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r1판)
편집일시 :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는 사람.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 사리(捨離)하여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거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롭도다.
이제 법을 설하려 카시(迦尸)로 가거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甘露)의 북을 울리리라.
<잡아함경>. 득도 후 처음으로 만난 우파카라는 자의 질문에 답하여.
자기 PR이 좀 심하시다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혹은 섬)로 삼으라.
자등명법등명 (自燈明法燈明).[5]
1. 개요[편집]
불교의 창시자.깨달은 자[6]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카무니'를 중국어(한자어)로 음역한 것으로, 샤카는 그가 속하던 부족, 무니는 '성자'를 의미하므로 석가모니란 '샤카(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무니에는 고행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석존, 불, 여래 등의 10가지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또한 붓다(부처)로도 불린다.
본명은 싯다르타 고타마[7][8] 로, 샤캬족의 소왕국인 카필라에서 '라자'[9] 슈도다나와 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사방의 성문 밖에서 노인과 병자와 망자 등을 만나 인간의 생애가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생로병사)으로 이뤄져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결국 왕위를 버리고 출가. 많은 수도 끝에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열반하였다.
석가모니는 인도인이라고 많이 알려져있는데 확실하게 인도사람이라고 단정 지을수는 없다.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유명한 룸비니가 네팔 남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10]
2. 일생[편집]
인간이되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 그런지 얽힌 전설 및 일화도 가지각색이다. 우선 어머니 마야 부인이 인도에서 신성시되는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했다.[11] 마야 부인은 당시 인도 풍습에 따라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룸비니 동산[12] 에서 탐스러운 무우수 나무를 향해 손을 뻗다가 산기를 느끼고 그곳에서 산실을 차렸다.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겨드랑이로 나와[13] , 육방, 혹은 팔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 유아독존'[14] 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마야 부인은 출산후 7일뒤 숨을 거두고 만다.
그가 태어나고 난 후에 아버지인 정반왕이 예언자 아시타 성인에게 예언을 들었는데, 만약 궁정에서 그대로 자란다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는 말도 들었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이모인 마하파자파티가 고타마를 돌봤으며 아버지는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에게 바깥을 잘 안보여주고 궁정에서만 호화롭게 자라게 했지만, 알다시피 몰래 바깥을 경험한 싯다르타는 뭇 삶(중생)들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다른 일화로는 젊어서는 무예에 통달하여[15] 무술대회에서 사촌 데바닷타나 아난다 같은 강무자를 물리치고 우승했으며, 성난 코끼리를 잘 달래서 집으로 돌려보냈을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경지 또한 매우 원숙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외의 기록에서 부처의 경지에 이른 뒤, 다치거나 몸에 이상이 온 사례가 있는데, 데바닷타[16] 가 갑자기 돌을 벼랑 위에서 굴려 석가모니를 죽이려 했을 때 이를 피하다 튄 돌에 발가락을 맞았을 때와[17] 열반 직전에 대장장이 순타가 공양을 드리고 식중독 증세를 보인 정도.[18]
최후에 열반한 후 다비를 거행하였을 때, 사리가 무려 여덟 섬 너 말이 나와 당시 석가모니를 조문하러 온 8부족의 왕들이 한 바라문의 조정에 따라 나눠 가졌다고 한다.[19] 뒤늦게 온 한 나라는 남은 재를 가져갔고, 조정을 맡은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있던 병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2.1. 석가모니불의 오도송(悟道誦)[편집]
위 내용은 담마빠다(법구경)의 153번과 154번의 게송이다. 영문 번역본
3. 사상[편집]
http://www.daibi.vn/wp-content/uploads/2013/08/P025.jpg
그의 중심 사상은 역시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경이며, 이는 후대에 그를 따른 수많은 이들에 의해 정립되고 확장되었다.[21]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성, 위엄, 절대의 모습보단, 제자에게 신통력을 내보이지 말고[22][23] 수행에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당시 인도는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상들이 혼잡하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내용이 결국 불교의 경전이 된다. 대화 내용중에는 민감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거나 석가모니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일관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설하였다.
붓다가 께사뿟따라는 깔라마들의 성읍(북인도의 조그만 도시)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수행자와 성직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리라고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스스로 깨닫고 알게되면 그 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 깔라마 경 중에서[24]
역사학적으로 따자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힌두교의 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식자에 가깝다. 힌두교는 불가촉천민을 포함해서 5단계로 계급을 나누고, 전생에 업(카르마)를 져서 현세에 이런 걸로 태어난 것이라는 사상을 주장한다. 그러니 내가 현생에 그 계급에 맞는 일을 열심히 하면 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는 지금 계급이 아닌 더 높은 계급으로 환생한다든지 바라문으로 환생할 수가 있다고 가르쳤다. 인도의 지배층은 이 힌두교의 가르침을 널리 설파해 하위계급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고 현대에도 이러한 문화는 인도에 뿌리깊이 박혀 있다.[25]
그런데, 석가모니는 카스트 제도를 강력히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었다. 이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일부 권력자들의 열성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아쇼카왕 이후의 인도에서는 타 종교의 요소들을 받아들인 힌두교가 세를 급격히 불려 민중들을 적극 공략해 인도의 사상의 대세를 점하게 된다.
4. 가족[편집]
아버지 정반왕과 어머니 마야부인,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바티, 부인 아쇼다라, 아들 라훌라가 있다. 아쇼다라와는 16세때 결혼했다.
후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돌아왔을 때 라훌라는 모친인 아쇼다라를 통해 '왕이 되려 하니 보물을(유산을)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전하게 했다. 이에 석가모니는 즉석에서 라훌라를 출가시켜 불도를 닦게 하였다.
정반왕이 죽자, 새어머니 마하파자바티와 아내 아쇼다라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사촌 형제로 아난다와 아나율, 이복동생으로 난다가 있는데, 이들 셋 다 석가모니를 따라서 출가했다.[26] 참고로 석가모니를 일생의 원수로 삼고 그를 해하려 했다 알려진 데바닷타 역시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이다.
이렇게 왕족 중 뛰어난 남자는 대부분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하는
사실, 전대에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도다바 왕자의 아버지 파세나디 왕이 샤카족에게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국이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족은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도다바인 것. 비도다바가 아직 왕자일 적에 샤카족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뒤에서 모친 얘기를 꺼내며 몰래 비웃는 것을 듣고는 앙심을 품었다.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샤카족을 침공했다. 이 때 석가모니는 3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군대를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4번째는 결국 치뤄야하는 업이라는 것을 알고 슬퍼하면서도 막지 않았다. 여담으로 비도다바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 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국이 샤카족을 학살하자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석가모니의 사촌 뻘이었다고 함)는 코살라국의 왕에게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몸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
달리 말하면 여래의 가르침이 의외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또한 수행에 있어서 엄숙함이나 교조주의를 최대한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는 초기의 불교 전파에 매우 큰 강점이 되었다. 풍속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 풍속을 지키며 불법을 따르고 싶다고 하니 다 허락하는가 하면, 지체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가 출가한 제자가 발에서 피를 흘리자(당시 출가자들은 맨발로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 모든 비구들에게 신발을 신게 하기도 했다. 또 라훌라가 탁발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숙소를 뺏겨 화장실에서 자는 걸 보고 당시 계율이던 '1인 1실'을 '2인 1실'도 허용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5. 제자[편집]
팔리어 삼장에 의하면 석가모니의 첫 제자는 아프가니스탄 발흐(Balkh) 출신의 상인인 트라푸사와 바하리카이다. 현장에 의하면 이둘은 붓다에게 머리카락을 받고 발흐로 돌아갔다고 한다. [28] #
6. 절의 전각[편집]
'대웅전(大雄殿)' 또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는 이름이 붙은 법당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불상으로 표현할 때는 좌선하듯이 양 손을 하단전에 모으고 있는 선정인이나, 선정인에서 한 손을 풀어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마라 파피야스 항목 참고)을 수인으로 취한다.
7. 국내에서의 인식[편집]
종교인들 다수가 종교를 믿는 이유가 기복신앙인(...) 한국에서는 가끔 존재감이 아미타불이나 미륵, 관세음보살 등에 밀리기도 한다. 기원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불 독송은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조이므로 대부분의 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위에도 나오듯 절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곳이다), 가장 많이 신앙하고 있다.
어째서인지 무속에서는 현재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인식된 것 같다.[29] 이는 석가모니가 이 시대의 부처(현존불)라는 가르침이 변질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을 더 높이 치기도 하는데, 실제 불교 내에서도 미륵이 이 세계에 내려오려다 석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더 완전한 세계의 부처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륵의 위치가 높긴 하다.
8. 기타[편집]
- 그 일생에 워낙 신비한 전설이 많이 섞여 있는지라 한 때 서양학자들은 그 실존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이곳은 석가모니불이 태어난 곳이므로 세금을 면제한다'고 쓰여진 아소카 왕의 석주가 발견되면서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이 확정. 그리고 이로써 룸비니 동산의 위치도 확정되었다.
- 석가모니의 수행법은 동양 문화권에 큰 영향을 끼쳤다.
- 현존불이기 때문에 각종 고전 및 현대문학, 그리고 창작물에 등장하지만 최강이 아닌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서유기.
- 가장 권위있는 철학 백과사전인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에서는 석가모니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이 선한 삶을 얻도록 돕는 것이지만, 고통의 근원에 대한 그의 분석은 사람의 본성에 관한 주장과 세상과 우리의 장소에 관한 지식을 어떻게 얻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다양한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철학적 전통의 기초를 형성했다.[30]
- 그 사상이 워낙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사유구조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아브라함의 종교)가 모두 같은 '아프로아시아'어족에서 나왔듯이, 같은 어족에서 비슷한 사유가 나오는 경우가 있고 그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도 있는 것이 사실. 무려 3372개의 언어와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는 인도[31] 에서(사멸하는 언어를 가정하면 과거에는 더 많았을 수도 있다) 태어난 석가모니가 실제 모어로서 사용했던 언어는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은 충분히 들 수 있다.
- 환빠들은 석가모니불 또한 단군의 자손이라 주장한다(애초에 단군은 특정인물도 아니지만, 이들은 그렇다고 우긴다).(...) 주장의 출처는 한국외대 학사, 뉴욕 시립대학교 석사학위, 동국대 철학과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강상원[32] 인데, 옥스퍼드 산스크리트어 영문 대사전 509페이지 석가모니 항목에 나와있는 산스크리트 어를 해석하면 석가모니는 단군의 자손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혀 신빙성이 없고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어짜피 자기 분야가 역사학도 아니고, 철학과 박사가 이런 주장 해 봐야 학술적으로 의미 없는 짓이다.
- 염세주의의 대부인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인도철학의 기반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든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근본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사상이며, 불교가 기반이 되는 부분이 많다. 문제는 상당히 왜곡해서 이해했다는 거. 뭘 어떻게 착각했는지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허무의 종교로 봤다.[33][34] 그리고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현대에까지 불교에 대한 상당한 오해와 편견을 남겼다.[35]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에서 공통분모가 있다면 집착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불교에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지 "어차피 허무하니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붓다는 대담하게도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중략)
붓다는 자신의 사상이 독재적 승직을 갖는 무미건조하고 흔해빠진 종교로 저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신의 견해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이 최고 지상의 실체라고 생각한 것을 추구해 왔다는 점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이 실체를 하나의 인격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그 인격은 인간이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자기 부친이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권력입니다.
1962. 5. 13. B. Russell
- 프리드리히 니체는 본인의 저서 <안티크리스트>에서 석가모니에 대한 생각을 남겼다.
부처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바로 복수심과 혐오감 그리고 원한을 경계하라는 것 이다(- "적대는 적대를 통해서는 종결되지 않는다." : 불교 전체의 심금을 울리는 후렴구......)
- 한국 불교계에서는 불경을 독송하거나 할 때 "석가모니"를 "서가모니"라고 읽기도 한다. "석가여래" 역시 "서가여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관습이 영향을 끼쳐서 원불교에서는 아예 "서가모니"라고만 쓰며, 불교 쪽 영향을 받은 소규모 종교에서도 서가모니/서가여래라고 씀이 관례로 정착한 사례가 있다.
- 조선의 진묵스님이 석가모니불의 환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이런 스토리는 주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에서 인용된 것이다.
9. 미디어에서의 석가여래[편집]
-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는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석가모니에 대한 전기 만화이다.
- 디지몬 시리즈의 샤카몬이 석가모니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 세인트 영멘에서는 세기말을 무사히 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본에 내려와 휴가 중이다.
- Fate/EXTRA에서 석가모니가 등장한다.
- 근육소녀대의 악곡 석가(근육소녀대)의 제목이기도 하다. 단, 가사는 종교적인 내용과 별 관계가 없는 (결말이 좀 많이 끔찍한) 사랑 노래.
- 신드로이아 연대기 - 박건 작가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으로써 최상위급의 신성을 획득한 초월자중 한명.
- OH, MY GOD!에서 다른 신들과 더불어 이사로 근무중이다.
-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는 인민의 눈을 멀게 한 악인으로 엄청나게 까인다. 석가모니만 까이는 건 아니고 메이저 종교 지도자들은 다 까인다.(예수, 공자 등)
- 서유기에서는 불교성향의 이야기답게 가장 강한 존재로 나오며 선신의 최고위인 옥황상제도 어쩌지 못하는 손오공을 제압하거나 선인들이나 보살들조차 잡지못하는 강력한 적을 잡는 존재로 나온다.
- 세인트 세이야에 등장하는 골드세인트 아스미타 및 샤캬, 시지마는 설정상 신불의 환생이다. 다만, 석가여래를 콕 집어서 설정한 것은 아니고 부처 혹은 아라한이나 사다함 등 일정한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환생했다고 보아도 무방.
- 일본 드라마 서유기(2006) 마지막화에서는 손오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잠깐 보여줬으나 어쩐일인지 납치되어 삼장법사 일행은 재결성, 여래를 구출하러 간다.[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