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노 요리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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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60년에 구마모토현 가모토군 기쿠카마치(현재의 야마가시)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마쓰노 라이조가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인연으로, 호소카와가 창당한 일본신당에 입당해 1993년부터 일본신당 본부에서 당직자로 근무했다. 일본신당이 해산되자 신진당에 합류해, 신진당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1995년부터는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의 비서로 근무한다.
1998년, 호소카와가 중의원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열린 구마모토현 제1구 중의원 보궐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자민당 이와시타 에이이치에 밀려 낙선한다. 그러나 그 후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마모토현 제1구에 다시 출마해, 자민당 이와시타 에이이치를 꺾고 당선된다. 이후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때까지 구마모토현 제1구를 지역구로 계속 당선된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중의원 의원운영위원회 필두이사를 맡았으며, TPP 협정에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과 <TPP를 신중히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어 참여했다. 2011년에는 민주당 국회대책부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9월, 일본 유신회 창당에 합류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 뒤 민주당을 탈당해 일본 유신회에 합류했다. 이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일본 유신회 소속으로 지역구 구마모토현 제1구에 출마했으나, 자민당 기하라 미노루에게 패배해 석패율 구제로 당선되었다.
일본 유신회와 결속당의 합당으로 창당된 유신당에 합류했다. 합류 후 유신당 대표대행, 국회의원단 회장 등을 맡았다.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유신당 소속으로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자민당 기하라 미노루에게 또 다시 패배하고 석패율 구제로 당선되었다.
2015년 유신당 전당대회에서 에다 겐지의 뒤를 이어 대표로 선출되어, 유신당 대표를 역임했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 주인이던 하시모토 도루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하시모토 도루 계파에서 아예 따로 바바 노부유키를 대표로 하는 집행부를 선출하기도 했다. 이후 유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진당에 합류했다.
2017년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 체제에서는 민진당 국회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민진당을 탈당해 희망의 당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후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기하라 미노루에게 밀려 지역구에서 또 패배했으며, 큰 표차로 패배한 탓에 석패율 구제도 못 받고 낙선했다.
이후에는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3. 기타[편집]
- 고노 담화에 대해, “담화의 근거가 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내용이 없다는 발언이 나온 이상, 국회에서 확실하게 담화를 검증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자”며 사실상 고노 담화의 수정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 가족 중에는 차녀 마쓰노 미카가 있는데, 아버지와 같은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이며, 2016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 우승자다.# 미스 일본 그랑프리 우승자 신분으로 아베 신조 당시 총리를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아베로부터 자민당 입당 및 정계 입문을 권유받았다. 심지어 당시 아버지 마쓰노 요리히사는 야당인 유신당 대표였다(…). 그 뒤 잠시 탤런트로 활동하다가 정말로 자민당에 입당했으며,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민당 도쿄 권역 비례대표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4. 둘러보기[편집]
[1] 1883~1962. 철도대신, 중의원 의원, 참의원 의원, 참의원 의장 등 역임.[2] 1917~2006. 농림대신, 방위청 장관, 노동대신, 중의원 의원 등 역임.[3] 1995년생. 게이오기주쿠대학 졸업, 2016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 우승.[A] 석패율 비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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