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네이션즈/역사적 배경/건물/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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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즈텍
2. 이집트
3. 몽골
4. 마오리
5. 체로키
6. 인도
7. 미국
8. 러시아
9. 에티오피아
10. 필리핀



1. 아즈텍[편집]


아즈텍 제국은 테노치티트란, 틀라코판, 텍스코코로 이루어진 3개 도시의 연맹이 지배했습니다. 이 연맹은 대립 관계였던 아스카포살코를 몰아내기 위해 1428년에 결성되었습니다. 그 후 100년 동안 이 연맹은 테노치티틀란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멕시코 중부의 많은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아즈텍 제국은 속국 영토를 직접 정령하지는 않았습니다. 황제들은 정복한 도시 국가의 국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물을 확보하는 것이 더 편하고 비용 효율적인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즈텍 제국의 영토는 광대했지만, 틀락스칼라를 비롯한 인근 국가를 무력으로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1521년 유럽인들의 유입으로 신기술이 도입되고 질병이 퍼질 당시,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즈텍을 정복할 때 틀라스칼라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아즈텍인들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으며, 아스텍의 언어인 나와툴어는 아직까지도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 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 이집트[편집]


이집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 중 하나입니다. 그리스인들이 문자를 발명할 당시 이집트의 기자 피라미드 지구는 이미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이집트는 하트셉수트, 투트모세 3세, 람세스 2세 등 강력한 파라오의 통치 아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네페르티티 왕비는 이집트의 종교에 실신론이라는 획기적인 이념을 도입했습니다. 파라오들은 아시리아, 히타이트 및 바빌로니아의 왕들과 협력하여 수백 년 동안 힘의 균형을 유지해 왔으나, 청동기 시대가 끝나면서 이들의 왕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후 이집트는 여러 원주민들과 외부 세력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로마, 오스만 제국, 영국을 비롯하여 카이로를 점령한 파티마 왕조와 맘루크 술탄국 등이 이집트를 지배했습니다. 현대의 이집트 공화국은 1953년에 수립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지역 강국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3. 몽골[편집]


몽골족은 세계에서 가장 광활한 제국을 건설한 유목 민족입니다. 칭기스칸은 정복에 앞서 각 지역 세력을 통합했습니다. 유목민들은 국가를 이루거나 부족 간에 협력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통합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몽골족을 통합하여 강력한 힘을 갖춘 칭기스칸은 적국 정복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칭기스칸은 항복을 요구한 후 저항하는 세력은 몰살시켰습니다.

그가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병력 지휘 및 통치 방식에 새로운 문화를 통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인 기술자들로부터 공성 무기 생산 기술을 전수받은 것도 한 가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정복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오랜 세월 세계 역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유럽과 아시아는 '팍스 몽골리카' 하에 문물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4. 마오리[편집]


마오리족은 12세기경 뉴질랜드에 정착한 폴리네이아계 민족입니다. 마오리족 전통 사회의 중심이 되는 개념은 신분과 상호주의를 의미하는 '마나'와 '우투'였습니다. 이로 인해 모욕과 공격에 복수하고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주기적으로 발발했습니다. 하지만 마오리족은 오랫동안 요새화되지 않는 거주지에서 평화로운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1800년경부터 영국인 선교사와 상인, 그리고 포경선이 뉴질랜드로 진출 하면서부터 마오리족은 머스켓 전쟁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부족 간 내전에서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오리족의 족장들은 1835년에 함께 연합하여 독립을 표명하고 자신들이 뉴질랜드의 정당한 통치자임을 선언했습니다.

5년 후 족장들은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에 통치권을 양도하고 영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마오리족은 전장과 법정에서 토지권을 되찾기 위해 싸워 왔습니다.



5. 체로키[편집]


체로키족은 미국에서 가장 큰 원주민 부족 중 하나로, 미국 남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이었습니다. 체로키족은 농업 중심의 생활을 영위했으며 민주적 제도와 모계 중심사회라는 지역적 유산을 지켜 나갔습니다.

유럽인의 이주와 함께 끔찍한 질병이 퍼졌지만 체로키족은 이들의 무기와 무역품의 가치를 인정하고 영국과 우호적인 동맹을 유지했습니다. 미국 혁명 중에는 13개의 식민지와 맞서 싸웠으며 그로 인해 많은 영토를 잃었습니다. 그 후 체로키족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눈물의 길'의 걸어 오클라호마 주로 이주해야 했으며 현재도 체로키족 대부분은 오클라호마 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강제 이주를 피할 수 있었던 산악 지역의 소규모 체로키족이 지금의 동부 체로키족 연합니다.

체로키족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체로키 문자입니다. 이를 발명한 문맹이었던 은세공, 세쿼야는 체로키족의 문화적 영웅으로 숭상되고 있습니다.



6. 인도[편집]


오늘날 인도로 알려진 지역은 근대에 들어서도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인도에는 다양한 왕국, 도시 국가 및 정치 조직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 중 가장 강대했던 것이 무굴 제국입니다. 무굴 제국의 통치자들은 무슬림이었지만 악바르 황제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힌두교도들에게 관용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전책으로 인해 무굴국은 100년 동안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근본이념과의 달리 팽창주의를 내세우며 힌두교도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아우랑제브가 즉위한 후 무굴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858년부터 1947년까지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은 인도는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인디라 간디(마하트마 간디와는 관련이 없음)는 독립 국가가 된 인도의 첫 여성 수상으로 선출되어 1966년부터 11년 동안 거대한 다문화 국가인 인도를 이끌었습니다.



7. 미국[편집]


미합중국은 식민지 시대를 자력으로 종식한 최초의 국가로,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7년 후에 독립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다른 국가에 간섭하지 말자는 정치 운동이 빈번했지만 미국은 독립 국가가 된 직후부터 해외에 군 병력을 파병해 왔습니다.

1801년에 이미 바르바리 해적단을 공격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미국 함대를 보냈으며, 이때 미 해군의 군가인 '트리폴리 해안으로'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약 20년 후, 미 대륙 전체를 유럽 열강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먼로 선언을 표명했습니다. 1800년대 후반에는 미국 남북전쟁과 원주민 정복으로 인해 해외 파병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은 다시 해외로 눈을 돌려 스페인 식민지였던 괌, 푸에르토리코 및 필리핀을 점령했습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에는 뒤늦게 참전했으나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8. 러시아[편집]


15세기에 몽골 킵차크 한국을 정복한 후 러시아는 유럽의 변두리 취급을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 군을 근대화하고 서유럽의 과학과 문화를 새로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입하여 큰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카타리나 여제 시대까지 유지되어 제정 러시아는 황금기를 누렸습니다. 1812년, 러시아는 혹독한 겨울 날씨와 모스크바 화재로 나폴레옹 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에 러시아군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 및 영국과의 연합군에 참여했습니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합인 소련이 탄생했는데, 이 연합에는 러시아를 비롯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55년에 소련과 여러 사회주의 국가는 미국 주도의 nato에 정치적, 이념적으로 대항하여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9. 에티오피아[편집]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에 부대를 파병하여 1936년 합병에 성공했습니다. 이 합병으로 당시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는 망명을 떠났으며 소련을 제외한 국제연맹의 거의 모든 회원국이 합병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통치하는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제국이 아프리카에 수립되었습니다. 이 정권은 식민지 확장을 준비하기 위해 에티오피아 인프라 프로젝트에 큰 투자를 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패하면서 1941년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곧 셀라시에가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셀라시에는 1955년에 새 헌법을 확립하고 아디스아바바 대학을 개교함으로써 국가 근대화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또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동일기구의 창설 회원국이 되어 다른 아프리카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에티오피아는 마침내 국제연합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미국 제7보병사단과 나란히 싸웠으며 훈련 수준이 높고 무공 훈장을 받은 칵뉴 부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10. 필리핀[편집]


필리핀 군도의 거주민들은 스페인이 1500년대에 이 섬들을 식민화 할 때까지 유라시아 역사에서 지엽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1815년까지 이 외딴 전초 기지는 중국의 부를 신세계에 가져다 준 마닐라 범선이 출항하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몇 세기에 걸친 실정은 1896년 필리핀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5년간의 충돌 끝에 미국에서 지배권을 장악해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정부를 꾸렸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한 후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필리핀 군도를 침략했습니다. 미국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몇 달 간의 저항 끝에 퇴각했어야 했지만 자신이 언급한 '돌라오겠다'는 유명한 약속을 전쟁이 끝날 무렵 지켰습니다. 결국 필리핀은 1946년에 독립했습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대통령들은 군 독재자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막으로 지원했습니다. 현대의 필리핀의 외교 정책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와의 평화로운 협력에 기반을 두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