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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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로마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지중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로 정치적 권한을 지닌 황제가 없어진 로마 시는 서서히 교황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되었고, 754년부터 1870년까지는 교황령의 수도가 되었다. 1871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1870년 교황령이 멸망하며 이듬해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의해 현대의 교황령으로서 바티칸이 독립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로 자리잡고 있다.


2. 상세[편집]



2.1. 고대 로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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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사람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흔적은 기원전 14000년경의 것으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집단이 거주하다 팔라티누스 언덕의 마을을 중심으로 여러 마을이 합쳐져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추측이다. 도시 로마의 기록된 역사는 도시국가 로마 왕국로마 공화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

파일:1481px-Map_of_ancient_Rome.svg.png
파란 선
기원전 4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우스 성벽
빨간 선
기원후 3세기에 지어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전통적으로 일곱 언덕의 도시로 불렸고 세르비우스 성벽이 이들을 모두 포함한다. 이후 도시가 확장되어 테베레 강 서안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때 유럽인들에게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자 유럽의 수도였다. 로마 제국이 곧 세계였으니 말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영어: All roads lead to Rome, 라틴어: Omnes viae Romam ducunt)'[1]는 속담이 로마의 위상을 말해준다.

한편 초창기 기독교에서는 서기 1세기 예수사도베드로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하면서 로마 지역 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수위 교회로[2] 부상하며 기독교의 중심지라는 역할을 함께 수행하게 된다.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교황권이 확립되어 가면서 교황의 거처로도 인식되게 된다.

사두정치 시절부터 서로마 황제들은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박힌 로마 시보다는 북부의 밀라노에서 집무를 봤다. 결정적으로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구 비잔티움을 6년간의 공사 끝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재건축하며 동방 지역의 본부가 새로 세워졌다. 그 이전 사두정치 시절의 니코메디아도 동방 본부 역할을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수년간의 대공사를 벌이지는 않았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의 도시 개발에서도 신도심이 건설되면 기존 구도심의 도시 역량을 흡수해서 구도심이 쇠퇴하듯이,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기존 로마 시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점점 성장하는 만큼 로마 시는 점점 수축해 갔다.

4세기 들어 로마 시에서 인구가 빠지면서, 기존에는 인산인해였던 인술라(원시적인 아파트) 및 각종 공공시설들이 그 용도를 잃어갔고, 귀족들은 그 건물 및 용지를 자신들의 사저로 용도변경했다.[3]

375년 훈족 침입의 연쇄 효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훈족의 압박을 받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대규모 무리를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서 로마 제국 영내인 트라키아로 침입하였고 378년에 로마 제국은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동방 정제인 발렌스가 전사하고 동로마 중앙군이 모조리 궤멸하는 대참사를 겪게 된다. 그 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집권해서 일시적으로 고트족과 휴전협정을 맺고 단일 황제로 등극하지만 395년 급사하고 그의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인 호노리우스가 서방 황제로 즉위한다. 그는 부유하고 강력한 동로마에 비해 누더기가 된 서로마를 통치할 능력이 없었으며, 동서 정부의 협조체제는 완전히 마비되어 서로마는 크게 흔들린다. 어떻게든 서로마를 지탱하려고 노력하던 스틸리코가 처형된 직후, 서고트족의 약탈을 피해 서로마 제국은 수도를 메디올라눔에서 라벤나로 옮겼지만 서고트족은 수도 라벤나 대신 로마 시로 쳐들어가 410년 로마 약탈을 일으켰다. 이로인해 서로마 제국은 치명타를 입었고 이어 452년에는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받을 뻔 했지만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으로 회군함으로서 로마 시는 위기를 피한다. 하지만 455년 6월 반달 왕국 군대에 의해 다시 한번 침략을 받아 두 번째로 로마가 약탈당하는 사태는 교황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2.2. 게르만족의 지배[편집]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잠시 동안 게르만족 출신 장군인 오도아케르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다른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족의 지도자 테오도리크동로마 황제 제노의 사주를 받아서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이탈리아를 점령하게 되면서 이후 로마 시는 반세기가량 동고트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6세기동로마 제국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동고트 왕국의 아말라순타가 귀족들의 반란으로 피살당한 사건을 발단으로 동고트 왕국과 동로마 제국은 사이가 틀어지게 되고, 마침 고토 수복 원정을 시행하고 있었던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를 이탈리아를 재정복할 명분으로 삼게 된다.

고토 수복 전쟁을 거치면서 이탈리아는 30여 년간 전쟁터가 되어 초토화되었고, 몇 차례의 점령과 재탈환을 거친 로마 시 역시 이때 인구수가 정말 많이 줄었다. 이 당시였던 6세기에 인구수가 6만 명 정도로 줄어서, 로마 시 인구 전체를 콜로세움이 다 수용할 수 있었음은 물론, 동시대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1/3~1/4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의 1/10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는 로마 주교다른 주교들에 대한 수위권이 교의적 타당성 논쟁과는 별개로 로마시의 정치적 힘과는 차이가 있었음을 말한다.[4]


2.3. 동로마 제국[편집]




반달왕국을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 속주를 탈환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시칠리아에 상륙시킨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인 536년 12월 9일에 동로마 군대가 로마 시에 입성함에 따라 서로마 제국 멸망 60년 만에 로마 시는 로마 제국의 영토로 다시 수복된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제국의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군이 일시적으로 로마를 장악하기도 했지만, 나르세스가 토틸라를 격파하면서 최종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568년랑고바르드족이 남하해서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함에 따라 이탈리아 내의 동로마 영토는 로마-라벤나를 잇는 회랑 일대와 남이탈리아의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지역 정도만 남게 된다. 로마 시와 라벤나 등의 중부 대도시들이 위협받자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거점 방어의 용이성을 위해서 586년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을 임명해서 로마-라벤나를 잇는 회랑 지역을 야만족들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려고 노력한다.

그 뒤 라벤나 총독부와 로마 시는 서방 세계에 동로마 황제가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창구로 이용되었으며 콘스탄스 2세 같은 경우에는 로마 시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거기에 가끔 로마 교황이 동로마 제국에 대항할 때마다 라벤나 총독부의 군대가 로마 시로 쳐들어가서 교황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해가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 간 중재를 위한 칙령을 칼케돈파의 입장에서 강경하게 거부했던 마르티노 1세 교황을 콘스탄스 2세가 압송해서 유배시켰지만, 7세기 말이 되니 상황이 변하여 이탈리아 내에서의 교황의 영향력이 더욱 커짐에 따라 교황을 손봐주려는 제국 측의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었다. 로마 시의 시민들이 의용대를 조직하여 교황을 손봐주려는 제국군과 싸웠던 사건도 발생했으며, 심지어 라벤나 총독부 직속부대마저 동로마 본국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교황을 호위하러 갔다고 하며, 총독이 교황을 압송해오라고 소수의 병사와 함께 따로 보낸 자카리아스가 오히려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교황의 침대에 숨어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5]

하지만 랑고바르드족이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속주 상당지역을 잠식해나감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동로마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교황 자카리아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동로마 제국 본국도 아바스 왕조와 한창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를 지켜낼 만한 병력을 보낼 수가 없었다. 결국 751년에 라벤나가 랑고바르드족에게 함락됨으로써 라벤나 총독부는 사라지게 되고, 동로마 제국이 로마 시에 간섭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2.4. 교황령[편집]


동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를 지켜낼 만한 힘이 없는 것을 본 교황은 차선책으로 비밀리에 가톨릭 국가인 프랑크 왕국에 밀사를 보내서 보호를 요청했다. 피핀 3세는 이를 승낙해 북이탈리아로 쳐들어와 랑고바르드족을 격파하고, 구 라벤나 총독령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하는데 이 영토가 교황령이 된다. 이로써 로마 제국이 분명히 로마 시에서 발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시로서의 로마와 나라로서의 로마(동로마)는 완전히 갈라서게 됐다. 예전 오도아케르-동고트 왕국 때도 그랬지만, 그 때와는 달리 이 때에는 교황을 위시한 로마 교회 및 로마 시 거주민들이 제국과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의사가 확연했다. 이후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북이탈리아를 점령한다. 카롤루스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할 때,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에게 '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해주는데 이것이 신성 로마 제국의 시작이다.

로마 시는 로마 제국의 수도의 지위도 잃고 고대 말기엔 이런저런 시련도 겪었지만,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군주로서 다스리는 도시라는 것만으로 중세 내내 서유럽 도시 중 패왕급 위상을 유지해왔다. 제아무리 강력한 세력이라도 고의적으로 로마를 공격하려면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 기독교 시대 교황과 로마 시는 공생 관계였다.

파일:leonine_walls.gif

9세기 로마. 교황 레오 4세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지도 서북쪽의 San Pietro) 근처에 성벽을 쌓아 '레오의 도시'가 세워졌다.

파일:Plan_of_Rome_in_the_Middle_Ages_-_Historical_Atlas_by_William_R._Shepherd,_1923.jpg
중세시대 로마 시 확장
빨간색 선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하늘색 선
9세기 레오의 도시
삐뚤빼뚤한 선
17세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세운 성벽

15세기 중반 이후 르네상스기에 로마 시는 번창했으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로마 교황령의 수도로서 성벽, 궁전, 교회 등이 건설되며 화려함을 되찾았다.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로마로 몰려들어 활동하게 되어 15세기 말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교황을 위한 예술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화려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로마는 1527년 합스부르크 가문카를 5세가 보낸 용병들의 침략을 받아 도시 전체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는데(사코 디 로마) 이때의 피해는 서로마 제국 말기의 두 번의 로마 약탈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르네상스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고 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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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로마.

1798년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프랑스군은 로마에 쳐들어와서 교황 비오 6세를 납치하고 괴뢰국로마 공화국을 세우지만, 2년 후에 프랑스 정부는 교황령을 복원하고, 새 교황 비오 7세도 로마에서 선출되었다. 하지만 1808년 나폴레옹은 다시 로마를 점령하고 프랑스 제1제국의 직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간 뒤에는 빈 회의에 따라서 다시 교황령이 부활했다.


2.5. 이탈리아 통일현대[편집]


파일:콜로세움 로마.jpg

1849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이 교황을 축출하고 로마 공화국을 수립했으나 진압당하고 교황령이 또다시 부활하였다. 1859년부터 벌어진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에도 로마는 교황령의 영토였으며 1870년 교황령까지의 합병이 끝난 뒤에야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1929년에는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서 로마 시 내의 바티칸 성당 구역이 바티칸 시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3년무솔리니가 실각하고,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독일 국방군이 로마를 점령했다. 이듬해인 1944년에는 안치오 상륙작전을 통해 연합군이 로마를 해방시키고 2년 동안 통치했었다. 그 뒤 1946년 이탈리아 공화국이 세워지고 현재에 이른다. 2015년 1월 1일을 기해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로마를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인 로마도가 로마 수도 광역시(약칭: 로마 광역시)로 개편되었다.이탈리아의 광역시 참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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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목표에 도달하는 데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2] 이 부분은 가톨릭-정교회-개신교 간의 교의적 논쟁까지 얽혀있어서 정말 조심스럽게 언급해야 하지만, 가톨릭의 교황권 신학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역사학적으로는 늦어도 AD 1세기 말에는 '로마 교회가 뭔가 특별하다'는 인식이 그리스도교 세계에 자리 잡았다.
「The slow growth of papal influence began no later than ca. 95, when the church of Rome intervened to settle a dispute at Corinth, and as the Protestant historian Harnack observed,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
교황의 영향력의 느린 성장은 늦어도 기원후 9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로마교회는 코린토의 논쟁을 해결하는 데 개입하였다. 개신교 역사가 Harnack이 관찰했듯이,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

-Jeffrey Burton Russell, 《Medieval Civilizati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5, p.69
[3] 출처: # 'Bryn Mawr Classical Review'라는 학술 사이트에 사학자 Raymond Van Dam이 'Two Romes: Rome and Constantinople in Late Antiquity'에 관하여 투고한 리뷰에는, 'At Constantinople imperial patronage shaped the urban space, but at Rome aristocrats appropriated for their own private use public building materials such as statues and decorations, public spaces such as streets, and even the public water supply. Machado also gives examples of multiresidential buildings (insulae) that were converted into large aristocratic residences.'라는 대목이 있으며, ## 해당 출판사(옥스포드 대학 출판부) 사이트에 올라온, 바로 위 리뷰한 서적 'Two Romes'의 디지털판 책 중 한 챕터의 서문에는 'This study shows how the boom in aristocratic housing in fourth-century Rome involved the progressive takeover, on an unprecedented scale, of public space by private interests.'라는 대목이 있다.[4] The oddity is that by the early sixth century the population of Rome had fallen to perhaps 60,000 residents. By then almost the entire population could have fit into the Colosseum. The demographic collapse of Rome also affects Philippe Blaudeau’s discussion of the ecclesiastical politics among the bishops of big cities, Alexandria as well as the two capitals, during the later fifth and early sixth century. Although the bishops of Rome continued to insist on their priority, by then Rome was about one-quarter or one-third the size of Alexandria and perhaps one-tenth the size of Constantinople. This vast discrepancy in population underscores the discrepancy Blaudeau stresses between Petrine ideology and Realpolitik
[
기이하게도 6세기 초까지 로마시의 인구는 아마도 6만명까지 떨어졌다. 그때까지는 거의 전체 인구가 콜로세움에 딱 맞았다. 로마시의 인구학적 붕괴는 또한 Philippe Blaudeau의 담론에도 영향을 끼쳤다. 곧 5세기말에서 6세기초까지의 대도시 주교들간 교회정치에 말이다. 이는 두 수도 뿐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도 해당한다. 비록 로마의 주교들이 그들의 우선을 주장했지만, 그때까지 로마는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약 1/4 내지 1/3였으며 아마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1/10이었다. 인구에서의 이 큰 차이는 Blaudeau가 강조한대로 베드로좌 이데올로기와 현실정치가 차이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

-Raymond Van Dam #
[5] The imperial armies in Ravenna and Rome not only refused to cooperate, the army of Ravenna marched to Rome to defend Sergius, and were joined by soldiers of the Pentapolis. The soldiers reached Rome, surrounded the papal residence, and demanded to see the pope. Zacharias is said to have cowered under the pope's bed until Sergius himself allowed him to escape; in any case, the Pope was safe.[6] 이탈리아의 광역시는 한국의 광역시와는 달리 도시 자체를 광역시로 승격시킨 것이 아니라, 해당 도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인 도(Provincia)를 승격시킨 것이다. 또한 광역자치단체-기초자치단체라는 2단계로 나뉘는 한국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주(Regione)-광역시(Citta Metropolitana) 또는 도(Provincia)-시(Comune)라는 3단계로 나누고, 시의 단체장이 광역시 또는 도의 단체장을 겸하는 체계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