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네이션즈/역사적 배경/병력/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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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
1.1. 알렉산더
1.2. 클레오파트라
1.3. 잔 다르크
1.4. 노부나가
1.5. 나폴레옹
1.6. 맥아더
1.7. 처칠
1.8. 주코프
1.9. 페트라 에레라
2. 유니버시티
2.1. 한니발
3. VIP
3.1. 비요른 아른시다



1. 성[편집]



1.1. 알렉산더[편집]


알렉산더 대왕(기원전 356~323)은 20세에 아버지 필리포스에게서 마케도니아 왕국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스를 제압한 후에 그는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아시아를 거쳐 인도에까지 걸친 페르시아 정복 전쟁에 착수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팔랑크스를 이용해 적을 한 곳에 유인하고 뛰어난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대담하게 측면 공격 전략을 쓰는 연합작전의 전문가였습니다. 비록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지만 그는 서양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1.2. 클레오파트라[편집]


클레오파트라(기원전 69~30)는 고대 이집트를 통치한 마지막 파라오였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원인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더 대왕 아래 이집트를 정복한 그리스인의 계승자였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지도자 율리우스 시저와 동맹을 맺었고 시저의 아들을 낳아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시저가 죽은 다음 그녀는 마크 안토니우스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아이도 낳았습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함께 시저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와 맞섰지만 패하게 되었고 안토니우스는 자살을 하고 클레오파트라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1.3. 잔 다르크[편집]


'오를레앙의 소녀' 잔 다르크(1412~1431)는 프랑스의 통일과 구국을 상징하는 영웅입니다.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잔은 영국군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아무런 군사 훈련을 받지 않은 잔은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를 찾아가 자신이 프랑스군을 지휘해 포위된 오를레앙 시를 탈환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돕겠다며 설득했습니다. 영국군의 포위에서 벗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9일이었습니다. 이 기적적인 승리는 프랑스 곳곳에 알려졌고, 프랑스군의 사기에 불을 붙여 마침내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부르고뉴군 에게 붙잡혔고 마녀로 몰려 19살의 나이에 화형 당했지만, 그로부터 25년 후 교황 칼릭스투스 3세가 그녀의 무죄를 선고했고 이후 그녀는 순교자이자 프랑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1.4. 노부나가[편집]


오다 노부나가(1534~1582)는 뛰어난 일본의 장군으로, 일본 영토의 3분의 1을 제패하였습니다. 그의 성공 비결은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투였던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화승총사는 일제사격으로 적의 기병대를 무너뜨렸습니다. 노부나가는 비록 자신의 부하에게 배신당하고 할복자살을 해야 했지만 그의 후임자들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는 일본 통일을 완수했습니다.



1.5. 나폴레옹[편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프랑스 포병대의 소위였습니다. 탁월한 정치력과 천재적인 군사력으로 프랑스를 지배하고 유럽을 거의 모두 정복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중 나폴레옹은 공화주의를 지지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와 이집트에서 프랑스 군대를 지휘한 다음 자신이 쿠데타를 꾸미고 혁명을 전복시킨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15년이 넘는 동안 나폴레옹은 유럽을 가로질러 진군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모든 연합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의 눈보라에 패배한 후 워털루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군대에 패했습니다.



1.6. 맥아더[편집]


미군 역사상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보다 높은 명성을 떨친 장교는 드물며, 적에게는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반에 발발한 세 차례의 대규모 전쟁에 참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의 활약으로 가장 유명합니다. 그는 필리핀 방어 전장을 지휘했지만,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의 필리핀 침략을 저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3년 후, 맥아더 장군은 '내가 돌아왔다.'라는 명언과 함께 필리핀 레이테 섬에 상륙하게 됩니다. 전쟁 이후 맥아더 장군은 일본 재건을 감독했습니다. 평화주의와 혁신적 양성평등에 입각한 전후 헌법 역시 맥아더 장군 휘하에 이뤄진 일본 재건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그는 UN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인천상륙작전을 과감히 단행함으로써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결국은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되었으나, 맥아더 장군은 그의 마지막 미 의회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1.7. 처칠[편집]


후대에 큰 업적을 남긴 윈스터 처칠은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자주 회자되는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군인이자, 작가이며, 정치인인 처칠은 약 60년간 대영 제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1894년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쿠바, 인도, 노스웨스트프런티어(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 수단, 남아프리카,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때 서부 전선에서 종군했습니다. 1940년대 초, 영국은 브리튼 전투에서 독일의 무자비한 공습을 받게 되고 처칠은 불같은 연설과 글을 통해 결사항전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 중 1940년 6월 영국 하원에서 한 연설은 명연설로 꼽힙니다. "우리 모두 굳은 의지로 맡은 임무를 다하여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천 년간 지속된다면, 후대 사람들은 '이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1.8. 주코프[편집]


게오르기 주코프는 나치 독일을 상대로 소련의 방어 병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승진을 거듭하여 1939년 할힌골 전투에서 처음으로 사령관이 되어 일본의 침략군을 몽골 밖으로 쫒아 냈습니다. 1942년에 그는 붉은 군대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주코프는 현대 군사 이론을 연구하고 적용한 덕분에 어떤 러시아 지휘관보다도 더 능수능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소련군을 이끌어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마지막으로 1945년에 베틀린으로 진격해 대승을 거두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서 그는 스탈린을 대신해 독일의 항복을 수락하도록 지명되기도 했습니다. 주코프의 성공 비결은 변덕스러운 독재자의 호감을 계속해서 살 수 있는 능력에 있었습니다. 1930년대 대숙청을 견딘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히 긴 기간 동안 스탈린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설전인 입지 때문에 주코프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였습니다. 그는 1946년에 부 사령관으로 강등되었고 1953년에 니키타 흐루쇼프의 집권을 도운 후 이 새로운 당의 수장의 호감을 사기도 그렇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74년 사망 후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그는 러시아 군 영웅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받았습니다.



1.9. 페트라 에레라[편집]


멕시코 혁명 (1910-1920)기간 동안, 솔다레라로 알려진 여성들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대부분 요리사나 간호사였으나, 탄띠를 두르고 남성과 함께 전투한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페트라 에레라가 바로 이러한 전사이었습니다. 그녀는 페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남장을 했습니다. 얼굴에 털이 없다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그녀는 다른 병사들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마다 면도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량 폭파 전문인 페드로는 캡틴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에레라는 위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한 신뢰를 얻었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여자임을 밝히자 그녀는 강제로 직위에서 해제되었습니다. 그녀는 포기하기를 거부하며 400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전투 여단을 조직했습니다. 1914년 2차 토에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그녀는 이를 인정해 장군으로 승격시켜 달라고 군에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대신 그녀에게 대령 계급이 주어졌고 그녀의 여단은 해체되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멕시코의 대통령이 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의 스파이가 되었습니다. 바텐더 역할을 하던 그녀는 총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이야기는 공식적인 역사에 거론되지 못하도록 압박 받았으나 솔다레라의 문화적 이미지는 대중 영화와 노래에 살아 있습니다.




2. 유니버시티[편집]



2.1. 한니발[편집]


현대의 북아프리카 국가인 튀니지와에 해당하는 카르타고 한니발 바르카는 기원 전 2세기와 3세기 사이의 장군이었으며 역사 상 위대한 명장 중 한 명으로 존경 받고 있습니다. 그는 2차 포에니 전쟁의 많은 전투에서 로마에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전투 중 적을 제압하기 위해 기병, 보병, 전쟁 코끼리를 함께 투입하는 전술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를 상대로 이중 포위를 적용하는 전략도 사용했습니다. 이 전략에 따라 기병과 보영은 측면에서 초승달 대형으로 공격해 직선 대열의 적군을 무력화시켰습니다. 또한, 한니발은 이탈리아와 로마의 전투 중 한 겨울에 거대한 부대를 끌고 알프스를 건넌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결국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의해 패배를 맞았고, 2차 포에니 전쟁이 종료되었습니다. 패배 이후 한니발은 정치가가 되어 군 재판관 복무 기간을 단 2년으로 줄이는 등의 수정 법령도 입안했습니다. 그는 결국 로마 제국이 자신을 포획할 수 없도록 망명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인의 마음에 공포를 심었고,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로마인은 무서움에 떨며 '한니발이 문 앞에 왔다'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했습니다.



3. VIP[편집]



3.1. 비요른 아른시다[편집]


중세 전설에 따르면 비요른 야른시다는 바이킹 군주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별명은 그의 전사로서의 강인함과 부상 없이 전투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빗댄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9세기에 유럽의 해안을 따라 급습 원정을 이끌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라그나르는 노섬브리아의 왕인 앨라의 손에 독사의 굴에 넣어져 죽음을 맞았는데, 이 형제들은 영국으로 항해해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습니다. 비요른은 지중에 이탈리아 마을 루니를 함락시키며 영리함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 죽은 것으로 알려지게 해서 주교가 기독교 장례를 위해 그의 시신을 옮기는 것을 허락하도록 했습니다. 일단 내부로 들어오게 된 바이킹은 아직 살아 있는 비요른을 꺼냈고 성문으로 돌진해 나머지 부대원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비요른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스웨덴 왕관을 물려받아 이를 자신의 아들에게 승계해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설적인 왕조는 비요른의 무덤이 발견된 섬의 이름을 따 문쇠가 왕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고 상충되는 면이 있어서 그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거나 여러 명이 합해진 인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왕조에서 스웨덴 최초의 역사적인 왕으로 인정받는 에이리크 인 시그르셀리가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비요른 야른시다는 역사와 전설 사이 중요한 경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