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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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구려(高句麗) 또는 고려(高麗)는 삼국시대 한국의 고대왕조 중 북쪽에 있었던 군주제 국가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중심으로 전성기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로서 삼국 가운데 가장 큰 영토를 점유했던 나라다. 넓은 북방 영토를 지배했던 고대 국가라는 점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의 또 다른 왕조인 발해와도 비교되는 경우가 많다. 신라(991년) 다음으로 긴 기간(704년) 존속한 장수 왕조다.[26]
2. 상징[편집]
2.1. 국호[편집]
2.1.1. 명칭[편집]
'고구려'라는 이름은 중국 후한의 역사가 반고(32~92)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하며, 한사군 중 현도군에 속한 현인 '고구려현'(高句驪縣)이라는 지명으로 나온다. 이는 한나라의 지명 조어법과는 상이하므로, '고구려'는 일대의 토착민들이 본래 자신들의 마을 또는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 지명으로 추정된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본래 오녀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압록강 지안시 일대에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토착민의 강력한 저항으로 흥경(신빈만주족자치구 일대)에 이전하였으며, 1세기에 다시 무순(푸순현 일대)으로 후퇴하였다. 이 과정은 나라로서의 고구려가 성립하는 과정이기도 했는데, 부여계 유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졸본에 도읍을 세웠으며 이들도 '고구려'라는 일반명사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다. 현도군의 '고구려현' 쪽도 계속 이름은 남아 있다가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명왕에게 흡수당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고구려를 공격하여 복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오이(鳥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병사 2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정벌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계속 진군하여 한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빼앗도록 하였다.
三十三年 秋八月 王命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유리왕(琉璃王) 33년 가을 8월
건국 초기에는 국명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고구려(高駒驪), 구려(句麗), 구려(駒驪), 고리(高離) 등으로 기록되었는데 주로 고구려(高句麗)의 빈도가 가장 높았다. 당연하겠지만 이는 고유어 이름을 한자를 빌려 나타내는 과정에서 여러 표기가 나타났다가 점차 '고구려'로 통일된 것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관련되어 졸본부여나 '맥'(貊)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4세기부터는 '고려'(高麗)로 불리기 시작하여, 5세기에 이르러서는 '고구려'라는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고려'로만 불리게 되었다.
현재 사학계의 정설은 장수왕 때 고구려가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아 한국의 비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듣보잡인 경우가 많다. 장수왕 때 고려로 국호를 바꿨다는 증거들은 여럿 있다. 가령 5세기 장수왕 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 고구려비에는 고려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박혀 있고, 장수왕 시기부터 중국 측 문헌에 '고려'라고만 표기되기 시작된다. 전성기를 맞이한 장수왕 재위기에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는 등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여러 정책들이 추진됐는데, 국호 역시 그 일환으로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 바꾸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무래도 고구려(高句麗)의 고(高)와 구(句)의 발음이 비슷해서 빨리 발음하면 고려(高麗)나 구려(句麗)로 줄어들게 되는데 구려보다는 고려가 한자의 의미를 봤을 때, 물론 어원은 한자의 의미와 무관한 고유어에서 유래했겠지만 더 그럴 듯해 보여서 고려로 변경했을 수도 있다.[37]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한서》 〈지리지〉에서는 현도군의 속현으로 고구려현과 함께 상은태(上殷台)현과 서개마(西蓋馬)현이 소개되는데, 이 둘은 전부 방위어인 상(上)과 서(西)로 시작하므로 고구려 역시 본래 방위어 고(高)와 토착 지명 구려(句麗)의 합성어였을 것으로 보인다.[38] 이렇게 본다면 국호가 '고려'로 변경된 것은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명의 본래 형태와 유사하게 돌아온 셈으로 볼 수 있다.
이 '구려(句麗)'의 정확한 어원은 불명이나 다음과 같은 추측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삼국지》 〈동이전〉에 소개된 성(城)을 뜻하는 고구려의 고유어 '구루(溝漊)' 및 《삼국사기》 〈지리지〉에 기록된 고구려 지명에서 역시 성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 '홀(忽)'과 연관짓는 것이다.[39] 또 일각에서는 고구려를 일컫는 고대 돌궐어 '뵈퀼리(𐰋𐰇𐰚𐰠𐰃, Böküli)'[40] 와 그리스어 '무크리(Μούκri)'에 주목하여 구려가 '맥'(貊)과 '예'(濊)의 병치형 합성어였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 동명성왕이 세운 나라를 보장왕 때까지 통째로 고구려, 대조영이 세운 나라를 발해, 궁예가 세운 나라를 후고구려[41] , 그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를 그냥 고려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긴다. 이는 우리가 '고려시대'라고 부르는 그 시대 중에 성립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언급한 네 국가 모두 궁예가 기분 내킬 때마다 바꾼 태봉을 제외하면 다 고려가 정식 국호였다. 자세한 건 후고구려, 발해, 태봉, 고려 문서로.
장수왕 이래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러 왔던 탓에, 5대 10국 시대와 북송을 거친 이후부터 전근대까지의 중국과 일본에서는 왕건이 세운 고려도 고구려가 거의 그대로 이어지되 왕조만 바뀐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송나라 사신이 쓴 《고려도경》에서도 중세의 고려를 고씨 고려가 망하고 왕씨가 일어나 세운 고려라 표현했으며, 중국 역사학자들이 종종 이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늘날 한국에서 쓰듯이 고구려, 발해, 고려 등으로 부른다.
현대에 로마자로 표기할 때는 북한식 표기법을 따른 Koguryŏ와 남한식 표기법을 따른 Goguryeo 두 가지가 쓰인다. 남한 매체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은 높지만 고구려 자체가 현 북한 지역에서 기반한 왕조였다보니 두 표기법의 저명성은 엇비슷한 편이다.[42]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서에서는 북한과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재했으므로 Koguryŏ로 표기했다.
왕씨 고려 때는 구고려(句高麗)[43] , 구려(駒驪)[44] 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자국을 고구려의 고려에 맞춰 후고려(後高麗)[45] 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아예 고구려와 고려를 동일시하여 고구려를 우리 고려[我高麗]라고 부르는 축문도 등장한다.[46]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 이름이 '후고구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냥 '고려'였다가 나중에 마진, 태봉으로 바꾼 것이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궁예가 처음 썼던 국호로 되돌아간 것. 일본에서 발견된 외교문서에서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도 고려라는 이름을 사용했음이 나타난다. 사실 발해라는 국호는 당과의 협상에서 어쩔 수 없이 합의된 대외용 국호였고, 어디까지나 공식 국호는 고려였으나 워낙 발해라는 국호 사용 빈도가 평소에도 높다보니 발해인들 스스로도, 적어도 요나라 시대 후기, 금나라 때부터는 본인들이 발해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어쩌는 수 없이 인정하게 된다.[47]
장수왕 대의 국호 변경을 대체로 제대로 반영한 사극으로는 태조 왕건이 있다. 고증 등에서 문제 제기가 여럿 있는 사극이긴 하지만, 극중에서 고구려가 장수왕 때 고려로 바꾼 것은 제대로 반영해서 해설했으며, 궁예가 처음 세운 나라의 이름 역시 후고구려가 아닌 고려로 불렀다. 그런데 극중에서 옛 고구려를 언급할 때는 고구려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옛 고구려도 나중 이름을 써서 고려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청자들이 헷갈려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냥 고구려라 한 듯.
같은 이환경 작가가 대본을 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로만 표현했다. 태조 왕건과 달리 연개소문은 아예 작중 내내 고구려를 언급해야 하는데 극중에서 계속 고려라고 부르면 시청자들이 혼란을 느낄 게 뻔하니….
이외에도 고구려 유민 고모의 묘지명(高牟墓誌銘)에 따르면 별칭으로 동해지동(東海之東, 동해의 동쪽), 한향(韓鄕)이라 부르기도 했고 삼한=삼국으로 여겨지면서[48] 그 중 마한에서 유래했다고 여겨 그냥 마한이라 불리기도 했다.[49] 근데 보통 고구려는 마한과 동치되긴 했지만 이게 좀 어지러워서 진한이나[50] 변한[51] 으로 불리기도 했다.
2.1.2. 발음[편집]
고구려 당대 및 고려시대까지는 국호의 발음이 고리였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일단 당나라 시대 자치 통감의 주를 보면 '麗는 力+知로 발음한다(力知翻)' 고 기록하였으며 『책부원귀(冊府元龜)』에서도 '고구려(려는 驪라고도 쓰고 리로 발음한다)(高句麗 (亦作驪 音離))'라고 주가 붙어 있다. 즉 고구려의 국호에서 麗를 읽을 때는 중국 당, 송 시대의 음과 달라 음가 주석을 붙여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꽤 흐른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여말선초 사람들이 직접 저술한 일부 문헌에서도 麗는 '리'로 발음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테면 《용비어천가(1445)》 제6장에 '麗運이 衰ᄒᆞ거든(고려의 운이 쇠하거든)'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려(麗)는 리(离)로 발음하고 고려를 말한다(麗音离, 高麗也)"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한마디로 '고려'로 읽지 말고 '고리'로 읽으라는 소리다. 이 설에 따르면 지금처럼 '려' 음으로 바뀐 것은 조선 초기에서 중기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도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다.
高句麗라는 이름이 기록된 것은 BC 2세기 한나라 시대의 기록으로, 이것은 고구려 현지에서 쓰고 있던 발음에 대한 음차로써 상고음 발음이었을 것이다. 高句麗는 상고음으로는 ‘고구리’가 되고, 고대음(중고음)으로는 ‘가우구리’가 된다. 그러나 423년부터는 이미 나라이름을 高麗라고 바꾸어 불렀기 때문에 ‘가우구리’라고 불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高麗는 상고음으로는 ‘고리’가 되고, 고대음(중고음)으로는 ‘가우리’가 된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가 다른 문헌에서 '고리(高離)'로도 나타난다는 것이나, 한국을 제외한 타국에서 부르는 '코리아(Korea)', '코리(Coree)'라는 이름, 돌궐에서 뵈퀼리[52] , 인도에서 무쿠리, 중국에서 가오거우리(가오리), 일본도에서 코우리 등으로 불렀던 것을 참고하여 '본디 발음이 고리였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추정할 수도 있다.
조선후기의 글인 대동지지 등에서도 '高句麗는 본래 구려(句驪) 맥(貊)이다. 한나라 현도군에 속한 현에 高句麗(‘려(麗)’자는 ‘리(离)’로 읽는다)가 있는데…' 라며 '고구리'라는 음가가 옳다는 인식도 계속 이어졌다. 증보문헌비고에서도 '리'로 읽음을 주석하고 있다. 즉 조선 전기에 麗 자의 발음이 일반적으로는 려로 읽히는 음가가 제시되었으나, 국명으로써는 리라는 음가가 옳다는 인식이 학자들 내에서는 계속된 것이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 간행된 자전을 보면 麗 자에 '나라 이름 리' 라는 훈음이 계속 병기된다.[53]
그러나 전자의 설만을 토대로 고려의 원래 발음이 '고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 《삼강행실도언해(1481)》 등 동시대에 간행된 다른 한글 서적에는 고구려와 고려의 이름이 한글로 '고구려', '고려'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조선후대의 《오륜행실도(1797)》 등에도 한글로 '고려적', '고려'라고 적힌 표기가 있어 한글 '고려'표기가 이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고구려', '고려'라는 발음 역시 상당한 역사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전술한 사례만으로 '고구리'라는 음가만이 정당한 발음이라고 제시하고 이를 단정하거나, 나아가 현대에 통용되는 발음까지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는 위험한 일이다.
2.2. 깃발[편집]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제24 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 원년 11월 첫번째기사
고구려군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로 붉은 기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의 계루부 내지 중앙군만 붉은 기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시기가 뒤로 움직이며 고구려군의 깃발은 붉은 깃발로 통일되어 갔다.
5세기 말 쌍영총 연도동벽화 거마행렬도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고선지 실크로드 개척사-기창을 든 개마갑주무사와 석반부철모' 원전 이미지와 복원 이미지 발췌.
안악 3호분 벽화에서도 기수가 붉은 색 깃발을 들고 있으며, 개마무사 부대가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붉은 색 깃발을 군기(軍旗)로 사용한 것은 명확해 보인다. 다만 근대적인 국기(國旗)의 개념이 없었던 만큼 국가의 상징은 아니었을 것이다.
2.3. 옥새[편집]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使人尋之, 得金壐·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동틀 무렵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니, 금새[金壐]와 병장기 등을 얻었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주신 것이다.”라고 하고 절한 다음 받았다.
삼국사기 권제14 고구려본기 제2 대무신왕 4년 12월 첫번째기사
고구려는 금새(金璽)를 하늘에서 받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 세계에서 새(璽)라는 단어는 원래 오직 황제의 옥새에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제후는 인(印)을 사용해야 했다. 물론 제후의 의미가 비중화 주변국으로 확장된 뒤로는 그런 거 없고 개나소나 (대중외교 문서를 제외한) 모든 문서에 옥새를 쾅쾅 찍어대긴 했다. 심지어 류큐(...)조차 금인은 구석에 처박아두고 옥새를 마구 휘둘러 썼으니 별 의미 없는 규정.
그런데 고구려의 금새가 여타 제후국의 옥새와 차별화되어 중요한 것은, 고구려는 중원왕조에게 도장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제후국들은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만 중국이 준 도장을 찍고 자기들의 문서엔 자기들의 옥새를 찍었다면, 고구려는 중국에 보내는 문서에도 자신들의 금새를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의 고구려와 중국 왕조들의 관계를 본다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고구려의 금새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아서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3.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사회[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사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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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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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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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군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국력[편집]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삼국사기》 18권 〈고구려 본기〉 장수왕
영명 7년[54]
에 평남참군 안유명과 용종복사 유사효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갔더니 원회에서 고려(고구려)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이에 안유명이 위나라 주객랑 배숙명에게 말하였다.'우리는 중국 임금의 명을 받고 그대 나라에 왔소. 천하에 우리나라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나라(북위)뿐이거늘…(중략)… 하물며 동이의 조그만 맥국(고구려)은 우리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우리랑 나란히 선단 말이오'
유사효 역시 위나라 남부상서 이사충에게 '우리는 위나라에 이런 적이 없었소.'라고 하자 사충이 답하였다.
'정사와 부사 모두 전 위에 오르지 못했을 뿐이지 이자리도 충분히 높은 자리이니 이 정도도 족히 갚음이 될 것이오'[55]
《남제서(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
정시 연간[56]
에 세종[57] 이 동쪽 당사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말하였다.'고려는 하늘과 같은 정성으로…(중략)…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58]
는 섭라[59] 에서 생산됩니다.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되었는데…(중략)…지금 두 가지 물건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 두 도적들 때문입니다.'하자, 세종이 말하였다.
“고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해외를 마음대로 제어하여 교활한 오랑캐인 9이 (九夷)를 모두 정벌하여 왔소,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소? …(중략)…위압과 회유의 방략을 다하여 못된 무리들을 멸망시키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두 읍을 옛 터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항상 바치는 공물에서 빠짐이 없게 하오.”[60]
《위서》 〈열전〉 고구려
15만 군대가 내달리고 깃발이 30리에 뻗쳤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이 누런 뱀이 흙먼지를 토하듯 하였고 기병들이 들판을 뒤덮은 것이 마치 붉은 개미떼와 같았다(有徒十五萬, 連旗三十里. 烟火稽天, 若黄虵之吐霧. 彀騎横野, 邁赤蟻之爲羣)[61]
《전당문》
초기의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다. 졸본의 성읍 국가였으며, 4세기까지만 해도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의 유력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등 연이은 명군들의 치세를 거치면서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북부과 요동, 만주를 아우르는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정벌하여 멸망에 준하는 피해를 입히는 한편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하여 신라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다. 북으로는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말갈 세력 대부분과 요서, 내몽골 일대의 거란 세력 일부를 복속시켜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요동을 차지한 후에는 중국 왕조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된디.
이 시기 고구려는 아시아 전역을 범위로 잡아도 그 존재감이 뚜렷할 만큼 위상이 높았고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명실상부 자타가 공인하는 한반도와 요동, 만주 지방의 지역 패권국이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중국 통일 왕조들의 침략을 70여 년 가량 막아내면서 국력은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진흥왕 이후 급성장해 백제를 밀어내고 고구려와 한반도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신라와의 외교에 실패함과 동시에 군사 면에서도 신라 방면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 660년의 백제 멸망과 663년 백제부흥운동의 좌절로 인해 양면전선의 불리함이 가중되었으며, 여기에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의 분열이 겹치면서 정치적 소요 사태가 크게 발생했으며 결국 당나라,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 생산력
- 군사력
- 국제적 위상
10. 영역과 행정구역[편집]
고구려의 영토는 수도와 지방을 각각 5부로 나눴다. 수도 5부의 경우, 고구려의 주요 귀족 가문이었던 5부족(계루부, 소노부, 절노부, 관노부, 순노부)이 고국천왕에 의해 행정구역인 5부로 정리된 것으로, 각각 방위의 이름(동, 서, 남, 북, 중)을 가졌다. 지방 5부의 경우 욕살(褥薩, 지방관)이라고 하는 대표를 두어 다스렸다. 부의 아래에는 대성(大城), 중성(中城), 소성(小城)을 두었는데, 각 성을 다스리는 처려근지(處閭近支, 중국식으로는 '도사')를 두어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욕살과 처려근지는 모두 어떤 관직을 뜻하는 순우리말(고대 한국어, 고구려어)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으로, 원음은 알 수 없다.
고구려는 4세기 이전까지는 압록강 북부~함경도에 걸쳐 있던 소국이었으나, 미천왕을 시작으로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수왕과 문자명왕 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중국 군현의 터를 몰아내면서 한반도 북부 전역을 지배하고, 서쪽으로는 요동을 차지하고 요하를 건넜으며 남쪽으로는 한강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방까지 정복했고,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 대략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재위 14년 10월,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000명을 사로잡았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菟城 殺獲甚衆
재위 16년 2월, 현도성을 함락시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 본기〉 제5(미천왕)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太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재위 원년) 10월, 백제 관미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바다로 둘러싸였는데, 태왕이 군대를 일곱 방면으로 나누어 20일만에 빼앗았다.
十一年, 太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재위 11년 태왕이 병사로 하여금 숙군을 치게 했다. 연나라의 평주 자사인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광개토대왕)
九月 太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재위 63년) 9월, 태왕이 친히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해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다. 부여경(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 본기〉 제6(장수왕)
장수왕에서 문자명왕 대에 고구려는 남으로는 평택 아산만에서 경상북도 일부, 북쪽으로는 북부여에 이르는 영토를 손에 넣고 일대의 말갈 및 실위를, 동쪽으로는 책성을 중심 거점으로 말갈을 지배했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넜다. 이 밖에 고구려계 왕족인 고운이 북연의 천왕이 되었고, 변경의 말갈, 두막루와 실위를 군사적 영향권 아래 두었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되자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신라는 왜의 침략에 시달려 광개토대왕의 지원군을 받는 등,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정세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기까지 계속된다. 이와 관련한 고고학적 증거로는 지안의 광개토대왕릉비, 충주의 충주 고구려비, 신라 호우총 등이 있다.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3,100리이며, 남북 2,000리이다."
《구당서》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
후한 때에 사방 2,000여 리였다. 위대에 이래로 남북이 점점 축소되어 겨우 1,000여 리였으며, 수대 이래로 동서 6,000여 리로 확대되었다.
《통전》 제186권 〈변방〉 2
북벌을 지양하고 남진에 몰두했다는 통념과는 다르게 고구려는 전성기 이래로 요하~송화강 선을 국경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거란, 말갈, 실위, 지두우 등을 복속시키거나 군사적인 영향권 안에 두고 중원 세력과 요서의 지배권을 다투면서 동몽골, 북만주, 요서 등지의 진출을 단행하였다. 지리를 상고하기 힘들고 이탈과 복속이 일정치 않아서 구체적인 비정에는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팽창 시도는 역사 기록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고구려의 강역은 성곽을 깔아놓고 조밀하게 통치하는 구역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거점을 두고 통치하는 구역, 세력들의 복속을 통한 간접지배를 통해 통치되는 구역도 있다. 이에 대한 해석에 따라 상이한 강역 비정이 나오곤 하는데 이 지도는 후기 부여, 말갈이 위치한 연해주와 동북만주 일대에만 신경을 썼지만 흥안령, 동몽골, 요서 등 다른 지역에도 비슷하게 견해 차이로 강역 비정이 달라지곤 한다.
북한의 경우에는 말갈, 거란, 실위 등 북방 민족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통합시켜 매우 방대한 영토를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69]
고구려가 차지한 령역은 서북-내몽골 동부, 북-흑룡강 남쪽 류역, 동북-우쑤리강 류역을 넘어 흑룡강 하류, 남-아산만으로부터 청하계선에 이르게 되였다. 즉 동족의 나라 전 령토의 90%를 차지하였다.
-《조선력사》
아래 표는 《삼국사기》에서 확인가능한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시대의 성이다.
안동도호부는 9도독부+42개 주=51개 주[70] 로 구성되어 있지만 32개만 확인되는데, 압록강 이북으로 서술을 한정한 영향으로 보인다. 나머지 19개 주는 확실하지 않지만 압록강 이남 한사군의 현을 그대로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71] . 또한 발해의 행정구역으로도 족보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1. 외교[편집]
12. 멸망 이후의 고구려인들[편집]
중원 왕조들과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간 총력전부터 시작해서 이남의 신라와 전선을 수십년간 맞대었던 고구려는 멸망 시점인 668년에 인구가 69만 7천여 호(戶)로 급감하게 된다.[72] 그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은 주로 신라, 발해, 당 등으로 뿔뿔히 흩어졌으며 고토에 잔류하거나 당을 탈출해 발해에 합류한 유민들은 훗날 발해 유민의 형태로 고려, 요나라, 금나라 등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더러는 말갈, 돌궐, 왜국 등으로 도피하였지만 수는 위의 세 부류[73] 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았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들의 거취는 대규모 망명, 강제 이주, 부흥운동의 여파로 여러 국가에 걸쳐져 있었다.[74] 타향으로 끌려가거나 객지에 머물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의식이 희석돼 현지 사회에 동화되는 양상이었다. 그렇기에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적통을 잇게된 건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보존해 종국에는 고려를 건국한 신라 내의 일파들이다.[75] 이들은 동족인 발해인들의 합류에 힘입어 백제인, 신라인과 더불어 한민족(韓民族)의 원류(原類)를 구성하는 세 축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나아가 통일신라가 실패했던 세분화된 종족 정체성의 통합을 이루어내게 된다.[76]
- 신라 ➪ 고려
- 발해 ➪ 거란 ◦ 고려 ◦ 금나라
- 당나라
- 잔류 고구려인
- 북방 초원
- 왜국
13. 역사귀속과 계승인식[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역사귀속과 계승인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관련 사료 목록[편집]
14.1. 한국[편집]
14.2. 중국[편집]
14.3. 일본[편집]
14.4. 금석문[편집]
15. 고구려/문화재[편집]
15.1. 유적[편집]
- 고구려 고분군
-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 고구려왕릉
- 국내성
- 대성산성
- 동명왕릉
- 동황성
- 부벽루
- 아차산 일대 보루군
- 안악 3호분
- 안학궁
- 오녀산성
- 을밀대
- 장군총
- 정릉사
- 천리장성
- 태왕릉
- 통구 고분군
- 평양성
- 호로고루
- 환도산성
16. 연표[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연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 왕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구려 계루부 고씨 왕실의 후손이라는 가문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동명성왕 고주몽을 시조로, 보장왕의 아들인 고인승을 중시조로 하는 횡성 고씨가 있으며, 일본에는 보장왕의 아들인 고약광의 후손 고마씨가 있고, 중국의 경우에는 장수왕을 시조로 하는 요양 고씨가 있다.
18. 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구려/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 고구려의 대(對)중국 전쟁 목록[편집]
20. 고구려부흥운동[편집]
고구려는 멸망 직후부터 활발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부흥운동에 투신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검모잠, 고안승, 고연무 등이 있다. 이때의 부흥운동 세력은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을 세우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하여 30년 뒤에는 발해가, 200년 뒤에는 고려가 건국되며 전체적으로 보면 성공한 부흥운동이 되었다.
21. 고구려/창작물[편집]
22. 기타[편집]
- 해외에서는 통일된 한국(Korea)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남한과 북한 지역의 역사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런 이유로 고구려도 북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135] 평양 등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도시를 비롯해서 상대적으로 남한보다 북한 지역에 고구려의 흔적이 훨씬 많은 것도 이러한 인식을 낳는 이유다. 실제 북한에서도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 북부의 고대 왕조를 계승한 것은 북한이라고 규정하고 교육 및 선전을 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할 목적도 내포되어 있다.
- 한국사 교과 과목 시험에서 고구려는 다음과 같은 사료로 등장하고는 한다.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좌식자[136] 가 10,000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하여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137] 이라 한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이 사료에서 고구려인 걸 알아차려야하며 고구려가 아닌 부여나 동예 등 오답형으로 종종 출제된다. 처음보는 수험생은 당황할 수도 있다.
- 1999년 4월 동양 철학을 전공한 교수인 김경일[138] 은 유교 문화와 한국 사회를 비판한 책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을 출간하여 국내에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김경일 교수는 "고구려가 있던 만주는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와 가까우며, 아울러 만주의 중심 도시인 하얼빈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만주에는 백인종인 슬라브인, 즉 러시아인들이 이주하여 살았으니 고구려인들은 러시아인과 혼혈이 된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뉘앙스가 담긴 내용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틀린 말이다. 우선 연해주가 러시아 땅이 된 때는 1860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였고, 러시아인들의 이주는 그 이후의 일이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러시아인들이 진출한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16세기 중엽에서야 가능했다. 그러니 고구려가 활동하던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7세기[139] 까지 러시아인들의 조상격인 슬라브족들은 시베리아 차지도 못했을 때였으며, 고구려에 백인종의 유입자체는 있었지만 주로 토하라인, 소그드인 계통의 종족들이었지 슬라브족은 아니었다 ,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러시아인들과 혼혈이 될 일도 없었다. 아마 연해주나 시베리아 동부가 원래부터 러시아 땅인 것으로 잘못 알고서 이런 터무니없는 오류를 저지른 듯하다.[140][141]
- 역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고구려 관련 사료가 많이 번역 및 정리되면서, 단순히 "진취적인 기상", "넓은 땅" 수준으로만 인식되던 고구려 역시 대중 사이에 독특한 인식 내지 진짜 상남자 국가(...)의 인식으로 자리잡았다. 안악 3호분의 마교를 연상시키는 괴물 그림과 빛이 바래 소름끼치게 변한 벽화 등을 두고 마교국가, 한민족 막나가던 시절(...)이라는 등과 같은 반응을 보이거나, 약탈지의 농사가 잘되길 바라는 축제나 결혼할 때 수의부터 맞췄던 풍습 등을 두고 "내 조상이니까 웃지 진짜" 등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23. 같이 보기[편집]
- 고구려대학교
- 고구려부흥운동
- 고려
- 고마 신사
- 대발해
- 대위국
- 동란국
- 마진
- 발해
- 발해부흥운동
- 백제
- 보덕국
- 부여
- 북연
- 소고구려
- 신라
- 안동도호부
- 예맥
- 올야국
- 정안국
- 제나라
- 최광수
- 태봉
- 패서
- 후고구려
- 흥료국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ㅡ 예군 묘지명 中[89] 석문 전투와 호로하 전투 이후 신라에 귀부한 고구려 부흥군 세력 등.[90] 당나라 영주에서 탈출한 무리 가운데 발해에 합류하지 않은 무리와 더불어 안동도호부에 잔류하던 요동의 고구려인들.[91] 역설적이게도 나말여초에 이르러 신라가 잦은 민란, 천재지변(가뭄, 홍수, 지진 등), 삼림파괴, 그리고 혼란한 정치 상황으로 쇠락하고 인구가 급감할 때, 패서 일대는 비교적 번영을 구가하면서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윤순옥, 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92] 선덕왕 시절에 신라인들을 일부 패서로 사민시킨 바 있지만 원(原)신라 지역이 쇠락하면서 찰산후 박직윤(朴直胤)처럼 패서(浿西)로 자발적으로 이주한 왕경인(王京人)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들의 경우 현지의 고구려계 주민 사회에 동화되면서 고구려의 관직명인 대모달(大謨達)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고구려 유민 사회에서도 신라 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면서 후에는 김(金), 정(鄭) 등의 신라식 성씨들을 차용하는가 하면, 신라식 관등 체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왕건의 아버지였던 패서의 고구려 유민인 왕륭은 사찬을 지냈다. 마찬가지로 왕건의 조상이면서 고구려 유민이었던 자 가운데 스스로 골품제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각간(角干)을 자처한 두은점 등이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스스로를 무려 성골장군(...)이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다.[93] 예를 들어 신라의 오소경(五小京) 가운데 하나인 남원경(南源京).[94] 물론 일부는 전주 최씨나 일부 성씨들처럼 뿌리가 북방에 기인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듯 하다.[95] 통일신라 당시 영동 지방은 원(原)신라 지역이 아닌 예맥의 땅 혹은 영역으로 취급되었다. 사실 이쪽 지역은 실직국이라는 독자적인 나라가 있기도 했고 영서 지방의 맥국을 비롯해 기원을 따지면 동예의 후예로 엄연히 고구려의 가까운 친척이긴 해도 약간 다른 정체성 또한 있었다. 그래서 후삼국시대에는 꾸준히 고구려 계승을 주장한 패서호족과는 별개로 태봉이라는 약간 다른 정체성을 주장한 궁예의 홈그라운드가 되기도 했다. 물론 신라 정부에서는 상기했다시피 그냥 예맥인들이 살고 있는 고구려의 옛 영역으로 봤고 궁예가 몰락한 뒤에는 좀 남쪽에 있던 왕순식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려에 흡수되었다.[96] 사천 전투와 평양성 전투 당시 전쟁 포로로 유입된 집단 등.[97] 송악 출신의 고구려계 해상 호족인 왕륭의 아들로, 고려도경 등에 따르면 고구려 귀족의 후예다.[98] 고구려부흥운동의 결과로 세워진 고려는 고구려가 이전에 달성하지 못했던 신라와 백제의 병합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발해 유민들을 짧게는 수십년에서 길게는 이백여년에 걸쳐 대거 수용하면서 삼한 내의 개별적인 종족 정체성을 고구려쪽에 가깝게 단일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고려 후기로 가서는 삼국을 모두 일정하게 계승했다는 의식이 강해지면서 고구려에 편중된 계승 의식은 희석되고 특히 고조선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또한 고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였기에 몽골 제국의 침탈로 인한 우울하고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유구하다는 자존심을 위해 더더욱 강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조선 또한 역시 평양을 기반으로 했던 왕조였기에 후대에도 삼국 중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가장 강조되었고 그래서 해모수는 아예 시조 단군과 동일한 신격으로서 합쳐지게 된다. 이런 인식에 힘입어 동명성왕은 단군의 아들로서 같은 사당에 합사되었다. 또한 고구려 당대에도 이미 단군에게 고조선을 이어받았다는 전설이 있던 기자를 신으로서 섬기기도 했다.[99] 고구려를 정신적으로나 영토적으로나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추진된 북진 정책, 서경 중시, 강동6주 획득, 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를 자처하고 멸망 이후에도 이백여년 동안 부흥 운동을 전개한 발해 만큼이나 고려도 끈질기도록 선조들의 유산을 되찾고자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해 주변국들을 복속했듯이, 고려도 이를 그대로 답습해 전성기 시절 요나라와 북송을 상대로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외교 정책을 취하는 동시에 탐라국, 여진족 부족들, 일본계 호족들 등을 밑으로 두어 조공을 받는 해동천하를 일구었다. 고려의 사신들이 북송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궐에서 요나라 사신을 모욕해도 두 강대국들이 고려를 어찌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북송의 유명한 시인 소식은 아예 고려인들을 '고구려인 도적'이라는 뜻의 맥적이라 깐 적이 있다.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 일대를 호령하던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인식했으며 고려로부터 조공을 받는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와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하였을 정도로 고려를 경계하였다.[100] 발해 유민들이 고려 사회의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잡았음과는 별개로 어디까지나 주체인 고려의 건국 세력, 즉 신라 출신의 고구려인들에게 합류하는 형식이었다.[101] 혈연 및 정신적인 계승의식은 차치하고서 논하자면, 오늘날 한민족의 전통문화 가운데 전해지는 것들로 상당수는 고구려에서 유래하였다. 김치, 불고기, 젓갈, 된장 등의 식문화가, 온돌, 치성 등의 건축 문화가, 한복 등의 의복 문화가 고구려에서 시작되었다. 악기로는 대표적으로 대가야의 가야금과 함께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거문고가 있으며, 무형(無形) 문화로는 한때 고려시대 때 무신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수박의 후신으로 씨름 등이 전해진다. 언어의 경우 이병도와 이기문의 학설을 주류로 취급하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현대 한국어가 신라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 여전히 강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이나 제임스 웅거 같은 해외의 저명한 언어학자들이 논증한 바로 신라어가 아닌 고구려어가 한국어의 뿌리라는 주장이 2013년부터 유력시된다.[102]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등의 영향으로 여전히 반도 일본어설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잖은 상황이기도 하다. 반도 일본어설은 한반도를 원향(原鄕)으로 삼던 고대의 일본어족이 고조선과 부여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족에 의해서 일본 열도로 밀려난 것을 골자로 한다.[103] 여담으로 알다시피 국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한(三韓)을 모두 이었다고 해서 정한 대한(大韓)이라는 명칭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을 가리킬 때 한국인(韓國人)이라고 부르지만, 애초 해외에서의 한민족의 명칭은 신라인(Sillan)도, 백제인(Baekjean)도 아닌 고려인(Korean), 즉 고구려인(高句麗人/高麗人)이다.[104] 주로 속말말갈, 백산말갈 출신 등. 이들은 '퉁구스계'가 아니라 소위 '예맥계 말갈'이다.[105] 대연림처럼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한 유민들.[106] 고모한, 고청명, 곽약사처럼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자리잡은 유민들.[107] 금나라에 합류한 발해인들의 경우, 금나라 황제에게 시집가 황실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금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 역사상 최악의 폭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해릉양왕의 어머니는 발해 왕족인 대씨(大氏)였으며, 또한 금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금나라 세종도 어머니가 발해인 추와지(雛訛只)의 딸로 발해계 혈통이었다.[108] 당시 고려는 발해인들의 인심을 얻고 반(反)거란 의식을 고취시기 위해서 거란의 사신들을 유배보내고 만부교에서 낙타들을 굶겨죽인 적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 문서로.[109] 상술했다시피 고구려계라는 의식이 강했던 초기 고려인들은 발해인들을 동족으로 여겼던만큼 출신지가 고려인 이상 따로 발해 출신으로 적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인 예시가 유충정(劉忠正)이다. 발해 유민으로서 국내(고려)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추정되는 고영기(高英起), 고적여(高積餘), 양규(楊奎), 지채문(智蔡文) 등과 달리, 유충정은 사료에서 발해 출신이라고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기상 유충정 혹은 그의 선대가 당시 발해로 여겨지던 정안국에서 979년 고려로 망명한 수만명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이름을 전한 발해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그들이 고려에서 벼슬을 하면서 고위 관직을 신라계 • 백제계와 대등한 조건으로 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처우와 조치들은 고려인들이 한국어족 계열의 탐라인을 여겼던 방식과는 확실히 대조되는 것들이다. 1105년 숙종 시기, 탐라군(耽羅郡)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탐라인들은 발해인과는 달리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 위해 외국인들만이 응시하는 빈공과를 거쳐야 했다. 설령 빈공과를 통과해 중용되었어도 태자 고말로의 아들로 전해지는 고유의 사례처럼 탐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간관직을 겸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고유는 심지어 한낱 속국에 불과할지라도 엄연히 자견왕의 혈통을 잇는 왕족 지위에 탐라인 최초로 관직을 얻은 인재였음에도 말이다. 고유가 탐라인 최초로 임용된 1057년 이전에 등장하는 고씨들은 사실상 고구려계 • 발해계로 보아도 무방하다.[110] 934년 한해에 귀부한 세자 대광현의 무리만 해도 그 규모가 수만이 아니라 수만 호(戶)였다.[111] 정몽주의 시(詩)인 발해고성(渤海古城)에서도 발해 유민들의 귀부를 언급하고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渤海昔爲國, 於焉遺址存, 唐家許相襲, 遼氏肆幷呑, 附我全臣庶, 于今有子孫, 遺民那解此, 嘆息住歸軒.'
'먼 옛날 발해가 세워졌던 곳. 아직도 그 자취가 남아있구나. 당에선 왕위 계승 허용했는데, 요것들이 함부로 병탄하였네. 우리의 신하와 백성이 되어, 여지껏 그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거늘. (옛 발해 땅에) 남은 백성들은 이 사실을 어찌 알리오? 탄식하며 수레를 멈춰보노라.'[112] 고려에 귀부했다가 죄를 지어 다시 거란으로 도망친 고모한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모한의 출신지인 요동성부터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에 이르기까지 발해 유민들의 귀부는 소수의 거란군이 점유한 일부 지역까지 모두 포함해 일어나고 있었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113] 대표적으로 고려 목종 대의 신료였던 유충정(劉忠正), 여요전쟁 당시 맹활약한 대도수(大道秀), 대회덕(大懷德), 고적여(高積餘) 등이 있었다. 무신정권 때는 권력자이자 간신배로 이름을 남긴 대집성이, 여몽전쟁 때는 고려군의 군관으로 활약한 대금취(大金就) 등이 전해지고 있다.[114] 각자 사병들을 거느리던 호족들이 난립하던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로지 왕건 본인에게만, 즉 고려 왕실에게만 직속으로 신속된 발해 유민들이라는 기반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115] 서경 일대와 그 이북인 강동 6주 등.[116] 임진강을 기점으로 이북인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그리고 평안남도 일대.[117] 특히 구 후백제 영토.[118] 그러나 건국 주체(고구려인)와 이념(고구려 계승), 그리고 역사적 연고권(패서와 평양성)이 분명했던 고려의 정통성과 연속성 덕분에 온전히 한국사의 영역으로 인정받는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건국 주체부터 속말말갈인지 고구려인인지에 대한 학술적 논쟁부터 시작해서 예맥계인 고구려인과 숙신계인 말갈족의 인구 구성에 대한 토론이 결론나지 않아 국내외에서 순전히 한국사로서만 취급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을 이용해서 중국인들의 넷상에서의 역사왜곡이 가장 빈번하기도 하다.[119] 하지만 모든 걸 떠나서 발해는 고구려계가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인 주도권을 쥔 지배계층으로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이끌어간 나라였다. 속일본기의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건 발해에서 발해인(예맥계)과 말갈인(숙신계)이 따로 구분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발해인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들이 신라학어(新羅學語)라는 역관들이었음을 보면, 적어도 말갈인이 아닌 발해인들은 신라인들과 말이 통하는 한국어족 집단이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발해가 멸망하고 나서 곧바로 지배층의 다수를 포함한 인구의 상당수가 고구려계 국가인 고려에 귀부한 점, 고려의 왕건이 이들을 친척의 나라 혹은 혼인한 나라로 여겼다는 점,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발해의 말왕(末王)이었던 대인선을 구출하기 위해 후당측에 협공을 제의한 점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인과 발해인은 같은 고구려계로서의 동류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계만의 영향력을 앞세울 수도 없는 것이, 발해에서는 인구의 상당을 말갈족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본의 고려악(高麗樂)에 포함된 발해 음악의 제목도 다름아닌 신마카(新靺鞨)다. 이는 발해의 건국세력이 비단 고구려계뿐만 아니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향유한 속말말갈과 백산말갈도 포함되어서 그런 것도 있다.[120] 오늘날 전해지는 나말여초 대의 성씨들만 보아도 대씨(大氏) 외에도 사료상 신라에는 없었고 발해에만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지씨(智氏), 곽씨(郭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기씨(奇氏)(이쪽의 경우 1033년 11월 발해인 기질화(奇叱火) 등의 내투를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기씨는 이미 후삼국시대 고려에 속한 호족으로 여러 명이 등장한다. 奇라는 한자의 단순한 음가상 고유어나 말갈식 이름을 음차하다 보니 우연히 그 한자가 쓰인 것일 수도 있고 발해에도 이전부터 기씨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내는 걸 수도 있다), 오씨(吳氏) 등 여러 성씨들, 하물며 뿌리가 중국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성본(性本)들이 발해계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씨(李氏)와 고씨(高氏)의 경우 일부 본관들이 정황상 발해인들에게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놓고 보았을 때 오늘날 남한의 1만 태씨(太氏)들만이 발해의 후손인 것은 실상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건 당연히 가장 수가 적었을 왕족만 1만이 넘는다는 걸 나타낸다.[121] 연남생의 묘지명만 봐도 아무리 배신했다지만 본인은 고구려인이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그의 증손자인 연비의 묘지명에는 스스로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이라고 썼을 정도로 세대가 지나면서 차차 동화되는 정황이 나타난다.[122] 자치통감 기준으로 최소 28,200여 호(戶).[123] 중국인들이 활동하는 영문 위키백과나 바이두에서는 약 40만의 고구려 유민들이 강제이주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낭설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자주 써먹는 역사왜곡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와 안동도호부의 영문 항목에서 약 78,000여 호(戶)가 끌려갔다고 하는 등 중국인 학자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용하면서 크게 문제시되고 있다. 다만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로 자의든 타의든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대개는 유력한 민호 출신들이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의 상당수가 청나라로 끌려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지배층 한정으로 본국으로 거의 대부분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물론 고구려도 걸걸중상이나 대조영의 사례처럼 당나라를 탈출한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이 말갈이나 신라로 피신했지만 조선과는 달리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 모두가 고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124] 당나라의 문인인 장작(張鷟)이 지은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평양성 출신의 절세미녀로 당나라로 끌려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정일(郭正一)의 종이 된 옥소(玉素)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자신을 학대하던 곽정일의 독살을 시도하고 그의 전택(田宅)을 벗어나, 연인으로 추정되는 무명의 고구려인, 그리고 그들에게 협력한 착마노(捉馬奴)라는 곽정일의 노비(본명이 아니라 마굿간지기라는 뜻)와 함께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나란히 참수당했다고 한다.[125] 국내성, 평양성, 한성.[126] 사실상의 수도권.[127] 다른 게 아니라 서해의 섬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 부흥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육지로 돌아온 뒤 전쟁 중 지나가면서 (아마도 그가 나고 살았을) 평양성 일대를 보고 폐허가 되고 사람이 얼마 안 남았다고 슬퍼한 기록이 적혀있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후퇴하기 전 시점으로 나당전쟁 이전에 고구려의 각 방어선이 무너지며 전황이 악화되자 이미 상당한 고구려인들이 이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28] 말갈로 탈출한 이들은 발해에 합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9] 이성계의 요동 정벌 당시 고려군에게 다시 귀부해 고국으로 돌아간 1만여 호(戶)를 제외하면 사실상 나머지 전부라고 보아도 좋다.[130] 천막 만여 개의 규모.[131] 다만 이 정체성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고구려인 선조를 두었음을 인식하고 그들을 기린다는 의식에 가까운 것이다. 고구려인 선조들을 두었고 그들의 혈연적, 문화적, 의식적 유산들을 민족적인 차원에서 계승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과는 결이 180도 다르다.[132] 몇몇 진짜(상당부분은 중화사상으로 인한 사칭이고 한국 토성(土姓)이지만 일부분은 진짜 중국에서 온 조상을 두고 있다) 중국계 본관 성씨의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정착한 옛 중국계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들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음과 같은 맥락이다.[133] 백제부흥운동의 수뇌부. 다만 멸망을 전후로 왜국에 망명한 백제인들은 얼마 안 되며 이전부터 교류나 이주 목적으로 왜국에 정착한 백제인들의 수가 더 많다.[134] 고구려의 신라 구원과 신라의 침공을 계기로 왜국으로 대거 망명한 가야인들. 가장 대규모로 이주했던 경우로 추정된다.[135] 같은 이유로 한반도 북부, 만주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북한의 역사로, 남부 지역에 비중이 큰 고대 왕조는 남한의 역사로 인지하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고대에 별개의 국가였던 북부 왕조와 남부 왕조가 고려시대부터 하나가 되어 통일을 유지하다가 냉전 이후 다시 분리됐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북한인과 남한인이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인지하지 않고 그저 이념과 사상, 정치적 이해에 따라 분리됐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성급한 관점일 수도 있다. 애당초 두 국가 전부 헌법상으로 상대국은 국가가 아니라 영토를 강제 점유 중인 괴뢰 세력이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북한이 정통성이 있든 남한이 정통성이 있든 한반도의 역사는 남북 구분 없이 한민족의 역사이다.[136] 사학계에선 직업군인으로 본다. 고구려군 항목 참조.[137] 국동대혈이라는 것으로, 국사편찬위 홈페이지에 정보가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수험생들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혈'이라 언급되기도 하며, 이 또한 고구려를 가리키는 키워드다.[138] 도올 김용옥 교수처럼 동양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비롯한 동양 철학을 굉장히 낮게 평가하고, 민족과 민족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인물이다.[139] 고구려의 후계 국가인 발해의 연도를 넣으면 서기 10세기 초반, 그래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보다는 훨씬 오래 전이다.[140] 출처: 《르네상스의 어둠》,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73~274쪽[141] 사실 이밖에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 많았는데, 로마가 외국인들을 개처럼 멸시해서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배타적인 태도 때문에 망했다는 황당한 내용을 버젓이 집어넣기도 했다.# 서로마의 역사까지만 보아도 1,200년, 동로마까지 합치면 무려 2,000년 동안 존속했던 로마가 외국인들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받아들였는지를 감안한다면, 세계사에 너무나 무지한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