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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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2. 학창시절
3. 정치 경력
3.1. 외무대신
3.1.2. 방위대신 겸직
3.1.3. 퇴임 이후
3.2. 제100대 내각총리대신
3.3. 제101대 내각총리대신


1. 출생[편집]


1957년 도쿄도 시부야구에서 출생했으며, 2남 2녀 중 장남[1]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미나미구 히지야마초이다. 후미오의 가문은 히로시마를 기반으로 3대째 정치가를 배출해온 명문이다. 할아버지 마사키(正記)는 만주에서 백화점 경영, 부동산 사업 등으로 큰 부[2]를 쌓아 이를 기반으로 중의원 의원을 지냈고 아버지인 기시다 후미타케는 \통상산업성 관료, 정치인이었다.

2. 학창시절[편집]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통산성 관료였던 아버지가 뉴욕 총영사관에서 근무하던 관계로 뉴욕에 거주하며 공립학교에 다녔다.[3]


파일:기시다.png

카이세이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귀국 후 치요다구립 나가타초 초등학교의 3학년에 편입, 치요다구립 고지마치 중학교를 거쳐서 카이세이 고등학교[4]를 졸업했다. 도쿄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삼수까지 했지만 결국 와세다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였다.
기시다 후미오의 집안에는 관료가 많았고 이들 전원이 도쿄대학 출신이다.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통상산업성 관료, 중의원), 삼촌 기시다 슌스케(대장성 관료, 히로시마은행 회장), 고모부 미야자와 히로시(자치성 관료, 참의원), 고종사촌 미야자와 요이치(대장성 관료, 참의원)에 더해, 매제인 기무라 요시히데(재무성 관료)와 가베 데쓰오(재무성 관료)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일가가 도쿄대학 출신 관료 일족인데 비해 기시다는 와세다대학에 은행원 출신이라 튀는 편이다. 까놓고 말해 도쿄대학 - 관료 루트를 타는 것이 당연한 집안에서는 열등생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5]

물론 와세다대학일본에서 명문대로 인정받는 것은 맞지만, 그건 일반인이나 제계 엘리트 기준이고 정관계 엘리트들에게 있어서는 와세다도쿄대학 - 관료 루트와는 별개로 취급된다. 대학 졸업 후 기시다는 일본장기신용은행에 입행하였다. 이 곳도 버블 붕괴와 함께 망하긴 했지만 엘리트들이 근무하는 주요 금융 회사로 일컬어지던 곳이었다.

기시다가 관료가 되기 힘들었던 이유가, 일본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1종 공무원시험 합격자들은 보통 재학 중 시험에 합격하고 부처에 면접을 보아 대학 졸업 후 바로 가스미가세키에 입성하는 경우가 많다. 이 궤도를 이탈해서 적기를 놓치면 한국과 다르게 사실상 입성이 어렵다.

특히 대장성[6]이나 통산성[7], 자치성[8]과 같은 일류 중의 일류 관청은 현역 도쿄대 법학부생이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관계는 도쿄대 법학부와 비법학부의 차이도 심해서, 재무성의 경우 역대 사무차관도쿄대 법학부 출신이 아닌 경우는 딱 세 명이다.[9]

그래서 외무성외교관도 법학부생[10][11] 비율이 높고, 방위성의 경우도 상층부의 경우 방위대학교를 나온 자위대 장교 출신[12]보다는 도쿄대 법학부 출신 방위관료가 많다. 외교관 퇴직 후 최고재판소 재판관에 가기도 한다.

그런데 기시다는 삼수 출신에 와세다 출신이라 애초에 일류 관청엔 들어가기 힘들었다. 당시 와세다게이오의 졸업생은 대부분 기업에 들어갔고 관료가 된 인원은 별로 없다. 기시다 역시 도쿄대에 진학했다면 젊은 시절 중앙 성청 관료로 일하다 부친의 비서를 거쳐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 목표였을 확률이 높다.

한국의 정치인들에 비추어, 기시다가 관료가 되었더라도 적어도 20년 이상 근무하며 주무 과장이나 국장 정도는 맡아야 정치 입문을 위해 내세울 만한 경력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여겨 차라리 사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냐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다르다.

일본에서는 젊은 시절 잠시 관료로 일한 엘리트 청년들이 정치에 입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오히려 한국처럼 수십년간 정부에서 근무하며 고위직 공무원을 지낸 사람들은 국회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한국일본의 정치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우선 한국의 공무원 출신 정치인들의 경우, 선거에 떨어져도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는 판사검사를 제외하면 행정부 관료, 경찰 간부, 국군 장교, 외교관 등 국가기관 및 지방자치단체 출신 국회의원들의 경우, 내세울 수 있는 고위공무원 직위를 역임한 뒤 정계에 입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정당과 지역민은 이들에게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국정 경험과 능력, 그리고 인맥을 발휘해 일해주길 원한다.[13]

관료 출신 정치인 중 행정고시 출신인 박성훈 전 부산 경제부시장의 경우 40대 후반에 정치권에 영입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젊은 축에 든다. 보통 행정고시 관료 출신들은 50대 후반은 되어야 국회에 입성한다. 예외적인 경우로는 정말 파격적으로 발탁되거나 일본처럼 세습 정치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21대 국회의 오영환 의원은 비고시 출신의 현장직 소방공무원 출신이거나 양금희 등과 같이 중등교사초등교사가 공천을 받는 사례가 있지만 전자는 청년 공천 + 특정 후보 대체 사례이고 후자는 특정 후보 대신 나온 케이스로 볼 수 있다.

한편 국회에 일부 관료 출신 세습 정치인이 있는데, 정우택, 이종구의 케이스를 봐도 이들은 아버지의 기반이 있음에도 자신들도 행시 출신으로 40대 중반~50대까지 근무하다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인 가문 출신으로 행시에 붙어도 진짜 아버지 이름만 믿고 별 경력도 없는 어린 나이에 출마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중앙성청 관료나 지자체 관료 출신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의 이른 나이에 퇴직하고 정계 입문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14]

대형 정당에서 그런 청년들을 심사해 지역구 지부장을 맡기고 공천을 주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직 관료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위 공무원의 직무 경험과 인맥과 같은 공직 경력, 네트워크를 선호하는 반면 일본에서는 국가공무원채용1종시험을 통과하고 부처 면접에서도 선별되어 중앙부처 관료로 일한 경험이 있는 전도유망하고 똑똑한 청년을 잘 키워내는 것이 지역민과 정당의 목표인 것이다.

그래서 관료 출신이라고 해도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이들의 경력을 보면 중앙성청에 입성해 유학 경력까지 포함해도 10년이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과장은 커녕 계장까지만 하고 나오는 케이스가 많다.[15]

이런 정치 문화 덕분에, 관료가 되는 것은 정치인 가문 출신이 아닌 기반없는 청년이 국회의원이나 현지사, 시장이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에 해당된다. 일단 고시에 통과한다는 것이 유능하다는 것과 동일시 되기에 웬만하면 대부분의 정당들이 이들을 믿고 공천을 준다.

한국일본과 다르게 이런식의 행정부 청년 관료를 대상으로 한 정치권 영입 문화가 전무하며 그나마 법조계에서 청년 인재를 영입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정치 특성에 따른 방향성, 정치문화의 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16]

다마키 유이치로, 스즈키 게이스케, 스즈키 노리카즈, 오가와 준야, 고바야시 다카유키, 야마다 미키, 이노우에 신지 등 당을 불문하고 다양하게 있는 관료 출신[17]들은 모두 빠르면 20대, 늦어도 30대 중반에 관을 떠났다. 그래서 빠르면 30대, 늦어도 40대 중반의 나이에 4선, 5선 의원이 되었다. 오히려 호소다 히로유키처럼 중앙성청 과장직까지 역임하고 나온 중견 관료 출신은 희귀할 정도이다.[18]

한국에서 정치권 영입 대상인 차관이나 청장, 중앙부서 국장급 인사들은 주로 은퇴한 후 공기업, 대기업, 중견기업 이사, 고문직 혹은 교수직으로 가기도 하고 나가미네 야스마사와 같이 타 부서나 공공재단으로 이동하는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

일본 국회에서는 젊은 나이에 첫 당선되는 경우가 많고 다선 의원들이 많아 늦은 나이에 입당하는 것이 불리한 편이다. 늦은나이에 선거에 뛰어들 경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차선책으로 참의원 선거에 뛰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의원 선거에 뛰어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19]

일단 총리, 장관을 하기에는 선수가 부족하고 그렇다고 정무차관 하기에는 직급 상 사무차관과 차이도 거의 없고 연령 상 직무 수행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젊은 국회의원들이 많고 선수를 많이 쌓아야 뭘 할만하니 대부분 젊은이가 들어오는 것이다.

한국은 바깥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오니 평균 정계입문 연령도 높고, 재선, 삼선만 되어도 할만하니 전문성을 쌓은 고위 관료 출신이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주민들도 고위직 출신이 인맥 네트워크를 이용해 예산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강화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3. 정치 경력[편집]


파일:기시다 후미오 1993년.jpg
1993년, 기시다 후미오의 인생 첫 당선 순간


  • 1996년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소선거구제 개편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소선거구 히로시마현 제1구에서 출마했고 이후 모든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 2007년 제1차 아베 신조 개조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20]에 임명되어 계속 입각하였고, 아울러 소비자 행정 추진 담당 대신, 우주 개발 담당 장관에도 임명되고 한때는 최대 6개의 장관 자리를 겸임했다.

  •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히로시마1구에서 민주당의 스게카와 히로시를 꺾고 선출되었다.


  • 2012년 10월 정계 은퇴를 표명한 고가 마코토로부터 굉지회 회장직을 계승, 제8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파벌 통칭이 기시다파로 바뀌었다. 그 해 12월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히로시마 1구에서 7선거했고 선출되었다.

  • 아베 신조 내각에서는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과 더불어 핵심 내각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의 시작부터 2017년까지 5년간 외무상을 맡았으며 2017년 8월 3일 개각 및 당직개편에서는 핵심당직인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전보되었다.

  • 아베가 밀어주는 포스트 아베의 대표주자로 2017년 들어 이시바 시게루를 제치고 사실상 차기 자민당 총재로 유력시 되고 있다. 내각이나 당직에 기시다파가 포진해있다. 기시다와 같이 차기주자로 불리우는 이시바 시게루나 노다 세이코는 아베 총리와 매우 심한 대립각을 세우지만 기시다 후미오와 기시다파 의원들은 아베 정권과 아베 총리에 매우 협력적인 태도를 보인다. 다만 위 두 인물에 비해 대중의 지지가 부족한건 약점. 그러나 의원내각제와 자유민주당 일당우위제가 결합된 일본의 정당정치에서는 대중의 지지보다 자유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 중요하므로, 자신의 파벌을 기본으로 한 상태에서 호소다파의 지지까지 끌어모을 경우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다.


3.1. 외무대신[편집]


선거 후에 출범한 제2차 내각에서 외무대신으로 입각하면서 제2차 아베 개조 내각에서 유임했다. 2014년 12월 제4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8선거 후에 제3차 아베 내각에서도 연임 자민당 총재 선거 후의 2015년 10월에 출범한 제3차 아베 제1차 개조 내각에서도 외상을 유임했다.

2016년 4월 현지 히로시마에서 열린 G7장관 회의의 의장을 맡아 다른 G7장관과 함께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 히로시마 평화 기념 자료관을 찾은 뒤 원폭 사망자 위령비에 헌화하였다. 그 해 5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 방문을 했다. 참의원 선거 후 그 해 8월에 출범한 제3차 아베 제2차 개조 내각에서도 유임한다. 2017년 8월 3일 외무대신에서 물러났다. 총 재직기간은 1681일.[21]

3.1.1. 위안부 협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기시다 외무상 시절 한일 간 가장 큰 외교적 사건은 위안부 합의였다. 2015년 12월 28일 서울특별시에서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회담을 갖고, 일본 정부한국 정부가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치유금 10억엔을 지급하기로 하고 20여년을 끌어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하였다.


3.1.2. 방위대신 겸직[편집]


2017년 7월 29일에 이나다 도모미 방위상이 남수단에 파견된 육상자위대의 교전기록을 은폐한 것이 들통나 자진 사퇴하면서 외무상과 함께 방위상 직책도 임시로 겸직하게 되었다.

이후 오노데라 이쓰노리 중의원이 후임 방위대신으로 임명되면서 겸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3.1.3. 퇴임 이후[편집]


2019년 12월 19일 자기 파벌의 모치즈키 요시오 의원이 병사하자 기시다 후미오 정무조사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오랫동안 행동을 같이한 동료 파벌의 사무 총장으로, 저를 지지해 준 정치 동지이자 둘도 없는 존재였다. 슬픈 심정이다. 높은 뜻을 제대로 이어 받아 노력해 공적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2020년 8월 28일, 아베 신조가 총리 사임 의사를 밝힌 이후 곧 치러질 총재 선거에 나설 의욕을 보였고, 이후에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했다#. 이에따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에 이어서 정식으로 출마를 선언한 두번째 인물이 되었다.

9월에는 책 출판을 가짐으로 총리 포석을 다지는 중이다.# 9월 1일에 공식 출마 선언했다.# 그리고 2위로 낙선했다.

다음 총재 선거에도 나갈 것을 밝혔다.# 타니가키파 지지 협조를 가졌다.# 또, 자신의 파벌인 굉지회, 아소파, 타니가키파의 3파벌이 합류하는 "대굉지회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기시다파의 옛 주인이던 고가 마코토 전 간사장이 아소파와 함께 하는 것은 절대 불가하다며 파벌을 탈퇴하며 만만치 않은 차질이 예상된다. 그리고 이시바 시게루가 계파 수장에서 물러나자 이시바파 일부 끌어들이기를 시도 중이다.#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일본 학술회의 6명 임명 보류에 대해 설명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하였다.#

2021년 상반기 열린 보궐선거에서 자민당 히로시마현연합 회장 자격으로 참의원 히로시마현 재선거 승리를 위해 니시다 히데노리 후보와 함께 적극적으로 유세에 나섰으나, 호헌파 야권 단일후보인 미야구치 하루코에게 접전 끝에 패하면서 정치적 내상을 입었다. 패배 이후 기자단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의 뇌물 문제와 관련해 현민들의 분노가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3.2. 제100대 내각총리대신[편집]


2021년 8월 26일, 작년에 이어 다시 한번 202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확산과 올림픽 개최로 민심을 크게 잃은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강력한 대항마로 평가받았고, 스가 총리가 9월 3일에 아예 총재직 연임 도전을 공식 포기하면서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떠올랐다.

2021년 9월 29일 이루어진 자민당 총재 선거 투·개표 중 1차 선거에서 전체 764표 중 256표를 얻어 예상을 깨고 255표를 얻은 고노 다로를 제치고 1위로 결선에 진출했다. 이미 이 시점에 선거 승리가 거의 확정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

결국 최종 결선 투표에서 257표를 얻어 170표를 얻은 고노 다로를 제치고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1차 선거 중 당원 투표 결과에 따라 배분된 도도부현 표에서는 참패했지만, 중·참 양원 의원들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

1차 투표와 2차 투표 모두 당원 투표에서는 고노가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국회의원들의 투표 결과 때문에 기시다가 당선되는 결과가 나왔다. 한편 선거 과정에서 아베 신조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돼 그의 상왕 정치라는 의견이 많다,#

10월 1일, 자민당 당직 인사를 단행했는데 야당과 일부 비판 세력으로부터 3A(아베-아소-아마리)의 괴뢰정권이냐는 소리를 듣는 중이다.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을 2018년 고무라 마사히코 이후 공석이었던 사실상 명예직인 당 부총재로 보내는 대신 후임 재무상에 아소의 처남인 스즈키 슌이치[22]를 임명하고, 3A의 일각 아마리 아키라 세제조사회장을 니카이 도시히로의 후임 간사장으로 임명, 대놓고 전면에 드러냈다. 한편 총재 선거에서 맞붙었던 친아베 성향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대신은 과거 한번 역임했던 당 정무조사회장에 다시금 임명했다.# 관방장관에도 호소다파마쓰노 히로카즈가 임명되는 등 전체적으로 개혁성으로 국민에게 어필하기보단 당내 파벌의 논리로 철저하게 갈라먹은 인사로, 3A의 당내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것을 이번에도 입증한 셈.

현재 야당 지지율은 하위권에 머물고 있고 그나마도 이번 총재선의 컨벤션 효과가 지대하여 모든 토픽을 자민당 총재선이 잡아먹은 수준이 되어 야당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못하는 상태라, 비록 기시다가 국민적 지지를 받은 총재는 아니지만 스가를 끌어내려 뭔가 쇄신한 듯한 감각을 주는 동시에 종합적으로 당 내부에서 차기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양쪽의 의견을 종합한 나름의 수라는 평가다.

또 전체적으로 세습 경향이 강해졌는데 당 4역중 하나인 총무회장에는 후쿠다 다쓰오가 발탁됐는데 청년인사라지만 나이는 54세이며, 전직 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의 손자이자 마찬가지로 전직 총리대신인 후쿠다 야스오의 아들이다. 후쿠다는 이번 총재선에서 90여명의 젊은 의원을 규합하여 파벌논리를 비판하며 자유투표를 요구하고 당의 개혁을 요구하여 마치 고노를 지지하는 듯한 뉘앙스를 비췄으나 선거 결과를 보면 고노에 표를 던진 사람은 얼마 안 되어 보이며 결국 소장파를 결집시켜 목소리를 낸 후쿠다에게 기시다가 자리를 나눠주는 식으로 그를 총무회장에 임명한 것으로 비춰진다. 조직운동본부장에는 역시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딸인 오부치 유코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인사 속에서 고노 다로 행정개혁상은 당 4역에 들지 못하는, 전직 외무대신이 갈 자리가 절대 아닌 당 홍보본부장으로 좌천되었고 고노를 도운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상 역시 내각에서 배제될 전망이다. 이시바 시게루는 이번에도 중앙 정계 복귀에 실패하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전임 스가 내각 때보다도 오히려 3A의 영향력이 강해진 게 눈에 띄는 인사라 비판하는 측에서는 그냥 '아베의 리턴'이라며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내각 명단이 공개된 이후 일본 언론에서는 각료경험이 없는 신인이 13명 이나 각료로 기용된 점에 대해 기존 아베 내각을 거의 그대로 계승했던 스가 내각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신선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특히 4선 이하 선수가 낮은 신인이 전면에 나서면서 자질과 경험부족으로 '불안하다', '신선하나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라는 목소리도 있으나, 일단은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여론의 눈높이를 나름대로 반영하려 했다는 인사라는 평가.

1974년생에 3선에 불과한 고바야시 다카유키가 신설된 경제안보담당대신을, 마찬가지 1976년생 3선에 불과한 마키시마 카렌이 디지털대신을 맡는 등 젊은이들에게 새롭게 떠오르는 분야를 맡겨 젊은 감각으로 기민하게 대처하길 바란다는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 인사를 했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의중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아베 전 총리가 이번 기시다 내각 인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아베는 관방장관에 본인의 최측근 하기우다 고이치를 배치하고 간사장엔 이번 총재선에 본인이 푸쉬해준 다카이치 사나에를 올려놓길 바랐다고. ##

이렇게 각료 인사에 대한 평가는 서로 엇갈리고 있다. 뒷받침하듯 요미우리신문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기사다 총리의 각료인사에 대해 61%가 호평했다.# 그러나 마이니치신문의 여론조사에서는 새 각료에 대한 기대감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 ‘기대감이 있다’는 답변은 21%에 그쳤고, ‘기대감이 없다’는 51%나 되었다.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는 조각(組閣)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파벌을 배려해 결정했다’는 응답이 74.4%에 달했고, ‘적재적소로 결정했다’는 18.8%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아사히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기시다가 '다시 태어난 자민당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응답이 54%, '실현할 수 있다'는 응답은 24%에 그쳤다.#

그리고 각료 인사는 그렇다 치고 당료 인사는 문제점을 많이 지적받았다.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은 아마리 아키라 전 세제조사회장을 간사장으로 기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이 48%에 달했고, 긍정적인 평가는 30%에 머물렀다. 게다가 국회대책위원장으로 기용한 다카기 쓰요시는 팬티 도둑으로 유명하다. 이 둘을 묶어서 까는 기사도 있다.#

총재 취임 이후 2021년 10월 4일, 임시국회에서 열린 내각총리대신 지명 투표에서 중의원 311명, 참의원 141명의 지명을 받아 일본의 제10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저녁 나루히토 천황의 임명장을 받는 것으로 공식적인 임명 절차는 완전히 종료된다.#

당초 예상보다 일정을 앞당겨 10월 14일 중의원을 해산하고 31일 총선거 투·개표하는 방향으로 방침을 굳혔다고 한다.#

한편 총리 취임 이후 소신표명을 위한 공식 기자회견에서 납북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한일관계와 관련해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나라"라며 "건강한 관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따라 한국 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력히 요청할 것"라고 말해 2020년 스가의 소신표명 연설의 한일관계 관련 부분과 거의 일치했으며 오히려 스가가 한국을 '매우 중요한 이웃나라'로 표현한 것에서 '매우'를 빼서 한국에 대한 중요도를 한단계 낮췄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10월 4일 첫 취임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자본주의를 실현하겠다" 며 “분배 없이 다음 성장은 없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이뤄 국민이 잘살 수 있는 경제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양적완화를 기반으로 한 아베노믹스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정책이지만 여기서 '분배'를 한국언론들은 소득주도성장과 비슷하다고 평했다.##

출범 직후 언론별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스가 퇴임 직전 30% 전후에서 회복된 50% 전후의 지지율이 집계되었다. 이전 내각이 출범시에 대부분 60~70% 정도의 지지율로 시작한 데 비하면 허니문 없는 스타트를 끊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같이 조사한 비례대표 지지율에서 야당을 압도하는 결과가 나타나 10월 중 실시될 총선의 전망은 어둡지 않은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TV 도쿄 여론조사에서는 기시다 내각의 첫 지지율이 59%, 비(非)지지율은 25%로 조사됐다. # #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는 내각 지지율이 55.7%, 비지지율은 23.7%로 집계되었다. 비례대표의 정당별 지지율은 자민당 44.6%, 공명당 5.8%, 입헌민주당 14.9%로 집계되었다. 교도통신(영어), 산케이신문 인용(일본어)

마이니치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 첫 지지율이 49%로 조사됐다. 이전 스가 내각의 마지막 지지율 37%에 비해 12% 상승한 수치이나, 스가 내각의 첫 지지율인 64%와 비교해서 15% 하락한 수치이며 비지지 또한 40%로 타 언론 대비 높다.1 비례대표의 정당 지지율은 자민당 34%, 공명당 6%, 입헌민주당 16%로 집계되었다.2

요미우리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이 56%, 비지지율은 27%로 집계되었다.#

아사히 신문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 45%, 비지지율은 20% 수준으로 다른 조사에 비해 낮은 수치가 나오긴 했지만, 자민당 지지율이 41%, 연립여당 공명당 지지율이 5%를 기록해 합계 46%를 기록한 반면 제1야당 입헌민주당의 지지율 13%로 집계되었다.#

8일, 사이타마 1구의 무라이 히데키 중의원을 국내경제보좌관으로 기용하였다.#

총리 취임 후 1주일도 되지 않아 치바현에서 규모 5.9의 지진이 터지면서, 총리로서의 재난 대응 및 수습 역량이 첫 시험대에 올랐다.

총재 선거 당시 공약했던 부유층 과세에 대해서 당분간은 도입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공약을 추진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10월 11일, JNN 여론조사 결과 내각 지지율이 58.6%로 집계되었다. 비지지율은 34.7%다. 2008년 아소 다로 정권 이후 내각 출범 초기 지지율로는 최저치이지만, 총선을 3주도 안남긴 시점임을 감안하면 무난한 지지율이라고 할 수 있다. #[23] 자민당 지지율 41.5%, 입헌민주당 지지율 5.7%, 공명당 지지율 3.1%, 유신 2.5%, 공산당 2.3%로 집계되었다.

산케이신문-FNN 합동 여론조사에서는 내각 지지율 63.2%, 비지지율은 27.4%를 기록했다.# 정당 지지율은 자민당이 45.3%, 입헌민주당 6.4%, 공명당 2.4%, 공산당 2.5%, 일본 유신회 2.6%, 국민 민주당 0.5%로 집계되었다.

같은 날 발표된 취임 후 첫 NHK 여론조사에서는 내각 지지율 49%로 조사됐다. 이 역시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의 마지막 지지율이었던 30%보다는 19%p 상승한 결과지만 타 여론조사 대비로는 저조한 수치다. 특히 아베-스가 노선을 계승하지 말아달란 의견이 57%로 매우 높게 나왔다.# 정당 지지율은 자민당 지지율이 41.2%로 직전 동 여론조사 대비 3.6%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헌민주당 또한 0.6% 상승해 6.1%를 기록했고, 공명당은 4.1%를 기록했다. 공산당 2.7%, 유신 1.8%, 국민민주당 0.7%로 집계되었다. 지지후보 없음(무당층)은 36.1%를 기록했다.

2017년 48회 중원선에서는 선거 막판 2주간의 아베 신조 내각의 비지지율이 지지율보다 대략 5%~10% 가량 높았지만 오히려 의석 비율은 늘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민당으로서는 현재의 40%대 지지율(비례 블록에서의 지지율 포함)을 유지하는 것이 선거 승리의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민당은 지방 및 소도시 텃밭 지역구를 최대한 방어하고 선거 열기를 다소 톤다운 시키는 전략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애초 과반수 의석인 233석 확보를 목표로 했지만 실제 이 정도로 나오면 40석 이상의 의석수 감소이기에 실제로는 과반수 의석을 상회하는 목표를 가질 확률이 높다.

49회 중원선에서 현재의 자민-공명 연합의 의석수 305석에서 얼마만큼의 출혈로 연립 내각이 과반 의석을 확보할 지가 선거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21년 10월 14일, 예고한대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본격적인 총선 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이번 중의원 선거는 "미래 선택 선거"라며 "코로나 후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선택 주셨으면 지지를 호소했다. 여담이지만 총리 취임 이후 10일만에 중의원을 해산한 건 전후 최단기 기록이다.#

10월 15일. 자신이 좌장을 맡는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본부'를 설치했다.# 같은 날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 강제징용 및 위안부 관련 소송에 관해 한국 측의 적절한 대응을 요구했으며 북한 문제와 관련하여 한일, 한미일 3국이 한층 협력하기로 문 대통령과 의견 일치를 이뤘다고 밝혔다.#

16일자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안전보장전략을 개정할 때 적의 미사일 발사 기지를 자위 목적으로 파괴하는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담느냐'는 질문에 '하나의 선택지'라고 밝혔다.#

10월 17일,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다. 전임 스가 총리와 마찬가지로 본인 재임 시기에는 외교 마찰을 부를만한 직접 참배는 피하는 대신 공물 봉납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18일. 취임 후 첫 납북 피해자 가족들과 면담을 가졌다.#

10월 24일 열린 참의원 보궐선거에서 1승 1패를 거뒀다. 기시다 총리 취임 이후 첫 국정 선거였는데, 총선을 불과 1주일 앞두고 치러져 총선 전초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보수세가 압도적인 야마구치현 선거구에서는 예상대로 자민당 후보가 70%가 넘는 득표율로 공산당 후보를 누르고 압승을 거뒀지만 문제는 시즈오카현 선거구에서 야권분열에도 불구하고 자민당 후보가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의 추천을 받은 무소속 후보에게 패하고 만 것.#

기시다 총리가 직접 두 번이나 방문해 지지 연설을 할 정도로 공력을 들이면서 '2승 전략'을 꿈꿨던 시즈오카현 선거에서 패하면서 이 결과는 타격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NHK가 총선 일주일 전 진행한 기시다 내각 지지 여론조사에서 48%로 전주에 비해 2% 높아졌다. 총선 3주전 49% - 2주전 46%. 하지만 여전히 50%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총선 출구조사에서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이 61%가 나왔다.#. 기존 여론조사들의 지지율을 10%p 전후 웃도는 수치다. 다만 비지지율이 39%로 지지, 비지지의 합이 100인걸로 보아 유보 응답은 없는 조사인 듯 하다.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단독 과반을 유지, 공명당과 연립해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여 일본 국민의 신임을 얻었다. 당초 다소 불안했던 기반이어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하지 못한다면 리더십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자민당의 단독 과반에도 성공해 국정운영에 탄력을 받게 됐다. 그러나 3A의 일원으로 기시다가 직접 당 2인자에 발탁한 아마리 아키라가 지역구에서 낙선하면서 기시다도 약간의 내상을 입었다. 아마리 아키라 간사장은 지역구 낙선 결과에 충격을 받고 간사장직에서 사퇴하였다.

11월 1일 오후 6시,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아마리 아키라 간사장이 사퇴한 간사장 후임에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을 겸임시켰다.

다음 날, 유엔기후변화협약 COP26 참석 기간에 조 바이든 대통령과 첫 회담가졌다.#

모테기 외무대신이 간사장 자리로 완전히 이동하면서 자리가 공석이 되자 11월 10일에 있을 제2차 내각 출범 전까지 잠시 외무대신을 겸직하기로 했다.#[24] 이에 따라 그의 공식 직함은 내각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이 되었다.

이후 2차 내각부터 취임할, 모테기 외무대신의 후임 외무대신으로 본인 파벌 굉지회의 2인자인 하야시 요시마사를 기용함으로써, 아마리의 낙선으로 기시다 자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나비효과를 낳게 되었다.

인권담당보좌관이라는 직책을 신설하고 이 자리에 나카타니 겐 전 방위대신을 임명하였다.# 인권보좌관에 전직 방위대신을 임명하여 중국의 군사 위협과 인권 탄압을 동시에 견제한다는 의도로 추측되고 있다.

11월 8일. NHK 여론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이 53%로 지난 달 비해 5% 올랐다.#

3.3. 제101대 내각총리대신[편집]


11월 10일. 임시로 소집된 국회에서 제49대 중의원 의장, 부의장 선출 다음으로 총리로 선출되었다.

제2차 기시다 내각에서는 당 간사장으로 이임한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의 후임에 하야시 요시마사를 임명한 것을 제외하면 제1차 기시다 내각의 각료가 전원 유임되었다. 외무대신 임명과 관련해서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사이가 틀어졌다. 기시다 총리를 지지해서 당선시켜줬던 아베 전 총리는 본인의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사람을 임명시키려 하였는데, 기시다 총리가 자기 파벌인 굉지회의 2인자 하야시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새로이 기용하는데 국제인권담당 보좌관에 나카타니 겐 前 방위대신을, 여성활약담당 보좌관에 모리 마사코 前 법무대신을 새로이 기용하였고, 1차 내각부터 재임하던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기하라 세이지(내각관방 부장관 겸임)과 국내경제담당 보좌관 무라이 히데키는 유임되었다.#

총리 취임 후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백신 부스터샷(3회차 접종)[25]임금 인상에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닛케이신문의 여론조사로 내각 지지율은 61%로 10월보다 약간 오른 상태이다.#

3.3.1. 2021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시다 후미오/202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2. 2022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시다 후미오/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3. 2023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기시다 후미오/202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남동생 타케오, 여동생 쥰코와 노리코[2] 만주에서 고액납세자 1, 2위를 다툴 정도였다고 한다.[3] 어린 시절 미국에서 학교를 다녀 영어에 능통하다고 한다. 또한 이때 받은 인종차별의 경험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라 밝혔다.#[4] 히라이 신지, 이노우에 신지, 고바야시 다카유키, 기우치 미노루, 스즈키 게이스케 등이 고교 동문으로, 도쿄대 합격자 배출 전국1위를 40년 이상 하고 있는 입시 최고명문 중 하나이다. 참고[5] 일본의 상류층들에서도 도쿄대학 입학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 아베 신타로아베 신조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이유도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 친조부인 아베 간, 부친인 아베 신타로 모두 도쿄대학 출신인데 아베 신조만 세이케이대학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명문대 중 하나인 와세다대학에 나온 기시다 후미오와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도쿄대학 - 관료 코스가 정계 입문 코스로 취급 받았다.[6] 예나 지금이나 초일류관청이지만 노팬티 샤브샤브 사건으로 개편되기 이전의 대장성은 전후 최강의 관청으로 명성을 날렸다.[7] 전후 일본의 산업경제 성장을 견인한 부처로 위상이 높다.[8] 일본제국 내무성 시절만큼의 위상은 아니더라도 자치행정을 맡는 부처 특성상 자치단체 부단체장과 같은 고위직 자리가 많고 다른 부처의 소관이 아닌 업무를 총괄하므로 권한이 광범위하다.[9] 도쿄대학 경제학부, 교토대학 법학부, 히토츠바시대학 경제학부 출신.[10] 정치외교학과가 사회과학대학이나 정경대학에 속한 한국과 달리, 일본의 정치학 전공과정은 대개 법학부에 속한다. 도쿄대학의 경우도 법학부에 사법, 공법 코스와 함께 정치 코스가 있으며 앞의 두 코스가 법학과목에 치중된 반면, 정치 코스는 공법과 정치학, 국제관계학, 행정학, 경제 정책 등 좀 더 다루는 범위가 다양하다.[11] 도쿄대학에서 외교관에 맞는 전공인 국제관계학을 가르치는 곳은 교양학부 후기교양과정의 국제관계론코스인데, 여기는 소수정예고 전공진입 난도가 도쿄대 법학부보다 높다고 인정받긴 한다. 이 곳 출신으로 기우치 미노루가미카와 요코가 있다.[12] 특히 장성급 장교[13] 그러므로 정당 공천을 받으려면 기재부, 국토부와 같은 주요 부서의 차관이나 실장, 못해도 국장급 이상 직위 출신은 되어야 한다. 국군 장교도 현재 21대 국회에 있는 한기호(중장), 김병주(대장), 신원식(중장) 등의 케이스로 볼 때 장성 출신이어야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다. 과거 김성회처럼 대령만 하고 나와서 국회에 입성한 거나 초급 장교 출신인 최춘식의 케이스가 신기한 케이스로 취급받는다. 외교관 역시 조태용(차관), 김종훈(통상교섭본부장) 등의 케이스로 볼 때 못해도 주요 국가 파견 대사 및 대사와 동급인 주 타이베이 대표부장, 본부장급, 차관 경력은 있어야 한다.[14] 물론 도쿄, 가나가와, 사이타마, 치바, 아이치, 오사카, 교토, 효고, 후쿠오카 등 대도시권 소속 공무원들은 중앙에 진출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 공무원 출신은 중의원 공천보다는 시의회, 현의회나 지자체장 쪽을 노린다. 중의원 공천을 받으려면 최소한 엘리트 관청 관료여야 한다.[15] 이 부분은 국가공무원채용종합직시험 문서의 출신 인물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부분 30대에 관료직을 박차고 나와 출마했고, 스즈키 노리카즈스즈키 게이스케 등은 20대 후반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다.[16] 이런 식의 청년 관료 영입은 공무원의 인사 적체를 해소하고 정치권의 전문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지만 엘리트주의를 강화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그만큼 장단점이 명확한 청년 정치인 육성 방식이다.[17] 참고로 나열한 인물 전원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이다. 일본 관료계에는 도쿄대 일극주의가 극심해서, 국내 서열 2위의 교토대 출신도 비주류 취급받는다.[18] 호소다는 역시 세습 의원인데 통상산업성에서 20년이나 근무하며 주무 과장까지 맡았던 사람으로, 그래도 40대 중반에 첫 당선된 것임에도 정계 입문이 상당히 늦은 축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40대 초반에 첫 당선된 박주민이 소장파로 꼽히는 것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77세의 나이에도 선수는 11선으로 대단히 높은 편이 아니다.[19] 늦은 나이에 입문 하는 경우는 정치인 가문 출신이 아닌 이상 주로 선거구 내 조직이 중요한 중의원 선거보다는 중대선거구제로 선출하는 참의원에 간다.[20]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규제개혁·국민 생활·과학 기술 정책[21] 재직기간으로 따지면 요시다 시게루(1909일)에 이은 역대 2위에 해당하며, 연속재직일수로는 일본 최장.[22] 아버지나 본인이나 수협이랑 연관이 깊은 수산족 의원이라 재무에는 전문성이 하나도 없다.[23] 비슷한 시기의 총선 전 아소 내각 지지율은 대략 20%대였다.[24] 대한민국에서도 정부 수립 초창기에는 국무총리가 장관을 겸직하는 일이 종종 있긴 했으나 일본처럼 흔하지는 않아서, 이러한 사례가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백두진 국무총리 겸 재무부장관, 변영태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허정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장도영 내각수반 겸 국방부장관, 송요찬 내각수반 겸 외무부장관, 정일권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외에는 사례가 없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폐지된 국무총리의 후신으로 수석국무위원이라는 직책이 신설되었긴 했으나, 이건 외무부장관-내무부장관-재무부장관 순으로 장관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도록 아예 법으로 못을 박아버린 경우이므로 논외로 한다.[25] 이에 따라, 3월 4일 3회차 백신 접종을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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