가지의 처지가 되었다. 장현은 처음에 경상남도 거제현(巨濟縣)에 정배되었다가 전라북도 부안현의 위도(蝟島)로 이배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705년(숙종 37)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죽은 죄인 명단에 이름이 보인다.[16]
3. 가계[편집]
- 증조부: 절충장군 장세필(張世弼)
- 조부: 절형 증 우의정 장수(張壽)
- 조모 증 정경부인 충주 지씨
- 부친: 사역원 동지 장경인(張敬仁)
- 모친: 영월 신씨(판관 신철수(辛哲壽)의 딸)
- 본인: 숭록대부 장현(張炫)
- 처: 여흥 이씨(지중추부사 이질(李耋)의 딸)
- 아들: 장천우(張天羽)
- 며느리: 평양 조씨(조응현(趙應賢)의 딸)
- 손자: 내의원정 장성유(張聖維)[17]
- 아들: 사역원 봉사 장천헌(張天憲)
- 며느리: 우봉 김씨(사역원 동지 김기문(金起門)의 딸)
- 손자: 숭록대부 장채유(張采維)[23]
- 아들: 절충장군 장천강(張天綱)[24]
- 며느리: 광산 김씨(호조 계사 김석령(金錫齡)의 딸)
- 아들: 부사맹 장천석(張天錫)
- 손자: 장태유(張泰維)[25]
- 딸: 상궁 장씨[26]
- 딸: 변이창(卞爾昌)의 처[27]
4. 여담[편집]
- 《청성잡기》에는 장현이 얼마나 부유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효종이 신풍부원군 장유의 묘를 이장할 적에 왕족과 부마들이 모두 가 보도록 했는데, 그때는 매우 추운 겨울이었다. 당시 방한용으로 쓸 수 있는 모자는 만선(萬縇)[28] 과 휘항(揮項)[29] 이 있었고, 특히 족제비나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것은 1,000금이 부럽지 않을 만큼 사치품이었다. 그런데 이런 휘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유한 역관 두 명 뿐으로 그 중 한 명이 장현이었다고 한다.
5. 대중매체[편집]
- <장희빈> - 오영갑
- <장옥정, 사랑에 살다> - 성동일
한편 복선군의 역모에 가담했으나 남인들의 태도에 불만을 느끼던 중[30] , 자신이 준비한 장옥정이 만나는 상대가 숙종이라는 사실을 알자 재빠르게 갈아타면서 "꽃을 예쁘게 키워줄 사람은 복선군이 아닌 전하"라고 말한다. 원래 장현의 계획은 복선군을 왕으로 세우고, 장옥정을 복선군의 여자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장옥정을 침방 궁녀로 만들고 자의대비를 통해 숙종과 제대로 엮어준다.
참고로 작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 공작은 장옥정이 아닌 장현의 짓이다. 간택을 막기 위해서 인현왕후 민씨의 어머니까지 독살하는 악랄한 짓도 서슴치 않는 데다가 치부책까지 갖고 있는 등, 장희재가 실제 역사에서 저지른 악행들을 대신 다 저지르면서까지 행한다. 결국 그토록 대립하던 민유중을 제압하고 자신이 꿈꿨던 국구(國舅: 왕의 장인)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치수에게 포섭 당한 심복 광선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하루짜리 짧은 꿈으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