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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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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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한의 건국자이자, 정치인, 독재자인 김일성의 인간관계를 말한다.


2. 가족[편집]



2.1. 김정일[편집]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501050361_01.jpg
여느 정치인 부자가 으레 그렇듯 일반적인 부자관계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둘 사이의 관계는 정치적인 인간관계일 뿐 인간적인 부자관계는 김정일의 어린시절 외에는 없었다.

김정일이 갓 태어났을 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때문에 김일성은 김정일을 돌볼 틈도 없었고 만주 지역을 돌며 항일 독립투쟁에 몰두해야 했다. 해방되고 나서도 김일성은 좌우대립의 해방정국 하에서 공산당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불철주야 선동을 하느라 바빴으니 김정일의 성장기에 김정일을 제대로 돌보기는 어려웠다. 이렇듯 김정일의 유아기~아동기에는 김일성이 늘 바빴으며 김정숙 역시 1949년에 사망하여 김정일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유년기를 보냈지만 부모의 사랑은 받지 못했다.

그나마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신분 덕분에 6.25 전쟁 당시 남북한이 쑥대밭이 된 상황임에도 소련에서 안전하게 수업을 받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입학도 순수하게 김일성의 아들이라는 집안배경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허나 김정일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이복동생 김평일, 김영일 형제를 질투하였으며, 이 때문에 김정일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보상심리로 권력을 획득하는 데 집착했으리라 보는 시각도 많다. 김일성의 사랑으로 콧대가 지나치게 높아진 김성애 일가가 북한의 로얄패밀리로서 김일성의 권위를 넘어서는 행동을 자주 해오자 김일성의 반감을 샀는데, 김정일은 이 틈을 타 김성애 일가의 비리를 폭로했으며 김평일을 비롯한 김성애 일가는 철저히 몰락하고 김정일이 장남으로서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우뚝 서게 되었다.

1974년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실시 된 이후에는 김일성의 김정일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공고해졌으나, 김정일에게 김일성은 단순히 본인의 권력 승계를 위한 도구일 뿐, 인간적으로 느끼는 부정은 전혀 없었으며, 말년에 들어서 김일성을 본인의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김일성에게 기쁨조도 바치고, 김일성을 위한 선전영화를 만드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그렇게 명목상 1인자와 실질적 1인자로서의 관계를 꾸준히 이어오던 김일성과 김정일 관계는, 소련의 해체와 남북정상회담으로 최말년에 갑자기 틀어졌다. 소련이 해체하면서 북한에서도 개혁개방론이 오고갈 때 개혁개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북한에서도 힘을 얻기 시작했는데, 김일성은 개혁개방에 찬성한 데 비해 김정일은 원치 않았다는 것, 남북정상회담조차도 김일성은 이권 등의 이유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기에 어떤 식으로든 통일하는 것을 극렬 반대했으며 이 때문에 김일성과 갈등이 붙었다. 김일성 암살설이 나오는 것도 김일성 사망 직전 갑자기 틀어진 부자지간 때문이다.


2.2. 김경희[편집]


김일성이 애지중지하던 딸이었기에 김일성은 김경희를 좀 있는 군관 집안의 아들과 결혼시키고자 했으나 김경희는 별볼일없는 집안의 장성택과 결혼하겠다고 해서 갈등이 심했다. 오죽했으면 김일성이 장성택을 쫓아내자 김경희가 김일성의 차를 끌고 장성택을 찾으러 갔을 정도.

허나 김경희가 김일성이 반대하던 장성택과의 결혼을 감행하고 나서 신혼 초기와는 달리 80년대 들어 장성택과의 부부사이가 나빠지자 도리어 김일성과의 관계가 다시 좋아졌다.


2.3. 장성택[편집]


김일성은 사위로서 장성택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김정일이 실권을 잡고서는 김정일에 의해 폭풍승진했다. 종종 김정일의 권력강화를 목적으로 김정일에 의해 제철소로 좌천되는 일도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복직하면서 김정일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


2.4. 김정남[편집]


김일성은 김정일이 유부녀이자 배우인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낳은 김정남을 처음에는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당시에는 김정일의 본처 중에서 적자녀가 김설송, 김춘송 같은 딸밖에 없었기에 김정남을 손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남을 손자로 인정하고 나서는 김정남을 매우 아껴 김정남을 자신의 별장도 같이 데려가고 낚시도 같이 할 정도였다.

1994년 방북한 지미 카터와의 회담에서도 손자인 김정남과 같이 낚시하는 것이 삶의 큰 낙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 즈음에는 자신과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남이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믿었다.


2.5. 김정은[편집]


김일성이 김정남을 손자로 인정한 후부터는 이후에 태어난 김정철, 김정은은 손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김정은은 어린 시절 김일성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2.6. 김평일[편집]


김일성과 김성애의 아들로 한때는 김정일을 제치고 김일성의 후계자로 유력했으나 어머니와 외가의 권력 남용으로 인해 김일성의 신망을 잃어 외교관으로 해외에 좌천되었다. 김정일 생전에는 북한에 한 발짝도 발 들이지 못했으나 김정일 사후 김정은 시대 들어서 김평일이 나이도 많고 너무 장기간 해외에 있는 탓에 국내에 더 이상 김평일 세력이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 김평일이 자신에게 위험 요소가 되지 않을 것으로 여겨 국내에 들어어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7. 김영일[편집]


김일성이 김성애에게 푹 빠졌던 1955년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김일성의 사랑을 받았으나 김영일이 학생이던 1970년대에는 "선생 동무가 우리 아바이보다 쎄오?" 라고 선생에게 벌써부터 갑질을 하는 모습을 보여 김일성의 실망을 받았으며[1] 김평일이 후계자에서 탈락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김평일과 마찬가지로 외교관이 되어 동유럽을 떠돌았으나 북한 내외에서 행방이 널리 알려진 김평일과는 달리 김영일은 알려진 사진 한장 없고 존재 자체도 모를 정도로 두문불출했다. 후에 2000년에 김영일이 간경화로 사망(암살설도 있다)한 것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8. 김정숙[편집]


후대에 김정숙어머님, 김정숙녀사님이란 극존칭을 받으며 우상화 교과서까지 나오는 존경까지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김정숙은 김일성에겐 평범한 아내였다. 갓 결혼했을 당시에는 항일 투쟁을 하느라 바빴고, 해방정국에는 좌우대립으로 인해 매우 바쁜 상황이었다.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고 잠시나마 안정적인 상황이 되나 싶었지만 이 즈음부터 김일성은 김성애를 총애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김정숙과의 갈등이 생겼다. 북한 정권에서는 김정숙이 1949년 김일성이 자신의 출산 때문에 김일성의 업무가 방해될까봐 혼자서 애를 낳다 사망했다고 선전했지만 일설에는 김일성이 김성애와 불륜하는 것에 깊은 분노를 느껴 화병으로 인해 출산 중에 사망했거나 분노로 인해 간호사들을 전부 밖으로 내쫓고 혼자서 출산했다가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김정숙이 죽고 김성애와 그 일가가 득세했던 1950년대에는 김정숙은 김일성에게 잊혀진 존재였으나 1970년대에 김정일에 의해 김성애 일가가 몰락한 후에는 김일성이 김정숙을 그리워했다는 얘기가 있다.


2.9. 김성애[편집]


1948년경 김일성의 비서로 만나기 시작하여 1949년 김정숙이 사망한 이후에는 김일성의 후처가 되어 김경진, 김평일, 김영일을 낳으며 승승장구했지만 김일성에게 총애를 받고 있다는 자만심과 자신의 친아들 김평일이 김일성 다음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자신과 친정가족에게 요직들을 두루 꽂아준 것도 모자라 김일성에게 "당신 가시어머니(장모)한테 이런 것도 못 해주나요?" 라며 구박을 한 것이 포인트가 되어 김일성의 눈 밖에 났고 그 틈을 탄 김정일에게 철저히 몰락했다.


2.10. 김형직[편집]


김일성과 김형직의 부자로서의 개인적인 관계는 북한의 공식 선전 말고는 알 수 없는 상황이나, 골수 반공주의자인데다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된 이력이 있는 김형직이 김일성 입장에서는 달가울 수가 없다. 북한 측에서는 그걸 숨기고 "민족의 어버이" "인민의 스승님" 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2.11. 김형권[편집]


김일성의 숙부. 김형직과는 달리[2] 독립운동을 했다가 옥사한 이력이 워낙 분명하기에 김일성은 김형권을 마음놓고 존경하고 우상화할 수 있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김형권군도 만들었다.


2.12. 김보현, 리보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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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이 14살 때 아버지 김형직을 잃자 김일성을 키워 준 조부모였으므로 김일성은 김보현과 리보익을 매우 각별히 여겼으며 해방 시점에는 이미 은퇴한 할아버지 김보현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농업성 예하 고급특별고문역보좌관이라는 명예직을 주었다. 손자며느리 김정숙의 죽음과 6.25 전쟁, 증손자 김정일, 김평일까지 보고 갔다.


2.13. 동생 김철주, 김영주[편집]


김철주는 항일 결사운동을 하다 전사했고, 김영주는 김일성의 정치적 동지로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김일성의 후계를 놓고 조카인 김정일, 김평일과 다툼이 있었지만 후계자가 김평일도, 김영주 본인도 아닌 김정일로 확정된 이후에는 순순히 인정하고 조용히 살았다. 이 즈음 김일성에 좌천을 받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으며 김정일의 권력이 확고해진 이후엔 평양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김정일에 의해 외교관 신분으로 국외로 거의 추방되다시피 한 김평일, 김영일, 김정은에게 독극물로 암살당한 김정남의 사례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잠시 지방으로 좌천된 것 외에는 별다른 불이익 없이 천수를 누린 것으로 보아 김일성과 김영주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북한 내[편집]



3.1. 박헌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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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엔 독립 동지, 해방 정국에는 공산진영을 대표하는 동료였지만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는 내부적 이념 차이가 있으며 그 이전에 김일성은 절대권력을 원했기 때문에 정통 공산주의자인 박헌영이 달가울 수 없었다.

결국 김일성은 6.25 전쟁에서 남한 수복을 못하고 휴전한 것을 박헌영의 책임으로 몰아 숙청했다. 오늘날 북한 내에서 박헌영주의는 소련에서 트로츠키주의자가 받는 탄압만큼이나 심하며 북한에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물론이고 박헌영주의, 트로츠키주의 모두 불법이다.


3.2. 오진우[편집]


김일성과는 항일 독립운동 당시 전우였으며 때문에 각별한 사이였다. 해방 이후에도 일관적으로 김일성을 지지했기에 오진우는 김일성-김정일 시기 내내 호의호식했고 오진우의 아들 오일정 역시 현재는 요직에 있다.


4. 남한[편집]



4.1. 이승만[편집]


김일성은 무장투쟁 독립운동가였고, 친중 친소 공산주의자여서 외교독립론자이자 친미 제1세계주의자인 이승만과는 처음부터 상극이었다. 6. 25 때만 해도 이승만을 죽이고자 애를 썼고 휴전 후에도 이승만을 상대로 한 저질적인 선동을 멈추지 않았다.


4.2. 박정희[편집]


김일성은 박정희를 암살할 목적으로 1.21 사태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을 무장공비를 남한으로 보냈을 정도로 박정희 역시 증오했다. 허나 박정희 집권 초창기에는 그랬으나 박정희가 3선 개헌도 하면서 자신과 같은 독재자의 길을 걷자 적대적 공생으로 방향성을 바꿔 겉으로만 적대하는 척 하고 둘끼리는 이후락을 북한으로 보내 7.4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킬 정도로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4.3. 김영삼[편집]


김영삼 집권 초기에는 제8차 남북 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한 측 박영수 대표단장이 남한 측 통일부 송영대 차관에게 서울불바다 발언을 하여 남북관계가 잠시 험악해졌지만 지미 카터의 중재 하에 극적으로 김영삼과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날짜까지 잡아 둔 상태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묘향산 특각에서 정상회담을 준비하다 심근경색으로 급사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김일성이 그 고령에도 몸을 무리하게 이끌며 묘향산 특각과 철도 등등 김영삼이 거쳐갈 곳을 일일이 점검한 것으로 보아 죽기 직전까지 김영삼은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외국[편집]



5.1. 마오쩌둥[편집]


김일성은 만주파였기에 마오쩌둥과의 관계가 각별했으며 6. 25 전쟁 초기엔 물자 지원 외에 병력 지원에는 소극적이었던 소련과는 달리 중공군을 대폭 지원해주면서 김일성을 도왔다. 중소결렬로 소련과의 사이가 틀어졌음에도 김일성과는 꾸준히 친밀한 관계를 과시했다. 허나 김일성을 절대권력을 획득한 후 김정일에게 후계를 세습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여겼다. 허나 김정일이 본격적으로 후계자가 된 건 1974년 즈음으로, 이 때는 마오쩌둥이 죽기 직전이었으므로 그 점에 관해서는 특별히 사이가 틀어질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5.2. 이오시프 스탈린[편집]


김일성은 처음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눈에 띄어 1948년 36살이라는 그 어린 나이에 북한 수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에 대해서는 갈등이 많았으며 김일성은 전쟁에서 북한이 38선 이남까지 완전히 성공시킬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스탈린은 괜히 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과 범자본주의 진영, 제1세계 진영이 합세하여 세계 3차 대전으로 확장될까봐 걱정이었고 2차대전이 끝난 지 5년만에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가 소련 국민들의 민심을 잃어버릴까봐[3] 걱정이어서 전쟁 개시를 48차례나 반대했으나 끝내 전쟁을 승인한 것도 모자라 북한군에 전차와 미사일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6.25 휴전(1953년 7월 27일) 전인 1953년 3월 5일 사망했기에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더 이상의 갈등은 없었다.


5.3. 쇼와 덴노[편집]


북한, 대한민국,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소련을 막론하고 나라와 진영을 막론하고 공공의 적이었다. 쇼와 덴노 사후 조선중앙통신이 쇼와를 '전범'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다케시타 총리의 담화에 대해서도 피해국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도전이자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5.4. 지미 카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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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미국 대통령 중 김일성과 그나마 말꼬가 트였던 대통령. 퇴임 후에 지속적으로 방북해서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고 북한의 개방화, 북한과의 대화를 꾸준히 시도했다. 1994년 6월 방북으로 남북이 분단된 지 44년 만에 처음으로 남한과의 남북정상회담을 확정시키는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정상회담 날짜가 1994년 7월 25일로 정해진 상태에서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 급성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고, 김영삼과 지미 카터와의 관계 또한 미완성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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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욱이 김평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급부상하던 이 시기에도 김정일과 김평일이 후계자 순위권에 있었지, 김영일은 후보군조차 든 적 없었는데도 동복형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자신이 왕인 양 행사하는 김영일의 모습이 아무리 김일성이라도 안 좋게 보였을 것이다.[2] 상술하듯 김형직은 독립운동을 한 사실만큼은 인정되지만 독립운동 이외의 이력은 철저하게 왜곡되어 우상화에 써먹고 있다. [3] 2차대전 때 가장 많은 사상자가 소련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