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네이션즈/역사적 배경/건물/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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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벨 1
1.1. 크노소스
1.2. 바빌론
1.3. 우르
1.4. 아슈켈론
1.5. 멤피스
2. 레벨 2
2.1. 코린트
2.2. 시돈
2.3. 트로이
2.4. 마살리아
2.5. 키레네
3. 레벨 3
3.1. 오스티아
3.2. 아테네
3.3. 카르타고
3.4. 난징
3.5. 탐랄립티
4. 레벨 4
4.1. 뤼베크
4.2. 취안저우
4.3. 킬와
4.4. 콘스탄티노플
4.5. 순다 켈라파
5. 레벨 5
5.1. 아바나
5.2. 암스테르담
5.3. 무스카트
5.4. 마닐라
5.5. 고아
6. 레벨 6
6.1. 광저우
6.2. 나가사키
6.3. 라로셸
6.4. 잔지바르
6.5. 캘커타
7. 레벨 7
7.1. 런던
7.2. 르아브르
7.3. 볼티모어
7.4. 랑군
7.5. 알렉산드리아
8. 레벨 8
8.1. 킬
8.2. 구레
8.3. 샌프란시스코
8.4. 셰르부르
8.5. 부에노스아이레스
9. 레벨 9
9.1. 할리팩스
9.2. 맬버른
9.3. 인천
9.4. 카라치
9.5. 리우데자네이루
10. 레벨 10
10.1. 뭄바이
10.2. 헬싱키
10.3. 노보로시크
10.4. 가오슝
10.5. 포트 안토니오
11. 레벨 11
11.1. 뉴옥
11.2. 콜롬보 항구
11.3. 샹하이
11.4. 부산
11.5. 두브로브니크
12. 레벨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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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레벨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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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벨 1[편집]



1.1. 크노소스[편집]


크레타 섬에서 오늘날의 이라클리온 남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노소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알려졌습니다. 크노소스의 고대 궁전은 청동기 시대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신화에서 크노소스는 테세우스가 반인반수인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린 미궁의 소재지였고 이카루스가 운명적인 비행을 시작한 장소였습니다. 20세기 초반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 경이 이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여 복원했습니다. 그는 유적지에서 선형 문자 A와 선형 문자 B를 발견했습니다. 선형 문자 A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으며, 선형 문자 B는 초기 그리스어의 형태로 드러났습니다. 왕궁의 폐허에서는 유명한 미노스의 황소가 뛰는 프레스코화를 포함하여 아름다운 미술품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1.2. 바빌론[편집]


전성기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했던 도시, 바빌론은 오늘날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변 양쪽에 세워졌습니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 있는 곳으로, 영향력 있는 통치자 함무라비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수도였습니다. 또한 바빌론에는 거대한 지구라트 에테메난키가 있었는데 이는 마르두크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성서의 바벨 탑 이야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바빌론은 정치적으로 영고성쇠를 거듭했지만 수천 년 동안 고대 근동에서 과학과 문학, 문화의 중심으로 명맥을 이었습니다.



1.3. 우르[편집]


우르는 인류가 건설한 최초의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우르의 위치는 페르시아 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대에는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르는 페르시아 만에 바로 연결되었고 항구는 수메르 도시 국가들이 바다로 진출하는 주요 관문이 되었습니다. 우르의 문화적 중요성은 도시가 그만큼 번영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르의 왕기는 가장 잘 보존된 수메르 미술 중 하나이며, 우르의 왕실 게임은 지금껏 발견된 가장 오래된 보드 게임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2100년경 우르남무 왕이 최초의 법전을 공표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는 보다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 앞선 것이었습니다. 우르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조상으로 여겨지는 아브라함의 출생지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1.4. 아슈켈론[편집]


번성했던 아슈켈론 항은 오늘날 이스라엘 지중해 해안의 전략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슈켈론은 가나안인과 필리스티아인이 살았던 요새화된 대도시 중 하나였지만, 기원전 604년 네부카드네자로 왕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도시는 곧 페니키아인에 의해 재건되어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무슬림 등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슈켈론은 십자군 전쟁 동안 격렬한 전투를 겪었고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살라딘이 요새를 무너뜨리면 사자왕 리처드가 새로운 요새를 짓고 살라딘이 다시 그 요새를 무너뜨리는 식이었습니다. 결국, 1270년 이슈켈론은 맘루크 왕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1.5. 멤피스[편집]


나일 강 기슭에 위치한 멤피스는 기원전 2700~2200년경 고왕국 시대 이집트의 수도였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멤피스는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를 통합하여 통일 이집트 왕국을 이룬 파라오 메네스가 설립했다고 합니다. 멤피스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건축가이자 기술자이며 가장 오래된 의학 저술을 남긴 의사인 임호테프입니다. 그의 의술은 미신적인 처방이 아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치료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임호테프는 사카라의 멤피스 네크로폴리스에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2. 레벨 2[편집]



2.1. 코린트[편집]


고대시대 내내 그리스의 중요한 도시 국가였던 코린트는 기원전 431~404년 펠레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 제국에 맞서 스파르타에 해군 전력을 지원하며 함께 싸웠습니다. 투키디네스에 따르면 코린트인 들은 300년 동안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에서 전함으로 사용한 3단 노선을 개발했습니다. 코린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테베와는 달리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적이 없었고 어쩌면 그 때문에 고전기에 이들 도시 국가처럼 급격한 쇠락을 겪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코린트는 결국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직접 지배가 시작되는 시기인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장군 루키우스 뭄미우스에게 무너졌습니다.



2.2. 시돈[편집]




2.3. 트로이[편집]


전설 속 트로이는 막대한 부와 힘을 가졌지만 아킬레스의 분노와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무너졌습니다. 로마인들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묘사된 대로, 영웅 아이네아스를 통해서 스스로를 트로이의 후예로 여겼습니다. 1870년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은 서부 터키에서 오랫동안 신화라고만 믿어졌던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트로이를 그리스어로 '일리오스'인 '윌루사'라 칭하며 유적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히타이트 문자가 발견되었습니다. 여러 차례 파괴된 거대한 방벽이 실재했다는 증거도 발굴 작업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미케네 그리스의 무자비한 침공을 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묘사된 10년 공성은 아직도 허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2.4. 마살리아[편집]


지금은 마르세이유로 알려진 남부 프랑스의 고대 도시 마살리아는 서부 터키의 이오니아 지역 그리스인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마살리아는 그리스의 문화가 남아 있는, 갈리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거점이 되었습니다. 마살리아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결정적인 분쟁인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했고, 부와 소규모 영토, 로마에 인접한 환경 등 여러 불리한 요소에도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기원전 49년 줄리어스 시저와 대립했던 폼페이우스 대제를 지원하면서 종말을 고했습니다. 시저의 군단이 마살리아를 정복했고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마살리아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탐험가 퓌테아스였습니다. 그는 영국을 일주하고 아이슬란드까지 발견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2.5. 키레네[편집]


'아프리카의 아테네'라고 알려진 키레네는 기원전 630년에 리비아 해안의 그리스 식민지로 건립되었습니다. 키레네는 지중해에서 주요 실피움 수출지로서 부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실피움은 현대 학자들이 끝내 밝혀내지 못한 진귀하고 값비싼 약용 허브였습니다. 키레네는 로마의 속주 키레나이카의 수도로,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나 실피움의 과수학 및 멸종 등의 이유로 2세기에 쇠퇴하게 됩니다. 키레네는 지구 둘레를 최초로 정확하게 계산한 지리학자이자 천문학자, 수학자였던 에라스토스테네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키레네 학파라 불리는 쾌락주의 철학의 영향력 있는 유파를 창시한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티포스 등 뛰어난 사상가들의 고향이었습니다. 그의 딸인 아레테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집안의 전통을 따라 수년 동안 유파를 이끌었습니다.




3. 레벨 3[편집]



3.1. 오스티아[편집]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의 역사는 로마의 역사를 반영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세워졌으나, 로마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라틴 역사에 쓰인 것보다 훨씬 오래 전에 거주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초기 오스티아는 중요한 해군 보급항이자 소금 생산지였습니다. 티베르강의 어귀, 전략적 방어 거점에 위치하여 로마의 지중해 출구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 제국의 전성기에는 미봉책으로서, 로마 군중을 먹여 살린 대량의 곡식 수송을 다루는 항구로 번영했습니다. 이제까지 발견된 유럽의 가장 오래된 시너고그인 오스티아의 시너고그도 이즈음에 건설되었습니다. 오스티아는 서로마 제국이 약해지면서 중세 시대 초기에 완전히 폐쇄되었습니다.



3.2. 아테네[편집]


아테네는 서구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도시 국가입니다.아테네 귀족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08년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자유민인 남자 지주로 참정권이 제한되었고 노예나 여자는 의회에 설 수 없었습니다.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는 아테네는 반복되는 페르시아의 침공을 격퇴했고, 기원전 480년에는 결정적인 살라미스 해상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로 아테네는 권력과 부, 명성을 거머쥐게 됩니다. 이후 아테네는 철학과 학술의 황금기를 겪습니다. 파르테논이 세워졌고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네스는 역사와 정치학을 창시했으며 위대한 극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는 불멸의 희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팽창을 두려워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고 27년 동안 전례 없는 잔혹했던 전쟁에 아테네는 결국 무릎을 꿇었습니다.



3.3. 카르타고[편집]


지금의 투니스 인근에 있던 카르타고는 원래 페니키아의 도시 티레의 식민지였으나 기원전 650년경 독립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남부 스페인에 이르는 거대한 식민지 제국을 지배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서부 지중해에서 맹위에 떨쳤던 로마와의 갈등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기원전 218년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명장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는 한겨울 알프스를 넘는 상상할 수 없는 도박을 감행했습니다. 한니발의 병력에는 전투 코끼리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많은 코끼리가 산속에서 죽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의 부대를 연속해서 대파했는데, 특히 칸나이 전투에서는 이중 포위로 혁혁한 전과를 세웠습니다. 한니발의 군대는 모종의 이유로 로마의 관문에서 후퇴한 후 수년 동안 소모전을 치르다 쇠퇴하고 말았습니다. 한니발은 결국 카르타고 인근에서 로마 장군 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합니다. 그로 인해 카르타고의 기세가 꺾이고 명맥을 유지하다 기원전 146년 훨씬 더 강력해진 로마에게 무너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 세기 후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의 옛 숙적이 있던 자리에 도시를 건설했고 이 새로운 카르타고는 로마 아프리카 문화와 경제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3.4. 난징[편집]


양쯔 강 삼각주에 위치한 난징은 수천 년 동안 중국과 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여러 이름이 쓰이다 14세기 후반 명 왕조 때 난징(남쪽 수도)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난징은 명나라의 수도였으며 태평천하를 비롯한 중국 역사를 거치면서 몇몇 작은 국가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동중국해의 내륙 쪽에 위치한 난징은 주요 무역항입니다. 영락제 재임 기간에 대규모 원정 함대가 구축되어 난징의 부두를 떠났습니다. 정화제독이 이끈 이 함선들은 일곱 번의 '보물탐사' 원정에서 굉장히 먼 거리를 항해했습니다. 난징은 또한 영곡탑, 석두성 등 수많은 건축물과 자연경관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3.5. 탐랄립티[편집]


인도 동부에 위치한 탐랄립티는 고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교역의 관문이었습니다. 탐랄립티의 거주 흔적은 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탐랄립티는 이전에 강의 어귀였으나 유사가 쌓여 지금은 내륙에 위치합니다. 독립 왕국의 영토가 되기도 했지만, 마우리아 왕조,굽타 왕조 등 거대한 왕국의 지배를 자주 받았습니다. 서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고전 '서유기'를 쓴 중국의 고승 현장은 탐랄립티를 방문하여 번영하는 항구라고 묘사했습니다. 탐랄립티는 독실한 불교도인 마우리아의 아소카 왕이 스리랑카로 보낸 성공적인 불교 사절단의 출발지이기도 했습니다. 사절단은 붓다가 그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신성한 나무로 알려진 보리수의 묘목을 가져갔습니다



4. 레벨 4[편집]



4.1. 뤼베크[편집]


독일 북부 발트 해에 위치한 뤼베크는 한동안 북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뤼베크는 14세기, 지역 전체에서 교역을 지배한 상업 도시와 길드의 연합체인 한자 동맹의 '여왕'으로서 영향력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한자 동맹은 서쪽으로 영국과 플랑드르, 북쪽으로 노르웨이, 동쪽으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조합을 운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쪽의 국가들은 곡물, 목재, 꿀, 왁스 등 원자재를 생산했고 서쪽 국가들은 옷감을 비롯한 여러 상품들을 제조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구리와 철을, 노르웨이에서는 고래 기름을 생산했고 해안 전역에서는 어류를 공급했습니다. 중세 도시 뤼베크는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지만 오늘날까지 상당 부분 보존되었습니다.



4.2. 취안저우[편집]


취안저우는 송과 원 왕조 시대에 가장 큰 항구이자, 타이완 해협을 마주하는 해양 실크 로드의 주요 중계항이었습니다. 수백 년 간 이어져온 상업 덕분에 다양한 문화가 정착했으며 아랍과 페르시아의 상인들이 거주했습니다. 베네치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취안저우를 방문했으며, 이곳에서 몽골 공주가 혼인을 위해 페르시아로 항해를 떠날 때 호위를 맡기도 했습니다. 취안저우는 실패로 돌아간 쿠빌라이 칸의 마자파히트 왕국 침략의 출발점이 되는 등, 군사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명 왕조 시대에 외교 정책이 대외 지향에서 고립주의 정책으로 점차 변화하자 취안저우의 입지도 낮아졌습니다. 대외 무역은 크게 감소했고 중국에 온 유럽 상인들은 대신 광저우를 찾았습니다.



4.3. 킬와[편집]


수백 년 동안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에는 수많은 상업 도시 국가가 생겨났습니다. 그중 가장 큰 도시는 오늘날 탄자니아의 킬와 섬 왕국이었습니다. 이 해안 도시들은 대 잠바브웨 등 아프리카의 내륙 왕국과 아라비아,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 등 인도양 주위의 부유한 국가를 연결했습니다. 이들은 노예를 포함하여 상아, 향신료, 기타 상품을 수출하여 부를 쌓았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포르투갈인 들은 인도양 무역로를 차지하려 했으며, 무방비 상태인 아프리카 도시 국가를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시는 결국 재건되어 다음 수 세기 동안 과거의 영화를 일부 되찾았지만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했습니다. 킬와 섬의 거대 석조 유적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4.4. 콘스탄티노플[편집]


'도시의 여왕'이라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은 기원후 330년 그리스의 도시 비잔티움이 있던 곳에 세워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로마'라는 의미로 노바 로마라는 세례명을 내렸으나, 건설이 끝나기도 전부터 도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뜻하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곧 그곳은 후일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불린 동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서로마제국의 몰락에도 거의 천 년 가까이 지속했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전략적 위치를 점유한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이었습니다. 두께가 수 미터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이중벽이 도시의 막대한 부를 보호했고 수중에 거대한 쇠사슬을 걸어 해군 공습으로부터 골든 혼 항구를 지켰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공격을 견뎠으나, 1204년 베네치아가 이끄는 4차 십자군에게 잔혹하게 약탈당했습니다. 이중벽은 1453년 오스만 군대의 강력한 포격으로 무너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1928년 현대 터키 공화국 하에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명 되었습니다.



4.5. 순다 켈라파[편집]


순다 켈라파는 인도네시아 순다 왕국의 주요 항구로, 오늘날 자카르타시 해안의 수마트라 섬에 있습니다. 순다 켈라파가 번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후추 교역으로, 순다는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후추의 생산지로 알려졌습니다. 1522년 포르투갈은 항구 방어와 무역을 자유롭게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인접한 드막 왕국은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도시를 침략하여 정복했고 '승리의 도시'를 뜻하는 자카르타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1619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군대가 자카르타를 무너뜨리고 바타비아라는 이름으로 재건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거점이었던 바타비아는 2차 세계대전 후 자카르타라는 이름으로 오늘 날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5. 레벨 5[편집]



5.1. 아바나[편집]




5.2. 암스테르담[편집]


유럽의 많은 대도시와는 달리 암스테르담의 역사는 불과 800년에 불과합니다. 암스테르담은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중심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네덜란드인 연합 주가 16세기 후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때입니다. 이 시기에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여러 가지 주요한 금융 혁신을 이끌었고,1602년에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창립되었습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그림, 특히 초상화의 황금시대였습니다. 렘브란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프란스 할스와 같은 거장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또한 연합주는 유럽에서 가장 관대한 지역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종교 개혁의 결과로 대륙 전체가 혼란스럽던 시기에 암스테르담은 종교 탄압을 피해 도망친 모든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포용했습니다.



5.3. 무스카트[편집]


오만의 무스카트 항구는 페르시아 만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는 곳으로, 거의 150년 동안 포르투갈 무역 제국의 핵심적인 연결고리였습니다. 포르투갈은 특별히 인구가 많거나 부유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도로 향하는 해상 무역을 통제할 방법을 고심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상인들에 대한 유일하고 분명한 이점을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포르투갈의 해상 및 군사 기술적 우위였습니다. 포르투갈 함대는 바다에서 아프리카, 아라비아, 페르시아의 해안을 포격하고 지상에서는 포르투갈 병사들이 무스카트, 호르무즈, 말라카 등 여러 전략적 항구에 '팩토리'라 불리는 고도로 요새화된 기지를 건설했습니다. 포르투갈 함대는 이러한 요새를 통해 중요 해협을 봉쇄하고 효과적으로 인도양의 무역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튀르크와 페르시아의 반복적인 공격으로 무스카트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고 1650년에 일어난 지역 반란으로 포르투갈의 지배는 결국 끝나게 됩니다.



5.4. 마닐라[편집]




5.5. 고아[편집]


인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한 고아는 인도 아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 중 하나입니다. 1510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제독이 고아를 정복하여 그 후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시기, 고아는 '동방의 리스본'이라 불렸습니다. 고아의 총독은 중국의 중요 교역항인 마카오는 물론 아프리카에서 동인도까지 모든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관리했습니다. 주로 해군과 군사 목적을 위해 운영되었던 포르투갈의 다른 '공장'들과는 달리 고아는 자체적으로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17세기 초반 네덜란드가 인도에 진출하면서 고아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네덜란드의 진출과 함께 포르투갈의 동부 제국은 대부분 몰락하게 되고 포르투갈은 식민지 지배력을 브라질에 집중하게 됩니다. 고아는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지배권을 유지한 유일한 영토였고,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에도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포르투갈은 1961년 인도 군대가 고아를 침략한 후에야 영토를 포기했고 인도 아대륙의 식민지 시대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6. 레벨 6[편집]



6.1. 광저우[편집]




6.2. 나가사키[편집]




6.3. 라로셸[편집]




6.4. 잔지바르[편집]




6.5. 캘커타[편집]





7. 레벨 7[편집]



7.1. 런던[편집]


런던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런던은 반란 세력의 부티카 여왕에게 무너진 후 브리타니아 로마 주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콘터', 즉 한자 동맹의 조합이 있었지만 영국과 마찬가지로 16세기까지 변방으로 여겨졌습니다. 튜더 왕조 시기에 영국은 조선, 탐사, 식민지 건설에 집중하여 부상하게 됩니다. 영국의 강력한 해군력은 부분적으로 런던의 조선소에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1666년 비극적인 대화재가 도시를 집어삼켰고 대부분의 인구가 노숙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이 오랜 통치를 시작할 무렵에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한편 런던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에서 묘사된 대로, 극심한 빈곤이 존재하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산업화와 철도는 런던의 경관을 변화시켰습니다. 철도는 도시 전역은 물론 시외 지역까지 손쉬운 운송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1863년에는 세계 최초의 지하철인 런던 지하철이 등장했습니다. 또한, 가스 가로등이 발명되고 이후 전기 가로등이 등장하면서 역사상 거의 최초로 안전한 야간 통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현대 런던은 금융과 문화의 세계 수도입니다. 한 예로, 재건된 글로브 극장에서는 1997년부터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상연되고 있습니다.



7.2. 르아브르[편집]


센강 어귀의 '항구'를 의미하는 르아브르는 1517년에 세워졌습니다. 르아브르는 방벽과 성채에 둘러싸여 18세기 내내 번영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인접한 환경 때문에 많은 군사 작전을 겪어야 했습니다. 7년 전쟁 때는 영국 침공을 위한 집결 지점이었습니다. 영국 침공은 왕립 해군이 연합 함대를 격퇴하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동안 르아브르는 다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전쟁 후에는 빠르게 현대화되었고 곧 커피와 면직물을 전문으로 수입했습니다. 부유하고 호화로운 르아브르는 19세기 후반 파리 상류층에 게 해안 휴양지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피해는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지만 파리의 주요 항구로서 어느 정도 위상을 회복했습니다.



7.3. 볼티모어[편집]


메릴랜드 식민지는 1632년 유럽에서 종교적 탄압을 피해 넘어온 가톨릭교도의 피난처로 건립되었습니다. 도시의 이름은 개척자인 조지 갤버트 볼티모어 경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볼티모어는 1700~1800년대 상당 기간 동안 북아메리카의 최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볼티모어는 블루칼라 산업을 이끌었던 전성기 시절 국가의 철도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주요 항구이자 철강 생산지, 조선 산업의 중심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남북 전쟁 동안 메릴랜드는 북부군 에 남았지만 볼티모어의 시민들은 분열되었습니다. 남북 전쟁 이후 볼티모어는 더욱 번영했고 1904년 대화재로 수많은 건물이 무너진 후에도 계속 번창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볼티모어는 '리버티 선' 이라고 알려진 상징적인 수송선의 두 번째로 큰 생산지였습니다. 오늘날 볼티모어는 예술과 음악 그리고 빅휴즈 게임즈가 있는 비디오 게임 산업을 중심으로 창의적인 문화가 꽃피우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7.4. 랑군[편집]


랑군은 미얀마에서 가장 신성한 불교 유적지인 쉐다곤 파고다 주위에 세워진 작은 정착지로, 당시에는 다곤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초기에는 순례지였으나 점차 교역의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영국이 버마를 정복한 시기에는 양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번영한 항구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1880년대에는 영어로 '랑군'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영국령 버마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랑군은 주요 상업 및 문화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1878년 영국은 미얀마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 교육 기관인 랑군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랑군은 랑군 대학 학생들의 주도로 버마 독립주의 운동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2006년 독립 미얀마가 새로 건설한 네피도 시로 정부를 이전할 때까지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1989년 이후에는 올바른 버마 명칭인 양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7.5. 알렉산드리아[편집]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건설한 많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고대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알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의 일부였지만 지중해에서 문화와 학술의 중심지로 로마를 능가하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많은 서적을 소장했으나 도시가 파괴될 때 누군가의 소행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수 세기 동안 부유한 무역항으로 남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동쪽 64km 거리에 위치한 로제타로 거점을 옮긴 후 쇠퇴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19세기 후반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고 이집트면 교역이 부상하자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882년 영국은 폭격을 감행하여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1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 지중해에서 연합군의 해군기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오늘날의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국가의 일부로, 아프리카의 최대 도시 중 하나입니다.



8. 레벨 8[편집]



8.1. 킬[편집]


독일의 발트 해 연안에 위치한 킬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주도입니다. 킬은 1242년 세워졌고 수십 년 후 한자 동맹에 가입했습니다. 오랫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던 킬은 1777년 덴마크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독일 통일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요 움직임 중 하나가 1866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전쟁이었으며 그 결과 킬과 나머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병합되었습니다. 새로운 독일 제국 하에서 킬은 중요한 해군 기지가 되었습니다.1895년 킬 운하가 개통되어 선박이 덴마크를 우회하지 않고 북해와 발트 해 사이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킬에서 항해사의 반란이 일어나 독일 혁명을 촉발시켰습니다. 그 결과 황제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작되었습니다. 킬은 2차 세계대전 중 제3제국의 조선 중심지라는 중요성 때문에 연합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세계 최고의 요트 행사인 '킬 위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8.2. 구레[편집]


구레 해군 기지는 세토 내해의 히로시마 남동쪽으로 약 24km 떨어져있습니다. 1889년 세워졌으며 조선 공업 시절을 갖추고 있습니다. 구레 해군 공창이라고 불리며 제국주의 일본의 주요 통제부 4곳 중 하나였습니다. 구레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전함, 야마토함을 건조한 곳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야마토함은 1941년 건조가 완료되어 이듬해 일본의 기함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야마토함은 거대한 크기에도 실전에 거의 배치되지 않았으며 전쟁의 추이에 별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습니다. 야마토함의 마지막 전투인 텐고 작전은 미국의 오키나와 침공에 맞선 자폭 임무였습니다. 섬에 좌초하여 포대로 운용되면서 파괴할 때까지 싸우는 것이 마지막 임무였으나, 미국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비행기들이 야마토함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격추시켰고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야마토함은 일본의 힘과 결의, 무너진 제국주의의 영원한 문화적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8.3. 샌프란시스코[편집]


유럽인들이 뛰어난 자연항의 입지를 갖춘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것은 1776년 스페인 사절단이 정착촌을 건설한 때였습니다. 1848년은 중요한 해였습니다.1월 24일 서터스 밀에 금이 발견되었고 9일 후 미국은 멕시코 미국 전쟁의 결과로 캘리포니아를 합병했습니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는 호황을 맞았습니다. 골드러시는 잦아들었지만,1859년에 네바다의 콤스톡은 광맥이 또 다른 이주 행렬을 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기인이 자신을 미국의 황제 노턴 1세라고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1906년 지진과 화재로 수천 명 사망자가 발생했고 도시가 무너졌지만 그 후 빠르게 재건되었습니다. 1937년에는 유명한 금문교가 완공되었습니다. 다리는 금문, 즉 샌프란시스코 만과 태평양의 해협을 연결합니다.2차 세계대전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주요 조선 중심지이자 태평양 전장으로 향하는 미국 함대의 주 승선 항이었습니다. 항구는 배로 북적였지만 미국에서 가장 컸던 재팬타운은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텅 빈 채로 남겨졌습니다. 전쟁 이후 샌프란시스코와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은 대항문화와 기술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8.4. 셰르부르[편집]


셰르부르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 북부 해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르아브르와 마찬가지로 영국과 가까워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루이 14세 때 뛰어난 축성가 보방이 셰르부르의 요새화를 계획했으나, 영국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한 나머지 2년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셰르부르는 주요 군사 항구로 발전했습니다. 주변에 강이 없어 초기에는 상업 발전이 어려웠으나 1850년대 파리까지 철로가 구축된 후 무역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1944년 6월 공격 개시일에 유타 해안 상륙의 주목표가 되기도 했습니다. 몇 주 동안 지속된 격렬한 전투 끝에 연합군은 셰르부르를 점령했습니다. 독일군이 사전에 셰르부르 항구에 지뢰를 매설하고 철저하게 파괴하긴 했지만, 8월 중순 경 복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셰르부르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항구였으며, 연합군 물자를 유럽으로 보내는 주요 관문이었습니다. 2000년에 인근의 소규모 도시와 병합되어 현재는 셰르부르 옥트발이라 불립니다.



8.5. 부에노스아이레스[편집]


16세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최초 선주민들의 침입으로 파괴된 후에 재건된 도시로, 스페인 지배 시절 평범한 무역항으로 발전했습니다. 초기에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1776년에는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부왕령의 주 수출 품목은 소 생산품 특히 가죽이었습니다. 가우초, 즉 팜파스라 불리는 거대한 평원에서 가축을 돌보던 카우보이는 아르헨티나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는 호세 에르난데스의 민족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에 나타나 있습니다. 1816년 독립 이후에는 부유한 수도와 지방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9세기 후반 내정에 대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통제력을 갖추고자 노력했습니다. 1900년대 초반부터는 문화와 상업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서 큰 영향력을 끼친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고향이자 탱고의 도시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9. 레벨 9[편집]



9.1. 할리팩스[편집]


캐나다의 대서양 해변에 있는 할리팩스는 원리 미크막 부족이 번영하던 곳입니다. 유럽에서 전파된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거의 전멸하고, 1749년에 영국은 시타델힐 요새 아래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근처 루이스버그의 프랑스 요새를 견제하고 노바스코샤의 수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마을이 세워졌습니다.

프랑스와 인디언 전쟁, 미국 독립전쟁, 1812년 영미전쟁 동안 영국 함대의 보급기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할리팩스는 부를 축적했습니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의 평화로운 시기에는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세계대전과 냉전시대에는 다시 해군기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55년 항구에 맥도널드 다리가 개설되면서 수십 년 동안 안정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캐나다의 가장 큰 군사기지인 캐나다 해군 할리팩스 모항으로 기동하고 있습니다.



9.2. 맬버른[편집]


멜버른은 호주 남동부 쿨린국의 우룬제리 족 영토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태즈메이니아의 농부인 존 베트먼이 1835년에 정착할 권리에 대한 대가를 매년 지불하겠다는 애매한 조약을 원주민 족장들과 체결했습니다. 모든 호주 땅은 왕실 소유라는 이유로 식민지 총독은 원주민을 토지를 매각할 수 없고 베트먼도 매수할 수 없으니 이 조약은 불법이라고 발표했으나, 마을은 계속 성장했습니다. 1850년부터 1880년대까지 이어진 골드러시로 '마블러스 멜버른'은 대영제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신분 계층에 상관없이 모두 막대한 부를 누렸습니다. 비록 1981년에 금 매장량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면서 경기가 나빠졌으나, 멜버른은 1901년부터 192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의 첫 수도로 지정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양털 가격의 상승과 이주민의 증가로 도시는 다시 번성했으며 1956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멜버른은 남동태평양 지역의 문화 및 금융 중심지입니다.



9.3. 인천[편집]


서울 서쪽에서 황해를 마주보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인천은 19세기 후반까지 주요 항구 도시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가 치외법권을 획득하고 1833년에서 1834년 사이에 인천에 한국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건설한 후에야 인천은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 급성장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의 첫 포문이 열린 제물포 해전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에 인천의 산업 및 교통 시설이 더욱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에서는 한국전쟁 중 1950년의 인천상륙작전의 장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UN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이더 장군은 북한군의 후방에 상륙하여 부산 시계에 봉쇄되어 있던 UN군에 대한 압박을 해소할 계획 이였습니다. 이 위험한 도박이 성공하여 북한군은 후퇴해야 했으며, 중국은 동맹인 북한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천 공항은 한국에서 가장 분주한 공항이며, 인천항은 부산 다음으로 큰 항구입니다.



9.4. 카라치[편집]


고대 시대로부터 여러 이름으로 불려온 카라치는 인더스 강 삼각지대의 서쪽에 있는 아라비아 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신드 족이 무역 기지를 수립하기 전에는 자그마한 어촌이었으며 18세기에 요새가 지어졌습니다. 1839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위해 HMS 웨슬리 호가 마을을 정복하고 4년 후 영국령 인도 제국 신드 주의 일부로 병합되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영국과 러시아 간의 '스파이 전쟁'에서 카라치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78년에는 급성장하는 항구에서 인도 내륙으로 철도를 연결하여 대영제국에서 가장 큰 곡물 수출 항구가 되었습니다. 1947년부터 1959년까지, 카라치는 파키스탄 독립국의 첫 수도이자 파키스탄 건국의 국부인 무하마드 알리 지나의 고향입니다. 여러 문화가 혼재된 세계적인 도시는 20세기 중반에 번영하다가 세기 말에 종교 분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파키스탄의 경제 중심지이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입니다.



9.5. 리우데자네이루[편집]


1502년 새해 첫날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은 브라질 남동쪽에 있는 과나바라 만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만을 강의 하구로 착각한 모험가들은 해당 지역을 리우데자네이루, 즉 '1월의 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프랑스인들이 정착했지만, 1565년에는 포르투갈인 들이 돌아와서 2년 동안 치열한 전투 끝에 인근 지역을 정복했습니다. 포르투갈인 들이 건설한 도시는 내륙으로부터 운반해온 설탕, 금, 다이아몬드를 수출하면서 부를 쌓았으며, 1763년에는 브라질 식민지의 수도로 선포되었습니다.

1808년 리스본에서 나폴레옹이 행진하자 포르투갈 왕가와 신하들은 리우데자네이루로 피신했으며, 리우데자네이루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국의 임시정부가 주재했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822년 브라질이 독립하자 첫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 리우는 우아한 호텔과 화려한 카니발 축제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으며, 코파카바나와 아파네아 해변에 관한 유명한 노래를 여러 곡을 탄생시켰습니다. 브라질 정부는 1960년에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옮겼으나, 리우데자네이루는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10. 레벨 10[편집]



10.1. 뭄바이[편집]


이전에 봄베이로 알려진 뭄바이는 인도 정부가 통치한 뭄바이항만의 본고장입니다. 이 항만의 항구는 수 세기동안 해운에 사용되었으며 포르투갈과 영구그이 식민 해군이 자주 다녔습니다.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봄베이와 나머지 세계가 연결되었으며 이로써 봄베이는 인도의 주요 항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60년에 뭄바이는 인도의 주요 항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60년 뭄바이는 마하라슈트라의 주도가 되었으며, 새로운 수도에는 많은 현대적인 구조물이 건설되었습니다. 오늘날 주식 거래소로 인해 이 도시에 회사들이 세워지고 다른 분야의 산업이 성장하면서 뭄바이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0.2. 헬싱키[편집]


헬싱키 부두는 핀란드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습니다. 핀란드의 주요 항구로서 이 항구는 규격 화물 서비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며 2017년에는 1,230만 명이 넘는 승객이 찾는 가장 변화한 여객 항구가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건설되기는 했지만 헬싱키는 2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은 어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베아보리 요새가 러시아 공격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항구 입구에 건설되면서, 이 도시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요새화한 스베아보리조차도 핀란드 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에 함락되었으며, 핀란드는 프레드릭스함 조약에 따라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수도를 투르쿠에서 헬싱키로 옮기면서, 헬싱키는 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헬싱키는 1952년 하계 올림픽을 주최했으며, 2000년대는 유럽의 문화 수도로, 2012년에는 세계 디자인 수도로도 명명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몇 몇 모바일 게임 개발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10.3. 노보로시크[편집]


사해의 해변에 위치한 노보로시크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항구 중 하나입니다. 1917년 혁명 후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노보로시크는 공산당인 적군에 맞서 싸운 백군의 주요 기지이었습니다. 1920년에 적군이 우세를 점하면서 이 항구는 백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대거 탈출하는데 있어 중간 대기 구역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 항구가 함락되자 적군은 33,000명의 잔류 병사들을 처형했습니다. 러시아에서 대조국전쟁이라고 알려진 2차 세계대전 동안 노보로시크는 거의 추축군으로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결의에 찬 소련의 선원들로 구성된 함대가 추축군이 재공급을 위해 부두를 사용하는 것을 막아내고 부두를 계속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선원들은 이 도시가 진군하는 소련의 군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7개월 동안 버티어 냈습니다. 이들의 용감한 저항을 기념하여 노보로시크는 '영웅 도시'라는 명칭을 받은 소련의 12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0.4. 가오슝[편집]


가오슝은 청 왕조 시대에 항구로 처음 열렸습니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이며 대만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이 항구는 원래 여러 부족의 통제 하에 있었던 천연 라군 이었으며, 역사에 걸쳐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가오슝의 토착 부족은 이 지역을 '다가오'로 불렀으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1620년대에 도착하면서 개발이 시작되어 라군은 현대적 항구로 탈바꿈했습니다. 청 왕조가 2차 아편 전쟁에서 패배해 텐진 조약을 체결한 후 이 왕조는 공식적으로 서구의 상인들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청 왕조가 1차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대만과 새 이름이 붙여진 가오슝 항구는 일본에게 양도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서구의 연합군은 가오슝을 심하게 폭격했으며, 이 때문에 일본이 가오슝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은 중단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항구는 컨테이너 부두, 벌크 화물과 잡화품, 어항, 상품 등을 취급하기 위한 별도의 구역이 포함된 많은 다양한 생산 지역과 해군 기지를 위한 별도의 구역이 들어서 있어서 활기차고 북적거립니다.



10.5. 포트 안토니오[편집]


원래 푸에트로 안톤으로 알려진 포트 안토니오는 자마이카의 스페인 정착지로 시작했습니다. 1723년에 자마이카의 총독인 포틀랜드의 공작은 포트 안토니오를 해군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포틀랜드의 행정구로 편입되도록 명령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729년에 스페인 해군의 공습과 언덕으로 들어오는 흑인 공격자들로부터 정착민을 보호하고자 포트 조지가 건설되었습니다.

1870년대에 로렌조 도우 베이커 선장은 자마이카에서 처음 바나나를 맛봤습니다. 바나나에 푹 빠진 그는 이 과일을 북부 시장에 가져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는 보스턴 프루트 컴퍼니를 창립했으며, 포트 안토니오를 바나나와 코코넛을 위한 유명한 선적항으로 바꾸었습니다. 오늘날 포트 안토니오는 자마이카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입니다. 포트 안토니오는 여러 할리우드 영화에서 로맨틱한 곳으로 등장했으며, 지금은 많은 여행객이 찾는 인기 여행지가 되었습니다.




11. 레벨 11[편집]



11.1. 뉴옥[편집]




11.2. 콜롬보 항구[편집]




11.3. 샹하이[편집]




11.4. 부산[편집]




11.5. 두브로브니크[편집]





12. 레벨 12[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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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레벨 13[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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