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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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스만 제국의 12대 술탄이자 6대 파디샤.
2. 생애[편집]
2.1. 어린시절[편집]
셀림 2세와 누르바누 술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황과 마찬가지로 하렘에 틀어박혀 정사를 살피지 않았고, 대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와 태후 누르바누 술탄, 애첩 사피예 술탄 등이 정치를 맡았다.
2.2. 치세[편집]
1574년 동생 5명을 살해하고 제위를 계승한 그는 부황 대부터 황제를 대신해 제국을 운영해 온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국정을 계속 맡기고는 부황처럼 하렘에 틀어박혀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소콜루 파샤는 타흐마스프 1세 사후 흔들리던 사파비 제국에 라라 무스타파 파샤 휘하의 군대를 보내 캅카스를 석권하고 카스피해에 다다르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비록 그는 전쟁이 한창이던 1579년에 암살당했으나 오스만 군은 1585년 사파비 조의 옛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하였다. 1588년 사파비 조를 단합시킨 아바스 1세가 강화를 청해온 결과 1590년 코스탄티니예 조약이 체결되며 오스만 제국은 조지아, 대 아제르바이잔, 자그로스 산맥 일대에 대한 영유권을 얻으며 제국 역사상 최대 판도를 구축하였다.
2.3. 외화내빈의 제국[편집]
1590년, 영토상 절정에 이른 오스만 제국
외적으로 오스만 제국은 전성기를 이어갔지만, 내부에서는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다. 소콜루 파샤가 암살당한 뒤에는 유능한 국정 운영가가 없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어온 금은이 물가 폭등을 일으킨 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 결과 제국의 기축 통화였던 악체 은화는 은도금한 구리돈으로 바뀌었고, 봉급을 이 악체 화로 받던 관료들은 매관매직을 행하고 당파를 만들어 대립했다.[2] 본래 선별적 징집제였던 데브시르메 제도 역시 무슬림의 징집이 허용되는 등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티마르 (봉토)를 소유한 귀족들은 납세와 군대 양성 대신 사유재산을 불리기에 치중하였다.
1568년 오스트리아와 체결한 평화 협정인 에디르네 조약이 1592년 만료되자 오랜만에 헝가리에 전운이 감돌았다. 1593년 보스니아 총독 텔리 하산 파샤가 선전포고 없이 크로아티아를 침공했다가 시사크 전투에서 전사한 것이다.[3] 이에 대재상 시난 파샤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 1594년 부다페스트에서 빈으로 향하는 거점인 죄르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티미쇼아라 주의 5천 세르비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비록 4달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동맹을 맺고 창끝을 돌려 에디르네까지 진격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속에서 무라트 3세는 톱카프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하기아 소피아에 매장되었고 장남 메흐메트 3세가 새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3. 기타[편집]
- 후궁이 여럿 있었지만 하세키 술탄인 사피예 술탄과 거의 일부일처제 수준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를 본 모후 누르바누 술탄은 사피예가 주술로 아들을 홀렸다고 주장하며 사피예의 시종들을 잡아 들이는 등 며느리를 크게 견제해 고부갈등이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
- 무라트 3세가 죽고 황위에 오른 메흐메트 3세는 19명의 형제들을 처형하고 황위에 올랐는데 훗날 아흐메트 1세가 제위에 오르자 야흐야(혹은 야히야)라는 자가 자신은 메흐메트 3세의 형제 살해 이전 불가리아로 탈출한 무라트 3세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의 황위를 요구하기도 했다. 야흐야는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고 카자크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1세랑 교류하면서 오르간을 선물 받았는데, 손자 아흐메트 1세가 박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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