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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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인물의 아들이자 2024년 미국 대선 후보에 대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1968년 대선에 나갔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이것이 과장된 신화라는 반박도 있지만 여러모로 1960년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정치가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2] 오늘날에도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 지미 호파, 마피아와의 특이한 관계, 고대 그리스 영웅의 비극을 연상케 하는 극적인 인생 등으로 잘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5년 매사추세츠의 부유층 거주지에서 케네디 가문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53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이끄는 상원조사위원회의 보좌관이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상원 노사관계부정위원회의 보좌관 겸 의사진행자로 활약하며 지미 호파를 비롯한 거대 노동조합 간부들의 비리와 마피아 유착 관계를 공격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을 지내며 마피아와 노조의 비리를 척결하고 흑인 민권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린든 B. 존슨 대통령과의 좋지 않은 관계 때문에 법무장관 직에서 사퇴하고 뉴욕주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여론 악화로 3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196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뒤집고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베트남 반전좌파 진영을 대표한 유진 매카시,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받은 휴버트 험프리에 맞서 유색인종과 도시 빈민층의 지지를 얻으며 출마했다. 그는 1968년 혁명으로 미국의 인종, 세대, 정치가 분열되어있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당선되면 미국의 국론을 통합하겠다는 낙관주의 캠페인을 벌였다.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직후 암살되었기 때문에 그가 1968년 대선에 출마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최근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무조건적으로 1968년 대선에서 유리한 상황에 있지만은 않았다는 후속 정황이 계속 드러남에 따라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대선 출마를 번복한 것은 당대 유진 매카시 지지자와 현대의 일부 극좌 내지 보수성향 역사가들에게 상당히 기회주의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 대선에서 진정으로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로버트 케네디라고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고, 암살은 그런 로버트 케네디의 숭고한 메시지가 신화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6월 4일 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승리를 확인한 로버트 케네디는 자정이 지난 직후 LA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고 호텔을 빠져나오던 도중, 팔레스타인 이민자 시르한 시르한에게 총격을 당했다. 사유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다는 것. 시르한 시르한은 어릴 적 제1차 중동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고 미국으로 이주한 난민으로 이스라엘을 극도로 증오하던 인물이었으며, 프로파일러들의 분석에 의하면 편집증 증세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총상을 입은 로버트 케네디는 즉각 위중 상태에 빠졌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약 3시간 4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하고 총격 26시간 후인 6월 6일 새벽 1시 44분 숨을 거두었다. 향년 42세.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다. 케네디가(家)중에서도 자식이 가장 많았던 걸로도 유명하다. 형제자매들중에서 자녀수로나 아들수로나 독보적으로 가장 많이 낳았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케네디가(家)의 인물들은 절반 이상이 이 사람의 후손일 정도.[11]의친왕 제롬 보나파르트[12] 그 중 막내 딸은 생년월일에도 나오듯이, 부친이 암살 당한 후에 태어난 유복녀다.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이자 제64대 법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예비 선거에 참여하였다가 암살당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1968년 대선에 나갔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이것이 과장된 신화라는 반박도 있지만 여러모로 1960년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정치가 중 하나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2] 오늘날에도 마릴린 먼로와의 스캔들, 지미 호파, 마피아와의 특이한 관계, 고대 그리스 영웅의 비극을 연상케 하는 극적인 인생 등으로 잘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2. 경력[편집]
- 1952.12. 미국 상원 상설수사소위원회(위원장 조지프 매카시) 보좌관
- 1956.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대통령 선거 후보 보좌관
- 1957. 미국 상원 노사부당선별위원회(위원장 존 매클레런) 보좌관
- 1961.01. 제64대 미국 법무장관[3]
- 1965.01. 미국 연방 상원의원 (뉴욕주 / 제89, 90대 의회)[4]
- 1968.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후보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25년 매사추세츠의 부유층 거주지에서 케네디 가문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53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이끄는 상원조사위원회의 보좌관이 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상원 노사관계부정위원회의 보좌관 겸 의사진행자로 활약하며 지미 호파를 비롯한 거대 노동조합 간부들의 비리와 마피아 유착 관계를 공격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밑에서 법무장관을 지내며 마피아와 노조의 비리를 척결하고 흑인 민권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이후 린든 B. 존슨 대통령과의 좋지 않은 관계 때문에 법무장관 직에서 사퇴하고 뉴욕주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어, 차기 대권주자로 분류되었다.
3.1. 대선 출마[편집]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여론 악화로 3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1968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뒤집고 예비선거에 출마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베트남 반전좌파 진영을 대표한 유진 매카시, 민주당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받은 휴버트 험프리에 맞서 유색인종과 도시 빈민층의 지지를 얻으며 출마했다. 그는 1968년 혁명으로 미국의 인종, 세대, 정치가 분열되어있음을 지적하며 자신이 당선되면 미국의 국론을 통합하겠다는 낙관주의 캠페인을 벌였다.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한 직후 암살되었기 때문에 그가 1968년 대선에 출마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최근에는 로버트 케네디가 무조건적으로 1968년 대선에서 유리한 상황에 있지만은 않았다는 후속 정황이 계속 드러남에 따라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대선 출마를 번복한 것은 당대 유진 매카시 지지자와 현대의 일부 극좌 내지 보수성향 역사가들에게 상당히 기회주의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 대선에서 진정으로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사람은 로버트 케네디라고 여겨졌던 것이 사실이고, 암살은 그런 로버트 케네디의 숭고한 메시지가 신화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3.2. 급작스러운 죽음[편집]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8년 6월 4일 밤 캘리포니아 예비선거 승리를 확인한 로버트 케네디는 자정이 지난 직후 LA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하고 호텔을 빠져나오던 도중, 팔레스타인 이민자 시르한 시르한에게 총격을 당했다. 사유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편을 들었다는 것. 시르한 시르한은 어릴 적 제1차 중동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고 미국으로 이주한 난민으로 이스라엘을 극도로 증오하던 인물이었으며, 프로파일러들의 분석에 의하면 편집증 증세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총상을 입은 로버트 케네디는 즉각 위중 상태에 빠졌으며,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약 3시간 40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하고 총격 26시간 후인 6월 6일 새벽 1시 44분 숨을 거두었다. 향년 42세.
4. 평가[편집]
4.1.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점[편집]
5. 음모론[편집]
5.1. 쿠바[편집]
5.2. 마릴린 먼로[편집]
5.3. 암살 음모론[편집]
6. 1968년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편집]
7. 여담[편집]
- 스티븐 컬프[5] 가 마릴린 먼로의 삶을 다룬 〈노마진과 마릴린〉(1996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한 〈D-13〉(2001년)에서 두 차례 로버트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실제 나이에 비해 엄청난 동안외모를 가진 배우로 2000년, 영화 〈D-13〉을 찍을 당시 나이가 45세로 1968년에 42세로 죽은 로버트 케네디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심지어 같은 영화에서 JFK 역할을 한 배우 브루스 그린우드보다도 1살 나이가 많다. 실제 로버트 케네디와 형 JFK는 8살 차이였다.
- 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가( 家)〉(Kennedys. 2011년)에서는 배리 페퍼[6] 가 로버트 역으로 출연했다. 화려하지만 스캔들, 잔병 치레에 시달리는 형과는 대조적으로 가정적이고 사생활도 깨끗하며, 나이와 경력으로 자신보다 한참 위인 FBI 국장 에드가 후버를 상대로도 주눅들지 않는 바람직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형의 피살 후 형수인 재클린을 각별히 배려하는 모습도 나온다.[7]
-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5년 영화 〈닉슨〉에서는 로버트 F. 케니디의 암살이 노골적으로 밥 호스킨스가 분한 존 에드거 후버의 음모로 묘사된다. 존 에드거 후버를 만난 리처드 닉슨이 로버트 F. 케네디가 있는 한 대통령 당선이 어렵다고 말하자 이에 후버는 "그럼 그 사람이 출마를 안 하면 되겠군요."이라고 말하고 이에 닉슨은 "그 사람이 왜 출마를 안 하겠소?"라면서 손사레를 치지만 결국...
-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존 F. 케네디 암살과 함께 간단히 언급된다. "형제는 힘든가봐요."
- 2006년 부시 집권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바비〉가 개봉되었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감독을 맡았으며, 부시에 질려있던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영화에 대거 출연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2011년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J. 에드가〉에서도 등장한다. 자기보다 30살이나 더 많은 부하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와 마주앉아 신경전을 벌인다.
- 2019년작 마틴 스콜세지 감독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등장한다. 잭 휴스턴이 맡아 지미 호파(알 파치노 분)를 청문회에서 조사하는 역할로 연기했다.[8][9]
- 〈워해머 40,000〉에서는 이오지마 전투당시 납치당해 카발의 일원이 된 데이먼 프라티니스라는 인물이 암살한 것으로 나온다.
- 넷플릭스에서 케네디 대선 캠프 때부터 사망하기까지의 일생을 담은 4부작 다큐시리즈 <로버트, 우리가 사랑한 케네디>를 제작했다. 대체로 유익하다는 평.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1964년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 진보적인 아젠다를 내세우면서 강력한 민권법, 사회보장제도와 국영의료법 제정 등을 추진한다. 하지만 민권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분노 지수를 잘 조절하지 못하면 암살당하며 스트롬 서먼드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10]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 로버트 케네디 암살 이후의 민주당 경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암살 직후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영화.
- 정계 유력인사들의 파티에 자주 초대 받았던 배우 리처드 버튼에 의하면 언론 담당이었던 피어 샐린저(Pierre Salinger)가 연 파티에서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마고 폰테인(Margot Fonteyn)을 침실로 헐레벌떡 데려가 급히 관계를 맺고 나왔다고 한다.
8. 가족관계[편집]
슬하에 7남 4녀를 두었다. 케네디가(家)중에서도 자식이 가장 많았던 걸로도 유명하다. 형제자매들중에서 자녀수로나 아들수로나 독보적으로 가장 많이 낳았다.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케네디가(家)의 인물들은 절반 이상이 이 사람의 후손일 정도.[11]
9. 선거 이력[편집]
10. 소속 정당[편집]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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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운데가 로버트 케네디, 왼쪽은 존 F. 케네디, 오른쪽은 테드 케네디이다. 테드 케네디의 자서전인 "케네디가의 형제들"의 표지 사진으로도 쓰였다.[2] 1990년대에 "196~70년대의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케네디 암살 사건은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 존 F. 케네디의 장례식 다음인 3위로 기록되었다.[3] ~1964.09.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사직)[4] ~1968.06. (암살)[5] 위기의 주부들 시즌 1에서 브리 반 드 캠프의 남편, 웨스트 윙에서 미국 하원의장 등으로 출연한 바 있다.[6] 전쟁 영화 〈위 워 솔저스〉에서 종군기자 조 갤로웨이로 출연했다. 그보다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다니엘 잭슨 이병 역으로 나왔었다. 본 작품으로 2011년 에미상 미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7] 극중에서 재클린 역으로는 과거 탐 크루즈의 부인이었던 케이티 홈즈가 출연했다.[8] 로버트가 1953년 조셉 매카시의 법률 고문으로 재직했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매카시즘에 대해 안다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로버트의 이후 정치 행보와는 다수 상반되는 경력이라 이 경력 때문에 진보 성향의 일부 청년층은 그를 다소 불신하기도 했다.[9]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로버트, 우리가 사랑한 케네디'에서는 로버트가 정치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묘사된다. 이후 뉴욕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유세 과정에서 컬럼비아 대학교를 방문한 로버트에게 한 대학생이 이와 관련된 질문을 하자 '의견 차이로 인해 6개월 만에 그만뒀고, 매카시즘에 반대한다'고 해명한다.[10] 스트롬 서먼드는 최악의 대통령 자리를 두고 프랜시스 파커 요키와 경쟁하는 수준이며, 민권법을 폐지한다.[11] 큰 형 조셉은 2차대전 참전 중에 전사하여 후손이 없었고, 작은 형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아들이 후손없이 사망했고, 살아남은 딸 1명만이 후손을 남겼다. 때문에 '케네디'라는 성을 물려준 사람은 본인과 남동생 뿐이다.[12] 두 사람 모두 생전 각자의 가문에서 수장이 되지는 못했으나 이들의 후손이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13] 2020년 4월 2일 카누 침몰 사고로 막내아들 기디언 맥킨과 함께 사망했다.[14] 전 뉴욕 주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