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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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세 동유럽에 존재했던 나라로, 동시대 유럽에서는 가장 영토가 넓었다.
對동로마 무역이 쇠퇴하면서 수도 격인 키예프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 체르니고프, 폴로츠크, 랴잔 등이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13세기 중엽 몽골 제국이 침공함으로써 최종적으로 키예프 루스 체제가 붕괴되자, 동슬라브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3개국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루스의 북부에서 몽골의 간접 지배를 받은 지역으로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자립해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벨라루스는 몽골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배를 받은 지역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다가 벨라루스보다 좀 더 늦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세력권안에 들었다.
러시아 측에서는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뒤로는 키예프 루스의 정통성이 독립을 지키고 이후 힘을 길러 루스 영역의 최강국이 되는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몽골 침공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서부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으로 키예프 루스의 직계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역사가 토마셰프스키는 이 갈리치아-볼히니아를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5]
2. 민족 구성[편집]
동슬라브인의 국가이지만, 이 나라를 세운 민족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살던 노르드인들이었다. 이들이 발트해를 건너 지금의 벨리키 노브고로드 일대에서 류리크 왕조를 개창한 뒤, 남하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을 정복한 후 제2대 대공 노브고로드의 올레그때 중심지를 이 곳으로 옮겼다.
북유럽에서 노르드인이 건너오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정주하고 있었던 동슬라브인들도 함께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말그대로 추정이지 역사적 자료는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키예프 루스를 세운 사람들이 스웨덴계 노르드인(바이킹)들의 후예라는 사실이다. 초기 키예프 루스 지배계층의 문화는 노르드식이었다. 물론 이 지역에 정주하던 기존 슬라브인들도 어떤 형태로든 키예프 루스의 구성원이었을 테고, 노르드계 지배층은 현지 슬라브인에 동화되었지만 적어도 초기에는 슬라브인이 지배계층에 포함되지는 못했으리라 추정한다.
동슬라브 계통 국가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자신들의 시조가 되는 국가를 북게르만인들이 세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부정하고#, 동슬라브인들이 건국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 각 국가의 위키백과에서는 키예프 루스의 노르드인 도래설을 인정하는 서술을 써놓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 3국에서, 키예프 루스가 노르드인이 세운 국가라는 설을 아예 부정하지는 않은 듯하다.[6]
그러나 반노르드 이론의 스펙트럼은 굉장히 넓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반노르드 이론'이란 명확하게 정립된 특정 이론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있었던 노르드주의에 대한 반론이나 대안설 등을 총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7] 물론 이중에서는 역사왜곡이나 프로파간다성 주장도 있지만, 대부분은 키예프 루스가 건국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르드인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을 지적하거나, 슬라브인•핀인•발트인•튀르크인[8] 등 다른 민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노르드 이론이 '민족주의적' 시각이고 반노르드 이론이 여기에 반대하는 형국이다. 오히려 노르드설이 16~18세기 스웨덴의 최전성기 시절 동유럽에서 스웨덴의 팽창주의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 쓰였다.
다만 원래 '루스'라는 단어 자체가 노르드인을 의미하는 만큼 노르드인이 그중 상대적으로 가장 지분이 크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9] 초기 러시아 연대기나 기록들은 루스인을 정복자-지배자, 슬라브인[10] 을 피정복자-피지배자로 구분하며 '루스인의 땅'은 단지 이 노르드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으로 국한한다. 마찬가지로 전근대에서 전사회적인 민족주의나 민족의식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노르드인의 도래 이전에 (혈통적으로) 순수한 슬라브인인 존재했다기 보단 발트인, 핀인, 슬라브인, 튀르크인들이 같이 살면서 서로 연합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하면서 섞이다가 최종적으로 노르드인에 의해 군사적으로 통합되고 훗날 기독교 공인으로 인해 문화적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잡다한 민족들이 '동슬라브인', '루스인'이라는 동일한 의식을 가지게 된 것에 가깝다.
3. 역사[편집]
3.1. 형성[편집]
중세 초기,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유럽의 동쪽 대부분은 슬라브인이 다수인 지역이 되었다. 그중 중앙유럽에 자리잡은 서슬라브와 발칸 반도에 자리잡은 남슬라브와 달리 동유럽에 자리잡은 동슬라브는 기독교 문명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러 부족들로 나눠져 있었다. 그 중 키예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일대는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의 영향권에 있었고, 노브고로드를 포함한 러시아 북서부는 슬라브족이 우랄계 민족이나 발트계 민족과 함께 살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중 8세기 중반부터 바이킹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 류리크가 이끄는 바랴그인(바랑인) 바이킹 세력이 855년에 라도가 호수에 정착했고, 862년에는 일멘 호수에 도달해 노브고로드를 건설했다. 그리고 류리크 사후 세력을 이어받은 노브고로드의 올레그가 남하해 키예프를 점령하고는 수도로 삼은 것이 키예프 루스의 시작이었다.
12세기에 한 수도자가 작성한 《원초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일대는 슬라브족, 핀족, 발트족이 서로 싸우느라 혼란스러웠다. 참다 못한 현지 부족이 류리크를 찾아가 '이 일대는 혼란스러우니 이 곳을 다스려 달라.' 하고 초청했고, 류리크가 이에 응해 바랴그인을 이끌고 이 지역을 평정했다고 한다. 류리크는 노브고로드를 건설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는 세력을 확장했다. 879년 류리크가 죽었을 때, 올레그가 아직 어린 류리크의 아들인 이고리 류리코비치를 대신해 통치했다. 882년에 올레그는 어린 이고리를 데리고 드네프르 강을 타고 남하하여 키예프로 가서 류리크의 아들인 이고리가 정당한 지배자라는 명분으로 이미 키예프를 지배하고 있었던 류리크의 옛 부하인 아스콜드와 뒤레를 죽이고, 키예프를 접수했다고 한다. 초기 키예프 루스의 인구 구성은 원주민인 슬라브 및 우랄계와 발트계,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3.2. 초기[편집]
이후 올레그는 키예프 인근의 여러 동슬라브족들을 공격해 영토를 빠르게 확장했다. 키예프 루스는 910년에 카스피해를 통해 이란 북부 마잔다란 지역을 약탈하기도 했고,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에도 직접 원정을 가기도 했다. 올레그의 뒤를 이은 자는 제1대 대공 류리크의 아들로 알려진 이고리 류리코비치였다.[11] 941~944년에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으나, 945년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키예프 공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했다.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들 스뱌토슬라프는 너무 어렸기에 이고리의 아내 올가 대공비가 섭정하였다. 이 시기 드레블랴네족에게 응징을 가하여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세례를 받아 루스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군주가 되었다.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성장한 뒤 965년부터 군사활동에 나서서 볼가 불가르를 복속시켜 볼가 강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하자르를 공격하여 수도 이틸을 함락시켰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슬라브 부족들은 9세기 바랑고이족들이 남하하기 이전까지 하자르 칸국에 공물을 바치던 상황이었다. 루스인이 남하하여 하자르 칸국은 점차 슬라브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하다가, 10세기에 키예프 루스에게 침공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과거 하자르 칸국에게 공물을 바치던 슬라브 부족 상당수가 루스인들에게 투항한 것을 계기로 키예프 루스는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이후 스뱌토슬라프는 발칸 반도의 강국 불가리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강력한 군사력을 입증했다.[12] 하지만 결국 스뱌토슬라프는 동로마 제국도 공격하다가 요안니스 1세에게 패배하고 돌아오던 중 유목 민족인 튀르크계 페체네그인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두개골은 술잔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스뱌토슬라프의 최후는 비참했으나 패배하기 이전까지는 군사적으로 뛰어났다. 동로마 제국은 키예프 공국 병사들의 활약상을 보고는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13]
3.3. 중기[편집]
정복군주 스뱌토슬라프의 전사하자 왕위를 야로폴크 1세가 이었다. 그러나 980년에 옛 수도 노브고로드를 지배하던 블라디미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폴크 1세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국경지대의 발트족과 동슬라브족, 핀족 등을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또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인 안나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이후 국교로 인정했다. 물론 이 기독교화 과정이 평화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노브고로드를 비롯한 노르드 성향이 강한 북부지방에는 반란과 학살이 일어났다.
이후 정교회는 현재까지 동슬라브인들의 명실상부한 전통 종교가 되었다. 키예프 상인들은 드네프르 강과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교역했으며, 볼가강의 아틸[14] 과 불가르[15] 를 거점으로 삼아서 이슬람의 아바스 칼리파조와 교역했다. 블라디미르 1세 사후에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 스뱌토폴크 1세가 대공위를 계승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권력 유지를 위해 동생들을 살해한 탓에 민심을 잃었다. 이런 와중에 야로슬라프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스뱌토폴크 1세를 죽였다.
3.4. 전성기[편집]
야로슬라프 1세가 재위하면서 영토가 확장되었고, 11세기 중반에 최전성기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야로슬라프 1세는 자신의 세 공주들을 각각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의 왕에게 시집을 보냈고[16] , 자신의 여동생들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공작 ('부흥공') 카지미에시 1세 및 동로마 제국의 황자와 혼인을 시켰다. 그 자신도 1019년 스웨덴 임금 올로프 솃코눙의 딸 잉에예르드 올로프스도테르(Ingegerd Olofsdotter)와 결혼하는 등 적극적으로 타 유럽 국가들과의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중세 유럽의 문화적 패권국인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방해하는 페체네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루스카야 프라우다》라는 동슬라브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는 등 키예프 공국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며 번창하였다.
3.5. 쇠퇴 및 멸망[편집]

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루스
12세기 초반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로가 더 각광을 받게 되면서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 키예프 루스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기에 무역 쇠퇴는 국가 경제의 치명적인 타격이었다.1169년 루스 공후들 중 가장 세력이 막강하고 야심이 큰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 공후의 군대가 키예프를 차지했다. 보골륩스키 자신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아들을 보내 전투를 치르게 했다. 키예프를 점령한 그의 군대는 3일 연속 도시를 약탈했다. 보골륩스키는 키예프로 옮겨와서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보골륩스키가 클라즈마 강변에 있는 자신의 수도인 블라디미르를 선호한 것은 12세기 루스 정치, 경제, 사회에 일어난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키예프와 드니프로강 중류 지역이 끊임없는 정쟁에 휘말려 있는 동안 키예프 세계의 변방에 있는 주요 공국들이 더 부유해지고 강해졌다.
현재 우크라이나 서부인 카르파티아 산맥 아래에 있는 갈리치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후원 아래 다뉴브강을 이용해 발칸 지역과 교역을 했다. 이곳의 공후들은 공국을 번성시키는 데 드니프로 강 교역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보골륩스키는 볼가강 교역을 장악하고 있던 불가르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북서쪽의 노브고로드는 발트 지역과의 교역으로 부를 쌓았다.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여전히 존재했고, 폴로베츠족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역량은 더 증가했지만, 드니프로강 교역로는 루스에서 더 이상 유일한 교역로도 아니고 중요한 생명선도 아니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더욱이 키예프 루스는 체계적인 대공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보다는 대공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봉건적인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대크킹시대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루스를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대공은 다시 세력을 키워 키예프 대공으로 복위하기도 했는데, 뱌체슬라프 1세 때부터 쫓겨났다가 복위함이 관례처럼 되풀이되었다. 심지어 류리크 2세는 무려 5번이나 즉위했다. 이렇게 키예프 대공 자리가 불안정해지자 키예프가 각 공국을 통제할 수 있는 힘 또한 약해졌다. 키예프 루스는 사실상 여러 공국들로 분열된 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등이 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자르 칸국과 페체네그족을 주무르던 키예프 루스였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 즉 폴로베츠족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괴로워하였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네프르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던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17]

이런 상황에서 분열되어 있었던 루스 공국들은 1223년 몽골 제국이 숙적인 쿠만을 침공하자 쿠만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 파악하고 연합군을 구성했으나 칼가강 전투에서 불세출의 명장 우량카이 수부타이에게 대패한다. 이번 침공은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호라즘 왕조 잔당을 처리하고 지나가다가 건드려본 정도였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기고도 그냥 돌아갔지만, 시간이 흘러 1237년에 몽골 제국의 바투 칸이 본격적으로 루스를 침공한다. 바투는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 등 동쪽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박살내며 키예프로 진격했다. 키예프 대공은 싸우기 전에 도망가버렸고 시민들은 군사 지도자 드미트로의 지휘 아래 끝까지 항전했다. 결국 공성전 끝에 성벽은 무너지고 키예프 루스는 처참하게 멸망했다(1240년).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의 척박한 삼림 지대나, 반대편인 러시아 남부의 스텝으로[18] 대거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빛나는 문화도 쇠락하고 키예프 루스의 영토 대부분이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렸다.
몽골인들은 고향과 환경이 비슷한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직할통치했고, 삼림지대에 있는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등 루스 북부 쪽은 지구 반대편 한반도의 고려처럼 간접통치를 시행했다. 결국 몽골의 지배는 훗날 모스크바 대공국이 조금씩 힘을 길러 몽골을 쫓아낼 때까지 계속된다. 1326년에는 루스 세계 전체의 정교회를 관할하는 키예프 부주교좌도 전쟁과 몽골의 직접지배로 쇠퇴한 우크라이나를 떠나, 힘을 기르고 있던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키예프 대공 직위는 명목상으로 킵차크 카간 밑 루스 공국을 대표하는 작위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를 점령하자 리투아니아 대공의 칭호 중 하나가 되었다가 소멸했다.
4. 역대 대공[편집]
4.1. 독립 시기[편집]
- 시조 류리크 (862년 ~ 879년)[19]
-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882년 ~ 912년)[20]
- 이고리 1세 (912년 ~ 945년)
- 스뱌토폴크 1세 (1015년 ~ 1019년)
- 야로슬라프 1세 (1019년 ~ 1054년)
- 이자슬라프 1세(1차 재위) (1054년 ~ 1073년)
- 스뱌토슬라프 2세 (1073년 ~ 1076년)
- 이자슬라프 1세(2차 재위) (1076년 ~ 1078년)
- 브세볼로드 1세 (1078년 ~ 1093년)
- 스뱌토폴크 2세 (1093년 ~ 1113년)
-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 (1113년 ~ 1125년)
- 므스티슬라프 1세 (1125년 ~ 1132년)
- 야로폴크 2세 (1132년 ~ 1139년)
- 뱌체슬라프 1세(1차 재위) (1139년)
- 브세볼로드 2세 (1139년 ~ 1146년)
- 이고리 2세 (1146년)
- 이자슬라프 2세(1차 재위) (1146년 ~ 1149년)
- 유리 1세 돌고루키(1차 재위) (1149년 ~ 1151년)
- 뱌체슬라프 1세(2차 재위) & 이자슬라프 2세(2차 재위) (1151년 ~ 1154년)[21]
- 로스티슬라프 1세(1차 재위) (1154년)
- 이자슬라프 3세(1차 재위) (1154년 ~ 1155년)
- 유리 1세 돌고루키(2차 재위) (1155년 ~ 1157년)
- 이자슬라프 3세(2차 재위) (1157년 ~ 1158년)
- 로스티슬라프 1세(2차 재위) (1158년 ~ 1167년)
- 므스티슬라프 2세(1차 재위) (1167년 ~ 1169년)
- 글렙 유리에비치(1차 재위) (1169년)
- 므스티슬라프 2세(2차 재위) (1170년)
- 글렙 유리에비치(2차 재위) (1170년 ~ 1171년)
- 블라디미르 3세 (1171년)
- 미하일 1세 (1171년)
- 로만 1세(1차 재위)(1171년 ~ 1173년)
- 브세볼로드 3세(1173년)
- 류리크 2세(1차 재위) (1173년)
- 스뱌토슬라프 3세(1차 재위) (1174년)
- 야로슬라프 2세(1차 재위) (1174년 ~ 1175년)
- 로만 1세(2차 재위) (1175년 ~ 1177년)
- 스뱌토슬라프 3세(2차 재위) (1177년 ~ 1180년)
- 야로슬라프 2세(2차 재위) (1180년)
- 류리크 2세(2차 재위) (1180년 ~ 1182년)
- 스뱌토슬라프 3세(3차 재위) (1182년 ~ 1194년)
- 류리크 2세(3차 재위) (1194년 ~ 1202년)
- 이고리 3세(1차 재위) (1202년)
- 류리크 2세(4차 재위) (1203년 ~ 1206년)[22]
- 브세볼로드 4세(1차 재위) (1206년 ~ 1207년)
- 류리크 2세(5차 재위) (1207년 ~ 1210년)
- 브세볼로드 4세(2차 재위) (1210년 ~ 1212년)
- 이고리 3세(2차 재위) (1212년 ~ 1214년)
- 므스티슬라프 3세 (1214년 ~ 1223년)
- 블라디미르 4세 (1223년 ~ 1235년)
- 이자슬라프 4세 (1235년 ~ 1236년)
- 야로슬라프 3세(1차 재위) (1236년 ~ 1238년)
- 미하일 2세(1차 재위) (1238년 ~ 1240년)[23]
4.2.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기[편집]
- 미하일 2세(2차 재위) (1241년 ~ 1243년)[24]
- 야로슬라프 3세(2차 재위) (1243년 ~ 1246년)
- 알렉산드르 야로슬라비치 넵스키 (1246년 ~ 1263년)
- 야로슬라프 4세(트베리의 야로슬라프) (1263년 ~ 1271년)
- 레프(갈리치아의 레프 1세) (1271년 ~ 1301년)
- 이반(세베리아의 이반) (1301년 ~ ?년)
- 스타니슬라프 이바노비치 (?년 ~ 1321년)
4.3. 리투아니아 대공국 지배 시기[편집]
5. 문화[편집]

목조로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그 아름다움과 특유의 건축 형태로 유명했으나, 수명이 짧은 목조 건물 특성상 키예프 공국의 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다만 역사 기록과 그림을 바탕으로 키예프 공국 시대의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들을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 우크라이나 키이우와 르비우 등에 있으며, 이 외에도 러시아의 황금의 고리 지역에 루스의 옛 흔적이 꽤 남아 있다.
류리크 왕조의 대부분 신민들은 슬라브인들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슬라브 정체성이 키예프 지역 너머로 퍼져나간 것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 그 중에서도 정교회를 수용하고, 교회 슬라브어를 예배, 설교, 지적 대화의 언어로 삼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키예프 영역의 슬라브 지역과 비슬라브 지역 모두에서 슬라브어와 슬라브 문화라는 치장을 하고 나타났다. 루스가 점점 더 기독교화될수록 루스는 더 슬라브화되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사가 문학이 발전했으며, 《이고르 대공의 원정기》 같은 수준 높은 고전 서사시 작품도 쓰였다. 정교회 수도자들이 집필한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 왕조의 기원부터 1110년까지를 다루었는데,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 분파, 습속에 관한 여러 가지 구전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1146년부터 1154년 사이에 일어난 공후 이쟈슬라프 2세의 키예프 대공위 계승 투쟁을 비롯한 이야기를 담은 《키예프 연대기》도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의 문학사에서는 키예프 공국 시대의 문학 작품을 동슬라브족 문학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13세기 후반 갈리치아-볼히니아에서 키예프 공국 시절 연대기에 영감을 받아 《볼히니아 연대기》를 편찬하였다. 《열왕기》와 《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은 《볼히니아 연대기》는 교회와 관련된 일보다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일들에 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흑해 및 카스피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 동로마 문화 및 중동의 선진 문화를 적극 흡수하면서 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식받은 동방 정교회와 이콘의 전통 또한 동슬라브족 문화를 특징 짓는 키예프 공국의 유산이다. 다만 정교회 신앙이 일반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키예프 공국 내에서는 정교회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교육받은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기도 하였고, 문화적 저항 때문에 키예프 루스 주민 대다수는 정교회와 슬라브 토속 신앙을 둘 다 믿는 이중신앙을 따랐다.[25]
6. 경제[편집]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키예프, 류베치, 프스코프, 폴로츠크, 비텝스크 같은 키예프 대공국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흑해를 잇는 수상 교통로에 건설되었다. 특히 흑해와 가까운 키예프와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노브고로드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유럽 출신 여행자들은 키예프 루스에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루스를 '도시의 나라'라고 칭했다. 상인들의 권리는 '스메르드'라고 불리는 자유민 농민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했는데, 상인을 살해할 경우에는 자유민 농민을 살해한 경우의 벌금보다 2배 이상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상인들의 권리가 높았던 이유는 이들이 키예프 루스의 전사 계급이기도 했으며, 대외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키예프 루스의 상인들은 동로마 제국, 중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이슬람 칼리파조와 교역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밀랍, 꿀, 아마, 가죽, 대마, 귀금속, 무기, 갑옷을 주로 수출했으며 이슬람 칼리파조에는 주로 노예와 모피를 수출했다. 오늘날 스페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노예 대부분은 키예프 공국에서 중부 유럽의 유대인 상인들을 통해 수출된 슬라브족 노예였다.
키예프 공국에서는 화폐를 거의 주조하지 않았는데, 이슬람 칼리파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화폐가 많았던 데다가 자체적인 농업과 공업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11세기 이후부터는 흐리우냐라는 화폐 단위가 생기는데, 이것은 400그램짜리 은괴였다. 흐리우냐를 절반으로 자른 것을 루블 흐리우냐 또는 줄여서 루블이라고 했다. 은괴에는 중량 표기와 함께 공작의 인장을 새겼다.
7. 창작물[편집]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에서 등장하는데, 1066년에도 여러 류리크 왕조 가문원들이 분열되어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동쪽에는 쿠만이 있어 주기적으로 약탈을 해오는데다 키예프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개발 잠재력만 높을 뿐 실제 개발은 별로 진행되지 않은 가난한 땅이고, 1200년대 이후 몽골이 침공하므로 난이도는 높다. 다만 대부분의 루스계 대공들이 류리크 왕조의 친족인 특성상 좆간질을 통한 상속으로 영토를 불리기 쉬운 것은 장점. 이 때문에 초보를 벗어난 플레이어들이 해볼만한 플레이로 추천되는 경우도 있다. 아일랜드나 이베리아 반도 등 초보나 튜토리얼용으로 추천되는 플레이에 비하면 난이도가 있으면서 크킹다운 다이나믹함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